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責任지라, 빅브라더

 

1. 꿈꾸는 빅브라더

 

빅브라더는 6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역사의 비약을 확신했다. 15년 안에 영국과 미국을 추월하자 부르짖었다. 사회주의를 넘어 지상(地上)의 공산유토피아를 만들자 호소했다. 부강하고 정의로운, 풍요롭고 평등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며 지친 인민들을 다독였다. “수정주의자” 흐루쇼프의 소련을 대신해서 이제 중국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우뚝 솟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끼자”며 그는 온 사회를 흔들고 쑤시고 뒤집었다. 농공업분야의 대약진(大躍進)을 이루자며 노동자, 농민들을 밤낮으로 불러냈다. 대약진의 꿈은 그러나 물거품이 되었다. 대약진이 아니라 대역진(大逆進)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큰 걸음을 내딛는 대신 큰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역사적인 퇴보(退步)였고, 혁명적인 반동(反動)이었다.

 

하북, 하남, 안휘, 강소, 산동 등지의 농민들은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끝도 없이 집단노동에 시달렸다. 상부의 지시를 받은 간부들은 일상적으로 농민들을 윽박지르고 때리고 욕하고 벌주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더 많이 받아가려 했지만, 배급량이 줄어들자 일손을 늦췄다. 농민들은 감시를 피해가며 바닥에 주저 앉고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어디서건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았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 태업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생체에너지를 아껴써야만 했다. 그들은 식구들을 위해 곡식을 빼돌렸고, 논밭에서 설익은 날곡식을 씹어 먹었다. 식량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멀리 달아나거나 낯선 땅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타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면 월급을 모아서 고향의 식구들에 송금했다. 굶주리고 지치고 병든 농민들의 사보타주는 전체주의 정권에 항거하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Thaxter, Catastrophe and Contention in Rural China, chapters 5 and 6)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최대 4천5백만의 인민들이 굶어죽고, 맞아죽고, 과로사(過勞死)했다. 산더미로 쌓이는 아사자의 유골 위엔 삼면(三面)의 붉은 깃발만 나부꼈다. 이른바 삼면홍기(三面紅旗)란 1959년 제2차 5개년 계획 당시 채택된 3대 핵심전략으로 총노선(발전전략), 대약진(궁극목적), 인민공사(조직방법)을 의미했다. 쉽게 말해 농공업생산량의 급격한 증폭을 위해 모든 인민을 생산현장에 투입하는 총동원의 비상전략이었다. 삼면홍기는 모두 다 모택동의 고안이었다.

 

1956년 총리 주은래(周恩來, 1898-1976, Zhou Enlai), 부주석 진운(陳雲, 1905-1995, Chen Yun)과 국가발전개혁위의 박일파(薄一波, Bo Yibo, 1908-2007)는 모택동의 과격한 집산화 전략에 반대했었다. 1958년 초반 모택동은 이 세 사람의 패배주의와 보수 성향을 공격했다. 총리 주은래까지 모택동의 거센 비판에 휩싸이자 중공중앙의 지도부에선 아무도 모택동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1960년 이후부터 신경제정책(1960-1966)을 꾸려나갈 유소기(劉少奇, 1898-1969, Liu Shaoqi)와 등소평(鄧小平, 1904-1997, Deng Xiaoping)조차 대약진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중공지도부의 그 누구도 대기근의 발생에 대해선 면책특권을 누릴 수 없다. 대약진운동을 총괄하고 기획한 리더는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모택동이었다. 2년이 못 지나 과도한 집산화와 무리한 총동원의 폐해가 드러나자 중공중앙에선 모택동책임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

 

대약진운동의 정신을 압축한 삼면홍기의 구호.
대약진운동의 정신을 압축한 삼면홍기의 구호: "총노선 만세! 대약진 만세! 인민공사 만세!"

 

 

2. 대약진운동의 네 단계

 

대약진운동은 1957년 말부터 1962년 8월까지 모택동의 의지대로 진행되었다. 대약진운동을 다음 네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단계: 1957년 말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1958년 늦가을까지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 시기엔 전국적 집산화(集産化) 및 인민총동원이 이뤄진다.

