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0회. “反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0회. “反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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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0回. “反外勢 孤立主義의 어리석음”

 

1. 백년국치(百年國恥)

내겐 1995년 여름 하얼빈 공업대학 교정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산동 출신의 오랜 친구가 한 명 있다. 고교시절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그는 현재 심천(深川)의 공업단지에서 풍력발전 사업으로 꽤나 성공한 벤처 사업가로 활약하고 있다. 몇 년 전 홍콩의 학회 참석 차 심천에 들러 오랜만에 회포를 풀 때, 그는 내게 직접 써서 블로그에 올린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수를 보여주었다.

 

이 몸은 티끌처럼 작지만 (我身本尘微)

큰 뜻으로 곤륜산을 쌓으리! (大義筑崑崙)

단번에 백년의 치욕을 설복해 (一雪百年恥)

중화혼을 다시 빚으리! (再鑄中華魂)

 

개혁개방의 메카와도 같은 심천에서 자본주의 첨병이랄 수 있는 벤처사업가가 백년의 치욕을 설복하고 중화의 얼을 다시 빛내기 위해 한 몸 바쳐 “곤륜산”을 쌓겠다는 포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시다. 전설의 이상향 “곤륜산”은 공산주의 사회의 메타포일 듯하다. 이 짧은 시는 중국식 “자본주의”의 첨병 벤처사업가 역시 “백년의 치욕”을 되새기며 위대한 중국의 재건을 꿈꾸고 있는 애국자임을 잘 보여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무릎 꿇은 중국인들의 이미지

 

백년국치(百年國恥)란, 제1차 아편전쟁(1838-1841) 이후 반식민지(半植民地)로 전락한 중국의 모든 인민이 1949년 중국공산당에 해방되기 전까지 겪어야만 했던 수치스러운 “굴욕의 역사”를 의미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백년국치의 역사를 듣고 자란다. 중국 현행 8학년 <<중국역사>> 교과서를 보면, 크게 “1. 침략과 저항”, “2. 근대화의 탐색,” 3. “신민주주의 혁명의 흥기,” 4. “중화민족의 항일전쟁,” 5. “인민해방전쟁의 승리”의 구성으로 짜여 있다. 이 교과서의 구성에서 잘 드러나듯, 중국인들의 현대사는 1840년대 아편전쟁에서 시작해서 1940년대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나아가는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 반(反)관료자본주의 투쟁의 과정이다. 중국공산당은 그 백년의 역사를 제국주의의 도전(挑戰)에 대한 중화민족의 응전(應戰)이란 도식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바로 이 역사관이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인 의식을 지배하는 메가-내러티브(mega-narrative, 거대서사巨大敍事)이다.

 

정왕의 "국치를 잊지 말라!" 콜럼비아 대학 출판부, 2014

 

이 메가-내러티브에 따르면, 작은 섬나라 영국은 무력으로 청(淸, 1644-1911) 제국을 무릎 꿇리고 “아편”이란 향(向)정신성 마약을 퍼뜨려 중국인의 영혼을 병들게 했다. 그 결과 중국인은 누구나 치욕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제국주의 침탈로 국토는 멜론처럼 싹둑싹둑 잘려 나갔고, 모르핀에 중독된 중국인들은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공산당은 불굴의 인민들을 규합해 “제국주의 종복”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중국의 인민을 반제·반봉건의 압제에서 해방시켰고, 그 결과 모택동의 선언대로 “중국인민들은 일어났다.” 중국은 21세기 현실에서도 여전히 외부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최근까지 인권, 자유, 민주주의 등등 이른바 “보편가치”를 들고 나와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혼란과 분열을 획책한다. 때문에 모든 중국인민은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 

 

아편을 피우는 두 남자, 1870년대 경.
아편을 피우는 두 남자, 1870년대 경. 
http://kindredsubjects.blogspot.ca/2011/02/opium-smokers-pun-lun-chinese-1870s.html

 

중화민족주의의 밑바탕엔 바로 그러한 반제국주의, 반외세 자주독립의 열망이 깔려 있다. 반제국주의는 1949년 이후 중국정부의 고립주의를 낳은 심리적 배경이다. 그 결과 1949년부터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시작되기 전까지 거대한 중국 중국은 외부와 단절된 “거대한 섬”의 되어버리고 말았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28년의 과정에서 모택동의 반제국주의 자주노선은 필연적으로 반외세 고립주의를 초래했다.

