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2회. “변방에 역사서를 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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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1.08 08:18:25
  • 최종수정 2018.03.3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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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동파의 간지(奸智)
 
11세기 후반 (, 960-1279)나라에 파견됐던 고려 사신들은 수도 개봉(開封) 국자감에서 다양한 서적을 마구 모았다. 당시 송나라 정부는 상서성 조령(條令)으로 서적의 국외반출을 엄격히 관리했다. 역대 제왕(帝王) 통치술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부원귀(冊府元龜)>>, 태학(太學)의 칙령(勅令) 세칙(細則), 그리고 역대(歷代) 역사서(歷史書)들은 고려 사신들에겐 금지된 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려의 사신들은 국자감의 관리들과 개인적 친분을 터서 슬그머니 역사서를 사들였다
 
적벽부(赤壁賦) 알려진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본명 蘇軾, 1037-1101) 사실을 알아내곤 격분했다. 그는 모두 다섯 통의 상주문(上奏文) 작성해서 고려 사신에게 절대로 중국의 역사서를 넘겨주지 말라 역설(力說)했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역사서를 읽게 되면 거란으로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있다는 표면적인 이유였다. 과연 군사상의 이유 때문에 역사서의 국외 반출을 금지했을까. 아니, 그보단 변방의 지식인들에게 중화제국의 어두운 역사를, 자신들의 알몸과 민낯을 보이기 싫었음이리라.
 
북경 공묘(孔廟)의 십삼경비림(十三經碑林). 청(淸)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6) 때 12년에 걸쳐 63만 자의 유교경전을 돌에 새겼다
 
역사서와는 달리 <<서경>>, <<시경>>, <<논어>>, <<맹자>> 등 이른바 경서(經書)의 구매는 전혀 금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서는 변방의 사신들에게 적극 권장되었다. 경서에는 먼 옛날 성스러운 임금들의 빛나는 위업과 아름다운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원한 도덕원칙과 이상정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반면 역사서엔 권모, 술수, 모략, 중상, 배신, 찬탈의 어두운 기록이 담겨 있다.
 
소동파는 변방에 그런 적나라한 중화문명의 실체를 보여선 안된다 생각했다. 변방의 지식인들에겐 오로지 중화문명이 빚어낸 드높은 도덕과 아름다운 이념만을 전하려 했던 제국 중심부 지식인의 간지다. 역사적 경험과 시행착오의 기록을 깊이 공부하면 인간은 슬기와 지략을 얻는다. 영악하고 노회해진다. 소동파는 변방의 지식인들이 고루과문하고, 엄숙우직한 백면서생으로 머물길 원했으리라.
 
한(漢, 기원전206-기원후 220) 제국 이후 2천 년 넘는 세월에 걸쳐 중국의 지식인들은 황홀한 “경(經)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국의 경학은 보편이념이 되어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제국의 변방에서 경의 이념에 빠져 이상화된 “중국(中國)”을, 보편질서로서의 “중화(中華)”세계를 흠모했다. 경을 통해서 이념화된 “중화”를 숭배했던 변방의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 중화제국의 역사적 현실엔 눈을 감았다.
 
남송대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 주희(朱熹, 1130-1200)는 어린 학생들에겐 역사서를 읽히지 말라 했다. 역사책 속엔 불완전한 인간의 악행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역사를 읽기 전에 우선 성현(聖賢)의 모범(模範)을 본받아 실천하며 도덕적 의지를 계발하라 했다. 주희의 충실한 제자였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서”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했다. 
 
단적인 사례로 조선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李滉, 1502-1571)은 단 한 권의 역사서도 저술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李珥, 1537-1584)는 소중화(小中華)의 이념 아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강조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남겼을 뿐이다. 퇴계와 율곡은 모두 후대의 역사서를 통해 인간사의 궤적을 직접 경험적으로 탐구하기보단, 유가경전에 제시된 고대 성왕(聖王)의 이념을 존숭했던 "관념의 철인(哲人)"들이었다. 관념의 철인들에게 과연 인간의 현실은 무엇일까?
 
고려 사신에게 역사서를 주지 말라 외쳤던 소동파의 의도대로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사에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중화문명의 경학에 함몰되었음에도 냉철하게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았다. 1천 년 중화문명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문명엔 “중국역사학” 자체가 자리 잡지 못했다. 중국인의 행위를 통해 중국의 현실을 탐구하기 보단, 경전의 세계에 함몰되어 이상화된 중화(中華)의 세계를 존숭(尊崇)했던 것이다. 아뿔싸! 지난 천년의 세월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외면한 채 경전의 “이념”만을 좇고 따랐다. 
 