제2단계: 1958년 늦가을에서 1959년 7월까지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극단주의의 “좌의 오류”를 수정하면서 해결책을 강구하고 속도조절을 지시한다.

제3단계: 1959년 7월 여산회의에서 팽덕회를 제거한 후, 모택동은 여세를 몰아 다시금 반우파투쟁을 전개한다. 우파를 색출해서 형벌에 가하면서 모택동은 다시금 집산화 및 인민총동원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다. 그 결과 최악의 기근이 발생했다.

제4기: 1960년 10월부터 중공지도부는 기근의 참상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모택동은 실무1962년 8월까지 대약진운동은 극단적 조치들, 예컨대 인민공사, 공동식당, 뒷마당 용광로 등 극한의 조치들은 2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기된다. 모택동은 1962년 8월 대약진운동을 종료한다.

 

제3단계에서 발생한 대기근은 모택동의 철권통치와 독단에서 비롯됐다. 그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아래 표에서 1960년의 사망률에 주목해 보자. 1960년의 사망률은 1959년의 2대에 달하며, 기근이 꽤 줄어든 1962년에 비교하면 2.76배이다. 왜 1960년이 이토록 높은 사망률이 발생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모택동의 선택이었다. 

 

 

 

3. “좌의 오류”를 수정하려 했으나

 

흔히 중앙정부가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대약진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중앙정부는 생산량 증대를 요구했고, 지방의 간부들은 처벌받지 않기 위해 조직적으로 생산량을 과장하고 왜곡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정부는 예상치대로 곡물을 조달해 갔고, 현지의 농민들은 쫄쫄 굶어야만 했다. 그러나 과연 중앙정보는 그토록 현실에 어두웠을까? 통설과는 달리 1958년 가을에서 1959년 중엽까지 모택동은 지방의 실상을 전해주는 많은 보고서를 직접 받아보고 있었다.

 

예컨대 1958년 9월 5일, 안휘성 영벽(靈壁, Lingbi)의 마을에서 익명의 편지가 모택동에 전달되었다. 무려 500명이 이미 굶어죽었고, 많은 사람들은 병 들어 누워있다는 고발의 편지였다. 편지에 의하면,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과장하기 위해 간부들은 농민들에 강제로 벼를 옮겨 심게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0월 2일 모택동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명한다.

 

1958년 11월 중순, 모택동은 또 하북성 한단(邯鄲, Handan)의 21개 현(縣)과 71개 마을 농민들이 장티푸스, 위장염, 이질 등의 병균에 감염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두 달 후, 1959년 2월 2일, 모택동은 부종 환자가 5만 명이 넘는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1959년 4월 초에는 산동, 강소, 하남, 하북, 안휘에서 발생한 춘궁기 기근을 감지한다. 그는 당시 발생한 운남성의 대기근에 관한 전해듣고 있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모택동은 당 간부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명령했다.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7월 전까지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당시 초래된 “좌의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보수적이어도 좋고 우파여도 좋으니” 제발 사태를 과장하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 독려하기도 한다.

 

1959년 2월-3월, 그는 인민공사에서 발생하는 극단적인 "좌의 오류"를 비판했다. 그는 “1958년 9-12월 사이 우리는 과도한 정책으로, 모험주의적으로 행동했다”며 반성했다. 모택동은 인민공사의 이윤투자를 비판하면서 “어떻게 농민의 피땀 섞인 곡식을 무상으로 착복할 수 있는가?”라 비판하기도 했다. 모택동은 심지어는 농민의 편에서 우파가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변호하기도 했다. 1959년 봄, 그는 농민의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나아가 기초 간부들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도 말라는 말까지도 했다. 모택동은 “상부의 지시는 신경도 쓰지 말고 현실에만 신경을 쓰라. 진실만을 보고하고 실제로 가능한 생산량만을 보고하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고 외쳤다.

