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2回. “當身들의 民族主義”

 

1. 대체 민족주의란 무엇?

 

이쯤에서 민족주의의 문제를 짚어볼까 한다. 지난 150년 간 민족주의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주요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중요한 정치이념이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 1901-1989)의 군국팽창주의, 손문(孫文, 1866-1925, Sun Wen)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의 유학사상, 모택동의 “인민독재” 대중노선,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전체주의 “주체사상,” 이승만의 자유주의 “독립정신,”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근대화” 개발독재,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의 반제투쟁의 밑에는 강력한 민족주의가 깔려 있었다.

 

모름지기 민족주의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이다. 겔너(Earnest Gellner, 1925-1995)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민족단위와 국가단위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정치원칙”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둘로 나뉜 남북한이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다. 반면 한 민족이 두 개 이상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거나 다수의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이런 정치학적 원칙에 입각해서 본다면, 과연 중국은 “민족국가”인가? 물론 아니다.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헌법은 56개의 주요 소수민족과 다수의 한족(漢族)이 공생하는 다민족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물론 한족이 전인구의 92프로를 상회하지만, 중국은 결코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국가”일 수는 없다. 남북한의 정부는 공히 “한국인”을 동일 혈연의 “단일민족”으로 주장하는 반면, 중국정부는 스스로 다민족 국가임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은 “한민족주의”(漢民族主義, Han nationalism)를 경계하고, 한족 중심주의(Han centrism)를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억 인구의 중화대륙은 “민족국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민족 국가가 어떻게 민족국가가 될 수 있는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런 개념상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중화민족”과 “중화민족주의”를 선양한다. 대체 “중화민족”이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용어일까?

 

2008년 4월 27일 북경 올림픽을 맞아 서울에서 성화봉송 당시 중국 학생들이 모여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당시 외신들은 이 사건을 중화민족주의의 흥기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도했다.  https://www.belfercenter.org/publication/chinese-nationalism-rising-evidence-beijing
2008년 4월 27일 북경 올림픽을 맞아 서울에서 성화봉송 당시 중국 학생들이 모여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당시 외신들은 이 사건을 중화민족주의의 흥기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도했다. https://www.belfercenter.org/publication/chinese-nationalism-rising-evidence-beijing

 

 

2. “중화민족”이란?

 

정치학적으로 민족(民族, nation)이란 종족의식, 인종의식, 역사의식, 문화전통, 생활습관 등등을 공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ty) 혹은 집합체(collectivity)를 말한다. “중화민족”은 이러한 일반적 의미의 “민족”과는 다르다. “중화민족”이란, 한족뿐만 아니라 중국 영토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포용적 개념이다. 장족(僮族, 1천7백만), 회족(回族, 1천 50만), 만주족(약1천만), 위구르족(약1천만) 묘족(苗族, 약 9백만) 등등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로 인식된다. 인종, 지역, 신념 불문하고 미합중국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을 통틀어 “아메리칸 민족”이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중국을 “중화민족”의 국가라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한국어에는 없는 “국족”(國族)이란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도, 종족도, 국민도 아닐 국족이 바로 중화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어다.

 

국족은, 무술변법의 유신파(維新派) 양계초(梁啓超, 1873-1929, Liang Qichao)가 1920년대 고안한 개념이었다. 양계초는 인종, 문화, 언어, 습속 불문하고 중국의 영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중화민족”이라는 “국족”에 포함된다는 주장했다. 민족의 어의가 확장되어 “전체국민”으로 확장된 셈인데, 양계초는 무엇보다 주관적인 “민족의식”을 국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양계초가 국족 개념을 고안한 배경을 살펴보면······.

