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문혁춘추] 40회. "변방의 중국몽: 거짓의 시대, 진실투쟁의 전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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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10.28 10:30:28
  • 최종수정 2019.10.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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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70년대 한국언론의 문화혁명 관련기사

지난 회에 언급한대로 김동춘은 1970년대에는 "중국 사람들도 밥 먹고 산다는 얘기"만 해도 죄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 하에선 중국에 관한 지극히 기초적인 사실을 말만 해도 처벌되었을까? 박정희 정권 당시 과연 대한민국의 일반국민은 중국에 관한 어떤 정보에 노출되어 있었을까?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는 1면에 “毛澤東死亡(모택동사망)”을 대서특필했다. 그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모택동 사망. 84세. 어제 새벽 1시- 18일에 장례. 중공, 16시간 만에 공식발표. “老中靑 결합” 강조. 북경 로이터합동: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27년간 8억인구를 통치해온 중공당주석 모택동(82)이 9일 0시 10분 (한국시간 9일 오전 1시 10분: 이하 한국시간) 북경에서 사망했다. 중공당 중앙위 군사위원회는 모(毛)의 사망 후 16시간만이 이날 오후 5시 「당군부 인민전체」에 보내는 공동 명의의 성명을 통해 모의 사망을 발표하면서 “모가 와병 후 온갖 방법을 다해 세심한 치료를 받았으나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9일 오전 0시 10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관련기사 3.4면).

     모택동의 사망원인인 병명은 공식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가장 최근 그를 진단했던 서방의사는 그가 노인병인 「파아킨슨」씨병을 앓아 수년 전부터 신체각부분이 단계적으로 마비되어 왔다고 말했다. 모는 지난 6월부터 일체의 외빈접견을 중지하여 사망이 임박한 것으로 널리 보도되어 왔는데 가장 최근 그가 접견한 외빈은 지난 5월 29일 중공을 방문한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수상이었다. (중략) 북경방송과 신화사 통신이 보도한 모택동 사망공동발표는 중공이 모의 사망 후에도 “모주석의 혁명노선과 외교정책을 계속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국민들에게 「주자파」(전부수상 등소평)과 그 추종파)에 대한 비판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면서 모 후계자들은 이른바 “노중청(老中靑)3결합” 원칙을 따라야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동아일보, 1976년 7월 10일 아침, "모택동 사망">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보면 이 기사는 북경·로이터 통신에 근거해 당시의 중국 상황을 정확하고도 신속하고 상세하게 전한 객관보도라 할 수 있다. 당시 “주자파” 비판을 강화하란 중공 지도부의 지시까지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1960-70년대 한국 신문 아카이브를 검색해 보면 당시 한국 언론의 중국 관련보도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중앙일보의 경우, 문화대혁명이 진행된 1966년 1월 1일부터 1976년 12월 31일까지 “모택동”이란 키워드를 담은 기사가 1737건이 검색된다. 그 기사들을 하나씩 읽어 보면, 당시 신문이 중국의 문화혁명에 관해선 꽤나 정확하고 상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외신의 번역·소개도 많지만, 당시 기자들의 분석기사들도 적잖다.

 

1966년 12월 29일 중앙일보의 이현석 기자는 “중공의 권력투쟁 막바지: 유소기 자아비판의 이면”이란 분석 기사를 게재했다. 1966년이면 문화혁명 홍위병의 활동이 최고조로 치닫던 시기였다. 유소기는 청화대의 이른바 비투(批鬪)에 끌려나가 홍위병 앞에서 자기변호를 해야만 했다. 그 당시 이현석 기자는 다양한 외신과 문혁당시 중공중앙위원회의 기관지 <<홍기紅旗>>까지 인용하면서 당시의 중국 상황을 모택동과 유소기의 “권력투쟁”으로 예리하게 간파했으며, 미래예측에서도 번뜩이는 예지력을 보이고 있다.  

 

"··· 8월1일부터 12일까지의 8기 당중앙위 11차 총회에서 2위로부터 8위로 격하된 유에 대한 비판은 10월1일 국경일을 지나자 더욱 격화되었다. 이는 지난 6,7월 모주석의 지시도 없이 전국 각 학교·기관에 유가 파견한 공작조가 혁명직 학생·대중을 억압했다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은 당중앙의 지시에 의한 것임은 능히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당중앙이 유의 격하만으로 만족 않고 유의 자아비판으로까지 추궁하게된 것이다. <중략> 

   그런데 당중앙이 유·등을 모·임 노선에 진작 굴복시키지 못한 사실 자체가 소위 이들 권력파의 조직이 당고위층으로부터 지방에까지 방대한 세력이 전국에 뻗쳐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유의 자아비판을 곧 권력파의 전면적인 후퇴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당중앙이 권력파의 일소를 노리고 있지 않음은 <<紅旗>> 14, 15호에 『설사 과오를 행한 자일지라도 대중 앞에서 과오를 시인함으로써 옳은 노선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복권가능성을 말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는 권력파의 정상이지만 전국에 뻗친 그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것은 결코 간만한 일이 아니다. 27일 북평에서의 유·등 규탄대회는 흥위대의 기세가 유의 과오를 「적대성의 모순」으로 처리하려는 태도가 아닌지 의심케 하리만큼 가혹했는데 이는 결국 유의 숙청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지? 또는 당중앙의 모·임 등 주류파가 바라는 바가 아닐지.

