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7회. "어느 중공군 이야기"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7회. "어느 중공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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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보다 더 깊이 살펴 보기 위해 이번 주에는 2004년 중국 절강성 금화지방에서 제가 만났던 한 중공군 참전병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7回. "어느 中共軍 이야기
 

2004년 여름, 나는 중국지방사 연구팀에 합류해 중국 절강성 금화(金華)에서 한 달쯤 지방 탐사의 기회를 얻었다. 금화는 남송 (1127-1279) 말엽 이래 성리학을 숭상해 “소추로(小鄒魯)”라 불리는 고장이었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을 도와 명조(1366-1648)의 기초를 닦았던 송렴(宋濂, 1310–1381), 왕위(王禕, 1323-1374), 방효유(方孝孺, 1357-1402) 등의 지식인들 모두 금화 출신이었다. 2004년 당시 인구 400만 정도였던 금화에는 예부터 예닐곱 개의 현(縣)이 속해 있었는데, 현마다 방언이 달라 보통화를 모르는 지방민들과 대화하기 위해선 현지에서 통역을 구해야 할 정도였다.

 

금화의 난계(蘭溪)현에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조상으로 섬기는 제갈씨족(氏族)의 집성(集姓) 마을 제갈촌이 있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무성한 활엽수림에 폭 안긴 안온한 촌락이다. 마을 중앙에 커다란 원형의 저수지를 두고, 팔방으로 균일하게 여덟 갈래 큰 길을 닦아 만든 방사상의 구조였다. 자세히 보니 저수지와 여덟 갈래 길은 곧 태극(太極)과 팔괘(八卦)의 배치임을 알 수 있었다. 저수지 초록빛 수면 위로 촘촘히 들어서 쭉쭉 뻗은 남방 연꽃들의 연보라색 큰 꽃잎이 흐드러졌고, 동네 어귀 나무그늘 아래 모여 앉아 장기를 두는 이 빠진 노인들 주변으로 반(半)벌거숭이 아이들이 빙빙 돌며 공놀이에 빠져 있었다. 역사의 무대 속에 정지된 느낌을 주는 ‘늙은 마을’(古村), 잘 만들어진 사극의 세트장이나 사찰 벽의 불화(佛畵)를 연상시키는······.

 

제갈촌의 풍경
중국 절강성 제갈촌의 풍경

 

비지땀 흘리며 마을 곳곳을 배회하다가 하얀 회벽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에 흥미를 느껴 빼곡히 틈을 벌린 목재 대문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인기척이 없어 돌아설까 하는데 살며시 문이 열리면서 백발이 성성한 작은 키의 노인이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선 노인의 악어가죽 같은 만면엔 나이테처럼 깊은 주름살이 조화롭게 교차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그 얼굴에서 긴 세월 누군가를 기다려 온 사람의 인상을 받았다. 동행했던 난계 출신 인류학자 손(孫) 박사의 통역으로 우리의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손박사가 나를 한국 사람이라 소개하자 노인의 얼굴에선 일순간 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노인은 장난스럽게 눈웃음치며 뜻밖의 두 음절을 내뱉었다.

 

“앉아!”

 

한국어였다! 얼떨결에 낯선 곳에서 듣게 된 외마디 모국어에 놀라 멀뚱히 두 둔을 깜빡이는 이국의 청년에게 노인은 다시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자아아아!”

 

길게 늘어뜨린 뒷소리의 억양이 리얼(real)했다. 흉내 낸 외국어가 아니라 고향 사투리처럼 들렸다.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노인은 내 팔을 잡아끌며 집안으로 안내했다. ‘ㅁ’자 구조의 전통가옥 중간의 빈 공간은 놀랍게도 예배당이었다. 노인은 내 손을 잡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 자랑스럽게 왼쪽 벽에 걸린 액자 두 개를 보여주었다. 액자의 내용을 읽어보니 그곳은 금화 지방정부가 인증한 제갈촌 유일의 합법적 교회였다. 공인된 정통 교회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얘기했다.

 

"이 교회 말고 다른 교회는 전부 미신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인증서를 끝까지 읽자 노인은 내 손을 잡고 십자가 아래 놓인 강대상 쪽으로 걸어갔다. 강대상 옆에는 낡은 풍금이 한 대 놓여 있었다. 노인은 능숙하게 그 풍금을 치면서 한국민요 “도라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내게 노인은 눈빛으로 함께 부르자 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내가 따라 부르자 그는 풍풍 신나게 풍금을 때려댔다.

