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4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II)

 

1. 혁명의 성전(聖戰), 최후의 전술 

1948 5 23일에서 10 19일까지 5개월 지속된 장춘포위전에서 스러져간 난민은 최소 12만에서 최대 60만까지 헤아린다. 현재 대만과 홍콩에서 주목 받고 있는 대륙의 비판적 지식인 두빈(杜斌, 1972- ) <<장춘아표전(長春餓殍戰)>>(2017 ) 따르면 1948 현장에서 37만이 아사했다. 희생자의 정확한 숫자는 영원히 밝힐지 모르지만, 최근까지도 장춘의 공사현장에선 대량의 유골이 발굴되고 있다. 대체 , 무엇 때문에 이런 참사가 빚어졌을까

 

요하(遼河)를 건너는 팔로군의 모습, 1948년 5월 장춘 포위전 직전

1947년 말 영하 35도의 혹한과 설빙을 헤치고 송화강을 건넌 40만 병력의 인민해방군은 12월까지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포위하고 주요 철도 및 적의 보급로를 끊었다. 계속 포위망을 좁혀간 중공 팔로군은 1948 5 23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10만의 국민당 병력 모두 장춘 성내(城內) 몰아넣었다. 지원병력을 저지하고 보급을 차단해 장춘의 국민당 병력을 완벽하게 고립시키려는 전술이었다.

문제는 장춘의 시민들과 타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었다. 포위전을 시작하면, 50 무고한 양민(良民) 죽음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동서양 막론하고 자고로 포위전(siege warfare) 가장 잔인한 살상전쟁이다. 중공 지도부에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촘촘한 이중 가시철조망 장벽으로 50만의 도시를 봉쇄하진 못했으리라.

중공 지도부의 입장에선, 내전에서의 승리만이 이른바 "반제·반봉건 혁명"의 유일의 방법이었다. 패배는 혁명의 실패를 의미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해방의 성전(聖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인민"의 희생을 마다치 않았다. 혁명의 이상이 숭고할수록 수단의 잔악성은 쉽게 용인되므로······모택동 어록엔 이런 말이 있다.  “혁명은 만찬도, 글쓰기도, 그림그리기도, 수놓기도 아니다. 혁명이란 봉기이다. 계급이 다른 계급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는 폭력 행위다!

20 간 야전에서 게릴라 부대를 지휘해 팔로군 사령관 임표(林彪, 1907-1971)는 야심차고 노회한 마흔 살의 무장(武將)이었다. 임표는 이후 문화혁명 (1966-76) 당시 모택동  우상화를 주도한 국가권력 제 2인자의 지위에 오른다. 그에 대한 모택동의 "신뢰"는 바로 이 만주전장에서 처음 듯하다. 1971년 9월 13일 임표는 역모죄에 몰려 소련으로 도주하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그 배후가 모택동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문혁 당시 포스터 속의 모택동과 임표

만주에 투입된 국민당군이 전열을 갖추면서 광활한 동북(東北) 전장에서는 이미 2년에 걸쳐 대규모 전면전이 진행 중이었다. 임표는 길림성 요충지 사평(四平)에서 국민당군과 공수(攻守) 주고받은 끝에 대패하여 4-5만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다(사평공수전, 1946. 3.15-1948. 3.13). 군사천재 혹은 상승장군(常勝將軍)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임표였기에 더더욱 씻을 없는 모욕감에 휩싸였다.

하얼빈을 포기하고 전력회복을 위해 중장기적 유격전과 기동전을 고려할 만큼 난감한 상황이었다. 수세에 몰린 임표는 처음 위곤(圍困) 묘책을 떠올린 순간 전율했으리라. 20 병력을 단번에 동원해 심양과 장춘 사이 국민당군의 보급로를 끊고 장춘의 10 적병을 포위해 고립시킬 수만 있다면, 의외의 큰 승리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장개석은 이미 50만의 최정예 부대를 투입해 만주의 획득에 승부수를 상태였다. 객관적 전세(戰勢) 보건대, 장춘만 삼키면 인민해방군이 곧바로 심양의 20 국민당군과 정면으로 맞붙을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장성(長城) 이남의 북중국 농촌지역은 1 (1947 ) 인민해방군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농촌을 빼앗긴 장개석은 개의 보급로를 통해 만주, 산서, 내몽고 등지에 주둔한 국민당 병력에 겨우 물자지원을 이어가고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농민들을 조직해서 게릴라 습격을 일삼았다. 장개석이 만주에 집착할수록 국민당의 전력자원은 소진되고 있었다. 북중국보다는 남쪽의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미군의 조언을 그는 듣지 않았다. 공산당 입장에선 만주만 장악하면, 내전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화북, 산시, 내몽고, 산동까지 이미 인민해방군이 거의 장악했으므로. 장개석이 결코 만주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연안의 항일군정대삭 시절 모택동과 임표

