[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3回. "참새大虐殺 寸劇"

 

한국어에서 몽상은 주로 '헛된 생각'을 뜻하지만, 현대중국어에서 “몽상(夢想)”은 긍정적 의미로 쓰인다. 일례로 2017년 10월 제8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 습근평(習近平,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부흥이야말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몽상"이라 말한 바 있다. 중국어에선 미래적 희망과 이상을 뜻하는 "몽상"이라는 멋진 단어가 왜 한국어에선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까?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의 실현을 지향하지만, 자본주의는 현실의 한계를 수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언어학적 근거도 없이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 모택동이야 말로 "몽상"의 대가였다. 지상의 유토피아를 창건하려는 그의 거대한 "몽상"은 반인도적 전체주의와 광기어린 인민독재를 낳았다. 한시 바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그는 중국의 인민들을 극한으로 내몰았다. 그의 “몽상”이 빚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1962)은 특히나 인류사 최대규모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많게는 무려 4천 5백만이 대약진의 구호 아래 굶어죽어야만 했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될 무렵, 중국 사회는 쥐, 파리, 모기, 참새 등 네 가지 유해 생물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른바 “제사해(除四害)” 운동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전국적으로 전개된 참새대학살은 기괴하고도 광적인 전국규모의 대소동이었다. 모택동은 쥐도, 파리도, 모기도, 참새도 없는 “사무지방”(無之邦)의 건설을 꿈꿨다. 참새대학살은 그의 “몽상”이 빚어낸 참상이었다. 당시엔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지만, 분명 대기근의 재앙을 예시하는 불길한 전조(前兆)였다. 중국인들은 진정 왜 그 수많은 참새들을 깡그리 죽이려 했을까?

 

제사해(除四害), 네 가지 유해 생물을 제거하라! https://chineseposters.net/themes/four-pests.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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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새와의 전쟁

 

이미 1955년부터 중공지도부는 참새를 쥐, 파리, 모기와 더불어 4대 법정(法定) 유해생물의 하나로 규정했다. 그 당시부터 중국의 각 지역에선 집단적인 참새사냥이 일어났지만, 본격적으로 참새와의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1958년 봄이었다. 그 당시 중공지도부는 신문, 라디오는 물론, 거리의 확성기까지 동원해 인민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참새와의 결전이 불가피함을 반복해 설명했다.

 

“참새는 4대 유해 생물의 하나이다. 참새 한 마디리가 한 해 일곱 근(3.5kg)의 곡식을 먹어치운다. 5천만 참새들이 해마다 3백만 인민이 먹을 양식을 훔쳐 먹는다. 5천만 참새를 박멸하면, 3백만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참새는 인민의 공적이다! 모든 참새를 잡아 죽여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참새대학살이야말로 자연을 정복하는 인류의 역사적 투쟁이라 칭송했다. 문인연맹의 주석이자 과학원 원장이었던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은 “참새를 저주한다!”는 9행의 칠언시(七言詩)를 <<북경만보北京晩報>>에 발표했다. 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수천 년 죄악만 저질러온 것들아, 이제 너희들을 모두 숙청하노라!”


 

참새를 잡으려면, 과연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https://chineseposters.net/themes/four-pests.php

 

참새와의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신문과 라디오는 날마다 학살된 참새들의 숫자를 보도했다. 1958년 3월 20일에서 22일까지 불과 사흘 동안, 중국 전역에선 대략 1천5백만 마리의 참새들이 조직적으로 제거되었다. 인민들은 8만 여개의 참새 둥지를 허물고, 35만 여개의 참새알을 박살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58년 4월 6일 1천6백만 마리의 참새가 잡혀죽었다. 북경에선 4월 19일-21일까지 사흘 동안 40만 1160 마리가, 상해에선 4월 27일-29일 사흘 간 50만 5,303마리가 잡혀 죽었다. 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1958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역에선 대략 19.6억 마리의 참새가 박멸되었다. 

 

날래고 약삭빠른 참새를 잡기 위해 중국의 인민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독을 풀고, 덫을 놓고, 총을 쏘고, 그물을 치고, 미끼를 뿌리고,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뜨리고, 나뭇가지에는 풀칠을 했다. 집집마다 방울 달린 허수아비를 세우고 줄을 당겨 새떼를 쫓았다. 그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중국대륙 전역에 흩어진 참새들을 죄다 박멸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다 효과적으로 참새를 잡기 위해 정부는 기발한 묘수를 고안해냈다. 집단노동과 대중운동으로 단련된 중국의 인민들만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이었다. 거리마다 설치된 확성기에선 그 묘수를 설명하는 방송이 연일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정부의 지시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과연 어떤 방법이었을까?

