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0. “中央書記處秘密

 

1. “먼저 쓰라고 해놓고선······.

 

중국의 백화제방운동(1957)과 반우파(反右派)운동(1957-1958)을 생각하면 뇌리에 겹쳐지는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1985년 서울 서북지역 한 중학교 교실에서 일어났던 일.

 

30대 중반의 한 미술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빈 종이에 이 선생님에 대한 불만과 건의사항을 자유롭게 써라!” 뜻밖의 요구에 어리둥절해진 학생들을 향해 교사가 거듭 말했다. “뭐라고 써도 좋으니 깨알같이 너희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다 써라! 너희들을 비판으로 나 자신을 채찍질해서 더욱 좋은 교사로 거듭나려 한다. 지금부터 20분 후에 반장은 다 걷어서 교무실로 가져와라!”

 

교사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 왁자지껄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한 한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진짜로 쓰면 나중에 혼나는 거 아니냐?” 다른 학생이 대답했다. “혼나긴 왜 혼 나냐? 쓰라고 했으니까 그냥 다 써.” 교실은 “진짜로 썼다간 매 맞는다”는 쪽과 “쓰라니까 쓰자”는 쪽으로 딱 양분되었다. 그때 반장이 일어나서 말했다. “시간이 10분밖에 안 남았네.” 그 한 마디에 학생들은 “에라, 모르겠다! 쓰라니까 쓰고 보자”는 쪽으로 확 기울어졌다.

 

학생들은 서로 큰 소리로 떠들면서 교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왜 실기실습은 안하느냐? 왜 만날 미술과 상관없는 다른 얘기만 하느냐? 왜 자꾸 툭툭 때리고 치느냐? 왜 매번 자습만 하느냐? 왜 실기점수를 그렇게 짜게 주느냐? 왜 그렇게 소리를 치냐? 왜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느냐? 등등. 학생들은 교사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깨알 같은 글씨로 빈 종이를 채워나갔다.

 

20분이 다 되자 반장은 종이를 다 걷어서 교무실로 달려갔고, 교사는 일단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한 장씩 넘겨가며 읽기 시작했는데······. 5분이 못 돼 격노한 교사는 교실로 곧장 달려가선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이런 되바라진 녀석들, 용서할 수 없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장자리 책상들을 중앙으로 밀라 하고는 교실 둘레를 뱅뱅 돌며 “토끼뜀”을 뛰게 했다. 다리가 아파서 픽픽 쓰러지면서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먼저 쓰라고 해놓고선······.”

 

"백화제방 백가쟁명"http://www.aboluowang.com/2017/0606/940867.html
"백화제방 백가쟁명"http://www.aboluowang.com/2017/0606/940867.html

 

 

2. 집단지도체제의 중핵(中核)

 

잠시 되짚어 보자. 1956년 2월부터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깃발을 들고서 모택동은 1년 넘게 중국인민들을 향해 외쳤다. “주관주의, 관료주의, 분파주의를 극복하자! 정부를 비판하고 당 내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라! 헌법에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모택동은 슬슬 대중의 분노를 자극해서 그들 마음속의 빗장을 풀었다. “쓰라니까 쓰자”는 학생들처럼 중국의 지식인들을 “자유롭게 말하라!”는 최고지도자의 당부를 따라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에 백화제방의 불길은 1957년 4월 말부터 6월초까지 다섯 주에 걸쳐 세차게 타올랐다. 비당원 관료집단, 문예계 인사들, 과학자, 언론인, 대학교수, 교사, 기술자, 대학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하며 정부비판의 언설을 이어갔다. 그들은 공개 토론장에서 정부를 성토하거나 신문잡지에 격문을 게재하거나 건물 벽에 대자보를 써 붙이며 정부의 권위주의와 당내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성마른 지식인들이 비판을 쏟아내자 격분한 공산당 지도부의 간부들은 땀 쥔 손으로 탄압의 곤봉을 만지작거렸다. 당황한 모택동은 중앙서기처 총서기 등소평(鄧小平, 1904-1997)에 대책 마련을 지시하는데······. 치밀한 계획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두 사람은 전술적 인내를 발휘한다.

 

집단지도체제라 불리는 중국특유의 정치제도는 정치국상무위원회(政治局常務委員會, politburo standing committee, 이하 상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56년 9월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초로 6인 지배체제의 상위가 확립되었다. 오늘날도 상위(현재 7인 지배구조)는 중공중앙의 최고 정책결정 기구로 기능한다. 상위가 신설되면서 기존의 중앙서기처(中央書記處, 이하 서기처)는 실무 담당의 기구로 재편되었다. 서기처는 중앙정부의 정책결정에 필요한 주요정보의 수집, 특수 활동의 기획, 관리 및 처리, 또 비밀정찰의 활동까지 겸했다. 그 점에서 일면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와도 유사해 보이는데, 1967년 문혁의 광기가 절정에 달할 때 서기처는 폐지되었다.