 

요컨대 대약진운동 제2단계에서 모택동은 운동과정에서 드러난 급진적이고 과격한 경향을 경계하면서 신중하고 점진적인 개선책의 마련에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1959년 7월 여산회의 때부터 모택동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심리적 돌변은 1960년의 대기근을 낳은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인민들은 한 사람처럼 단결하라! 누가 할 수 있나 보자!"
"인민들은 한 사람처럼 단결하라! 누가 할 수 있나 보자!"

 

 

4. 빅브라더의 치명적 자만

 

이상의 과정을 살펴 보면, 적어도 제3단계에서는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꽤나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대약진운동 자체를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혁명에 희생이 따름을 직시했다. 다만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만을 했을 뿐. 그런 노력도 오래 가지 않았다. 1958년부터 대약진의 속도를 늦췄던 모택동은 1959년 여름 돌변한다. 

  

돌변의 계기는 바로 1959년 7월 여산회의였다. [문혁춘추] 28, 29회에서 이미 다뤘던 바와 같이 모택동은 대약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방장관 팽덕회와 그의 추종자들을 즉각 파면하고, 또 반혁명세력의 낙인을 찍어 매장했다. 곧 이어 모택동은 전국적으로 제2의 반우파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사회 곳곳에 팽덕회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파적 경향을 제거하지 않고선 사상통일을 이룰 수 없고, 사상통일 없인 대약진운동이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7년의 제1차 반우파투쟁에선 50만 명이 숙청되었다. 1959-60년의 반우파투쟁에서는 당원들 중에서만 3백65만 명, 평범한 인민들 중에서도 3백 70만 명이 우파로 몰려 문책당하고, 취조받고, 모욕당하고, 구타당하고, 구금되었다. 대약진 이후 정부의 재조사에선 70프로 이상이 누명으로 밝혀졌다. 모택동이 나서서 피해자의 복권을 지시했을 정도였다. 농민들은 강제노역에 내몰린 상태에서 계급투쟁까지 병행해야 했다. 

 

1959년 8월부터 1960년 봄까지 중국사회는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모택동은 특히 당내 간부들을 경계했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성급(省級) 정부에서도 대대적인 우파사냥이 일어났다. 바로 그 당시 안휘성의 서기 장개범(張凱帆, 1908-1991, Zhang Kaifan)이 표적이 되었다. 안휘성 무위현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자 장개범은 기민하게 공공식당을 해체하고 진휼미(賑恤米)를 방출해 농민들을 구제했다. 장개범의 구제책은 “무위현 20일 대소동”으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굶어죽는 농민들의 입장에선 목숨을 살려주는 은택이었지만, 중앙정부는 그의 조치를 우파적 일탈이라 규정했다. 정부의 시책에 맞서 공공식당을 허물고 곡간의 식량을 맘대로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장개범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훼방을 놓고, 공산당의 분열을 획책하고, 당내 분파를 조직한” 부르주아 끄나풀로 몰려서 파면되고 말았다.

 

중국 사회 전역에서 반우파투쟁을 다시 일으킨 모택동은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했다. 그는 반우파투쟁으로 다시 깨어낸 인민들이 극적으로 농업 및 공업 분야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리라 믿었다. 때문에 그는 농촌의 현실에 눈을 감았고, 농민들의 원성(怨聲)에는 귀를 닫아버렸다. 그는 분명 대약진운동의 부작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지상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선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빅브라더의 독단이며 노욕이었다. 현실에 눈을 감은 몽상가의 옹고집이며, 잔악무도한 혁명가의 파괴본능이었다.


 

힘써 풍작을 이루어 식량을 비축하자!

 

 

5. "대기근은 70프로는 인재(人災)였다."