 

중국을 나눠 먹는 제국주의 열강

 

 

2. “1950년 모택동 암살미수 사건”

 

1950년 10월 1일 건국 1주년 행사를 맞아 북경에선 최고지도자 모택동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한반도에선 유엔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극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 인민군을 추격해 38선 이북으로 북상하던 시점이었다. 지난 회에 살펴 본 대로 한국전쟁 발발 이후 중국 내부에선 날마다 반혁명분자 색출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감히 "최고존엄" 모택동 동지의 목숨을 노린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심상찮은 조짐이었다. 

 

정보망을 가동시켜 사태를 미연에 눈치 챈 중국공안부는 닷새 전 (9월 26일) 이태리 상인 안토니오 리바(Antonio Riva, 1896-1951)와 일본인 야마구치 류이치를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리바의 집에선 박격포 포탄이 발견되었고, 야마구치의 방에선 천안문 부근의 지형지물이 그려진 지도가 나왔다. 공안부는 두 사람이 천안문 성루(城樓) 연단에 박격포 포탄을 설치할 음모를 꾸몄다고 발표했다. 이후 1년 간 사건의 전말을 밝혀 온 북경 군사위는 1951년 8월 범인들에게 형량을 선고(宣告)했다. 리바와 야마구치 두 사람에는 사형이, 나머지 다섯 명엔 최소 5년, 최대 30년 징역형이 떨어졌다. 놀랍게도 단 한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의 범인은 모두 당시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이었다.

 

안토니오 리바는 1차 대전 당시 최소 7회의 공중전에서 적기를 격추시킨 1등 공군조종사였다. 1920년 이태리 공군조종사로 중국에 파견된 후 이듬해 전역하지만, 이후 그는 국민당 조종사들을 훈련하는 외국인 교관으로 활약하면서 중국에 쭉 머물러 살았다. 공산당의 승리하자 리바는 중국을 떠날까 생각도 했지만, 그는 어떤 정권 치하에서나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주변에 떠벌렸다고 한다. 증거로 채택된 박격포 포탄에 대해 리바는 1930년대 고철더미에서 주운 유탄(流彈)일 뿐이라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마구치는 그 지도가 자신이 소방장비를 납품하던 북경소방서의 의뢰에 따라 제작된 것이라 해명했지만 묵살되었다.

 

리바의 옆집에 살던 로마 가톨릭 사제 타르시지오 마르티나(Tarcisio Martina)는 종신형(終身刑)을 선고 받았다. 아울러 30년간 북경에서 외국어 서점을 운영해온 헨리 베치(Henri Vetch, 당시 52세, 징역 10년), 중국 해역 세관 직원이었던 이태리인 구에리노 게를리오(Guerino Gerlio, 당시 56세, 6년), 독일인 사업가 발터 겐쓰너(Walter Genthner, 당시 39세, 5년), 중국인 마신칭(9년, 15년 공민권 상실)도 모두 불과 한 시간만의 즉결재판 끝에 형사 처벌을 받았다.

 

재판 직후, 리바와 야마구치는 조속히 총살당해 북경 교외의 한 농장 부근에 매장되었다. 리바의 부인은 수소문 끝에 공안부를 통해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선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를 안치시킨 예수회 (Jesuit)묘역에 정식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반제투쟁의 광풍으로 예수회 선교사들까지 부정되면서 그 묘역은 훼손되었고, 1954년 그 자리엔 결국 북경의 공산당학교(當校)가 들어섰다 한다.