 

 

참새와의 대전쟁
참새대학살의 한 장면. 경찰, 군인, 청년, 어린이들까지 동원되었다. 죽은 참새떼 수천 마리를 수레에 싣고 행진하는 사람들.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An-old-photograph-of-people-showing-off-their-spoils-dead-sparrows-that-were-killed_fig1_262019132 

 

 

 

2. “참새는 떨어지리니!”

 

1958년 4월 재외화교작가 한수인(Han Suyin 韓素音, 1916-2012)은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홍콩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도심의 호텔에 머물면서 한수인은 그 당시 북경에서 전개된 사흘간의 참새대학살을 목격한다. 이후 그녀는 “참새는 떨어지리니”(The Sparrow shall fall)란 제목의 소설형식의 체험기를 <<뉴요커(New Yorker)>>(1959년 10월10일)지에 실었다. 싱가포르에 체류하면서 영어 및 불어로 소설을 써서 명성을 얻은 한수인은 줄곧 중국공산당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선 중국공산당 정부의 정책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짧은 소설은 북경에서 일어난 참새대학살의 실상을 소상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의 가치가 있다. 한수인의 증언에 따르면······.

 

며칠 간 신문과 라디오는 참새박멸운동을 구체적인 계획을 알리고 있었다. 참새박멸 운동이 시작된 후, 북경시가지에는 확성기를 단 트럭이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정부는 확성기를 통해 다양한 집단의 인민들을 향해 참새를 잡는 구체적인 섬멸전술과 행동지침을 하달했다. 그 중 가장 드라마틱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참새들은 두 시간 정도 연속해서 날게 되면 힘이 빠져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때 쉽게 그놈들을 잡을 수가 있다. 공공의 적에 대한 고귀한 투쟁에서 허공에 뜬 그놈들이 내려와 쉬지 못하게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전술이다. 참새들을 날게 하라! 주부동지들은 집채, 정원, 나무, 굴뚝 곳곳에 방울달린 허수아비에 세워 놓을 것! 학생동지들은 헝겊을 단 긴 막대를 들고 지붕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참새들을 쫓아버릴 것! 기타 동지들은 분대단위로 움직이면서 징과 양철을 사정없이 치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를 것! 참새들이 쉬지 못하고 계속 날도록 할 것! 인민해방군 무적대대는 멀리 지방까지 내려가 시골로 도망가는 참새들을 모두 때려잡을 것!”

 

정부가 제시한 참새박멸의 묘수를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 징과 양철을 두들기며 난폭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나뭇가지, 전깃줄, 지붕 위, 처마 끝, 창문틀에 놓인 참새들을 향해 징과 양철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징소리와 함성에 화들짝 놀란 참새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면 긴 막대를 손에 쥔 학생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절대로 내려앉아 쉬지 못하게 그들을 쫓아버렸다. 실제로 소리에 놀란 참새는 하늘을 떠돌다 결국은 지쳐서 추락사했다.

 

그렇게 잡혀 죽은 참새들의 숫자가 급증하자 확성기 달린 트럭은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장안가(長安街)에서 20마리, 부흥로(復興路)에서 30마리, 건국문(建國門) 부근에서 25마리” 등등 실시간으로 잡혀 죽임당하는 참새들의 숫자를 방송하고 다녔다. 도시의 다른 지구들끼리 경쟁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작가 한수인은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문체로 참새대학살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관찰에 따르면, 마지막 남은 참새는 수도 파이프나 나무줄기 새에 잠시 숨어 있다가 샅샅이 주변을 뒤지는 인민의 손에 잡혀 죽었다. 고색창연한 불교사찰에서도 참새들은 살 곳이 없었다. 나무 불상의 얼굴 주위에 걸려 있던 비단 깃발 사이로 지친 참새 한 마리가 파득거리며 날아다니자 동자승들이 예불 때 쓰는 징을 때려서 녀석을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결국 어린 참새는 사찰의 넓은 뜰까지 날아올랐다가 하늘을 향해 화살처럼 곧게 날개를 펴더니 땅바닥의 큰 바위 위로 쿵 떨어져 버렸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중국정부는 날마다 노동에 시달리는 인민들을 몰아서 수많은 참새들을 학살해야만 했을까? 20억 마리 참새들을 조직적으로 박멸한 결과, 중국은 과연 어떤 후과(後果)를 치러야만 했을까?