   27일 규탄대회를 고비로 유·등등 권력파 정상에 대한 불타협 투쟁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유는 자아비판에서 62년의 우경노선의 과오도 시인했다. 62년 우경노선은 59년에 시작된 대약진·인민공사정책의 좌절을 조정하는 시기에서 완화정책을 취함으로써 수정주의를 움트게 했다. 62년의 우경 수정주의적 정책의 과오시인은 모·임 노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고비로 모·임 노선은 일단 안전권에 들어선 셈이다.국가주석 유를 정상으로 한 반주류 권력파의 추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코스」는 급진전이 예상되며 이는 전국인민대표대회니 12차 중앙위전체회의, 9회 당대회를 모·임 체제강화 속에 열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짐을 뜻한다." ([출처: 중앙일보, 1966년 12월 29일] 이현석, “중공의 권력투쟁 막바지|유소기 자아비판의 이면”) 

 

1966년 12월 29일, 박정희 정권 출범 후 불과 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70년대엔 중국에 대해선 기초 사실도 발설할 수 없었다는 김동춘의 말을 상기해 보자. 문학적 수사이거나 터무니 없는 과장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목적에 따라 기억을 제멋대로 조작한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악마”로 만들어 스스로 “천사”를 자임하는 판에 박힌 수법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언론이 오늘날 북한처럼 완전히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리영희가 197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 극찬할 때, 다수의 대한민국 언론인과 학자들은 오히려 훨씬 정확하게 문화혁명의 폭력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1966년 문화혁명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냉철한 분석기사를 썼던 중앙일보 이현석 기자에 비하면, 1976년 모택동 인격숭배까지 정당화했던 리영희는 일말의 전문성도 없는 궤변론자에 불과했다.      

 

2. 1970년대 한국 출신 문혁전문가들

 

리영희가 중공(中共)의 선전물을 그대로 맹신하며 문화혁명을 격찬하던 197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선 묵묵히 서재를 지키며 중국의 현실을 탐구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냉철한 “이성”으로 리영희가 만든 문화대혁명의 “우상”을 파괴했다.

 

1975년 서울에서 당시 성균관대 교수 오병헌 선생(1926-2016)은 4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모택동사상>>이란 저서를 출간했다. 유학 시절 나는 보스턴 근교에 거주하시던 오병헌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그 분의 저서<<모택동 사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과문했던 나는 문화혁명에 관한 한국학계의 연구는 오로지 리영희의 저작만을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다.

 

꼿꼿한 선비의 풍채에 너그럽고도 푸근한 미소를 가지신 오병헌 선생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유학을 거쳐 서울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신 후, 1950년대 하버드 대학에서 비교정치학을 연구하신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모택동 사상>>외에도  <<평화 통일은 가능한가,1996>> <<북한의 운명, 2003>>을 출판하셨고,  2011년에는 85세의 노구로 이끌고 <<한국의 좌파>>를 집필하셨다. 

 

다시 <<모택동사상>>을 읽어보면,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도 오병헌 선생은 구미 학자들의 최신논문을 구해 분석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밑에 깔린 정치적 광기를 예리하게 읽어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농민을 중심으로 장기간의 유격전을 혁명의 방식으로 채택”하여 혁명에 성공한 모택동은 권력을 잡은 후엔 “현실과는 유리된 채 추상적·이론적인 분야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대약진운동 당시 모택동이 만든 “인민공사(人民公社)와 문화대혁명 등의 연이은 시도가 모택동 사상의 비현실성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1975년 11월 21일 중앙일보 인터뷰에 실린 오병헌 선생의 말씀이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지난 4반세기 동안의 공산 통치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짧은 시일 안에 집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독재정치가 일시적이나마 인간적인 고통과 중국사회에 침체를 가져다 준 것만은 사실이지요. 중국대륙에서 그런 통치가 언젠가 사라지는 날 비로소 그 해독의 크기와 깊이를 측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오병헌 선생께서 중국공산당의 독재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병헌 선생의 저서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지식계에선 망각되고 말았다. 당시 중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문혁의 오류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오병헌 선생의 저서 대신에 중공의 선전물과 왜곡된 정보에 근거해 문혁을 맹목적으로 미화했던 리영희의 저서가 좌파세력 사이에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역사의 진실이 이념의 허상에 밀려난 서글픈 현실이다. 