 

19세기 중엽 이미 태평천국지란(太平天國之亂, 1850-62)의 지도자 홍수전은 만주족(滿洲族)을 성경(聖經) 속의 악마로 인식했다. 그는 이족지배를 종식한 후 한족만의 국가를 재건하려 했다. 명백히 한민족주의 혹은 한 쇼비니즘을 제창했지만, 홍수전은 한족 지배관료층의 동의를 얻기는커녕 문명을 파괴하는 월(粤) 지방의 도적떼로 인식되었다.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등 직접 호남의 사병(私兵)을 길러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세력은 바로 청나라의 한족 엘리트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는 만주족과 한족 지배층의 계급적 연대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후 청조가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징후를 보이면서 입헌군주제를 내세운 점진적 개혁노선은 힘을 잃고, 민국(民國)혁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민국혁명이란, 2천 년 황제지배체제의 종식과 근대 서구식 공화정 체제의 확립을 의미한다. 황제의 나라가 공화시민의 나라로 거듭나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사건이었다. 공화혁명의 지도자 손문은 강렬한 한민족주의자(漢民族主義者)였다. 이민족지배를 끝내고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에 따라 한족중심의 한민족(漢民族)만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러시아의 레닌(V. I. Lenin, 1870-1924) 과 미국의 윌슨(T.W. Wilson, 1856-1924)이 이구동성으로 지지한 당시 국제법의 기본이념이었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발발로 이듬해 청조가 무너지고 민국이 설 무렵, 손문은 민족자결의 원칙 속에 내재된 중대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르자면, 만주족, 몽고족, 티베트족, 위구르족은 각기 배타적 영토의 민족국가로 독립할 국제법적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한민족주의를 강조할수록 중국의 영토적·정치적 분열은 불가피해 보였다.

 

그런 맥락에서 양계초는 중국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미래지향”의 개념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다양한 종족, 다양한 집단일지라도 하나의 국가에 장시간 공존하면 결국 모두가 하나의 “국족”이 된다는 발상이었다. 그는 춘추전국의 분열기 이후 등장한 진·한 제국의 통합 과정에서 제하(諸夏) 또는 화하(華夏)라는 다양한 부족, 종족, 집단, 민족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중화민족”이 착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중화민족은 바로 “국족”을 의미한다. 피부색, 언어, 풍속, 전통, 문화, 종교, 가치관과는 상관없이 중국의 영토 아래서 공민의 자격을 취득한 모든 사람이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인식된다. 이 개념에 따르면, 길림성에 거주하는 120만 조선족은 물론,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라마교 승려들이나 이슬람교를 믿는 신강자치구의 터키어계 위구르족 역시도 “중화민족”의 일원이다. “중화민족”은 실로 무서운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무술변법을 주도했던 중국의 근대 정치사상가 양계초의 모습https://www.westminster.ac.uk/liang-qichao-and-his-polemic-press-the-debate-that-changed-china
무술변법을 주도했던 중국의 근대 정치사상가 양계초의 모습https://www.westminster.ac.uk/liang-qichao-and-his-polemic-press-the-debate-that-changed-china

 

 

3. 홍콩의 바닷바람

 

본격적인 논의 전에 1국가 2체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를 두 가지 소개할까 한다. 최근 5년 이래 내가 직접 경험했던 사건들이다.

 

에피소드 #1

 

2013년 12월 7일 홍콩 중심가 한 전통 요리점에서 발생한 작은 에피소드. 음식에 불만을 느낀 한 50대 여성이 웨이터에게 또박또박 유난히 정확한 발음의 보통화(표준어)로 지배인을 불러오라 소리친다. 쩔쩔 매는 웨이터가 지배인을 불러오자 도도한 중년 여성은 요리가 차고 짜고 덜 익었다며 조목조목 불만을 늘어놓는다. 지배인은 난처해하며 떠듬떠듬 항변하는데 성난 여인은 다짜고짜 따진다. “당신들도 중국 사람들인데 왜 중국어를 못 알아듣나?” 지배인은 뭔가 장황하게 해명을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 정확한 표준어로 해 봐라!” 지배인이 여전히 뭔가 계속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성난 여인은 지퍼 채우듯 두 입술을 꼭 다물고선 고개를 왼쪽으로 획 돌려버린다.