그런 "관념 철인"의 문화적 훈습 때문일까? 최근 한국의 중국관련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특집기획 방송을 보면 안타깝게도 중국의 현실을 깊이 탐구하기 보단, 중국의 겉모습과 규모에 경의를 표하고 찬사를 쏟아붓는 친중주의 기조가 이어지는 듯하다. 경에 빠져 역사를 외면한 "변방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친중사대"와 "소중화" 의식 때문일까? 그러나 중화중심질서(sino-centric order)는 아편전쟁 이후 무너졌으며, 세계 12대 경제대국 한국은 더는 변방이 아니라 지구 전역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세계적 국가이다.       
 
 
2. 대륙의 그늘에 갇힌 사람들
 
사건#1
 
2017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북경 남쪽 대흥구(大興區)의 한 2층 건물에서 치솟은 불길이 19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북경의 번화한 도심에서 약 18킬로 정도 떨어진 사고현장은 가건물, 아파트, 봉제가게, 의류공장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교외의 빈촌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17만5천명의 인구 중에서 약 15만 명(85.7%)이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 온 "외래(外來)" 노동자들이었다. 2011년에도 화재가 발생했던 장소라 이미 화재위험지구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7만5천 명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보금자리로서 최소 기능은 하고 있었다. 화재가 재발하자 중국정부는 일주일만에 군사작전 치르듯 철거를 결정하곤, 그 지역을 싸그리 갈아엎어 버렸다. 철거 몇 시간 전에 급작스럽게 축출 통보를 받은 주민들도 있었다. 그렇게 17만5천의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둥지를 잃고 말았다. 
 
"알림, 모든 거주자들은, 상부의 통지에 따라 오늘 오후까지 이 숙소에서 나가야 합니다. 거주자는 모두 퇴소수속을 밟기 바랍니다. 2017년 11월 22일" (화재 발생 나흘 후), fttimes.com, 2017/11/25
 
사건 #2
 
2011년 6월 4일부터 천안문 학살 "기억주기(記憶周期)"란 테마로 1년 간에 걸친 행위예술을 이어간 북경의 화가 화용(華湧, 1969?- )은 2012년 6월 4일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의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 코피가 흐르자 손가락으로 선혈을 찍어서 이마에 천안문 학살일을 의미하는 "64"란 숫자를 썼다. 그 동영상이 SNS를 타고 급속히 퍼져나가자 그는 곧 체포되어 노동교양형에 처해졌다.
 
5년이 지난 작년 11월 말, 화용은 막 철거가 끝난 대흥구 화재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셀카봉에 핸드폰을 달고 현장을 직접 걸으면서 순식간에 폐허더미가 된 서홍문진의 거리를 묵묵히 걸어가며 촬영을 했다. 그는 스스럼 없이 피해자들에게 다가가서 인터뷰를 청했고, 피해자들은 일방적인 철거를 감행한 정부에 대한 울분을 거칠게 토로했다. 한 여성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일본군이 점령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겠다!" 화용은 현장에서 제작한 동영상을 SNS를 통해 외부로 알리기 시작했고, 즉시 수배령이 떨어져 도주를 했지만, 천진의 한 은신처에서 결국 구속되었다. 구속 직전 은신처에 들이닥친 공안(公安)이 문을 두드릴 때, 그는 카메라를 향해 마지막 말을 외쳤다. "이제 날 잡으러 왔어! 날 잡으러 왔어!" 마지막 발송된 영상까지 SNS를 타고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지만, 현재는 결국 중국의 인터넷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이다.
 
철거된 현장에서 촬영 중인 행위예술가 화융 (48세)

철거된 현장에서 촬영 중인 행위예술가 화융 (48세)
 
 
사건 #3
 
2016 9, 호주의 북아시아 특파원 매튜 카알니 (Matthew Carney) 중국 중부의 산촌마을에서 부모 없이 혼자 살고 있는 13세의 리이쾨이를 만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다. 리이쾨이는 주중엔 혼자 학교를 가고 주말이면 시간 걸어서 조부모 댁으로 간다. 웃는 얼굴이 귀엽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리이쾨이는 부모님이 보고 싶냐 묻자 금방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따라가면 짐이 되니까"라며 리이쾨이는 말을 잇지 못한다. 리이쾨의의 학교엔 그렇게 혼자 남겨진 아이들이 40프로나 된다. 중국 농촌 전체로 보면, 무려 6 100만에 달하는 숫자다. 70프로의 아이들이 우울증과 공포에 시달리고, 2천만(약 33프로) 정도가 결국엔 범죄에 연루된다고 한다.
 
