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3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 (I)”

 

오늘날 중국헌법 전문에는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모든 중국 인민들이 대단합하여 "제국주의, 봉건제도, 관료자본주의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 중국공산당의 자체 선전과는 별개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립되었는가? 어떤 정치적 결단, 군사적 전략을 통해서 그 참혹한 국공내전에서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던 것일까? 앞으로 3회에 걸쳐 중국인들은 흔히 "장춘위곤(長春圍困)"이라 부르는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의 내막을 파헤쳐 본다. 겹겹의 가시철조망으로 만주 제1의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여 15만의 유민(流民), 최소 12만의 양민 아사자를 낳은 인민해방군의 잔혹한 "포위작전"이다. 바로 이 "장춘위곤"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시한폭탄인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에서 "장춘위곤"의 참상을 고발하는 서적은 거의 대부분 출판 및 판매 금지되어 있다. 홍콩, 대만, 일본, 미국 등지에서 출판된 체험담, 연구서 등을 취합해서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에 관해 살펴 보려 한다. 문혁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공산당의 형성과정을 살펴 보아야만 하기에.   

 

1. “건국”과 “해방”의 의미

1949년 1월 31일, 북경의 시민들은 거리에 쏟아져 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씩씩하게 행군하는 인민해방군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했다. 일본군의 침략 이후로만 쳐도 12년의 전쟁 끝에 찾아온 귀한 평화였다! 젊은 여인들은 장갑차의 철판에 분필로 “인민해방 만세!”란 문구를 적고, 포신엔 꽃을 달았다. 거리에선 학생들이 행진하는 군인들의 머리에 잘게 자른 색종이를 꽃잎처럼 뿌리며 해방의 기쁨에 도취해 감격스런 울음을 터뜨렸다.

 

<1949년 1월 31일 북경에 입성하는 인민해방군을 환영하는 사람들>

9개월 후, 1949년 10월 1일 오후 3 천안문 성루(城樓) 오른 모택동(당시 58) 광장에 운집한 30 군중을 향해 호남 억양 섞인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成立)”을 선포했다. 중앙정부의 성립은 건국(建國) 혹은 개국(開國) 의미한다. 오늘날 중국에서 매년 10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기념하는 “국경일(國慶日)”이다. 예컨대, 2018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개국) 69주년이다

대한민국은 1948 8 15 유엔 감시 하의 국민 총선거(5.10)를 통해 성립되었다. 이와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4년에 걸친 내전 끝에 군사작전을 통해 이뤄졌다.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군사작전을 통해 장개석의 “국군(國軍)”을 물리치고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 “중화민국(中華民國)(The Republic of China) 대신해서 “중화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세운 것이다. 인민해방군에 맞서는 반군이나 군벌도 더는 없었기에 국민투표를 거칠 필요조차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건립된 나라이다.

군사적 점령을 통해 건국했다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으로 건립된 주원장(朱元璋) (, 1368-1644)나라나 정복전쟁으로 세운 만주족의 (, 1644-1912)나라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계급투쟁을 통한 “인민해방”을 국가의 최종 목표로 내건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분명 전근대의 왕조와는 근원적으로 달랐다. 그날 천안문 성루에서 모택동이 직접 낭송한 “중앙인민정부 성립공고”의 문단에는 바로 해방의 의미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장개석 국민당 반동정부가 조국을 배신하고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반혁명전쟁을 시작한 이래 전국의 인민들은 수심화열(水深火熱) 상황에 처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인민해방군은 전국 인민의 지원 아래 조국의 영토주권을 지키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위하며, 인민의 고통을 제거하고 인민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떨쳐 일어나 영웅적 작전으로 반동군대를 소멸하고 국민당정부의 반동통치를 전복했습니다. 이제 인민해방전쟁의 작업은 기본적인 승리를 얻어 전국 대다수의 인민은 이미 해방을 얻었습니다.