물론 장춘포위전은 중공중앙주석 모택동의 명시적인 승인 아래 실시되었다. 장춘 포위작전이 시작되고 보름 지난 1948 6 7 중공중앙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모택동은 임표에게 전문(電文) 보낸다. “지상에서 적의 식량을 근원까지 반드시 끊어야 한다. 점만 확실히 하면, 완전한 승리다. 모택동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장춘 봉쇄작전은 철저하게 진행된 것이다.

 

2. 인민해방군에 갇혀버린 인민들

팔로군이 장춘의 교외를 점령하고 바싹 성내를 조여오던 1947 10월부터 이미 장춘의 시민들은 단전, 단수 물자부족으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1948 5 23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위곤전쟁”(長春圍困戰爭) 마디의 원칙으로 정리된다. “식량은 들어가고, 사람은 나온다(糧不入, 人不出).

달을 넘겨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몰려갔다. 달이 식량이 고갈되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먹을 것을 찾아 거리로 몰려 나와 헤매던 사람들은 체력의 사점(死點) 끝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도심 대로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인육(人肉) 사고 팔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던 사람들은 결국 꾸역꾸역 철조망을 뚫고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초소에 총기를 거치한 팔로군 병사들은 철조망 앞까지 몰려나온 인민들을 죽게 내버려 둬야 했다.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흔히 국민당군대가 장춘의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국민당군은 출성(出城)하는 난민(難民) 붙잡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막아야 판이었다. 반면 팔로군의 입장에선, 난민들을 무차별 수용할 경우 봉쇄의 압박이 느슨해질까 두려워 적어도 8월까진 철통처럼 난민의 유입을 막았다.   

난민들은 국민당 철조망을 넘어 와선 팔로군 초병들에게 문을 열어 달라며 울부짖었다. 개의 가시철조망 사이에 끼인 진공지대(眞空地帶) ‘치아즈’(卡子) 굶주린 사람들이 겹겹으로 들어섰다. 생존의 마지막 순간에 몰린 사람들의 무법지대였다. 이미 수만의 시신이 쌓여 가고 있었다. 뼈만 남은 부모가 철망 밖의 초병 앞에 어린 자식을 놓고 도망가고, 부랑민은 난민의 품속에서 톨의 수수까지 빼앗고, 수많은 사람들이 온종일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호주에서 활약하는 상해 출신 반체제 중국화가 파주초(巴丢草, Badiucao)의 작품, "굶주려 죽은 이들이 온 들판에 (餓殍遍野)." 모택동, 시진핑 등을 조롱하며 중국의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만화 및 판화 작품으로 유명하다.  1948년 장춘의 "치아즈" 난민을 추모하는 이 작품 속엔 현재 중국정부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국군(國軍) 공군(共軍) 양측 모두 정기적으로 사복 정찰병을 투입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형언불가의 극심한 굶주림과 죽음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공산당 간부들은 위기의식에 봉착했다. 성난 인민은 마귀 들린 격한 분노에 치를 떨며 공산당을 저주했다. 인민의 고통을 직시하던 인민해방군들의 자부심은 형편없이 훼손되고 사기는 급락했다. 이때 팔로군이 난민을 모두 받았다면 살릴 있었다. 임표는 그러나 단호하게 문을 막았다.

봉쇄가 보름 진행된 1948 9 9 임표는 모택동에게 올린 “장춘포위전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의 주요 대책은 통행의 금지입니다. 1 상에 50미터 간격으로 초병을 세우고, 철사망과 도랑을 철두철미 봉합해서 틈을 완전히 없애는 것입니다. 난민을 절대 못나오게 하고, 빠져 나온 난민은 막아서 돌려보내지만······. 적과 아군의 중간지대에 [난민이] 군집하게 되면,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팔로군 병사들의 가슴도 찢어졌다. 결국 일부 난민들에게 문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피난민들을 밧줄로 묶고는, 빈사상태의 인민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발포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요행히 남겨진 병사들의 서신을 읽어 보면, 직접 참담한 죄악상을 목격한 국공 양측 병사들은 모두 오슬오슬 공포에 떨며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공산당 지도부 역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없었다