사건#1에서 언급한 15 외래 노동자 중에도 고향에 자식을 두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중국 특유의 호구(戶口) 제도는 자유로운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외래 노동자가 자식을 데리고 도시로 이주하면 아이는 학교에 수가 없다. 중국 사람임엔 틀림없지만 도시의 거주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구란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개개인의 거소증인데, 크게 보면 도시호구와 농촌호구로 나뉜다. 도농의 격차를 법제화한 점에서 현대판 카스트(caste)란 비판까지 있다. 화재사건 발생 직후 중국정부가 전격적인 철거를 감행할 있었던 법적 근거 역시 호구제도다. 엄격하게 법의 기준을 들이대면 그들은 "불법체류" 위법자들이므로 철거당한 사람들은 당당하게 거주권을 주장할 없기 때문이다.
 
 
사건 #4
 
한 대학에서 민법을 가르치던 양지주(楊支柱)씨는 2010년 계획 없이 생긴 둘째를 낳기로 결심했다. 당시 법에 따라 둘째를 임신하면 정부의 강압에 의해 낙태를 하거나 인민폐 20만원(미화 3만불)의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양심상 "하늘이 준" 자식을 지울 수 없었던 양지주씨는 개인의 출산에 벌금을 물리는 중국정부의 처사가 근원적으로 부당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는 큰 종이에 항의의 문장을 적어 거리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몸 팔아 벌금을 갚으렵니다! 저는 양지주라 하고, 원래 중국의 청년입니다." 그의 행위예술은 당시 중국사회에 작은 소음을 만든 에피소드였다. 결국 그는 대학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벌금을 물고서야 복직할 수 있었지만, 더는 학교에서 그에게 강의를 맡기지 않았다. 
 
양지주씨의 시위를 행위예술이라 설명하는 중국의 한 언론보도
 
1980년대 초 1자녀 정책을 추진한 이래 중국정부는 전체주의적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따라 가임기 여성의 몸속에 강압적으로 “자궁내 피임기구”(IUD) 삽입했다. 2015년 이후 다시 사회공학적 고려에 따라 이제 기구를 빼라고 강요한다. 보통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선 연결된 실을 당겨서 쉽게 자궁내 피임기구를 제거할 있지만, 중국의 경우 기구를 제거하려면 정식으로 산부인과 수술이 요구된다. 기구들은 대부분 변형됐거나 연결된 실이 짧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1자녀 정책을 2자녀 정책으로 바꾸면서 여성들에게 무료 시술을 약속했지만, 뉴욕타임즈와 전화 인터뷰한 여성은 “정부가 면상을 후려치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New York Times, 2017 1 7, "After One-Child Policy, Outrage at Chinas Offer to Remove IUDs.")

정부가 인구정책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신체에 메스질을 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아이를 낳기 전에 정부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 혼외임신이나 미혼임신일 경우 엄격하게 낙태가 강요된다. 모든 가임기 중국여성의 신체는 국가의 통제 대상인 셈이다. 국가권력이 강압적으로 인구를 제한한 결과 호적에서 누락된 “검은 아이들”(黑孩子)이 이미 수천만을 이루지만, 그들은 공민의 기본권을 누리지도 못한다.

 
사건#5
 
18세기 이래 중국 지배 하에 들어온 신강 지역은 몽고, 러시아, 파키스탄, 카자크스탄 등을 포함 모두 8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자 신강 지역의 위그르족들 사이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다시금 격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중국정부의 이주정책으로 2000년 이후 한족의 인구가 40%를 웃돌자 위그르족과 한족 사이의 종족갈등이 일어났는데, 2009년의 위그루 반란에서 무려 200명(대부분 한족)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2010년대 이후 신강의 분리주의 운동은 식칼테러, 폭탄테러, 비행기 탈취 시도, 차량폭주 등등 무장폭동과 테러리즘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신강의 분리주의 운동이 지속되자 최근 중국정부는 위그르족의 신체정보를 강제적으로 채집하기 시작했다. 인권감시단 (Human Rights Watch) 보고에 따르면, 2017 12 현재 중국의 신강 지역에선 12세부터 65 사이 모든 인구의 유전자(DNA) 정보, 홍채인식 (iris scans) 정보 혈액형을 채취하고 있다. 물론 목적은 신강 지방 반체제 인사의 통제를 위함이라는 분석가들의 중론이다. 일본정부에 의한 재일교포의 지문 채쥐 보다도 배나 가혹한 소수인종 감시 차별 사례가 아닐 없지만, 그런 정부에 대한 중국내부의 비판은 거의 전무하다. 
 
