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4回. “黑苗와 白描의 辨證法”

 

1. 혁명이냐, 생존이냐?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중공지도부는 두 패로 갈렸다. 모택동이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세력)라 비판했던 개혁세력은 대기근의 참사를 수습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회복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모택동이 이끄는 강경세력은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핵무장을 추진하는 한편 계급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이념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1-1965년 사이 유소기와 등소평에 의한 경제개혁이 한참 진행될 때, 실제로 이 두 세력은 첨예한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62년 여름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든 누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사천성의 속담에 빗대서 실용주의 개혁노선을 옹호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된다는 의미인데······. 흐루쇼프의 탈(脫)스탈린 노선을 “수정주의”라 비판해 온 모택동의 심기를 건드리는 위험한 정치 스턴트(stunt)가 아닐 수 없었다. 그해 9월 모택동은 등소평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계급혁명이 경제회복의 기본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으나······. 유소기와 등소평의 경제개혁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중국의 경제가 활력을 띄자 모택동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는 범사회적 캠페인을 이끌면서 이념 교육을 강화했다.

 

이 두 세력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피치 못할 실용노선과 원칙주의의 갈등이었다. 행정가(administrator)와 공론가(ideologue)의 투쟁이었다. 나라살림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집사(執事)와 당위와 이념을 선점하는 투사(鬪士)의 처절한 싸움이기도 했다. 등소평의 비유를 원용하자면, 흑묘 대신 백묘가 나타나 쥐를 잡기 시작했다. 백묘가 쥐를 잘 잡기 시작하자 시기심을 느낀 흑묘는 그릇된 방법을 써서 쥐를 잡는다며 백묘를 공격하기 시작한 꼴이었다. 결국 이 두 집단 사이의 투쟁은 문화대혁명(1966-1976)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드라마를 불러왔다.

 

1963년 북경 공항. 당당하게 걸어가는 유소기와 등소평의 뒤에 주은래가 따라가고 있다.
1963년 북경 공항. 당당하게 걸어가는 국가주석 유소기와 중앙총서기 등소평의 뒤에 주은래 총리가 따라가고 있다. 당시 유소기와 등소평의 위세를 보여주는 사진.

 

2. 유소기와 등소평의 경제개혁 (1961-1965)

 

33회에서 언급한대로 1962년 1월-2월 “7천인대회”에서 유소기는 대약진의 참사는 70프로가 인재(人災)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천만에서 4천5백만의 인명을 앗아간 대기근이 중국공산당의 정책 실패임을 인정한 셈이었다. 1959년 이래 유소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主席)직을 맡고 있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을 전개할 때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공산당총서기 모택동과 국가주석 유소기는 대약진운동의 추진에 의기투합했다. 덕분에 대약진운동은 파죽지세로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대기근의 참사로 귀결되었다. 바로 그런 유소기가 대기근이 국가정책의 실패였다고 공식적으로 시인한 셈이었다.

 

물론 유소기의 칼끝은 최고영도자 모택동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으나······. 모택동에 향한 직설적 비판은 중공지도부의 정당성 자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유소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완곡하게 에둘러 공산당지도부의 실책을 비판했을 뿐이었다. 이에 1962년 1월 30일 모택동도 역시 “7천인대회”에서 지극히 감상적인 어조로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동지여러분, 당 중앙이 범한 모든 오류는 바로 본인의 직접적 책임이오. 바로 본인이 중앙위원회의 총서기이기 때문에 나 역시 간접적 책임을 면할 수 없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걸 원치 않소. 다른 동지들 중에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지만, 주된 책임은 바로 본인에게 있소!”

 

모택동은 이렇듯 대기근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시인했으나 당내 그 누구도 모택동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다. 모택동은 일단 국가행정의 실무를 유소기와 등소평에게 떠넘긴 채 통치의 제2선으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흡사 대형사고를 치고 뒷수습을 맡긴 암흑가 보스를 연상시킨다. 모택동이 제2선으로 물러났다고 해서 그의 권위가 실추되지는 않았다. 대기근으로 파탄이 나버린 경제를 회복하고 민생을 추스르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소기와 등소평에게 경제회복의 책임을 지우고 모택동은 이념전선으로 물러난 셈이다. 국가경영의 실권을 양도하고 물러나는 제스춰를 보였지만, 실제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최고영도자로서의 절대권력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본래 모택동의 추종자로서 정치경력을 쌓아올린 유소기와 등소평은 모택동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모택동 정책을 뒤엎거나 거부하는 모양새는 연출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이들은 대약진에 관한 공개적 비판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행정의 실무를 맡아 경제개혁을 추진하되 모택동은 여전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國父)이자 최고지도자였다. 물론 어느 조직에서나 행정의 실무를 맡는 자가 실권을 쥐게 마련이다. 두 사람의 개혁이 성과를 발휘할수록 모택동의 권위는 도전을 받았다. 무엇보다 유소기와 등소평의 개혁안들은 대약진 기간 동안 모택동이 추진했던 거의 모든 정책을 부정하는 조치들이었다.

