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6回. “文字獄: 그물 치고 떡밥 뿌리고” (2)

 

1. "文化侵略”이란?

 

몇 년 전 상해의 한 국제학회에서 목격한 한 장면. 네덜란드 외교관 출신 패널리스트가 중국의 인권문제에 관해 언급하자 방청객 한 명이 매섭게 질문했다. “서방 시각으로 중국인의 인권을 거론한다면, 그 자체가 문화침략이 아닙니까?” 송곳처럼 날선 질문에 패널리스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인권이란 모든 인간에 적용되는 보편적 개념입니다.”

 

방청객은 따져 물었다. “각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고 인민의 체험이 다른데, 일방적으로 서방의 가치를 보편적이라며 강요하는 행위가 바로 문화침략 아닙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패널리스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네덜란드인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입니다. 여러분들도 중국인이기 전에 인간입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지만, 우리는 인간이길 거부할 순 없습니다.”

 

중국어에서 문화침략은 한 국가나 민족이 자문화(自文化)를 퍼뜨려 타국가나 타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누군가 보편가치를 거론하면 서구의 중국에 대한 문화침략이라 비판한다. 중국 정부의 인권유린을 지적해도 문화침략이라 반발한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정치시스템과 역사·문화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보편가치”는 중국현실에 맞지 않는 서구적 가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보편가치"는 중국공산당이 금지하는 일종의 "금칙어"가 되어 있다. 

 

패널 종료 후에 옆에 있던 한 중국인 교수에게 내가 물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19세기 서유럽에서 생겨난 사상인데, 혹시 문화침략에 해당되나요?” 이미 예상했던 질문을 받은 듯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합법칙성을 규명한 과학적 세계관이요. 뉴턴이 중력을 발견했듯,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객관적 법칙을 발견했을 뿐이죠. 과학적 세계관의 전파는 문화침략이 아니라 진리의 확산이자 사상적 진보입니다.” “글쎄요, 21세기 현실에서 과연 마르크시즘이 역사의 진리를 설파했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하고 되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론 중국공산당의 기본입장이 그렇다는 얘기”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문화침략"을 예시하는 만화, 서구문명이 전투 로봇이 되어 중국문명을 압살시키는 장면
"문화침략"을 예시하는 만화, 서구문명이 전투 로봇이 되어 중국문명을 파괴하는 장면
http://www.baike.com/wiki/%E6%96%87%E5%8C%96%E4%BE%B5%E7%95%A5

 

 

 

 

2. 知識人의 몰락

 

현재 서울의 모 대학에서 중국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2000년대 초반 북경대학 유학시절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애국자들이다. 애국자들이라서 그들은 정부비판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한다. 5.4운동을 이끌었던 바로 그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어떻게 그토록 체제순응적일 수 있나?”

 

1919년 5.4운동 당시 북경대학은 좌우 진영의 다양한 사상가들이 운집해 중국지식계의 신사조를 이끌던 자유사상의 요람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창건자 진독수(陳獨秀, 1879-1942)와 이대소(李大釗, 1888-1927), 근대 문학의 태두 노신(魯迅, 1881-1936), 컬럼비아 대학 유학파 실용주의 철학자 호적(胡適, 1891-1962)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머리를 맞대고 중국의 전통사상과 서구의 사상을 섭렵하며 이른바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틈에서 도서관 열람실에서 근무하던 호남성 출신 젊은 모택동은 도서관장 이대소의 영향 아래 공산주의에 입문하고, 그 인연으로 1921년 상해에서 발족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 당시 북경대학에서 민주, 자유, 과학을 논하던 그 숱한 자유사상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1949년 중공정부가 집권했을 때, 많은 지식인들은 국민당 정부를 버리고 대륙에 남아 “신중국” 건설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새로 등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에서 북경대학의 인텔리들은 대부분 “자산계급 지식분자”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잠재적 반혁명세력의 굴레를 써야만 했다.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지식인들은 대중의 집단테러와 국가폭력 앞에서 함구하거나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집권 이후 모택동은 단 한 번도 북경대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한다. 모택동은 한 평생 인텔리들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또 경멸했다. 도서관 직원으로서 교만을 떠는 엘리트 학생들에게 받은 심적 상처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1930년대 당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왕명(王明, 1904-1974)을 비롯한 모스크바 유학파 이론가들과의 대립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학교 공부 자체를 불신했던 모택동은 문화혁명의 절정에서 홍위병이 되어 밤낮으로 “혁명놀이”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을 산간벽지로 하방(下放)시켜 고단한 노동을 통해 직접 혁명을 체험하라 요구했다. 바로 그런 반지성의 광기가 오늘날 중국 지성계의 암흑기를 불러왔다.