<2017년 현재 신강지역의 위그루족, 2017.12.13. btnews.online>
 
 
이 다섯 가지 사건은 모두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중국정부는 호구제를 통해서 지역적 인구비율을 강압적으로 조정하며, 인구조절을 위해 여성의 신체를 감시하고 관리한다.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체제 인사의 감시를 위해 강압적으로 위그르족의 신체정보를 채취한다.
 
생각해 보면, 중국정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국가폭력"은 바로 "사회주의"란 이름의 집체주의(collectivist) 정치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정부는 다수의 공생을 위해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1950년대 이후 중국에서 개인의 권리주장은 퇴폐적인 부르주와 "자유주의"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중국과 북한의 일상어에서 "자유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일어로 사용된다. "개인주의" 역시 사특한 이기심의 추구로 치부된다. 오늘날의 중국은 그렇게 가혹한 개인의 희생을 밟고 굴러가는 육중한 저거너트(Juggernaut)를 연상시킨다.
 
1870년대 인도 벵갈루루(Bangalore) 지방의 우르수르(Ulsoor) 사원에 세워진 "저거너트" 수레의 모습
 
 
 
3. "당신들의 중국"
 
중국의 실제 현실은 이리도 가혹한데, 한국에 불어닥친 "친중주의"는 과연 무슨 바람일까? 한국의 지식인들은 흔히 미국 사회의 어둠엔 쌍라이트를 켜고 현미경을 들이댄다. 미국의 잘못에 대해선 면도날 같은 예리함으로 비판의 메스질을 한다. 반면 중국사회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뜬금없이 ""(cool)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는 주말 황금시간대 방송에 석달 넘게 출연해 중국의 공산당 일당독재의 "합리성"을 칭송하며 중국의 체제선전까지 하는 유명인도 있다.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선 왜 이런 "이중잣대"가 생겨난 것일까?
 
자유의 소중함을 망각한 까닭은 아닐까. 인류사에서 자유주의(liberalism)는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반독재 정신의 발현이다.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다수결에 의한 다수지배(majoritarian rule)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대한민국의 근본가치이다. 민주주의는 그 근본가치를 채택하는 합법적 절차를 의미한다. 양자의 결합을 통해서만 대한민국의 헌법은 인류의 보편가치와 절차적 합리성을 갖출 수 있다. 99프로의 국민이 원해도 1프로의 소수집단을 제거하거나 추방할 수 없는 제도,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바로 그 제도를 헌법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혹은 헌법적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 한다.
 
1919년 5.4운동 당시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자유주의"(liberalism)의 기치를 들고 신중국 건설을 외쳤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집권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부르조와지의 타락한 가치관이자 서구제국주의자들의 중국파괴 음모라 비판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포기한 결과, 중국인 개개인은 강력한 국가권력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위에서 살펴 본 다섯 가지 사건은 모두 "자유"가 사라진 "중국식 인민민주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현실에서 인민민주주의란 실제로 "인민독재" 혹은 "무산계급 독재"의 동의어다.
 
소동파는 고려사신에게 역사서를 주지 말라 했다. 소동파의 의도대로 변방의 지식인들은 지독한 경의 세계에 빠져 “소중화”를 부르짖었다. 역사서를 읽지 않는 관념철학자들처럼 대한민국 “친중파”들은 중국의 현실에는 눈을 감고 섣불리 중국을 찬양하는 오류를 범한다. 또 다시 중국이란 이념에 빠져 중국의 역사현실에 눈감는 어리석음은 아닐까. 중국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반미친중" 이중잣대를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의 관점에서 중국의 실상을, 역사적 현실을, 적나라한 민낯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냉철한 중국비판이 필요할 때다. 홍, 대만, 한국, 일본, 나아가 구미의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오늘의 중국을 비판할 때다.  중국의 현대사는 화려하지도 않고, 숭고하지도 않다. 중국과의 공존을 위해 더더욱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깊이깊이 탐구해야 한다. 지난 70년의 세월 중국 사람들이 직접 겪었던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되짚을 때다.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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