 

에피소드 #2

 

2014년 10월부터 홍콩에선 행정장관 직선제 개혁을 요구하는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에 운집해 최루액을 쏘는 진압부대를 향해 갖은 색깔의 우산을 펼쳐들었다. 우산혁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내가 근무하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선 홍콩학생회 주관으로 “우산혁명과 중국 민주화”에 관한 긴급 토론회가 열렸다.

 

50 여명의 청중 앞에서 홍콩 출신 학생 패널리스트들의 발표가 이어졌는데·······. 북경 중앙정부에 대한 홍콩학생들의 비판이 점점 과격해지자 대륙 출신 유학생들은 불편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언론사 기자 출신 패널리스트가 중공정부의 정치적 억압을 목소리 높여 비판하자 남경 출신 중국인 유학생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희들은 영국 지배 받을 때는 왜 독립운동을 않다가 중국에 통합되고 나서야 반정부투쟁을 하느냐?” 홍콩 출신 패널리스트가 되받았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홍콩에선 이미 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었다. 총독은 영국에서 파견됐지만, 홍콩 시민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를 이제 중공정부가 억압하고 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열심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너희들은 영국 제국주의 밑에서 굽실거리며 살지 않았냐.” 중국인 유학생이 따져 묻자 홍콩 패널리스트가 즉각적으로 되받았다. “무슨 소리냐? 그 당시 홍콩도 일본군에 점령당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항일투쟁을 했다.”

 

바싹 약이 오른 남경학생이 흥분해 소리쳤다. 숨이 가빠서 꼭 울먹이는 듯했다. “남경대학살 때 수십만을 학살당하면서 목숨 걸고 싸웠다. 대륙에선 수많은 민중이 목숨 걸고 싸우면서 나라를 지켰지만, 너희들은 영국 밑에서 굽실거리면서 살지 않았냐? 너희들은 민족자존심도 없냐? 너희들은 비굴하게 제국주의 종복(從僕, lackeys)으로 살았으면서 왜 같은 중국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느냐?”

 

이번엔 옆에 앉아 있던 홍콩 학생이 반박했다. “대륙 사람들이 홍콩에 관광을 오면 아기들 분유를 싹 다 쓸어 가고 아무 데나 침 뱉고 여기저기 난잡하게 쓰레기를 버리고 그러지 않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경 학생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홍콩 학생들을 향해 험악한 욕설을 퍼붓고 토론장에서 나가버렸다. 홍콩 학생회는 개의치 않고 토론을 이어갔다. 남경 학생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 상처가 되었는지 패널리스트들의 음성은 더욱 격앙되고, 중공정부를 향한 비판은 더 시니컬해졌다.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https://www.cnbc.com/2014/09/28/hong-kong-protests-qa.html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https://www.cnbc.com/2014/09/28/hong-kong-protests-qa.html

 

 

4. 대륙 (북방) 민족주의 v. 해양 (남방) 민족주의

 

아편전쟁 이후 지난 150년 넘는 세월 “중화민족”의 지상과제는 “부국강병”이었다. 1920-30년대 이래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결국 “힘세고 잘사는” 나라는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근대화(modernization)와 산업화(industrialization)를 추진했다. 물론 대립되는 국가개발의 전략을 채택했지만, 그 뿌리에는 늘 중화민족주의가 놓여 있었다. 중화민족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일까? 그리 간단한 질문일 수 없다.

 