 

1980년대 이래 대한민국의 대학은 반체제 운동의 온상이자 반정부 투쟁의 현장이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학은 체제순응의 친정부 성향 지식인들을 길러내는 이념교육의 중추기관이다. 오늘날도 대학생들은 졸업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개론수업”을 이수해야만 하며 대부분 대학엔 “마르크스주의 학교”가 부설되어 있다. 최근엔 유수한 대학에 “습근평(習近平, 시진핑)사상 학원”이 들어서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공산당원들이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이라는 “역사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독점한 진리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된다. 자발적으로 공산당의 공식이념을 수용하는 순간, 지식인은 진실추구의 의무에서 해방된다. 중국은 그렇게 닫힌 이념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중공정부는 인텔리들에게 “계급철폐와 인민해방”의 이상을 제시한 후, 사상적 자유를 빼앗고 혁명투쟁의 임무를 부과했다. 그러나 대체 왜 지식인들은 그토록 무력하기만 했을까?

 

지식분자의 4개 "S": "SURRENDER,SUBMIT,SURVIVE,SUCCUMB"https://botanwang.com/articles/201403/%E4%B8%AD%E5%9B%BD%E7%9F%A5%E8%AF%86%E5%88%86%E5%AD%90%E7%9A%84%E5%9B%9B%E4%B8%AAs.html
지식분자의 4개 "S": "SURRENDER,SUBMIT,SURVIVE"
https://botanwang.com/articles/201403/中国知识分子的四个s.html

 

 

 

3. 호풍(胡風, 1902-1985) 최후의 변론

(14회 “낙인 찍고 재갈물리고”에 이어서)

 

1949년 이후 중국의 문학·예술계는 모택동의 총애를 받던 주양(周揚,1908-1989)과 그의 추종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50년대 초 호풍과 그의 추종자들은 문단의 비주류로 밀려나 꽤나 신산(辛酸)스러운 야인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미 14회에서 설명한대로 문학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작가의 창의성을 신뢰했던 호풍은 주양으로 대표되는 “문예관료”들이야 말로 문학·예술의 공적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단순한 도식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섣부른 이론을 앞세워 작가의 창의성을 죽였다. 그렇게 문학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킨 후, 그들은 문단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호풍의 눈에 비친 문예관료들은 권력의 부나방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14회에서 언급한대로 1954년 3월부터 7월까지 호풍은 골방에 칩거한 채 200자 원고지 1천 3백매 분량의 “해방이후 문예실천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27만자를 넘는 방대한 두께라 흔히 “삼십만언(三十萬言)”이라 불리는 문제의 문건이다. 호풍은 이 보고서에서 당시 문학·예술 분야를 억압하던 도식적이고 일양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주양 집단의 핵심인물들이 제시한 도식적인 이론을 설파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작가정신” 대신 “노동자적 계급성”을, 독자적 사유 대신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강조했다.

 

그는 작가라면 모름지기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고 묘사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다. 작가 개개인의 독자적인 창작행위는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에 부합한다고 확신했다.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처럼 다채로운 복합인물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고 묘사해야 진정한 리얼리즘의 문학이 이뤄진다는 논리였다. 당시 중국의 문단권력은 작가들에게 특정계급의 전형적 인물만을 소재로 삼아 밝고 건강한 사회주의 인간형을 창조하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런 획일주의에 대항해 호풍은 더 심오하고, 더 다채롭고, 더 사실적인 작가주의 창작이론을 옹호했다. 집단보단 개인을, 도식보단 파격을, 혁명성보단 창의성을 강조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국의 현실에 비춰보면 꽤나 도발적이고 과격한 주장이었다.

 

호풍 만년의 모습
호풍 만년의 모습

 

 

1954년부터 중국공산당은 본격적으로 문인들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한다. 그해, 10월 31일부터 1954년 12월 8일까지 문단 내부에선 유평백(兪平伯, 1900-1990)과 풍설봉(馮雪峰, 1903-1976)에 대한 일련의 비판대회가 개최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청대 소설<<홍루몽(紅樓夢)>>연구로 이름 높았는데, 모택동은 유평백의 홍루몽 연구를 직접 비판하면서 두 사람은 문단의 표적이 된 것이다. 