 

두 사람은 농촌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식량분배를 개선하고, 집산화를 완화하고, 현실에 맞게 산업화의 속도를 늦췄다. 식량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곡물수입량을 대폭 늘렸다. 수입된 곡식은 재빨리 굶주린 인민들에 배급되었다. 국유화된 토지의 12프로 정도를 농민들에 되돌려 줬다. 농민들은 이제 집근처 작은 땅뙈기에 텃밭을 일궈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농작물을 장마당에서 사고 팔 수 있게 됐다. 모택동의 집산화 원칙을 거슬러 농촌의 사적소유제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셈이었다.

 

게다가 유소기와 등소평은 또한 모택동이 직접 명령을 내려 조직했던 비대한 규모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파격적으로 재편했다. 1959년 현재 중국 전역엔 2만4천 개의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는데, 1963년에는 7만 4천 개로 늘어났다. 인민공사의 규모가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된 셈이었다. 인민공사의 규모가 축소되자 농촌마을의 자율권은 그만큼 확대되었다.

 

농업생산량과 식량분배에 큰 개선이 있었다. 1961년 1억9천3백만 톤이었으나 1965년에는 2억4천만 톤으로 늘어났다. 또한 곡물수입량도 늘어났다. 1962년 3백 70만 톤에서 1963년 4백2십만 톤으로 늘어났다. 곡물생산량을 늘리고 정부의 곡물 각출을 줄이면서 기근이 분산되어 농촌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다. 도시의 과밀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도시거주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취해졌다. 1960년대 초반 2천3백만에서 3백만 정도의 인구를 귀농시켰다. 정치적 자유화의 움직임도 이어졌다. 반우파투쟁 당시 숙청되고 추방됐던 우파인사들을 복권시켰다. 문학, 예술, 영화 분야에서도 해빙의 무드가 있었다.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고, 혁명 이전의 예술 양식도 부활했다. 산업분야에서도 경영자의 주도권이 커졌고, 노동자에겐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회복세를 이어가던 중국경제는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전세계 인민의 단결투쟁을 독려하는 중국의 포스터 (1965), chinaposter.net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전세계 인민의 단결투쟁을 독려하는 중국의 포스터 (1965)

 

3. 횩묘의 반격

 

모택동은 행정실무를 유소기와 등소평에게 맡긴 후 일단 통치의 제2선으로 물러났다. 행정 실무에서 손을 놨다 해서 모택동이 권력을 잃었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유소기와 등소평에게 일단 실무적인 국가의 경영권을 넘겨줬지만, 중국공산당 주석으로서 모택동은 여전히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공산당의 주석으로서 이념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다. 국가행정의 실권을 잠시 놓게 된 모택동은 다시금 계급혁명과 사상투쟁의 불씨를 당기려 노력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국방장관 팽덕회(彭德懷, 1898-1974, Peng Dehuai)를 숙청한 후, 모택동은 임표를 오른팔 삼아 군권(軍權)을 완전히 장악했다. 1959년 이래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1960년 소련은 중국 내에 체류하던 과학기술자들에 귀환 명령을 내린다. 1963년 소련은 미국 및 영국과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했다. 모택동은 소련이 서구의 반중음모에 가세했다며 격분했다. 모택동은 반외세를 부르짖으며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구호 아래 핵실험을 앞당긴다. 1964년 10월 16일, 급기야 중국은 코드네임 596의 제1차 핵실험에 성공한다. 중국이 최초로 1945년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했던 원자폭탄에 필적하는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중국이 세계 핵클럽에 가입한 순간이었다.