 

놀랍게도 북경군사위는 리바와 야마구치의 배후로 당시 대만에 거주하던 미군 대령 대빗 배렛(David Barrett, 1892-1977)을 지목했다. 1년 전 대만으로 떠난 배렛이 리바와 야마구치의 이웃에 살았다는 이유였다. 배렛은 1924년 처음 북경에 도착해서 중국어를 익혔고, 이후 천진에 배치되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시발점이 된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1944년 미군측 대표로 중국공산당의 본부 연안에 직접 가서 중공지도부와 접촉했던 이른바 딕시 미션(Dixie Mission, 1944.7-1947.3)의 지휘관으로 유명하다. 1944년 7월 연안에 도착해 4개월 가까이 머물면서 배랫은 모택동에 대해 꽤나 긍정적 평가를 내렸고, 그 때문에 미국에서 맥카시이즘(McCarthyism) 바람이 몰아칠 때 장군으로 진급하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안의 딕시 미션 당시,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덕(朱德, 1886-1976)과 배랫과 모택동

 

연안에서 4개월 체류했으므로 배랫은 모택동와 주은래를 위시한 중공지도부와 꽤나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배랫은 1944년 12월 모택동과 장개석의 협상을 중재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딕시 미션을 수행했던 미군 측 인사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바로 배랫 및 당시 미군측 인사들이 용공혐의를 무릅쓰고 모택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 배랫이 1951년 모택동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면 황당무계한 누명이 아닐 수 없다. 배랫은 재판이 진행 중일 때 대만에서 전혀 사실무근이라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20년 후 주은래는 연안시절 만났던 배랫에게 정식으로 사과한 후, 그를 다시 중국으로 초대했다. 중국정부가 비로소 이 사건은 외국인 추방을 위한 조작극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왜 중국은 이토록 폭력적인 방법으로 외국인 처단에 몰두해야만 했을까? 반제국주의란 고작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에 불과했던가?

 

3. "외국인을 몰아내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가시화될 무렵 중국에 거주하던 많은 외국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외국인의 생명 및 재산 보장을 약속했으나 해방지역에서 본격적으로 토지개혁 등의 혁명이 진행되자 외국인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1930-40년대 중국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상해, 천진 등 조약항(港) 도시의 조차지(租借地)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외국인들은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었고, 청일전쟁 이후엔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특히 근대적 하수구와 항만시설과 통신망을 갖춘 상해에는 병원, 은행, 학교 등등 다양한 기관에 들어서면서 외국인의 인구가 급증했다. 상해는 물론, 북경, 천진, 대련, 광동 등등의 연안지역과 남방의 대도시는 외국인의 유입으로 점점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춰갔다.

 

외국인 인구의 급증을 흔히 일방적인 제국주의적 수탈의 과정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 각 지역의 상인들은 외국인 기업가들을 통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자유무역이 중국 상인들에게도 치부의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인들 역시 외국 자본의 유입을 통해 새로운 경제성장의 동력을 개발했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의 70프로 이상을 중국인 지역 상인들이 담당했다는 연구도 있다. 청조 이후, 원세개(袁世凱, 1859-1916)와 장개석은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외국인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그들의 자문을 경청했다고 알려져 있다. 외국인 전문가들은 중국의 초기 근대화를 이끄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

 

1911년 당시 대략 35만 명의 외국인이 중국에 거주했는데, 그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40년대 중국에는 외교관, 수행행정관, 선교사, 교사, 학생, 기업가, 사업가, 군사자문관, 기술자, 상인 등등 수많은 외국인들이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이미 중국의 곳곳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소련에서 도망 온 8만의 백(白)러시아 피난민과 2만의 유태인들도 상해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1919년 당시 1704개의 현(縣) 중 거의 대부분에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수백 개의 중고등학교를 세우고, 홍콩, 하문(夏門), 복주(福州), 천진 등지에 영화대학(英華大學, Anglo-Chinese universities), 북경의 연경(燕京)대학, 남경의 금릉(金陵)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을 건립했다.

 

1948년경부터 중국공산당은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가시화되자 대부분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귀환하거나 철수를 준비해야만 했다. 미국, 필리핀 등의 국가에선 직접 선박을 보내 자국민을 귀환시키지만, 영국처럼 결정을 미룬 채 중국의 공산화 과정을 관망한 나라도 있었다. (1950년 2월 8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1949년 12월 상해주재 영국 총영사는 모택동의 외국인 보호 약속을 신뢰한다며 중영관계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을 펼치기도 했다).