 

젊은 시절 작가 한수인(1916-2012)의 모습http://www.ntu.edu.sg/do/areas-of-impact/charting-global-frontiers/Pages/han-suyin-translation-fund.aspx
젊은 시절 작가 한수인(1916-2012)의 모습http://www.ntu.edu.sg/do/areas-of-impact/charting-global-frontiers/Pages/han-suyin-translation-fund.aspx

 

 

3. 대중동원의 집산화(collectivization)

 

참새박대학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1949년 이후 형성된 중국의 사회조직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9년 건국이후 중국공산당은 지속적으로 집산화(集産化, collectivization)의 강도를 높여갔다. 집산화란 쉽게 말해 토지, 노동, 자본 등 경제적 재원(財源)의 국유화를 의미한다. 지주의 착취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초창기 토지개혁을 통해 자영농으로 거듭 태어나지만, 1952년부터 정부는 개별농가들을 향촌단위로 묶기 시작한다.

 

1952년부터 전국적으로 80-90프로의 농가들은 상호협력조직인 호조조(互助組, mutual aid team)에 편성되었다. 호조조에 편성된 농민들은 상부상조의 공동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부족하나마 가구별 자립(自立)은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1954년 봄부터는 평균 30여 가구를 기본 단위로 하는 농업생산 합작사(合作社, cooperatives)가 전국적으로 조직된다. 호조조와는 달리 합작사는 토지의 공유화를 요구했다. 개별농가는 일단 소유권을 유지했으나, 공동경작 후 수확량의 45프로만이 농가 몫으로 돌아갔다.

 

집산화에 대한 농민들을 반발이 일어나자 모택동은 1955년 여름, 사회주의 대중운동의 강화를 요구한다. 그 결과 1956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75만 개의 합작사가 생겨난다. 초급농업생산합작사는 얼마 후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화된 고급농업생산합작사(collectives)로 강화된다.

 

곧이어 1958년부터는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중국 전역에 대규모 인민공사(人民公社, people’s commune)가 생겨난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된 1958년 처음 도입되어 1984년까지 존속된 인민공사는 공업, 농업, 상업, 교육 및 군사 등 생활세계의 제반영역을 포괄하는 중국사회의 기층단위였다. 4천 가구에서 2만 가구에 이르는 대규모의 인민공사에서 중국의 인민들은 함께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사회주의적 코뮌의 구성원으로 길들여졌다.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코뮌이야 말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생활무대였다.

 

1953년부터 중공지도부는 산업시설의 국유화 및 농업생산 집산화를 추진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방식의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중공지도부는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합작사의 전국적 확산으로 농업 부문의 집산화가 한창 진행되던 1955년이었다. 모택동은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1956년에서 1967년까지 전국농민발전강요초안”을 작성하라 지시한다. 모택동은 당시 농민들의 견해를 적극 청취하면서 곡식을 갉아먹는 참새들의 횡포에 분노하게 되는데······. 스스로의 농민적 직관을 과신했던 모택동은 쥐, 파리, 모기 및 참새 모두를 싸그리 잡아서 없애야 하는 사해(四害), 곧 네 가지 유해생물이라 단정한다. 인민들이 강렬한 의지로 떨쳐 일어나 쥐, 파리, 모기, 참새를 완전히 박멸하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획기적인 식량증산(增産) 이뤄진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가 늘 강조했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철학이 자연과의 전쟁에 적용된 셈이다. 

 

그해 11월, 모택동이 지방대표와의 상의를 거쳐 “농업 17조”를 채택한다. 그중 제13조는 "쥐, 파리, 모기, 참새를 모두 박멸한다"는 조항이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섣부른 참새와의 전쟁이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란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했으나 중공정부는 과학자의 의견보다는 농민의 경험을 더 중시했다. “농업 17조”는 1956년 1월 “농업40조”로 증보되었는데, 그중 제27조는 “1956년 시작해서 5년, 7년, 12년 내에 일체의 가능한 지역에서 쥐, 참새, 파리, 모기를 모두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공표한 농업발전 요강에 따라 이제 참새는 법정(法定) 박멸대상이 된 셈이다.

 

대약진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미화한 포스터 https://chineseposters.net/gallery/g1-959.php
대약진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미화한 포스터 https://chineseposters.net/gallery/g1-959.php

 

 

4. 참새는 대약진의 광풍에 휩싸여

 

1955년 겨울 전국의 각지에서 참새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감숙(甘肅)성에선 다수의 학생들이 출동하여 일주일 만에 무려 23만4천 마리의 참새를 잡았다는 보고가 상달되기도 했다. 꽤나 거세게 일어난 제1차 참새박멸전쟁은 그러나 곧 수그러들었다. 참새박멸의 위험에 경종을 울리는 정직하고도 용감한 동물학자들과 조류학자들 덕분이었다. 물론 참새는 곡식을 훔쳐 먹지만, 스스로의 번식하고 새끼를 키우는 시기엔 반드시 해충을 잡아먹는다. 일시에 참새가 사라지면, 그 많은 해충은 어찌할 것인가? 