 

1970년대 이미 국제수준의 뛰어난 업적을 낸 한국출신 학자들이 있었다. 두 명 모두 대한민국에서 학부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유학했다.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친 이홍영 전(前) 버클리대학 교수는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문화혁명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이란 역저를 출간했다. 그보다 1년 앞선 1977년 안병준 전(前) 연세대 교수는 미국 워싱턴 대학 출판부에서 <<중국정치와 문화혁명(Chinese Politics and the Cultural Revolution)>>을 출판했다. 이 두 저서는 당시 문화혁명에 관한 높은 수준의 연구로 세계 학계의 호평을 받고 현재까지도 인용되는 중요한 성과였다. 이홍영과 안병준의 연구는 앞으로 <<문혁춘추>>연재에서 계속 소개될 것이다. 당시 한국지식인의 통찰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서로서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인용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맥매스터 대학 도서관에 비치된 이홍영과 안병준의 문혁 관련 연구서

 

2005년 리영희는 “문화혁명”에 관한 스스로의 착오를 살짝 인정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또 “시대 탓”을 끌고 나왔다.

 

“내가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더구나 남한 같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는 누구나 그랬지요.”

 

살펴 본 바와 같이 1970년대 이미 중국 문화혁명의 광기와 폭력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던 이현석 등의 언론인들과 오병헌, 이홍영, 안병준 등의 학자들이 있었다. 리영희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당시 중국정부의 정치 홍보물과 일부 구미의 좌파분석가들의 논리만을 그대로 믿었을 뿐이었다.

 

3. 진실은 심리전의 무기

 

물론 리영희의 입장에선 70년대 가혹한 유신통치 아래서 반독재투쟁을 위해, 저항의 필요 때문에 목숨을 걸고 “비판적 중국학”을 제창했노라 항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당시 남한의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 저항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균형감, 정확성, 정직성은 갖춰야만 했다. 리영희는 아쉽게도 그 최소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한국은 “비인간적 자본주의”인데 중국은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사유방식엔, 자본주의는 악이고, 사회주의는 선이라는 일방적 도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런 리영희를 남한의 좌파세력은 여전히 미화하고 존숭한다. “모택동 어록” 27 “비판과 자기비판” 장엔 이런 말이 있다. “과오와 좌절은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시켜 우리를 더 총명하게 한다.”  리영희에게 전해주고 싶은 한 구절이다.  

 

요컨대 60-70년대 대한민국의 언론에 보도된 문혁관련 기사는 대부분 진실이었다. 또한 이미 70년대 한국 출신의 학자들은 국제학계에서 인정받는 문혁관련 역저를 남겼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지식계는 리영희의 엉터리 중국학에 열광했다. "결국은 진실이 승리한다"는 범부의 상식을 믿고 싶지만, 지난 40년 간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거짓에 영혼이 팔리고 가짜에 속으며 살아왔다. 왜 진실은 그리도 허망하게 패배하고 말았을까? 인간은 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리라. 지치고 고달픈 사람들은 잔인한 진실을 직면하기 싫어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꿈을 꾸려 한다. 리영희는 꿈꾸고 싶어하는 대중에게 멋진 꿈을 팔아먹은 "뛰어난"  세일즈맨이었다. 

 

애시당초 리영희는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본주의를 염오하고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그는 반자본주의 심리전의 전사일 뿐이었다. 그는 본래 진실을 탐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중국을 미화한 좌파투사였다. 리영희 같은 반체제 인사는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리영희의 중국신화가 역병처럼 사회 곳곳에 창궐하는데도 속수무책 무방비 상태로 심리전의 보루를 모두 빼앗겨버렸던 대한민국 지식계의 허약함이었다. 진실은 절대로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절대로 스스로 이길 수가 없다. 진실은 거짓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가까스로 드러난 진실도 태풍 앞의 모닥불처럼 허약할 뿐이다. 

 

마르크스의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잇다. "철학자들은 지금껏 여러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만 해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가 쓴 "포이에르바하 테제들"이란 철학적 단상들 중 제11번 테제이다. 좌파지식인들은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지만, 마르크스의 어리석은 로맨티시즘일 뿐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누구보다 냉철하게 잘 알아야만 한다. 공산주의의 역사가 증명하듯, 마르크스 방식의 명령경제는 미증유의 디스토피아를 낳았다. 마르크스의 테제11번을 역사학에 적용하면, 계급적 역사관이 된다. "역사학자들은 지금껏 여러 방식으로 과거를 탐구만 해왔다. 요는 오늘의 목적에 맞게 과거를 바꾸는 것이다." 리영희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중국의 현대사를 제멋대로 바꿔서 중국신화로 재구성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리영희의 중국신화가 지금도 대한민국 집권세력이 의식을 공고히 지배하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면 냉철한 이성, 엄격한 윤리의식은 물론 불굴의 투지와 열정이 요구된다. 또한 영리한 전략과 기발한 전술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하리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1966-1976)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두렵기도 하지만, 이미 세계학계의 축적된 많은 연구성과가 있는데다 세상에 진실에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진실투쟁의 원정에 나선다. 진실은 확실히 거짓보다 더 강력한 심리전의 무기이다. 먼지가 내려 앉은 무기를 꺼내서 제대로 휘둘러야 할 때다!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모택동 사상으로 우리 자신들을 무장하자!"
"모택동 사상으로 우리들의 두뇌를 무장하자!"
"사상"을 심리전의 무기로 인식하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이 단적으로 표현된 구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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