 

1948-49년 인민해방군은 외국인을, 특히 미국인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 공격했다. 미국 영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1948년 심양을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영사관 직원들에게 총질을 하더니, 곧이어 영사관 건물 주변으로 철조망을 치고는 영사를 감금했다. 1949년 11월, 모반 혐의로 미국 영사관 행정관들을 구속하고 재판했다. 미국의 항의로 추방으로 감형됐지만, 혹독한 겨울 바닷바람에 노출된 채 40시간에 걸친 생사를 오가는 항해 끝에야 천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가 확실시되자 외국인들은 앞 다퉈 중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미 1948년 이스라엘은 수대의 대형선박을 보내서 상해의 유태인들을 데리고 갔다. 1948년 11월 13일, 남경 함락 6개월 전, 주중대사의 요청으로 미국 해군은 수 천 명의 자국민을 소개(疏開)했다. 1949년 9월 상해에선 대형 여객선이 들어와서 44개국 1,220명의 외국인을 싣고 갔다. 필리핀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6천 명의 백(白)러시아 사람들도 데리고 갔다.

 

장시간 중국에 살면서 재산을 일궈 온 많은 외국인들은 그러나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중국에 잔류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지방정부에 새로 등록하고, 까다로운 면접을 거친 후, 가택 방문 조사까지 받아야만 했다. 1950년부터는 살인적 세율로 외국인의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운영해 온 문화시설, 복지재단은 물론, 병원, 학교, 교회는 세금폭탄을 맞고는 문을 닫아야 했다. 외국인 기업 역시 가혹한 세금과 극심한 노조의 압박을 견지지 못한 채 결국 폐쇄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1950년 이후 한국전쟁이 진행되면서 중국내 외국인들은 더욱 극심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1950년 12월 16일 미국이 중국인들에 대한 자산동결 법안을 통과하자 중국은 중국내 모든 미국인들의 재산을 동결했다. 1951년 3월엔 수십 명의 미국인들이 간첩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들의 학교, 병원, 교회, 복지재단은 모두 동결되었다. 모든 미국 기업은 결국 공산당정부에 의해 국영화되었다.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결국 외국인의 재산을 통째로 헌납 받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그래야만 비로소 출국 비자를 발급해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1951년 7월 25일, 신부, 수녀, 학생, 교수, 상인, 의사 등등 수많은 외국인들이 구속되었다. 1951년 8월 2일, 북경시는 마침내 감옥에 있는 외국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의 추방을 명한다. 1951년 말이면 상해와 북경에서 외국인은 모두 떠나고 말았다. 1953년 2,5000 명의 일본인들과 12,000명 백(白)러시아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그렇게 수많은 외국인들을 중국에서 몰아냈다.

 

감숙성 가톨릭 고아원의 모습, http://www.alamy.com/stock-photo/catholic-missionary-children.html

 

앞서 다뤘던 "회해전역"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던 뉴욕타임스 특파원 세이모어 타핑은 안휘성 봉부의 천주교 회당에 묵으면서 1936년 바티칸에서 파견된 이래 16년 간 중국에서 사역해 온 이태리 출신 주교 시프리아노 카시니(Cipriano Cassini)를 알게 되었다. 이 성당에는 800명 아동이 다니던 소학교와 1천 명의 소년들이 다니던 중학교가 달려 있었다. 이밖에도 주교는 주변 마을에 여섯 개의 학교를 더 개설해서 모두 1만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성당에 부속된 병원에선 12명의 의료진이 150명의 입원환자를 돌보면서도 날마다 800명의 환자를 외진하고 있었다. 성당 옆의 수녀원에선 고아원과 함께 여학생들을 위한 중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다. 수녀들은 버려진 수백 명의 여자아이들을 받아들여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공부시켰다.

 

인민해방군은 1950년 1월부터 노골적으로 이 성당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성당 시설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임의로 사용했음은 물론, 성당 내 모든 활동을 시시콜콜 캐묻고 감시했다. 결국 주교는 중국인 사제를 재워줬다는 이유로 구금하고 나선, 지방 신문에 주교의 자비로 광고를 내서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고 3일 구류만을 살게 한 공산당의 관용을 칭송하라 요구했다. 계속되는 강탈을 겪다가 주교는 결국 앉은 채로 묵주를 돌리며 1951년 6월 13일 임종했다. 공산당은 주교가 아편을 남용해 자살했다고 우겨댔다. 주교가 죽고 나서 공산당은 갖은 폭력과 협박을 다 써가며 성당을 폐쇄했다. 중국인 수녀의 부친을 잡아 총부리를 겨누고서 거짓 자백을 강요하는 야비한 수법도 꺼리지 않았다. 결국 국민당 잔당을 색출했다는 명분으로 공산당은 강제로 성당을 접수하고, 성당을 지키던 마지막 사제를 결국 중국에서 내좇았다. 떠나지 않으면 다섯 명의 중국인을 처벌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출국희망서에 서명을 했더니, 공산당은 그 다섯 명을 곧 감옥에 처넣었다 한다,  

