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3回. "毛澤東神話批判"

 

1. “신성(神聖모택동

 

오늘날 중국은 모택동의 나라다. 자금성(紫禁城) 천안문 앞엔 1949년 10월 이래 줄곧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옛날 중화문(中華門)이 있던 천안문 광장의 중앙에는 모택동의 시신이 안치된 거대한 모택동기념관(毛澤東紀念館)이 들어서 있다. 중국 전역의 어느 대학을 가도 캠퍼스 중앙에는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전국의 소학교 모든 교실에도 그가 직접 쓴 “好好學習, 天天向上!”(잘 배우고 익혀서 날마다 쭉쭉 자라자!)”라는 문구의 액자가 걸려 있다. 산간벽지 퇴락한 고택(古宅) 회벽(灰壁)에서도 그의 명언이 흔히 보인다. 농민들은 그의 사진 앞에 향을 지피며 구복(求福)의 기도를 올린다. 그는 중국 인민의 눈동자 위에 날마다 강림하는 불멸의 신성(神聖)이다.

 

https://www.quora.com/Why-is-Mao-Zedong-such-a-contentious-figure-40-years-after-his-death

 

1978년 개혁개방 이후 한풀 꺾였던 모택동 신화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다시 강화되는 듯하다. 1990년대 중국의 지폐에는 노동자, 농민, 소수민족이 등장했으며, 100원 지폐엔 모택동을 포함한 네 명의 혁명지도자가 나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공정부는 모든 1원짜리 지폐까지 모두 모택동의 초상으로 도배를 했다. 세월이 갈수록 모택동 정권의 정책실패와 정치범죄는 더 여실히 드러나는데도 중공정부는 모택동 신화를 계속 유지하려고만 든다. 

 

과연 왜 중공정부는 모택동의 권위에 의존해야만 할까? 도대체 어떻게 거대한 대륙의 14억 인구가 일개 인간을 그렇게도 열성으로 떠받들고 섬길 수 있을까? 진정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 때문일까? 구소련의 스탈린식 인격숭배의 변형일까? 중국식 황제지배체제의 유습일까? 공산전체주의 일당독재정권의 사상통제와 세뇌교육 때문일까? 우리는 과연 20세기 중국의 “인격숭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겉으로 모택동에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중국인들은 속으로도 정말 그를 숭배하고 있을까?

 

습근평(시진핑) 정부는 최근 모택동의 망령을 되살려내 새롭게 그의 신화를 윤색하고 있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을 만든 영웅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국부(國父)이다. 그의 권위가 살아 있는 한 중국공산당의 권위는 유지될 수 있다. 반면 모택동의 우상이 파괴되는 순간, 중국공산당 역시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국몽(中國夢)”의 실현을 위해 “중화민족”을 통합하는 상징으로 모택동의 권위를 재활용하려하지만, 중요한 딜렘마를 피할 수 없다.  

 

모택동노선은 현재 중국정부의 기본정책과 충돌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모택동 비판은 곧 중국공산당 비판으로 인식된다. 반면 모택동사상의 부활은 1978년 이래 중국정부의 실용적 개혁개방 노선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신좌파의 극단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중공정부는 모택동을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체제비판세력”이라며 탄압하고, 모택동노선의 회복을 꿈꾸는 신좌파세력은 중공정부의 “정책비판세력”이라 경계한다. 결국 모택동 비판도 문제이지만, 모택동노선으로의 복귀 역시 큰 문제를 야기하고 만다. 모택동사상은 사회 불평등의 근원적 해소를 위한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을 기본노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정부는 모택동 신화를 유지하는 한편, 모택동 사상 자체의 절대화는 용인하지 않는 어중간한 절충노선으로 모택동 신화를 유지하고 있는데·······.

 

겉으론 견고해 보이는 모택동 신화도 다방면에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듯하다. 풍차로 돌격하는 돈키호테처럼 그의 권위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이단아(異端兒)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2015년 모택동의 고향 소산의 풍경, http://www.chinafile.com/viewpoint/mao-man-mao-god
2015년 모택동의 고향 호남성 소산(韶山)의 풍경, http://www.chinafile.com/viewpoint/mao-man-mao-god

 

 

 

2. 모택동의 초상화를 공격하는 사람들!