결국 공산당은 전술을 약간 수정해서 제한적으로 난민을 받아주기로 한다. 난민을 일시에 많이 수용하면 봉쇄의 강도가 느슨해질 우려가 있었다. 현장의 지도부는 결국 난민에 선별적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작전을 지도하던 동북야전군 정치위원 나영환(羅榮桓, 1902-1963) 기록에 따르면, 8월에만 2 정도의 난민이 해방지역으로 넘어왔지만, 비좁은 “진공지대”엔 다시금 수만 명의 난민이 들어찼다. 결국 나영환은 난민 제한의 원칙을 제시한다. 1. 아사직전 사람들만 제한적으로, 2. 특정 장소에서만 선별적으로, 3. 정찰대를 들여보내 난민의 실태를 파악한 , 4. 학생, 기술자를 우선적으로 수용하라는 명령이었다.

남경의 미국대사관에 보낸 심양 미영사관 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팔로군 초병들은 난민들에게 탈출 관세(tariff) 부가했다. (Nanking, 23 September, 1948. Department of State Decimal, Box 7275). 보통 소총 혹은 권총 자루에 난민 다섯 명을 받아줬고, 쌍안경 혹은 100발의 탄환에 난민 명을 받아줬다. 성내의 국민당군을 탈영시키거나 군수물자의 탈취를 유도하는 전술이었다

포위전의 막바지에 이르면 국민당 병력 내부의 분열 때문에 운남성 출신들로 구성된 60군은 무기를 들고 인민해방군에 투항한다. 팔로군의 전술에 제대로 먹힌 셈이다. 군사전략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에 이어가고, 우선 기막힌 생존자의 증언에 기울여 보자.

 

3. 생존자 엔도 호마레(遠藤, 1941- ) 증언

길림성 장춘시 조양구(朝陽區) 홍기가(紅旗街) 1948 포위작전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이다.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이었을 홍희가(洪熙街) 불렸는데, 1948 인민해방군이 점령한 직후 안민가(安民街) 개칭되었다가 1960 이후부턴 줄곧 홍기가라 불려왔다. 장춘 입성 직후 중공 지도부는 홍희가”를 구태여안민가”라 바꿔 불렀을까? 혹시 수많은 아귀(餓鬼)들의 원혼(冤魂) 달래려는 의도였을까? 최근 거리엔 상가건물이 들어섰는데, 시세가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한다. 70 수많은 사람들이 숨진 곳이라 사람들이 지금도 꺼리는 까닭이다

바로 장춘의 홍희가의 무인지대(無人地帶) 치아즈에서 7 9개월의 나이로 요행히 목숨을 건진 일본인 엔도 호마레 선생은 츠쿠바 대학 명예교수이자 현재 동경대학 국제관계 센터의 소장이다. 최근까지도 중국정치에 관한 왕성한 저술을 이어가고 있는 엔도씨는 1984 장춘포위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논픽션 <<치아즈: 출구 없는 , 1948 만주의 밤과 이슬>>(卡子 : 出口なき 大地 :1948 満州 ) 발표했다. 2012년에는 증보판<<치아즈: 중국건국의 잔화(卡子: 国建国殘火)>> 다시 발표했다. 중국인들에게 1948 장춘의 참상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엔도 선생은 1990년대 초  번이나 중국 출판사들을 접촉했지만, 공산당정부의 검열 때문에 결국 대륙에선 중국어판은 출판할 없었다. 대신 대만에서 중국어판이 나왔고, 2016 영어번역 <<Japanese Girl at the Siege of Changchun>>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엔도 호마레의 <<치아즈>>, 중어어판과 영어판

엔도 선생의 부친은 만주국 장춘에서 기프톨(Giftol)이란 획기적인 약물중독 치료제 출시했던 제약기술자였다. 1939년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상업판매된 이후 기프톨은 동남아로 급속하게 팔려나갔다. 전성기엔 하루 평균 2백 만 정을 생산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일본 패망 이후 미군 감사 하의 "1백만 송환" 작전으로 모두 귀국한 일본인들과는 달리 제약기술자란 이유 때문에 엔도 선생의 부친은 장춘에 억류된 상태로 국공내전을 맞아야 했다. 1947 10월부터 엔도 선생의 가족은 모두 단전단수와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부친의 공장엔 기프톨 재고가 쌓여 있었다. 부친은 기프톨 외에도 고량주에 삼나무 껍집을 담궈 만든 사케풍의 술을 만들어 팔며 부지런히 식구들을 먹일 곡물을 계속 조달하지만, 결국 도시 전체의 식량이 바닥을 치면서 식구들은 혹독한 굶주림을 겪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와중에 7남매 막내아들을 출산한다. 갓난아이는 못가 죽고, 명의 아우가 목숨을 잃는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살아 있는 다섯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하게 버티고······. 장춘에 함께 있던 다섯 가구의 일본인 23명은 추위에 맞서 방에 모여 몸을 부비며 견디지만, 아이가 목숨을 잃고 곡물이 바닥나자 리더였던 엔도 선생의 부친은 탈출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장춘에 억류됐던 다섯 가구의 일본인들은 모두 마지막 안간힘을 내어 죽음의 "치아즈"를 향해 걸어간다