 

2004년 당시 제갈촌의 옹(翁) 목사의 모습,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지원병으로 참전해서 2년 넘게 개성 부근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2004년 당시 제갈촌의 옹(翁) 목사의 모습,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지원병으로 참전해서 2년 넘게 개성 부근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노인의 이름은 옹지승(翁志升, 웡쭈셩). 2004년 현재 만 78세. 제갈촌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1951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입대해 중공군 지원병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생사를 오가는 수많은 전투에서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하고 1953년 휴전될 때까지 2년 넘는 기간 동안 개성부근에서 주둔했다고 한다. 전후 곧바로 전역했지만, 마오쩌둥의 고향 호남성 상담(湘潭)에 배치되어 군부대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지냈다. 2년 후 금화지방으로 돌아와선, 탄광촌에서 일하며 결혼까지 했지만,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진폐증을 심하게 앓았다. 12년간 탄광노무자로 생활한 후에야 그는 오매불망하던 귀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로 오랜 세월 그는 제갈촌 근처의 고향 땅에서 농민으로 살았다.


 

1984년 그는 부인과 함께 기독교에 입문했다. 두 사람은 절실한 기도를 통해 관절염, 기관지염, 천식, 불면증 등 만성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 해 동안 속성으로 난계현 정식 교회의 후(胡)목사에게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을 전수 받은 후, 그는 부인과 함께 제갈촌 예배당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갈촌의 예배당은 몇 년 후 후목사를 통해 교단의 인증을 받게 되었다.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 스스로 ‘전도사’라 겸칭했지만, 제갈촌 유일의 예배당을 도맡아 운영해 온 담임목사와 다를 바 없었다. 교인들에게 직접 찬송가를 가르치고 성경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해 설교를 하는 등 목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85년부터 제갈촌의 예배당을 맡아 왔으니 무려 20년간 실질적 목사였던 셈이었다. 교인의 수는 대략 서른 명에서 쉰 명 정도를 오간다고 했다. 제갈량을 조상으로 섬기는 제갈 씨족 사이에 섞이지 못한 탓일까. 옹목사를 위시해 제갈촌의 기독교 신도들은 대부분 제갈씨가 아니라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그 정도에서 아쉽게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 할 때, 그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의자에 앉힌 후 낡은 양은 컵을 하나 보여 주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컵에는 또렷하게 여덟 글자 표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抗美援朝 (미제를 물리치고 조선을 돕자!)

保家衛國 (가족을 보호하고 나라를 호위하자!)

 

옹목사가 중공군 시절 직접 사용했던 양은 컵, 옹목사가 직접 컵을 잡고 자신의 성경책 위에 올려 놓은 상태.  

 

 

한국전쟁 당시 인해전술로 밀려 내려와 총알받이로 숨졌던 수많은 중공군들이 주술처럼 외고 외던 바로 그 전쟁의 구호였다. 중국의 노인들이 술에 취하면 기립해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부르던 그 당시의 군가. “압록강 넘어 야심찬 이리떼 미제를 타도하자!”는 섬뜩한 가사가 떠올랐다. 그 시절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바로 그 컵을 내 눈앞에 증거로 내밀면서 옹목사는 통역하는 쑨박사에게 난계어로 전쟁 당시 겪었던 고난을 줄줄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폭격으로 절반의 부대원이 전사했던 장면을 묘사할 땐,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전후 남한에서 태어난 내게 어색한 적의를 표출하거나 항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야기 중간에 이따금 나를 힐끔 보면서 유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지방정부에서 인증한 옹목사의 목사 자격증
지방정부에서 인증한 옹목사의 목사 자격증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난계어로 쑨박사에게 쏟아 붓는 옹목사의 증언이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다. 북경어와는 달리 경음과 탁성이 많이 섞인 난계어는 흡사 일본어처럼 경쾌하게 톡톡 끊어지는 아름다운 소리의 언어였다. 방언에 실린 옹목사의 컬컬한 목소리가 때론 중공군의 군가처럼, 때론 지방의 민요처럼 내 귓전을 때리고 부서졌다.