 

1989년 5월 20일, 계엄령이 발동된 후 군대가 도심으로 몰려오자 천안문 광장에선 운집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호송차량의 진입을 막는다. 중공정부는 발포 명령을 일단 유예한 채 시위대의 동향을 예의주시하지만, 유혈진압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5월 23일 오후 2시, 호남(湖南) 유양(瀏陽)에서 올라온 세 명의 젊은이들이 천안문 통로에 길이 1.2미터 높이 80센티의 종이를 내건다. 종이엔 “오천년 독재 종식!” “개인숭배는 이제 그만!”이란 구호가 붓글씨로 적혀 있다. 구호를 내건 세 명은 천안문 앞으로 달려 나와 페인트를 채운 스무 개의 달걀을 모택동의 초상화를 향해 투척한다. 쉽게 초상화를 훼손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달걀은 초상화에 미치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스무 개를 다 던졌건만 나머지는 과녁을 멀리 빗나가고, 오로지 세 개만 초상화에 맞았다. 그림 속 모택동의 두툼한 아래턱을 명중한 달걀이 깨지면서 순간적으로 페인트가 얼룩을 만들며 찌익 흘러내렸다. 그들의 극적인 국가원수 모독의 시위는 불과 5분 만에 막을 내린다.

 

세 명은 모두 현장에서 시위를 주동하던 북경시 대학생들의 “고교자치연합회”(北高聯)에 의해 즉시 체포된다. 학생대표들은 이들을 면담한 결과 정부의 프락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곧바로 경찰에 넘기기로 한다. 그날 오후 5시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선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천안문 광장의 시위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같은 날 저녁 뉴스에서 광장의 시위대는 모택동의 초상을 훼손한 세 사람의 비행을 규탄한다.

1989년 5월 23일 천안문 광장의 대학생 자치조직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신성모독의 주범들.
1989년 5월 23일 천안문 광장의 대학생 자치단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모택동 초상화 훼손 주범 여지견과 유동악.

 

한판 정치 콩트는 그렇게 막을 내리지만, 교사 출신 여지견(余志堅, 당시 26세)은 종신형을, 버스운전사 노덕성(魯德成, 당시 25세)은 징역 16년을, 언론사 사진기자 유동악(喻東岳, 당시 22세)은 징역 20년을 선고받는다. 이들의 죄명은 반혁명 파괴행위 및 선전고무였다. 각각 20년, 9년, 17년을 복역하고 보석으로 풀려난 세 사람은 모두 미주로 망명한다.

 

2005년 호남성 장사에서 이뤄진 여지견의 인터뷰에 의하면, 세 사람은 밤낮으로 문학을 논하던 지방 문인들이었다. 천안문 시위가 확산되면서 세 명의 문인은 곧바로 상경해 시위대에 섞였지만, 좀처럼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어 상의 끝에 모택동의 초상화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반부패 및 당내개혁을 요구했던 학생들과는 달리 공산당의 전복과 민주정부수립을 꿈꿨던 낭만적 행동가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유를 갈구하는 문인이었다. 여지견은 말한다. “모택동의 유령이 중국을 배회하고 등소평의 철통주먹이 우리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한, 중공이 권력을 유지하는 한, 처음부터 저항의 결과는 학살로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저 작은 에피소드를 썼을 뿐이고.”

 

이후에도 몇 차례 모택동의 초상화는 표적이 된다. 2007년 5월 우루무치의 출신의 35세 실업자가 모택동의 초상화를 향해 화염병을 던진다. 2010년 4월 5일 동북지방 출신 한 사내가, 2014년 3월에는 일군의 시위대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며 모택동의 초상화를 향해 잉크병을 던진다. 신성(神聖)을 모독함으로써 인간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의도일까?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유지견, 캐나다 언론 글로브 앤 메일(Globe and Mail)과의 인터뷰
캐나다 언론 "글로브 앤 메일"(Globe and Mail)과의 모택동 초상화 훼손 범인 노덕성의 인터뷰

 

 

3. “모택동을 인간으로 환원하라!”

 

모택동의 초상을 훼손하는 소수의 반체제 시위자들만이 전부는 아니다. 묵묵히 저술에 몰두하는 일군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날카로운 글쓰기로 모택동 신화를 해체하는 전사들이다. 그 중에서 올해 89세의 고령으로 여전히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는 자유주의 경제학자 모우식(茅于軾, 1929년- ) 선생의 활약이 단연 눈에 띈다.