한국현대사에 돌아보면, 김일성의 고립적 유아독존의 민족주의와 이승만의 개방적 상호의존의 민족주의가 대립했다. 대부분 학자들은 두 사람을 민족주의자(nationalist)라 부르지만, 두 사람의 민족주의는 전혀 다른 인간학과 세계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체계적인 이념이기 보단, “정치적 감정”(politial emotion)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민족주의”는 절대로 양립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중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은 모두 부국강명을 통한 중화민족의 재건을 열망한 점에서 민족주의자였지만, 서로가 채택한 민족중흥의 방법은 천양지차로 달랐다. 손문은 손문대로,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모택동은 모택동대로 서로 다른 중화민족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했다.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큰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통상주의 개방노선과 경제적 실용주의를 채택하는 “남방(해양)민족주의”와 반제·반서구의 자주 노선과 대중동원의 인민독재를 추구하는 “북방(대륙)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상기한대로 태평천국의 난에서 신해혁명은 이족지배의 청 제국을 종식하고 한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재건하려 했던 점에서 “한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두 케이스 모두 광동·광서 등 남방을 중심으로 일어나 장강 유역으로 확산되어간 “한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손문의 혁명군이 내걸었던 “반만흥한(反滿興漢)”의 구호가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손문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약진에 감동을 받아 일본을 지지한다. 일본의 근대문명에서 부국강병의 첩경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성공사례를 공부하며 일본과의 연대를 모색했던 범(泛)아시아주의자였다. 이후 손문의 민족주의는 장개석의 국민당 노선으로 이어진다. 중일전쟁(1937-1945) 당시 장개석은 장강 이남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지만, 미국과의 국제적 연대 아래 군사지원을 받았다. 요컨대 남방 민족주의는 국제무역, 자유통상, 시장경제 등등 서구중심의 근대문명에 열린 태도를 보인다.

 

반면 북방 민족주의는 1930년대 이후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 노선에서 잘 드러난다. 서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을 기반으로 공산혁명의 길을 모색하던 모택동은 반(反)시장, 반(反)통상의 고립주의적 자급경제(autarky)를 지향했다. 모택동은 남방의 통상주의자들을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부역자(comprador)라 규정했으며, 항일투쟁에 전력을 소모하던 남방의 장개석을 반민족(反民族)의 제국주의 앞잡이로 폄하했다. 중일전쟁 직후 모택동은 병력을 만주로 기민하게 이동시켜 동북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남방 정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요컨대 모택동의 북방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의 정서적 기초를 제공했다.

 

1976년 9월 모택동 사후, 다시금 중국 민족주의의 중심으로 남방으로 이동했다. 손문이 북방의 만주족을 부정했듯, 등소평은 모택동의 북방 (대륙) 민족주의를 거부했다. 모택동의 반시장주의 명령경제를 폐기한 후, 등소평은 남방과 연안지역의 통상전통, 기업가정신,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복원했다. 광동성 심천(深川, Shenzhen)의 경제특구와 광주(廣州, Guangzhou)의 무역박람회는 홍콩과 마카오 자본의 유입 및 대만 기업의 투자에 의해 이뤄진 성과이다. 바로 그런 개혁개방의 정신은 19세지 중엽 이래 해양세력의 도전에 대한 적극적 응전의 산물이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바로 남방 (해양) 민족주의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정치감정”(political emotion)은 그렇게 지역에 따라,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학, 현실인식, 세계관, 발전전략, 국가체제로 표출된다. 모택동과 김일성의 “민족주의”는 시대착오적 자력갱생의 정치구호일 뿐이었다. 등소평과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자유무역, 국제통상, 국제연대, 정보개방을 지향하는 열린 세계의 상호의존적 발전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여전히 “자급경제”를 지향하는 좌파세력은 “민족주의자”라 칭송하고, 자유통상의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우파세력은 “반민족주의자”, “부역자,” “매판(comprador)세력” 등으로 폄하하는 지적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 근래 제작된 역사물 문학예술 및 영화작품들을 볼 때마다 그런 단순한 이분법이 암처럼 번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http://www.chinawhisper.com/the-countries-that-controlled-china-during-the-age-of-imperialism/
http://www.chinawhisper.com/the-countries-that-controlled-china-during-the-age-of-imperialism/

 

5. “우리민족끼리” 대체 뭘 하자고?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신년사 직후 북한의 관영조선중앙통신은 “남조선은 수치스러운 외세 의존 정책”을 버리고 “민족자주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경제규모, 소득수준, 삶의 질, 자유지수, 행복지수, 기대수명 등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최하위의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런 나라가 감히 대한민국을 향해 “수치스러운 외세의존 정책을” 버리라는 요구하다니? 세계사의 흐름을 전혀 감조차 못 잡는 폐쇄중독의 독재정권답다.