 

1959년 4월 초 모택동은 “중앙상위는 7인, 서기처는 12인, 이 19인에 영도력이 집중된다”고 말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중앙상위의 총서기인 자신이 대원수로서 정사(正師)가 되며, 서기처의 총서기 등소평은 부사령관으로 부사(副師)가 된다고 말한다. 중국의 군사조직은 그렇게 정사와 부사가 쌍(雙)을 이루고 있다. 정부(正副)의 관계로 결합된 모택동과 등소평의 관계가 당시 중국집단지도체제의 중핵(中核)이었다. 모택도의 지도 아래서 상위 6인의 일인(一人)이면서 동시에 서기처의 총서기직을 맡았던 등소평의 파워는 실로 막강했다.

 

1959년 모택동과 등소평
1959년 모택동과 등소평

 

 

3. 등소평의 反우파투쟁

 

등소평은 중국식 개혁개방의 입안자이다. 덕분에 중국은 1978년 이래 30년 이상 연평균 10프로에 달하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대학살의 최종책임자로서 오점을 남겼음에도 오늘날 그는 모택동 시대를 종식하고 중국의 “제2 혁명”을 성공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문혁 당시 등소평은 두 번이나 권력에서 밀려나 강서성의 오지에서 사상개조를 강요당했다. 그런 드라마틱한 정치적 등락과 1978년 이후 개혁개방의 광휘(光輝) 때문에 1950년대 등소평의 활동은 흔히 간과되곤 한다. 예컨대 928쪽에 달하는 하버드 대학 명예교수 에즈라 보겔(Ezra Vogel)의 <<등소평과 중국의 변화(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2013)는 반우파투쟁의 활동에 대해선 한 마디 언급조차 없다.

 

1950년대 등소평은 자타공인 모택동의 오른팔이자 심복(心腹)이자 부사(副師)였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치밀함과 추진력을 믿었다. 모택동은 서기처의 등소평에 반우파투쟁의 전권(專權)을 부여했다. 모는 큰 그림을 그렸고, 등은 구체적 사건들을 기획하고 지휘했다. 모는 반우파투쟁의 기획자였고, 등은 총감독이었다.

 

등소평은 중앙지도부의 정책결정을 하위부서에 전달하고 지방정부의 상황을 최고지도부에 보고했다. 전화망을 활용해 전국단위의 중앙집권적 통신체계를 구축한 후, 성(省) 정부 서기들에게 구체적 지시를 내리고 지방 상황을 보고받았다. 서기처 없는 반우파투쟁은 있을 수 없었다.

 

1957년 5월 14일 서기처는 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비판세력에 대응하는 구체적 지침서를 작성한다. 지침서는 비당원 중에서 우파(右派)들을 잘 관찰해 색출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틀 후, 서기처는 주요 언론매체들에 우파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독설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게재하라는 명령한다. 같은 날, 공산당 중앙정부는 당 간부들에게 우파들이 맘 놓고 더 비판의 축제를 이어갈 수 있도록 몇 주간 가만히 내버려 두란 지령이다. 효과적 제초를 위해선 잡초가 땅을 뚫고 나와 잘 자라도록 내버려 둬야 하듯.

 

반우파투쟁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 등소평은 전국 성(省) 단위 공산당위원회에 “우파” 비판세력의 언설을 수집하고 분류하라 명한다. 그는 당내 학술요원들을 바주카포대라 불렀다. 등의 지시 아래 바주카포대는 우파들의 날선 비판을 논박하는 당의 논리를 계발하고 있었다. 결전의 순간이 오면 일시에 반박문을 출판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6월 8일, 드디어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었다. 인민일보의 사설 “무엇을 위함인가?”가 그 출발의 신호탄이었다. 중공중앙은 우파세력 타격의 지침을 하달했다. 중공지도부와 노동자계급을 파괴하려는 우파집단의 “사악한 야심”을 파괴하기 위한 대대적 투쟁을 촉구했다. 등소평은 중앙서기처의 요원들을 성(省) 단위 조직까지 파견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전(全)지역에서 반우파투쟁의 불씨를 당기기 위함이었다.