 

왜, 대체 왜 중공지도부는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외국인들을 몰아내려 했을까? 그 수많은 외국인 인력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없었을까? 백년국치를 종식하려는 반제혁명의 당위 때문일까? 반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다음 에피소드가 일말의 힌트를 제공한다.

 

4. 문화침략의 대리인?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은 장강을 건너 남경을 점령한다. 곧이어 군인들은 병상에 홀로 누워 있던 미국대사 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의 침실에 난입한다. 1876년 항주의 개신교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존 스튜어트는 20세기 전반기 중미관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중국어가 모국어였던 스튜어트는 1919년 연경대학의 초대총장이 역임했고, 1946년7월 11일 주중미국대사로 임명되었다.

 

연경대학 총장으로서 그는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중국인 역사학자 임맹희(林孟熹)는 “중국의 정치, 문화, 교육 다 방면에 종횡무진으로 참여하면서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20세기 유일무이한 미국인”이라고 평가한다. 스튜어트는 국민당은 물론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바로 그런 인간적 친분을 믿고 그는 중국공산당과 대화를 통해 중미관계의 미래를 모색하려 했다. 바로 그 때문에 대사관의 모두가 피난을 떠난 후에도 그는 홀로 고집스럽게 남경에 남았다. 한 평생 중국을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었기에 그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1948년 존 스튜어트의 모습, 위키백과
1948년 존 스튜어트의 모습, 위키백과

 

그런 스튜어트에게 대화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49년 8월 18일, 모택동은 “안녕, 스튜어트!”라는 냉소적인 칼럼을 통해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사랑했다는 스튜어트”를 조롱하면서 미국을 향한 독설을 유감없이 내뿜는다. 모택동은 이 글의 주석 1번에서 스튜어트는 언제나 중국에서 미국 문화침략의 충직한 대행인”이었다고 비판한다. 모택동은 스튜어트가 세운 연경대학을 폐쇄한 후, 여러 대학에 찢어서 병합시켜 버렸다. 왜 모택동은 그토록 스튜어트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을까? 그의 미국관에 해답이 있다.

 

그래, 미국엔 과학기술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과학기술은 자본가들이 쥐고 있을 뿐, 인민대중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국내의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외국 인민들을 학살한다. 미국엔 민주주의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와 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미국엔 많은 자본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은 그 많은 돈을 오직 골수까지 썩어버린 장개석 반동도당에게만 주려한다······.

 

우리가 좀 어려움을 겪는다고 무슨 상관이리요.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봉쇄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8년, 10년 봉쇄하라 해라! 그때가 오면 중국의 모든 문제는 이미 다 해결됐으리라. 죽음도 두려워 않는 우리 중국인들이 어려움 앞에서 움츠릴 텐가? 노자가 그랬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으니 왜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하는가?” 미제와 그 충견들인 장개석 반동분자들은 우리를 죽인다고 위협하지만 않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은 실제로 미제의 칼빈소총, 기관총, 박격포, 바주카, 고사포, 탱크, 비행기(폭탄투하)로 수백 만의 중국인민을 학살했다. 이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들은 패배했다. 이제 공격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한다. 그들은 이제 모두 끝날 것이다. 그래, 여전히 우리에겐 문제가 남아 있다. 봉쇄, 실업, 기근, 인플레, 물가앙등 등등의 어려움이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난 3년에 비하면 더 편하게 숨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지난 3년의 고난을 이기며 승리했다. 왜 우리가 오늘날의 곤란을 극복할 수 없겠는가? 왜 우리가 미국 없이 살아갈 수 없겠는가?