 

모택동은 작가의 계급성을 강조했지만, <<홍루몽>>을 탐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모택동은 왜 그토록 귀족가문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을 좋아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택동의 혁명적 문예이론과 <<홍루몽>>에 대한 그의 흠모는 모순되는 듯하다. 이 모순을 해소하려는 의도였을까? 1954년 주양 집단의 두 젊은 문인들은 <<홍루몽>>이 결국 계급투쟁의 산물이라고 해석한다. <<홍루몽>>은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가보옥은 병약한 사촌 임대옥을 가슴 깊이 사랑했지만, 부모의 계략에 넘어가 더 부유한 설보채와 혼인하게 된다. 상심한 임대옥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가보옥은 이후 과거에 급제하지만 젊은 아내를 뒤로 한 채 구도의 길을 떠난다. 1954년 이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졸지에 “계급투쟁”의 혁명문학으로 칭송되었다. 덕분에 기존의 <<홍루몽>> 연구는 비판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고, 유평백과 풍설봉이 비판의 창끝 앞에 서게 되었다.  

 

뜻밖에도 바로 이 비판대회에 호풍이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가 “삼십만언”을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후 넉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대회에 참석한 호풍은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오매불망 보고서에 대한 공산당 중앙위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던 시점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의 보고서는 이미 당내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곧 출판될 예정이었다. 게다가 그날 아침 기조연설을 시작한 역사학자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은 공교롭게도 토론의 자유를 강조했다. 다른 연사들도 뒤따라 소수견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들의 연설을 들으면서 호풍은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고 확신했다. 넉 달 전 중앙위에 올린 보고서가 최고영도자의 심금을 울렸음이 확실하다 믿었다.

 

곧이어 연단에 선 호풍은 가슴에 꾹꾹 묻어둔 비판의 언어를 슬금슬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문단을 장악한 문예 관료를 향해 독설을 내뿜었다. 호풍은 특히 문단의 권력자 주양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의 언설을 이어갔다. 주양의 문예이론은 단순하고 조악하며, 현실을 왜곡하는 엉터리 논리라 비판했다. 그런 엉터리 논리로 권력을 장악한 문단의 권력자들이 창의성을 억압하고 작가정신을 말살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문단 내부의 분파주의와 폐쇄성을 고발했다. 나아가 그는 공산당의 사상통제까지 거론한다. 그는 당당히 공산당 지도부가 마르크스주의를 교조화해서 소수의 전유물로 전락시켰으며, 그 결과 중국 지식계의 창의성이 말살됐다고 부르짖는다. 

 

호풍이 그렇게 노도와 같이 강렬한 연설을 이어갈 때, 묵묵히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그의 논적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풍은 어리석게도 정부가 미리 쳐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 셈이었다. 공산당 중앙위에 제출되었던 호풍의 “삼십만언”은 곧바로 그의 논적들이 장악하고 있던 작가동맹에 넘겨졌다. 이미 호풍의 논리를 숙지하고 있던 그의 논적들은 그날 그가 연설을 마치기 무섭게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해 12월 10일엔 호풍의 연설문이 주양의 비판과 함께 출판되었다. 그때서야 호풍은 스스로의 판단착오를 인지하기에 이르렀지만, 곧바로 호풍을 향한 거센 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955년 1월부터 호풍은 집중포화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말았다. 파금(巴金, 1904-2005), 노사(老舍, 1899-1966), 모순(茅盾, 1896-1981), 곽말약 등등 중국의 유수한 문인들이 홀린 듯 집체적으로 호풍 개인을 향한 격렬한 비판과 항의를 마구 퍼부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풍을 공격했던 이들 문인들은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 대부분 홍위병에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집단린치와 공중모욕의 희생물이 되었다. 특히 <<낙타상자>>의 작가 노사는 홍위병에게 모욕을 당한 후 호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호풍을 향한 이들의 극심한 공격 뒤에는 물론 중공 중앙위가 있었다. 모택동 바로 밑의 주은래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집중포화를 못 이긴 호풍은 1955년 1월 장문의 “자기비판서”를 쓰지만, 당은 오히려 그 문장을 역으로 이용해 호풍을 단죄하는 증거로 삼는다. 당은 호풍과 그의 친구들이 주고받는 서신들을 압수해 호풍의 “반혁명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에겐 단순한 사상적 오류를 넘어 체제전복의 혐의가 들씌워졌다. 1955년 초여름, 당은 전국에 걸쳐 호풍집단의 색출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건설 “5년 계획(1953-1957)”이 저조한 성과를 보이는 시점이었다.