 

6월 12일 등소평의 지령에 이런 말이 보인다. “큰 물고기는 나중에 나온다!” 또 이런 말도 있다. “투쟁이 심화되면 더 불온한 생각들이 표출된다!” 6월 14일 광동성에 하달된 그의 명령엔 이런 말도 나온다. “긴 낚싯대를 드리워서 큰 물고기를 잡아라!” 정부가 탄압의 칼날을 보이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입을 닫고 숨을 것이 뻔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등소평은 모든 우파들이 죄다 커밍아웃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라는 은밀한 지시을 내렸다. 잔챙이에 집착하지 말고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다 거물급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라는 요구였다.

 

반우파투쟁
반우파투쟁

 

4. “우파”사냥의 전술

 

등소평은 집요하게 투쟁의 수위를 높여갔다. 중앙고급당교(中央高級黨校)의 사례는 특히 등소평의 정치적 냉혹성을 잘 보여준다. 당교는 당원과 당원간부를 훈련시키고 길러내는 중공중앙의 학교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연구, 교육, 보급하는 이념기관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중앙고급당교는 극심한 반우파투쟁에 휩싸였다.

 

1957년 7월 22일, 중앙고급당교의 교장과 교감은 교내 반우파투쟁의 과정을 통해 우파 두 명과 그릇된 우경사상에 물든 두 명을 가려냈다고 보고했다. 저조한 결과에 수긍 못한 등소평은 더 많은 우파들을 당장 색출하라 다그친다. 한 달 쯤 지난 8월 19일 교장과 교감이 아홉 명의 우파를 찾아냈는데도 등소평은 더 심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그 학교의 소로(蕭魯)는 우파가 아니라고? 그런 자가 우파가 아니라면, 전국에 우파가 어디 있나?” 소로는 당교 입학 전 전국총노동조합 및 선원조합(全國總工會海員工會)의 국제부장이었던 인물이다. 등소평은 바로 그 인물을 지목해 우파란 선언한 것이다. 등소평의 권한대항이자 북경시장 팽진(彭眞, 1902-1997)은 당서기들을 향해 오히려 “당신들이 중도우파가 아닌가?”라 반문했다. 큰 위협을 느낀 당서기들은 곧바로 당교로 돌아가서 더욱 열광적으로 반우투쟁의 기치를 흔들어댔다.

 

1957년 9월 6일 당교에선 “소로 비판대회”가 열렸다. 수많은 군중에 운집해서 공개적으로 소로를 비판하고 모욕 주는 잔인한 반우파 집회였다. 1957년 9월 20일 중앙고급당교의 기관지 <<실사구시實事求是>>은 이 대회서 소로를 비판한 혜석례(惠錫禮)의 발언이 게재됐다. 그 발언에 따르면, 소로는 “몰락한 지주와 반동 군관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반혁명 분자로 분류되어 노동개조의 처벌을 받고 있었다. 비록 소로는 거의 20년 전 입당했지만, 제대로 공산주의자로 거듭나지 못한 채 부르주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20년 간 당원임을 감안한 당내 온정주의 때문에 그는 교묘하게 우파의 낙인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놀랍게도 그의 인격적 결함과 불순한 마음을 문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로는 당의 간부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교만하고 거만했다. 자신의 총명과 능력을 과신해서 명예로운 지위를 탐하고 [간부들의] 직급별 대우를 과도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는 스스로 입당한지 얼마 못돼 비교적 중책을 맡았지만, 현재 선원노조의 국제부장직을 맡은 것이 대재소용(大材小用, 큰 인재가 썩음)이라 생각한다.”

 

고급당교의 반우파투쟁은 석 달 간 지속되었다. 12월 초 67명의 “우파” 학생들의 명단이 서기처에 보고된다. 중앙서기처가 정부 기관에 암약하는 우파세력의 규모를 암시하고, 당간부가 눈치껏 알아서 상부의 기준을 초과달성하는 단적인 사례이다.

 

과연 당시 중공정부가 제시한 우파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6월 중순 반우파투쟁이 개시된 이후 넉 달 동안 중공정부는 명확한 우파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10월 15일에야 당중앙은 중앙서기처를 통해 우파의 기준을 밝히지만, 여전히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1957년 6월 19일 인민일보는 모택동의 연설문 “인민내부모순의 처리에 대해여”을 게재한다. 이 연설문에는 여섯 가지 반혁명행위에 대한 일반 규정이 제시되어 있다. 10월 15일 중앙서기처가 발표한 우파색출의 기준은 그보다 더욱 구체적이다.