 

옹목사의 난계어 증언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내 머리엔 실질적인 고민이 하나 떠올랐다. 젊은 시절 한반도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 노인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전할 수 있나. 미국에 살면서 여러 차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흔쾌히 “땡큐! 땡큐!”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목숨 걸고 전쟁을 감당했던 그 역전의 용사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전에도 중공군 지원병 참전용사를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바로 그날 옹목사와의 조우처럼 극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중공군 참전용사에게 한국인으로서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연합군이 지킨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나로선 중공군 지원병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감사하다” 말한다면, 외교적 수사로서도 부적절할 뿐더러 그 또한 쉽게 납득할 수도 없을 터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나? 장엄한 종교음악이 피날레로 치닫듯 그의 증언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 뇌리에 단 한 마디가 경건한 기도문처럼 떠올랐다. 그건 초급 중국어 교본 도입부에 등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의 인사였다.

 

“뚜이부치(对不起)! 뚜이부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억양 강한 그 지방식 보통어로 되받았다.

 

"뿌슈어 뚜이부치. 부 쓰 니더 추어. 떠우 쓰 메이구어더 추어. (미안해하지 마라. 너의 잘못이 아냐.모두 미국 책임이니까)."

 

그 말에 나는 큰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일어나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디 더 속삭였다.

 

"내일이 일요일이니 예배에 와라! 오후 1시니까."

 

다음 날, 단체 일정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지만, 어렵사리 틈을 봐서 다시 그 손박사과 함께 예배당으로 갔다. 벌써 예배를 시작한 교인들은 옹목사의 풍금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회당에 들어서자 옹목사는 급히 찬송가를 끝내고는 나를 앞으로 불러내서 "도라지"를 부르게 했다. 얼떨결에 교인들 앞에선 나는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옹목사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 소개한 후, 교인들에게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인들 틈에 끼어 한 마디도 알 수 없는 옹목사의 난계어 설교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정해진 일정 때문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몸을 낮춰 슬그머니 회당을 빠져 나올 때 옹목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의 눈빛에 중간에 자리를 뜨는 우리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났다.

 

한 시간 쯤 후에 단체 일정이 끝나고 다시 예배당 쪽으로 가고 있는데, 예배 보던 아주머니 교인들이 떼로 몰려 와서 나와 동행했던 손박사에게 옹목사에 대한 쌓인 불만을 죄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설교 때마다 옹목사는 제갈촌 전체가 제갈량을 숭배하는 사교집단으로 모두 지옥에 가서 유황불에 탈 것이라 저주를 한다 했다. 처음엔 덕담과 축복만 하며 마을 사람들 모두와 조화롭게 지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는 미신타파를 외치며 제갈촌 전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단다. 그날 우리가 예배 중간에 슬쩍 빠져 나간 후에는 이내 격분해서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이교도라며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얘기도 했다. 교인들은 비록 타성(他姓)이었지만, 제갈씨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고 제갈촌을 미신의 촌락이라 모독하는 옹목사를 더는 두고만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진작부터 그를 떠나고 싶었지만, 바로 그 곳이 지방 정부의 인증을 받은 공식 기독교회인데다 멀리 다른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 예배당에 출석한다 했다. 교인들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널리 다른 교회에 알려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손박사의 통역으로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뇌리에 떠오른 옹박사의 흐릿한 동공이 내 눈을 향해 광선을 쏘는 듯했다. 혹시나 바로 전날 내 앞에서 전쟁 당시의 아픈 기억을 회상했던 이유는 아닐까. 그날 옹목사가 격분해서 이교도들에 대한 적의를 표출했다는 얘기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그날 옹목사를 다시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며칠 후 함께 찍은 사진을 현상해 그에게 부쳤다. 사진과 동봉한 작은 카드에 나는 이번엔 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정서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谢谢您告诉我您在朝鲜的经验!)"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谢谢您的祝福!)"

 

한국전쟁 당시 중공 "지원병"의 모습, http://deadliestfiction.wikia.com/wiki/Chinese_People%27s_Volunteer_Army
한국전쟁 당시 중공 "지원병"의 모습, http://deadliestfiction.wikia.com/wiki/Chinese_People%27s_Volunteer_Army

 

       

송재윤(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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