 

요컨대 모택동 영도 하의 “인민해방군”은 제국주의와 결탁한 장개석 “반동정부”로부터 1) 국가의 영토주권을 지키고 2) 인민의 생명, 재산, 권리를 보위하는 목적으로 중국 전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는 선언이다. 군사적 점령을 중국공산당은 “해방”이라 불렀다. 공산당의 선전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크게 가지 의미에서 “해방”이었다. 첫째, 제국주의 침탈로부터의 “조국해방, 둘째, 장개석 국민당정부로부터의 부르주와 독재 해방, 셋째, 누천 지속된 지배계급 착취로부터의 완전한 “인민해방”이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중국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모택동>  

“만민평등 계급철폐”라는 숭고한 유토피아적 이상을 국가의 기본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은 집권 자체는 “절대적으로 옳다”(absolutely correct)는 “집권(執權)의 정당성”(the legitimacy of gaining power)을 선점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그 자체가 위대한 혁명이라는 논리다. 바로 그런 “집권의 정당성” 위에서 중국공산당은 1949년 9월 27일 중화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인민민주전정”(人民民主專政)과 “민주집중원칙(民主集中原則)”을 국가운영의 기본정신으로 채택한다. 인민민주전정이란 스탈린식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중국적 표현이며, “민주집중의 원칙”이란 결국 공산당 지도부의 전일적(全一的) 통치를 의미한다. 

오늘날 다수의 중국 사람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과정 그 자체가 위대한 해방전쟁이자 혁명투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50-60년대 중공지도부의 정책적 과오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조차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대해선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해방”의 실제 과정은 어떠했을까?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은 어떻게 승리를 쟁취한 것일까?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를 살펴보기에 앞서 1945년부터의 복잡한 역사를 개괄해 보자. 

 

2. 일본의 패망과 국공내전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원폭당한 후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裕仁, 1901-1989)는 연합국 측에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한다. 당시 중국엔 무려 215만의 병력(만주에 90만, 만리장성 이남에 125만)과 175만의 민간인 등 약 400만의 일본인이 머물고 있다. 항복 선언과 더불어 일본인들은 본국으로의 귀환을 서두른다. 일본인 송환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주역 알버트 위더메이어(Albert C. Wedemeyer, 1897-1989) 미육군총장이 관장한다. 미군의 지휘 아래 만주와 북중국의 일본인들은 장성 남쪽의 항구도시에 집결해 배를 타고 황해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고······.  

1945년 8월 21일 일본군 장군소장 이마이 타케오(今井武夫, 1900-1982)는 국민당에게 1백만 일본군의 주둔지가 명시된 전쟁지도를 넘긴다. 같은 해 9월 9일 남경에선 일본의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시(岡村寧次, 1884-1966)가 국민당 장군 하응흠(何應欽, 1890-1987)에게 맥아더 일반명령 1호에 따라 항복 의식을 거행한다 (아래사진). 전국 각지에 산재한 일본군 주둔지에 직접 가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과정은 그러나 용이치 않다. 연합군과의 조약에 따라 일본군은 원칙적으로 국민당군에 항복하지만, 공산당 역시 경쟁적으로 일본의 주둔지로 달려가 항복을 접수한다. 국공(國共) 양측의 피 튀기는 각축전은 특히 만주 점령에서 가장 긴박하게 펼쳐지는데······.  

 
<1945년 9월 9일 남경에서 거행된 항복 의식. 일본의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시(岡村寧次, 1884-1966)와 국민당 장군 하응흠(何應欽, 1890-1987)>

6개월 전, 1945년 2월 4일-11일, 스탈린은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영국 수상을 만나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을 맺는다.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는 대가로 스탈린은 연합국 측에 중국 요녕(遼寧)성의 공업단지 대련(大連)과 여순항(旅順港)을 요구한다. 장개석과의 상의도 없이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요구를 수락하고는 시베리아의 소련 병력에 무려 500대의 M4셔먼 탱크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군사지원을 결정한다. 미국의 군수물자 지원 아래 스탈린은 베를린과 동유럽으로 전선을 넓히면서도 시베리아에 100만 병력을 주둔하게 된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이틀 만에 시베리아 주둔 소련군을 만주로 남하시킨다. 국경을 넘은 소련군은 미국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파죽지세로 만주를 가로지르는 아무르(Amur)강을 건넜다. 중무장한 전위부대는 중국동부철도를 타고 곧바로 하얼빈으로 달려갔다. 뒤따르는 보병부대는 하루 70킬로 속도로 움직여 불과 며칠 안에 소련군은 만주 전 지역에서 주요도시를 점령한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로 투입된 소련 병력은 한반도로 진격하여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1945년 8월 만주에 투입된 소련병력>