 

모우식 선생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자유사상가로 꼽힌다. 1978년 이래 선생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시장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중공정부의 사상탄압과 정치억압에 맞서 싸운 “자유주의” 전사이다. 선생은 열린 경제와 투명한 정치를 외치며, 시민사회와 개인주의까지 옹호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생은 모택동 치하 27년의 정책실패와 정치적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모택동이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상했음”을 고발한다. 바로 그런 공로 때문에 2012년 미국 워싱턴 D.C. 소재 카토 연구소(CATO Institute)는 모우식 선생에게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 자유증진상의 수상자로 선정했다.

 

https://www.theepochtimes.com/chinese-economist-awarded-for-ideas-that-whittle-partys-power_1485619.html
https://www.theepochtimes.com/chinese-economist-awarded-for-ideas-that-whittle-partys-power_1485619.html

 

선생의 이력을 살피다 보면 1950년대 중후반 대륙을 휩쓸었던 반우파투쟁(反右派鬪爭, 1957-1959)의 파란만장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는 유명한 “여섯 시간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 시대의 범죄를 낱낱이 고발하고 비판한다. 그는 스탈린 인격숭배의 광기와 어리석음을 비판하면서 레닌주의 정당지배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스탈린 격하운동”(de-Stalinization)은 당시 공산권 전역에 큰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그해 6월 폴란드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10월 말 헝가리에선 거의 3주에 걸쳐 소련 지배에 항거하는 격렬한 민중봉기가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그러나 큰 동요가 일어나진 않았다. 스탈린격하운동에 긴장을 느낀 모택동은 선제적으로 “반우파투쟁”을 통해 최소 50만에 달하는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흔히 “노개”(勞改, 노동개조)라 불리는 강제노동 수용소에 감금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우파 낙인을 받고 노동개조의 강제노동에 동원된 지식인들은 길게는 20년 넘게 수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반우파투쟁의 폐해는 많게는 4천 5백만을 아사시킨 대기근(1958-1962)의 참사로 직결된다. 정부의 실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공포정치의 폐해를 낳았다. 그 폐해는 오늘날 중국의 정치문화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958년 공산당 일당의 명령경제에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우파로 몰린 모우식 선생은 거의 20년의 세월 강제노역과 유배와 기근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문화혁명 당시 선생은 집안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비판투쟁(批判鬪爭)에 끌려 나가 홍위병의 야만적 만행을 감내해야 했다.

 

고난의 체험은 그러나 선생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선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하여 1985년 <<최적분배원칙: 경제학의 수리적 기초>>라는 책을 출판하고, 중국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이 되었고, 1993년 퇴임할 때까지 미국경제 및 중국경제의 연구에 매진했다, 1993년 그는 시장중심 정책개혁을 추진하는 천칙경제연구소(天則經濟硏究所)를 창설했고, 현재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모우식 선생은 중공정부의 역사해석을 비판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1년 4월 20일, 재신(財新, caixin.com)에선 “모택동을 인간으로 환원하라!”는 모선생의 칼럼을 게재한다. 모택동을 인간으로 환원해야만, 그의 오류와 실책이 규명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모택동 집권 시기 희생당한 수천 만 인민을 대변해 모택동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자는 주장이다. 이 칼럼이 발표되자 선생은 곧바로 좌파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5만 명의 신마오주의 좌파세력이 선생을 반역죄로 구속하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물론 선생의 칼럼은 중국내 사이트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신좌파세력은 선생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체제전복 및 명예훼손을 노리는 서구의 노예라며 비난했다. 

 

명쾌한 논리로 신성(神聖) 모택동의 권위를 해체하는 거장(巨匠) 모우식선생의 육성을 듣노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생은 소아적인 권력의지를 가린 이념의 허위를 꿰뚫어보고 당위와 도덕으로 분칠한 추한 권력자의 민낯을 직시한다. 모택동의 초상(肖像)을 향해 달걀을 던지는 대신, 선생은 직설적인 언어로 “모택동을 인간으로 환원하라!” 요구한다.