 

인민해방군이 장강을 건널 때, 남경의 미국식민정부는 허둥지둥 도망갔지만, 스튜어트 선생은 홀로 앉아서 큰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며 새 간판을 달고 가게를 열어 또 이윤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뭘 보았을까? 인민해방군의 대오가 끝도 없이 행진하고,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일어나 반기는 모습 말고도 그는 다른 것을 또 보았다. 바로 중국의 자유주의자들, 혹은 민주적 개인들이 힘차게 뛰어나와 노동자, 농민,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혁명을 논하는 모습을. 스튜어트는 홀로 차가운 곳에 남겨진 채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에겐 아무 것도 남겨진 일이 없다. 이제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라! (모택동전집, “안녕, 스튜어트!”에서)

 

5. "닫힌 대륙"과  "열린 섬"

 

1948년 이래 중국공산당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그렇게 외국인을 몰아내는 야만적 폭력을 수반했다. 당시 모택동을 움직이는 심리적 동기는 무엇보다 "백년국치"를 극복하려는 성급하고도 과격한 민족자주의 정열이었다. 위의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듯, 모택동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 특히 미국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 잡혀 있었다. 국공내전 당시 미국은 실제로 천문학적 자본을 투입해 장개석 국민당정부를 지원했다. 장개석과 사투를 벌린 모택동의 입장에서 미국을 향한 그의 적개심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평생 중국을 위해 헌신한 스튜어트를 "문화침략의 충실한 대리인"이라 모욕주는 모택동의 심기까지 이해할 순 없다. 

 

중국 근현대사를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로 볼 수만은 없다. 중국은 분명 서구의 과학기술과 정치사상을 흡수하면서 근대문명의 수혜자로 거듭났다. 무술변법(1898)의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 신해혁명의 공화주의(republicanism), 5.4 운동(1919)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서구 전통의 정치사상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면서 "계몽된 근대인"(enlightened moderns)으로 성장했다. 더 말해 무엇하리,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적 기초를 이루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역시 19세기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념이었다. 서양의 근대문명 없인 오늘날 사회주의 중국 또한 없다. 

 

유학시절 나는 콜럼비아 대학의 석학 드베리 (Wm. Theodore de Bary, 1919-2017)교수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다. 드베리 교수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에 가서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던 드베리 교수의 눈동자를 나는 지금도 또렷이 상기할 수 있다.

 

"모택동은 서양문명에 대해선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 밖에 없었는데, 전통의 지혜는 철저히 부정했다. 그런 모택동이 중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폐해가 발생했다. 인문학의 핵심은 리더십이다! 리더십이 한 사회의 운명을 결정한다! 리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큰 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반외세 고립주의 노선으로 중국은 "닫힌 대륙"이 되었다. 반면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바다를 타고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열린 섬"의 역사였다. 거시적 관점에서 "열린 섬"의 역사는 지속적 성장, 진취적 개방, 위대한 성취, 눈부신 번영의 과정이었다. 반면 앞으로 우리가 계속 살펴 볼 "닫힌 대륙"의 역사는 결단코 순탄치 않았다. 이제는 늙어버린 586세대는 젊은 시절 너무나 성급히 "반미친중"의 미망에 빠져들었다. 윗 세대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면, 오늘 날 젊은 세대는 "반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을 꿰뚫어 봐야 하지 않을까.   

 

https://www.quora.com/Which-country-hurt-China-the-most-in-the-century-of-humiliation-1840-1949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Death Sentences In Peking "Plot". The Times (London, England), Saturday, Aug 18, 1951.

Frank Dikötter, The Tragedy of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Bloomsbury Press, 2013). ["3. 외국인을 색출하라"는 이 책 제6장의 내용을 축약하고, 또 다른 사료를 덧붙여 보강했음.]  

Seymour Topping, Journey between Two Chinas (Harper & Row, Publishers, 1972). 

林孟熹, <<司徒雷登與中国政局>> 北京 : 新華出版社, 2001.

<<中國歷史>>, 課程敎材硏究所 編著 (人民敎育出版社 2006)

Selected Works of Mao Tse-tung, “FAREWELL, LEIGHTON STUART! (August 18, 1949)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4/mswv4_67.htm)

http://www.executedtoday.com/2010/08/17/1951-antonio-riva-and-ruichi-yamag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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