 

중경에서 일본패망의 환희에 잠시 젖었던 국민당 총통 장개석(蔣介石, 1887-1975) 곧이어 자신의 처남이자 국민당 정부의 외무부장관 송자문(宋子文, 1874-1971)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송자문은 스탈린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만주의 여순항과 대련을 내주고 대신 신강 지역 점령을 막는 성공적인 협약을 이끌어낸다.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대신 장개석의 국민당을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당시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인 미군과의 군사대결을 꺼렸던 스탈린은 미군의 조속한 철수를 위해 장개석에게 만주 지역의 이양을 약속한다.

만주벌판에 들이닥친 소련군대는 일제 만주국의 산업기지를 조직적으로 약탈한다. 공장을 통째로 분해해서 기차에 실어 소련으로 나르고, 도시를 급습해 전리품을 챙긴다. 특히 요녕(遼寧) 성도(省都) 심양(沈陽)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은 사흘에 걸쳐 무차별 강탈, 파괴, 강간, 살해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문혁춘추” 1회에 소개된 재미작가 하진의 작품에도 1970년대 초까지 당시 소련군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규탄하는 조선족 노인이 등장할 정도다. 급기야 하얼빈의 중국인들은 “붉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까지 내걸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도 격하게 소련에 항의하지만, 소련군은 개의치도 않는다.

곧이어 장개석은 소련군에 짓밟힌 만주의 주요도시에 비행기로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다. 이미 장개석에게 만주의 이양을 약속했던 소련군은 공산당의 잠입을 눈감아 주어 공산당의 팔로군이 먼저 만주를 선점한다. 양측 모두 만주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1931년부터 일제의 만주국이 지배해온 만주(동북지역)에는 대규모 산업시설과 발달된 철도와 규모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극동의 태평양와 닿은 소련 관활 하의 대련과 여순의 부동항도 포함되어 있다.

장개석의 부대는 본격적인 국공내전이 개시되기 전부터 군사작전을 통해 임표(林彪, 1907-1971) 이끄는 중공 팔로군(八路軍)에게서 남만주를 탈환한다(1945.11-1946.10). 1946 무렵이면, 장개석의 국민당 병력은 남만주의 주요도시를 거의 모두 점령해 팔로군을 송화강 이북으로 퇴각시키지만, 팔로군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전열을 정비한 임표는 1946 말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하는데, 1948 3월부터 승기를 잡는다. 우선 임표는 국민당군의 교통로를 차단해서 길림성의 장춘, 요서의 요충지 금주(錦州), 요녕성 중심 심양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고립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1948 10 장춘을 점령한 인민해방군( 당시 개칭) 달이 못된 11 2 요녕성 심양을 점령한다. 장개석은 만주에서 거의 50만의 주력부대를 상실한 , 안에 북경과 천진을 내어주고 속절없이 퇴각하고 만다. 결국 1949 가을 인민해방군에 의한 중국의 “해방”이 눈앞에 보일 , 모택동은 천안문의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한 것.

 
3. 중국공산당의 승리 비결은?
 
1946 6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직전 국민당은 공산당에 비해 최소 3배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연구자의 집계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의 병력은 대략 4 30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미 1,545개의 도시를 포함한 73십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서 대략 33 9백만의 인구를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반면 공산당은 12십만의 병력으로 465 도시를 포함한 2 30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확보하고 대략 1 3 6백만 인구를 통치하는 상황이다.
 