 

공산당은 호풍을 체제전복을 획책한 국민당 간첩으로 몰고 간다. 기관지 인민일보의 사설은 “우리의 임무는 호풍안(案)을 전국에 걸친 철두철미한 교육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 선언한다. 급기야 호풍은 일개 반혁명, 반국가, 반공산당, 반민중, 친제국주의, 부르주아의 심볼이 되었다. 정부는 노동자, 농민, 군인, 소수민족, 청년집단, 민주조직, 여성단체, 종교집단까지 동원한 대중집회를 조직해서 호풍의 처벌을 요구했다. 호풍은 순식간에 전국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 그해 7월 18일 호적은 “인민의 뜻에 따라” 체포되지만, 호풍안의 광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정부는 모든 매체를 동원해 산간벽지의 농촌 마을까지 호풍집단의 색출에 나서라 강요했다. 1955년 여름, 공산당은 급기야 과학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과학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호풍집단의 암약을 방조했다는 논리였다. 라디오 방송과 신문 지면은 날마다 전문영역에 매몰된 과학자의 반혁명성을 질타했다. 문단의 논쟁에서 시작된 “호풍사건”은 결국 전국적 공포를 몰고 온 대규모의 현대판 “문자옥”으로 비화(飛火)되었다. 과연 왜 호풍은 그토록 공산당의 미움을 샀을까? 돌이켜 보면, 한 명의 악인을 만들어 전국의 인민을 구속하는 전체주의적 대중통제의 기법(技法)이 아닐 수 없다. 호풍의 문예이론은 반혁명의 불온사상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는 호풍의 사상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식계의 누군가가 감히 체제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당의 지도이념에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공산당은 모든 인민의 의식을 붉은 등을 켜고 대중을 정치적으로 조정할 수 있으므로.

 

호풍은 1955년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24년이 지난 1979년 등소평이 집권한 후에야 석방되었고 1980년엔 복권되었지만, 정신분열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는 모택동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유일무이한 작가로 기억되기도 한다.

 

 

4. “살아남아”(活着)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 이 속담엔 처절한 생존의 지혜가 담겨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처세술이지만, 독재정권 아래선 더더욱 절실하다. 이미 살펴 본대로 연안시절 정풍운동 당시 왕실미는 “자유롭게 비판하라”는 지도부의 요구에 고무되어 겁도 없이 방방 뜨며 속내를 다 드러낸 대가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실미의 선례를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정부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호풍 역시 정부가 먼저 그물을 치고 떡밥을 뿌려 놓은 연못에 가서 맘 놓고 유영(遊泳)하다 보기 좋게 잡힌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음 회에 다룰 “백화제방 운동(1957)”의 희생자들 역시 똑같은 패턴으로 정부의 계책에 말려 들어 희생되고 말았다. 

 

과연 그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부의 모략이 너무나 교묘했기 때문일까? 세상엔 분명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정 맞을 줄 뻔히 알면서도 모난 돌처럼 톡톡 튀는 사람들이 있다. 분노와 원한을 가눌 길 없어 목숨 걸고 가슴에 맺힌 한 마디를 결국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마는 어리석고 곧은 사람들도 있다. 중공정부는 바로 그런 소수의 우직한 사람들을 색출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잔악하게 처벌함으로써 다수 대중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가장 효과적인 대중통제의 방법이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선 민중의 저항이 도도한 물줄기가 되어 흐른다. 전체주의 국가의 민중은 바람 아래 바싹 엎드린 풀처럼 쉬이 일어나지 못한다. 다만 어떻게든 꿋꿋이 “살아남아” 가혹한 삶의 형벌을 역사의 신 앞에서 증언할 뿐이다.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活着,살아남아, 1994)"의 포스터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活着,살아남아, 1994)"의 포스터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Merle Goldman, Literary Dissent in Communist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丁抒, <<陽謀: 反右派運動始末>> (香港《開放》雜志社,2007)

호풍사건관련 기록영화. Storm under the Sun (short English version, reedited 2014), https://www.youtube.com/watch?v=QpBCzHQPEak&t=2332s
 

Johannes Kaminski, “Toward a Maoist Dream of the Red Chamber: Or, How Baoyu and Daiyu Became Rebels Against Feudalism,” Journal of Chinese Humanities, Volume 3, Issue 2, pages 177 –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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