 

불량국가의 궤변임에도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자주”란 개념은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427판문점 선언의 제1조 제1항이 바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 확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2000년 615공동선언문에는 노골적 북한식 표현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까지 등장한다. 3대 세습의 전체주의 독재정권과 손을 잡고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

 

만약 전 세계의 앵글로색슨족이 다시 뭉쳐서 “우리 앵글로 색슨끼리”를 외친다면? 게르만족이 다시 모여 “우리 게르만민족끼리”을 외친다면? 유태인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 유태민족끼리”를 외친다면? 세계시민들이 나서서 “나치즘”의 재현이라 비판할 것이고, 피부색깔 및 언어습관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인종주의 연대에 맞서 투쟁할 것이다.

 

실상 오늘날 그 어떤 “민족”도 더는 홀로 설 필요도, 이유도, 동기도, 능력도 없다. 정보화혁명에 힘입어 전 세계는 물리적 국경을 넘어, 비가시적 장벽을 넘어, 피부색, 언어, 문화, 전통,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넘어 점점 더 빠르게 유기적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민족자주”가 아니라 “상호의존”이며 “상생발전”이다. “우리민족끼리”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뒤섞임”이다.

 

“민족”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두 번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고 대륙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유럽연합의 출현은 일례에 불과하다. 유럽연합을 탈피한 영국은 53개 영연방 코먼웰스(commonwealth)의 상승적 재통합을 꿈꾼다. 21세기 현재 글로벌 ‘세계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전 세계적으로 무역거래, 자본의 흐름, 인구의 이동 및 지식의 확산이 더욱 용이해진 것이다. 앞으로의 인류사회는 배타적 “민족”의 굴레를 버리고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다종교, 다원론의 초국가적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全)지구적 확산과 혼융의 흐름은 앞으로 갈수록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사의 큰 그림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4백만 년 전까지 소급되는 “호미니드”(hominid, 原人)의 긴 역사에 비춰 볼 때, “민족”의 출현은 최근세적 현상일 뿐이다. 약 7-10만 년 전 북아프리카를 탈출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간 호모사피엔스는 농업혁명 이전까지도 99프로 이상의 역사를 작은 수렵공동체 속에서 살아왔다. 지속적인 이주를 통해 세계의 곳곳으로 뻗어나간 인류는 농경과 더불어 한 곳에 정착하고, 마을공동체, 씨족부락, 도시국가, 영토국가를 거쳐 제국적 통합으로 나아갔지만, 그 시기는 2-3천 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근대식 민족국가의 형성은 최근 1-2백 년의 현상일 뿐이다.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민족국가”의 출현은 최근세사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고고인류학의 최신연구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 사이엔 유전학적으로 인종의 차이조차 존재하지도 않는다. 민족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과 자문화 중심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난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하물며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식 “민족자주” 노선임에랴. 결국 김씨왕조가 전체주의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붙들고 있는 정신착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서글프게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우리민족끼리”란 말에 거부감도, 문제의식도 없는 듯하다.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김일성이 제창한 “우리민족끼리”의 민족자주를 기본원칙으로 천명하기까지 한다. “우리민족끼리” 붙어서 대체 뭘 하자고? 세상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뒤섞이며 서로 돕고 배우며 살아가도 늘 모자라거늘. 제발 이제는 민족을 넘어 인류를 보라! 일국(一國)을 넘어 세계를 보라! 국사(國史)를 넘어서 세계사를 붙들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9/2017091903225.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9/2017091903225.html

 

 

<참고문헌>

安静波, <论梁启超的民族观> <<近代史硏究>> 1993.3, 281-295.

梁启超: <中国历史上民族之研究><<饮冰室合集>>专集之四十二, 2.

Earnest Gellner, Nations and Nationalism (Basil Blackwell, 1983)

"4. 대륙 (북방) 민족주의 v. 해양 (남방) 민족주의"는 프리드만 교수의 아래 논문에 상세히 논구되어 있다.

Edward Friedman, “Where is Chinese nationalism? The political geography of a moving project,“ Nations and Nationalism, 14 (4), 2008, 7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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