전시상황에서 실시된 인구조사와 군대의 전력(戰力) 관련 보고가 정확할 수는 없다. 다만 국민당은 장강 이남의 곡창지대와 연안의 발달된 도시를 거의 모두 점령하고 있었었던 반면, 공산당은 그저 험준한 섬서(陝西) 북부의 오지에 본부를 두고 북서부의 척박한 농촌 지역을 거점삼아 세를 확장하고 있었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45년 당시 양측의 객관적 군사력과 국제정세의 정황을 따져보면, 국민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 보였다.
 

<Immanuel Hsu, The Rise of Modern China, 621-634>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우위는 그러나 불과 2-3년의 내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역전되고 만다. 프랑스 연구자의 추계(推計) 따르면, 내전 시작 당시 국민당의 주력부대 전력은 공산당의 10배에 달했지만 1948 초여름에 이르면 공산당은 이미 중화기 병력과 포병의 화력에서 국민당을 앞질렀다. 아래 표에 제시된 1945 당시 공산당 주력부대의 수는 꽤나 축소된 것으로 보이지만, 1948년의 상황만큼은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비교로 사료된다.

 
<Lionel Chassin, The Communist Conquest of China, 177>

일본의 패망 이후 전개된 국공내전(1946-1950)에서 과연 공산당은 어떤 군사전략과 대민전략을 통해 훨씬 더 강력했던 국민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 흔히 중국현대사 교과서에선 국민당 정부 패배의 원인으로 다음 예닐곱 이유를 꼽는다.

첫째, 8년간의 항일전쟁에 따른 대규모 전력소모
둘째, 국민당 병력의 전쟁피로증후군과 사기저하
셋째, 국민당 정부의 재정정책의 실패, 극심한 인플레이션
넷째, 국민당 정부의 공포정치 및 잔인한 숙청에 따른 민심이반
다섯째, 미국과의 소통실패로 인한 중재 및 지원 중단
여섯 째, 국민당 정부의 사회·경제적 개혁 실패
일곱 째, 만주 및 북중국 확보에 집중한 장개석의 군사전략적 패착
 

이상의 원인들은 분명 국민당 정부의 패배를 설명하지만, 공산당의 승리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내전발발 당시 열세였던 공산당은 과연 어떤 전략으로 비대한 국민당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나? 공산당의 군사전략 속에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4. 1948, 장춘 홀로코스트

만리장성 이북 길림의 소도시였던 장춘은 19세기 말 만주 지역의 양대(兩大) 철로가 개설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급속하게 성장한다. 이후 만주국의 수도가 되면서 장춘은 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이국풍 건물이 들어선 방사상의 휘황찬란한 도시로 거듭난다. 장개석의 국민당 제1병단은 1946년 5월 23일 시민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장춘을 점령하는데, 그해 겨울 제1병단이 요서(遼西)의 사평으로 옮기면서 장춘에는 약 제7군과 제60군(운남성 출신 부대) 등 대략 10만의 병력만이 남아 황포 군관학교 출신 지략가 임표가 이끄는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대치하게 된다.  

 
"1948년 요심전역(遼沈戰役)에서 국공대치 한 장면"

1947년 5월 팔로군은 첫 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하고, 이어 10월 다시금 공격해 온다. 도시 주변을 장악한 팔로군은 도시로의 곡물을 차단하고, 수력발전시절을 장악해선 전기를 차단한다. 본격적인 포위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장춘에선 전등불빛이 사라지고, 공장의 기계소리가 멎더니, 건물의 벽시계까지 멈춰 선다. 곡물의 유입이 끊기면서 곡가가 앙등하고, 장춘의 시민들은 수수와 콩으로 연명한다. 아직 느슨한 팔로군의 포위망을 뚫고 많은 시민들이 곡물을 밀수하고 물자를 조달하자 팔로군은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도시 진입로에는 검문소를 설치한다. 특히 도시 주변의 농촌 마을은 철저한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수차례 전투에서 국민당군의 거센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임표는 1948년 5월 30일 마침내 20만 병력을 동원한 도시의 완전한 봉쇄를 명령한다. 일제가 “정원도시”라 칭송했던 이국풍의 도시 장춘에는 당시 공산군을 피해 갑작스레 유입됐다 못 빠져나간 피난민까지 합치면 인구 50만의 민간인이 모여 있었고, 10만의 국민당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임표의 포위작전은 바로 그 장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드는 잔혹한 전술이다. 보급을 완전히 차단해 10만의 국민당 병력과 함께 50만 민간인도 함께 말려 죽이는 "홀로코스트" 전술이다. 전국시대 <<손자병법>>의 손무(孫武)가 가장 잔인하고도 소모적인 전술이라 극구 경계했던 포위전(siege warfare)이 시작된 것이다. 