 

인류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리더십이 크고 작은 인간 조직의 명운을 결정함을 본다. 유능한 리더는 인민을 부강과 번영으로 이끌었지만, 무능한 리더는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갔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흔히 대약진의 결과는 참혹했으나 대약진의 의도는 옳았다며 빅브라더의 순선한 동기를 칭송하곤 한다. 어리석은 발상이다. 아니, 인류의 지성을 모독하는 노예적 사고(思考)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건, 좋은 결과를 불러오면 좋은 정책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하면 나쁜 정책이다. 지도자가 치밀한 계산도, 신중한 점검도 없이 섣부른 정책을 강행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인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성직자라면 오로지 신념에 따라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하겠지만, 권력자는 정책의 결과에 책임져야 하고, 오로지 정책의 결과로만 평가받아야 한다. 현대국가의 정치인은 철인왕도, 도덕군자도, 윤리교사도, 종교적 구루(guru)가 될 필요도 없다. 오로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전문적인 행정가이어야만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민은 지도자에게 권력을 위임한다. 권력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공익실현의 수단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인에겐 무엇보다 “책임의 윤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자는 정책의 결과에 책임지라는 얘기다.  

 

빅브라더의 암시를 따라 1959년 겨울부터 1960년 봄까지 중국 전역에선 좌익극단주의와 소아병적 모험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과장하고 왜곡하는 부과풍(浮誇風)이 만연하고, 상황의 고려 없이 획일적 규정을 강요하는 공산풍(共産風)이 몰아쳤다. 모택동은 식량생산량의 급증을 약속하고, 대규모 토목산업을 요구하고, 더 강력한 집산화 및 집체생활을 추진했다. 1959년 여름과 가을 전국적으로 더 강력한 식량조달의 쟁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대기근이었다. 1960년의 대기근에 대해서 모택동은 문책당해야 마땅하다. 오기에 사로잡혀 섣불리 극한의 정책을 밀어붙인 게 바로 모택동이었다. 누가 그러나 감히 빅브라더를 문책할 수 있을까?

 

이미 수천만의 인명이 희생당한 후에야 중공의 지도부는 처절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거의 한 달에 걸쳐 북경에서는 이른바 “7천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중앙정부, 성급(省級)정부의 요원들은 물론, 지방의 간부들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7천 명이 함께 모여 중화인민공화국 12년간의 경제정책에 대해 총괄적인 평가 및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취지였다. 대약진운동에 대한 평가가 물론 핵심의제였다. 바로 이 “7천인 대회”에서 유소기는 3년간의 대기근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작심하고 발언한다.

 

“대기근의 30프로는 자연재해였지만, 70프로는 인재(人災)였다.”

 

중국현대사에 기리 남을 용감한 발언이었다. 유소기는 빅브라더를 문책하면서 신경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유소기는 등소평과 손을 잡고서 모택동이 망쳐놓은 경제를 복구하기 시작하는데······. <계속>

 

1962년 1월 "7천인 대회"에서 유소기와 모택동https://erenow.net/modern/maos-great-famine-the-history-of-chinas-most-devastating-catastrophe-1958-62/40.php
1962년 1월 "7천인 대회"에서 주은래, 유소기, 모택동, 등소평 (정면, 왼쪽부터)
https://erenow.net/modern/maos-great-famine-the-history-of-chinas-most-devastating-catastrophe-1958-62/40.php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대학 교수)

 

 

 

<참고문헌>

Thomas P. Bernstein, “Mao Zedong and the Famine of 1959-1960: A Study in Wilfulness,” The China Quarterly, No. 186 (Jun., 2006), pp. 421-445. (본문의 3, 4 섹션은 상당 부분 이 논문의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Ralph A. Thaxton, JR., Catastrophe and Contention in Rural China: Mao’s Great Leap Forward Famine and the Origins of Righteous Resistance in Da Fo Vill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Chapter 5 and 6.

Dali Yang, Calamity and Reform in China (Stanfor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 3: The Coming of the Cataclysm, 1961-6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Alfred Chan, Mao's Crusade: Politics and Policy Implementation in China's Great Leap Forwa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张素华, 《变局:七千人大会始末, 1962.1.11-2.7》 (北京: 中华书局出版社, 2006)。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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