 

예컨대 “공산당 지도부의 경제 또는 문화 정책에 대한 반대, 공산당과 정부조직에 대한 악의적 비판 혹은 비방, 노동자, 농민, 혁명 활동가들에 대한 모욕, 공산당의혁명적 활동에 대한 모독 등등이다. 이런 기준으로 우파사냥을 할 경우 무고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기 딱 좋다. 그렇듯 1950년대 현실에서 우파는 한 인격을 단죄하는 모호하고도 잔인한 개념이었다.

 

서기처는 정부 각 단위에서 우파의 할당량을 제시한 이른바 “우파지시(右派指示)를 내려 보냈다. 1957년 6월 초 이미 모택동은 참가자 중 1프로가 우파라고 단언했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10프로가 우파로 낙인찍히는 사태도 발생했다. 최고지도자의 기대수준에 부합하려는 공산당 관료집단의 노력 때문이었다. 서기처는 정부 각 단위에 압력을 가해서 모주석의 기대치를 초과 달성케 했다.

 

당조직과 정부부서는 우파 명단을 짜서 서기처에 올렸고, 서기처는 요식적 검토 후에 최종승인을 내렸다. 오직 우파의 숫자가 기대치를 밑돌 때만 더 많은 우파를 색출하라 명령했을 뿐이었다. 등소평은 개인적으로 반우투쟁의 기본원칙과 방법을 정했다. 그는 우파들을 오지로 유배시켜 중노동에 시달리게 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반우파집회의 풍경

 

 

5. 운동의 후일담(後日譚)

 

반우파투쟁으로 백화제방의 열기가 싸늘히 식고나자 흥미를 잃은 모택동은 경제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서기처는 그러나 우파색출을 지속했다. 1957년 가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반우파투쟁의 불길은 1958년 초에는 오히려 더 거세게 타올랐다. 1958년 2월 초중고 교사들 10만 명이 우파의 낙인을 받았다. 1958년 전반기 내내 우파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급기야 50만을 넘어섰다. 반우파투쟁은 1958년 5월 20일 막을 내렸다.

 

모택동은 “6억 인구를 일깨우기 위해 30만의 우파를 갖는다면, 그 역시 좋은 일”이라는 감상을 피력했다. 1958년 7월 16일 등소평은 “반우투쟁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서 이제 좌파와 중도파가 늘어나고 있다”며 서기처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며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은 반우파투쟁의 광기를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연구자는 단언한다. “반우파투쟁의 피해자들은 99.99프로 누명을 썼다”고.

등소평 집권 이후 문화대혁명의 오류와 피해에 관해선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는 이른바 “평반(平反)”의 의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반우파투쟁의 피해에 대해선 제대로된 진상조사도 국가차원의 피해자 배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유는 자명했다. 바로 등소평이 반우파투쟁의 주동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등소평과 더불어 서기처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 역시 개혁개방 시기 정부의 중책에 올랐다.

 

돌이켜 보면 묘한 아이러니다. 많게는 4천 5백 만을 아사시킨 대약진운동(大躍進, 1958-1962) 역시 서기처의 작품이었다. 1957-58년 당시 국무원(國務院) 주도의 경제개혁이 큰 성과를 못 보이자 모택동은 서기처의 등소평에게 “대약진”의 설계도를 그리게 했다. 반우파투쟁 당시 등소평의 기민한 대처와 실행력에 감탄했기 때문에 모택동은 더더욱 등소평의 서기처를 활용하게 된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유소기와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간 등소평은 과감한 경제개혁을 주도한다. 1962년 7월 그는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정신사를 지배하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바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다. 그는 유소기와 함께 과감한 실용주의의 개혁을 추진하지만, 4년에 걸친 그들의 노력은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 직후 산산이 바스러져 버린다. 유소기는 3년 후 옥중에서 병사한다. 등소평은 문혁 기간 두 번이나 강서성의 농촌에서 재교육을 강요당했다.

 

 

"타도 유소기! 타도 등소평!"
모택동사상과 위대한 홍기를 높이 들고 유와 등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는 대회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鐘延麟, <<文革前的邓小平:毛泽东的“副帅”(1956-1966)>>, 中文大學出版社, 2013.

鐘延麟, 鄧小平在1957年中共整風, 「反右派」中之角色, 中國大陸硏究 第50卷 第4期, 民國 96年 12月.

毛泽东, “关于正确处理人民内部矛盾的问题(讲话稿)”(一九五七年二月二十七日)

https://www.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570227AA.htm

杜光, “中央高级党校反右派内幕,” <<炎黃春秋>> 2005.9

Yen-lin Chung, “The Witch-Hunting Vanguard: The Central Secretariat's Roles and Activities in the Anti-Rightist Campaign,” The China Quarterly, No. 206 (JUNE 2011), pp. 39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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