1948년 5월에서 10월까지 5개월간 장춘은 20만의 팔로군에 완벽하게 포위된다. 팔로군은 처음엔 도시를 뺑 둘러 95 킬로미터의 철조망을 치지만, 이내 다시 바싹 조여 65 킬로미터로 포위망을 좁힌다. 도시를 둘러싼 두 겹의 높은 철조망에는 매 50미터마다 보초를 세운다. 밧줄이나 판자를 이용해 철조망 넘기를 시도하거나 밀수를 기도하는 시민들에 대해선 발포명령이 떨어진다. 팔로군에 도시의 공항을 점령당해 공수가 불가능해지자 국민당정부는낙하산을 이용한 공중투하로 간신히 보급을 이어간다.

6월 초 본격적인 포위작전이 시작되면서 생필품이 바닥나자 수만 명이 외부로의 도망을 시도하고 하루 평균 200-300명은 철조망을 빠져나간다. 굶주림을 못이긴 사람들은 팔로군의 보급창을 습격하거나 보초 앞에서 목을 매달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빌기도 한다. 임표는 철조망을 더 촘촘히 감아 도주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더 좁은 간격으로 보초를 세운다. 그렇게 두 달 넘게 포위작전은 물샐 틈 없이 전개된다.

<1948년 장춘 포위작전, 울부짖는 여인>

만주의 한파가 닥치자 사람들은 집채를 떼어내서 불을 때우고, 아스팔트 조각을 석탄 대신 태우고, 땅속의 관을 꺼내 불을 지피기도 한다. 굶주린 사람들은 , , 고양이, , 새를 잡아먹고도 모자라, 인간의 사체를 개에 먹이고는 개를 다시 잡아먹는다. 어린 소녀들은 사발, 빵 한 조각에 팔려간다. 노인, 불구, 고아, 환자는 도시 외곽으로 추방되어 철망과 철망 사이에서 굶주리다 죽어간다.

겹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팔로군 병력과 국민당 병력은 서로 대치한 상황이다. 도시를 두른 철조망 사이 50미터에서 1,000미터까지의 공간은 시체만 쌓여가는 무인지대(無人地帶). 바로 무인지대를 중국어론치아즈(卡子)” 불렀다. 치아즈란 초소 혹은 검문소를 의미하는데, 생존의 한계상황에서 치아즈에 몰려간 사람들은 철망에 갇힌 무참히 죽어간다.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뜯어 먹는 야생동물이 어슬렁거리고, 동물을 노리는 굶주린 인간이 몽둥이를 거머쥔다.

임표의 포위작전은 장장 5개월간 간단없이 지속된다. 15만의 인구가 피난민으로 떠돌다 도시를 탈출했고, 적게는 12, 많게는 30만이 넘는 양민들이 장춘을 떠난 굶어죽었다. 물론 인민해방군의 지도부 역시 대규모 아사자의 속출을 목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계속)

           
<참고문헌>
Harold M. Tanner, Where Chiang Kai-Shek Lost China: The Liao-Shen Campaign, 1948 (Indiana University Press, 2015).
Immanuel Hsü, The Rise of Modern China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mpany, 2013).
Jonathon Fenby, Chiang Kai-shek: China’s Generalissimo and the Nation He Lost Revolution 1945-1957 (Bloomsbury Press, 2013).
Niall Ferguson, The War of the World: Twentieth-Century Conflict and the Descent of the West (The Penguin Press, 2006).
Lionel Chassin, The Communist Conquest of China: A History of the Civil War, 1945-1949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
(중국 및 일본 자료는 다음 편에 제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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