 

일부 강직한 생물학자들의 이의제기가 이어지자 모택동도 그들을 무시할 순 없었다. 1957년 10월 26일, 중공지도부는 “1956년에서 1967년까지 전국농업발전강요(수정초안)”을 발표한다. 처음엔 7년이었던 시한을 5년 연장해서 “12년 이내”에 참새, 파리, 모기를 모두 박멸한다는 수정조항과 함께 또한 도시나 임지에서는 참새를 소탕할 필요가 없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다시 말해, 참새와의 전쟁을 농촌에 국한시키는 대타협이 이뤄진 셈이다. 참새의 씨를 말리자는 광기어린 대학살의 분위기가 한껏 완화되는 추세였으나······.

 

대약진의 광기가 전국을 휩쓸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는 다시금 참새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957년의 수정안은 광풍에 휩싸여 날아가 버렸다. 1958년 봄, 중공지도부는 초안 그대로 쥐, 참새, 파리, 모기를 모두 빠른 시일 내에 다 소탕할 것을 명한다. 다시금 참새가 집중적인 공격대상으로 부각되었다. 전국의 관료집단이 모두 앞 다퉈 "빅브라더" 모택동주석을 위해 각 지역의 성과를 부풀리고 왜곡하던 시절이었다. 대약진을 위해선 모든 불가능이란 없어야만 했다.

 

"소선대원들이여, 어린 친구들이여, 참새들을 모두 잡아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소선대원들이여, 어린 친구들이여, 참새들을 모두 잡아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https://www.thebrownpage.com/locality/mass-killing-of-sparrows-campaign-of-china/

 

최소 7년에서 12년까지 연장되었던 참새박멸의 시한은 다시금 대폭 앞당겨졌다. 중앙지도부는 진실로 인민이 불굴의 의지로 총궐기한다면, 사악한 참새쯤이야 단번에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1958년 2월 13일 인민일보의 사설은 “10년 이내, 아니 그보다 더 빨리 전국에서 쥐, 참새, 파리, 모기를 완전히 소탕해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강락한 사무지방(四無之邦)으로 만들자”고 과격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해 3월 중순, 정부의 위생관련 부서에선 경쟁적으로 쥐, 참새, 파리, 모기의 박멸 기한을 앞당겼다. 중앙지도부의 지시를 따라 지방정부들은 사해(四害)를 소탕하는 목표기한을 발표했다. 북경은 2년, 하남성은 3년, 상해는 3-5년, 강소성은 4년, 산동성, 산서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운남성, 감숙성, 흑령강성은 각각 5년, 안휘성은 5-8년이었다. 

 

수많은 참새들은 결국 대약진의 광풍 속에서 조직적으로 소탕되었다. 12월 30일, 전국 농업사회주의 건설 선진대표회의에서는 1959년 건국기념일 제10주년 때까지 "당력을 모두 기울이고, 모든 인민을 동원하여, 전국의 모든 가능한 지역에서"  쥐, 참새, 파리, 모기 등 네 가지 유해 생물이 전무한 "사무(四無)의 나라를 실현하자"는 결의가 이뤄졌다. 사해(四害) 중에서 참새가 가장 용이한 타킷이 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참새박멸운동의 광풍이 일어났던 것이다.

 

1958년 중국의 도농 전역을 휩쓴 "참새와의 전쟁" 한 장면. https://thesanghakommune.org/2017/06/05/china-myths-surrounding-the-anti-sparrow-campaign-1958/
1958년 중국의 도농 전역을 휩쓴 "참새와의 전쟁" 한 장면. https://thesanghakommune.org/2017/06/05/china-myths-surrounding-the-anti-sparrow-campaign-1958/

 

 

5. 과학과 권력

 

소수의 권위 있는 생물학자들은 참새박멸운동에 강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참새의 유익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참새박멸운동의 광기에 맞섰다. 1959년 11월 27일, 중국과학원은 참새의 이해(利害)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다. 외국의 사례, 해외과학자의 견해 및 중국과학자의 의견을 담은 이 연구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참새박멸운동의 광기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마침내 최고지도자 모택동에 전해졌다.