 

“모택동의 옹호자들은 국가를 우선시한다. 그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기에 모택동은 위대하다고 한다. 우리는 인민을 우선시한다. 모택동은 인민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다. 모택동 집권기에 원자폭탄과 핵잠수함이 개발됐음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텔레비전조차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어 수입해야 했음도 사실이다. 우리는 수천 년 간 국가우선의 교육을 받아왔기에 그런 정신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제 갈수록 모든 면에서 인민우선이 되어 간다. 국가는 오로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2012년 12월 15일, 현재는 폐쇄된 모우식 선생의 블로그에서)

 

“모택동 시대 무수한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당내 최고영도자인 유소기부터 수십만의 우파로 몰린 지식분자들과 소위 “지부반괴우(지주, 부농, 반혁명, 파괴분자, 우파)”로 몰렸던 절대다수 계급의 적인(敵人)들은 무고했다. 인간개조는 모택동 호전사상의 산물이다. “안 싸워도 괜찮아?”는 그의 호전적 기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그는 각급의 간부를 동원해서 계급의 적인(敵人)들을 색출했다. 그는 거짓증거로 좋은 사람들을 누명을 씌우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결국 타인을 숙청한 사람들 역시 타인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국가는 이러한 독재자의 착오사상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했고, 1억 인의 정상적인 생활은 침해당했다. 국내의 투쟁은 전사회 고통의 총량이 극대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모택동은 전문적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독재자인데, 그 자신은 그 와중에 쾌락을 누렸다.” (2015년 5월 28일, 모우선생의 칼럼, “모택동은 1억 인의 정상생활을 파괴하고 숙청을 기쁨으로 삼았다” 중에서, http://www.ftchinese.com/story/001062188?full=y&archive)

 

모우식 선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중국인 대다수가 혐오하는 중일전쟁 시기의 대표적 한간(漢奸) 왕정위(汪精衛, 1883-1944)를 위한 변론까지 자임하고 나섰다. 앞으로 더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겠지만, 국민당 남경정부 초대 총통 왕정위는 1938년 12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대가로 남경에 일본제국의 괴뢰정부를 세워 이른바 “평화운동”을 전개했던 문제의 인물이다.

 

모우식 선생은 “인민의 이익, 국가의 이익, 정치가의 이익”이라는 장문의 시론을 통해 때론 점령지의 적군에게 항복하는 지도자가 국토수호의 명목 아래 인민을 옥쇄시키는 지도자보다 더 윤리적일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인민의 관점에서 본 역적은 국가의 관점에서 본 역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매국하는 역적은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인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일제침략자와 중국인민 사이에 스스로를 던져 완충의 역할을 수행했던 역적도 있을 수 있으리라. 그런 역적이라면 흠잡을 데 없는 진정한 영웅이다. 그런 역적은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인민의 고통을 덜어주려 할 것이다. 역으로 수십 만 인민의 목숨을 저당 잡히고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채로 오로지 황제에만 복무하는 영웅도 있다. 인민의 이익을 감안한다면, 그런 영웅은 본받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수천 년 역사는 새롭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을 구분하는 것는 그만큼 중요하다.” 

 

50만 명의 지식인을 박해한 반우파투쟁의 폐해와 최소 3천만 명의 양민을 아사시킨 대약진 운동의 참상과 100만의 희생자를 낳은 문화혁명의 광기를 모두 고통스럽게 체험한 선생은 인민의 입장에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모택동의 망령이 되살아나 지식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2010년대의 현실에서 선생의 고군분투는 유토피아의 혁명운동이 빚어낸 계급과 민족의 주술을 벗어나 인민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투쟁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쓰신 칼럼 제목의 암시처럼 “모택동이 인간으로 환원”되는 순간, 인민은 해방을 얻으리라. 모택동 신화를 해체하는 선생의 고독한 싸움에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기를·······. 인간 모택동을 그리며 기도하노라.<계속>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사후 3일째 되던 날. http://www.chinafile.com/viewpoint/mao-man-mao-god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사후 3일째 되던 날. http://www.chinafile.com/viewpoint/mao-man-mao-god

 

<참고문헌>

Merle Goldman, Literary Dissent in Communist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여지견의 인터뷰:

https://chinachange.org/2017/06/02/interview-with-yu-zhijian-one-of-the-three-hunan-hooligans-who-defaced-the-portrait-of-mao-zedong-over-tiananmen-square-in-1989/

 

모우식 관련 기사 및 인터뷰:

https://www.theepochtimes.com/chinese-economist-mao-yushi-wins-catos-milton-friedman-award_1486946.html

 

https://www.ft.com/content/321d2330-e053-11e6-9645-c9357a75844a

 

http://www.ftchinese.com/tag/%E8%8C%85%E4%BA%8E%E8%B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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