 

유소기와 등소평이 경제회복과 민생안정에 여념 없을 때, 모택동이 계급투쟁을 외치며 핵개발에 몰두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나 소련이 미국 및 영국과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한 바로 이듬 해 모택동은 극적으로 핵실험에 성공했다. 중국으로선 아편전쟁 이래 백년의 국치(國恥)를 설욕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핵무기의 보유는 곧 모택동식(式) 선군정치의 승리이자 자력갱생의 선언이자 자강(自强)의 완성이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최초의 핵실험 장면
1964년 10월 16일, 중국 최초의 핵실험 장면

 

핵실험과 병행해서 모택동은 초지일관 계급투쟁과 사상투쟁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1963년 그는 흔히 사청운동(四淸運動)이라 불리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개시했다. 처음엔 노동점수(임금), 회계, 재화 및 곡물창고와 관련 구체적인 문제점의 해결을 표방했는데, 이후엔 보다 정치, 경제, 조직, 사상 등 사대(四大) 분야의 모든 적폐를 청산한다는 범사회적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모택동은 “절대로 계급투쟁은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수정주의(修正主義)의 암약을 차단하고 예방하자며 사회주의교육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투쟁의 포석이었다.

 

모택동의 주변에는 몇 명의 전투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1950년대 초반 모택동사상의 성역화에 앞장선 중국공산당의 이론가 진백달(陳伯達, 1904-1989, Chen Boda)은 모택동의 비서로서 사상투쟁의 최전선에 배치된 인물이었다. 사상투쟁의 백전노장 모택동에게 “모택동사상”이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이념전의 절대무기였다. 진백달은 바로 그 모택동사상이란 무기를 정비하고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1927년 8월 7일 이른바 87회의에서 모택동은 “총대에서 정치권력이 나온다(枪杆子里面出政權)”는 말을 남겼다. 군사력이 정치권력의 핵심임을 지적한 마키아벨리적인 발언이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팽덕회를 제거한 후, 모택동은 국공내전 만주전역의 영웅 임표(林彪, 1907-1971, Lin Biao)를 오른팔 삼아 군부를 장악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수장으로서 임표는 군대를 이념적 순수성을 견지한 모택동사상의 전위대로 만들려 했다. 1964년 5월 임표는 <<모택동어록>>을 편집해서 인민해방군에 배포한다. 1965년 최종본이 확정되어 전국에 배포된 이 책자는 문화혁명기 중국 전역에서 홍위병의 바이블이 되었다. 군이 중국사회의 이념적 재무장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모택동의 곁에는 늘 강생(康生, 1898-1975)이란 ‘냉혈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강생은 1930년대 초반 4년을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 시대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비밀경찰(NKVD)로부터 사찰, 첩보, 심문, 숙청의 기술을 전수받았던 인물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그는 모택동을 도와 당내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반당행위를 적발해 처벌하는 비밀공작의 임무를 철저히, 잔인하게 수행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강생은 임표 및 사인방과 함께 권력의 핵심이 된다.

 

모택동의 곁에는 또 그의 네 번째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이 있었다. 젊은 시절 상해에서 연극배우이자 영화인으로 활약했던 강청은 1938년 연안(延安)에 가서 이후 모택동과 결혼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1960년대 초반부터 문화예술계의 좌경화를 위해 강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강청은 문화혁명 시기 사인방(四人幇)의 리더가 되어 맹활약을 하게 된다.

 

전백대, 임표, 강생, 강청은 지근거리에서 모택동의 명령을 받고 수족처럼 움직이던 공산당 내부의 핵심요원들이었다. 이들은 1966년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때 배후에서 치밀하게 물밑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모택동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1961-1965년 잠시 백묘(白描)의 시대가 열렸다. 그 시기 실용주의 개혁가들은 구소련의 신경제정책에 비견되는 꽤나 성공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1966년 이후부터는 다시 본격적인 흑묘(黑苗)의 시대가 열렸다. 흑묘의 시대는 1976년 9월 모택동이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계속>

 

https://www.theepochtimes.com/reflecting-on-deng-xiaopings-cat-theory-of-economic-reform_2173740.html
등소평의 "고양이 이론" 왕립명(王立銘, 1973 -. Wang Liming) 작.
일본을 거쳐 현재 미국에서 망명 생활 중인 중국 신강 출신의 정치만화가. Rebel Pepper 혹은 변종고추(变态辣椒)라는 예명으로 더욱 유명.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대학 교수)

<참고문헌>

张素华, 《变局:七千人大会始末, 1962.1.11-2.7》 (北京: 中华书局出版社, 2006)。

錢庠理, 中華人民共和國史·5卷 歷史的變局: 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 1962-1965 (香港: 香港中文大學, 2008)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 3: The Coming of the Cataclysm, 1961-6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Readjustment and reaction, 1961–65" in Encyclopedia Britanicahttps://www.britannica.com/place/China/Readjustment-and-reaction-1961-65     

관련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