 

1959년 11월 29일 모택동은 보고서를 일별한 후, 과학자의 논의에 부쳤다. 1959년 12월 29일에서 1960년 1월 9일까지 중국과학원은 “참새문제” 좌담회가 개최했다. 이어서 결성된 전문 연구팀은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참새의 이로움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그 연구 결과에 따라서 모택동은 1960년 3월 18일 “위생공작에 관한 중공중앙의 지시”를 발표한다. 그 발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더는 참새는 죽이지 말라. 참새 말고 이제는 빈대를 잡아라. ‘쥐, 빈대, 파리, 모기를 제거하라!’가 우리의 새 구호다.”

 

거의 20억 마리에 가까운 참새들이 소멸된 후에야 참새대학살의 촌극은 막을 내렸다. 과학을 무시한 최고지도자의 유토피아적 “몽상”은 참혹한 후과(後果)를 불러왔다. 그동안 참새가 잡아먹었던 해충들로선 천적 없는 낙원에서 맘껏 번식할 수 있었다. 참새가 사라진 농촌에서 곡물의 생산량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어지는 대기근의 참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1955년부터 초지일관 참새박멸운동에 반대해 온 네 명의 생물학자들이 있었다. 세포학의 개척자 주세(朱洗, 1900-1962), 생리학자 풍덕배(馮德培, 1907-1995), 신경생리학자 장향동(張香桐, 1907-2007), 조류학자 정작신(鄭作新, 1906-1998) 등 현대중국의 대표적 과학자들이었다. 이들 중 특히 주세는 참새를 박멸하다 큰 폐해를 겪었던 1744년 프러시아의 사례까지 인용하며 참새박멸운동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인물이다. 결국 이들의 저항 때문에 도시와 임지의 참새는 내버려둔다는 1957년의 수정안이 채택되었지만, 대약진의 광기 앞에서 과학자들의 고견을 내팽개쳐졌다.

 

지난 회에서 다뤘던 “반우파(反右派) 투쟁”(1957-59) 이후 과학자들은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거나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없게 되었다. 최고지도자 모택동의 의지와 충돌하는 의제(議題)는 더더욱 발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주세를 비롯한 소수의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상식과 진실을 등불 삼아 시대의 광기에 맞섰다. 그 결과 1960년 모택동은 결국 사해(四害)의 명단에서 참새를 빼고 대신 빈대를 넣어야만 했다.

 

참으로 엄혹했던 1950년대 말, 중국의 방대한 대륙에선 한 절대권력자의 권위에 눌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입을 닫고 말았다. 당시 참새대학살에 반대한 소수의 생물학자들은 반우파투쟁의 칼날을 운좋게도 피해갔지만,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성난 홍위병들의 먹이감이 되고 말았다. 용기있게 소신발언을 했던 과학자들은 모택동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모욕을 당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참새대학살을 비판했던 주세는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4년 전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홍위병들은 이미 죽은 주세의 무덤은 파헤치고, 비문을 훼멸하고, 그의 유골을 들어내 능멸했다. 1978년 11월 26일에야 사람들은 주세의 유골을 추스려 다시 안장(安葬)했다. 지도자의 몽상에 동참하지 못하고 시대의 광기에 역행한 한 과학자의 서글픈 운명이었다.

 

과학과 상식을 무시한 한 권력자의 "몽상"은 참새대학살의 비극을 초래했다. 몰살당한 참새들은 비료로 재활용되었지만, 해충의 창궐로 식량증산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현실과 유리된 권력자의 "몽상"은 무책임한 망상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1950년대 내내 지속된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적 통치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정치적 억압(political repression)은 전문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절대지도자의 절박함"(utopian urgency)은 대중동원의 광기로 표출되었다. 그 자체로 끔찍한 사건이었음에도 이후 전개될 대약진운동에 비하면 참새대학살은 그저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계속>  

  
 

주세의 모습, "홀시당한 대과학자," http://news.sciencenet.cn/htmlnews/2015/4/316676.shtm
주세의 모습, "홀시당한 대과학자," http://news.sciencenet.cn/htmlnews/2015/4/316676.shtm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薛攀皋, “为麻雀翻案的艰难历程,” 《炎黄春秋》 1998年 第8期, 9—15.

Huaiyin Li, Village China Under Socialism and Reform: A Micro-History, 1948-2008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Chapter 2.

Han Suyin, “The Sparrow Shall Fall,” The New Yorker, Oct. 10, 1959, 43-50.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Legacy and Lessons,”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Vol. 1, No. 2, Special Issue: PERSPECTIVES ONENVIRONMENTAL PROTECTION IN NORTHEAST ASIA (August 2001), pp. 9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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