어린 호마레는 깊고 그윽한 눈망울로 잔혹한 가시철조망에 갇혀 분투하다 숨죽이며 스러져가는 사람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촉수가 마비되어 당시엔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고통은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30년이 넘도록 가슴을 찔렀다. 무엇보다 어린 호마레는 “치아즈”의 현장을 생생히 기억하는 역사의 증인이 된다. 진공지대, 무인지대, 무법지대, 죽음의 땅이라 불리던 바로 그 "치아즈"!  개의 가시철조망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한 굶주려 죽는 수많은 난민들. 엔도 선생은 진정 수많은 원혼들의 대곡자(代哭者) 자처했으리라

 

1948년 당시 엔도 호마레의 모습. 어린 호마레는 바로 이 옷을 입고 치아즈로 들어갔다. 

 

영양실조와 수면부족으로 어린 호마레의 다리엔 부종이 생기고 두피엔 고름이 흘렀다. 간지러움을 이기고 머리를 긁으면 머리털이 고름과 함께 손톱 끝에 끼어 떨어졌다. 면역력이 고갈되어 어린 몸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행여나 아빠를 놓칠까 힘을 다해 있는 힘껏 발길을 옮겼다. 마디 불평도 없이 버티던 어린 호마레는 어둠이 깔리자 비로소 꾹꾹 참았던 소변을 보게 되는데,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며 볼일을 마치자 바닥에서 불쑥 손이 올라왔다. 겁이 나서 달리는데 바닥 가득히 죽은 사람들이었다. 달빛 아래 켜켜이 쌓여 단말마 비명도  내지르는 사람들 위의 사람들 위의 사람들 위의 사람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역사의 실상(實狀) 바로 어린 소녀의 눈동자에 맺혀 볼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눈물방울에 있거늘.

엔도 호마레 동경대 교수의 중년 모습

하필 엔도 선생은 2012 증보판을 내면서 책의 부제를중국건국의 잔화(殘火)” 붙인 걸까. 2012년 중국 중앙방송에서 건국 63주년 기념행사를 보던 엔도 선생은 장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며 울분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었다 한다. 카메라 앞에서 행복하다고 구김살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엔도 선생은 스스로 불행하다 느꼈다. 그 불행의 근원엔 장춘의 어두운 기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건국의 잔화"이란 부제를 떠올렸으리라. 엔도 선생은 그러나 피해자 의식에 빠져 파멸하지 않고, 칼보다 강한 펜촉을 "건국의 아버지" 모택동의 심장에 정조준했다.      

2015 엔도 선생은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沢東 : 日本軍共謀した)>>란 제목의 역작을 발표했다.  선생의 세밀한 논증에 따르면, 중일전쟁 시기 모택동은 일본 외무성 지부에 반한민(潘漢民, 1906-1977) 등의 중공 스파이를 심어서 장개석 및 국민당 관련 고급 정보를 비싼 가격에 일제에게 넘기고 거액의 뒷돈을 챙겼으며, 일본과의 밀약을 체결해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다. 한 논평에 따르면,  책은중국연구의 1인자가 철저히 조사한 자료로 들려주는 중국공산당의 불편한 진실”이다

천하의 모택동이 항일전쟁 시기 “일제와 공모를 했다니?" 엔도 선생의 논증은 그야말로 폭군의 목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없다. 과연 모택동이 상상이나 있었을까장춘에서 아사한 수십 난민들 틈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가녀린 소녀가 70년이 지난 지금 동경대학 국제관계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자신 단죄하리란 사실을!

1990년대 초 당시 치아즈가 있던 장춘 홍기가에서 엔도 선생이 발견한 우물

1990년대 들어서서 엔도 선생은 40 넘게 영혼을 괴롭히던 악몽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엔도 선생는 바로 홍희가를 답사(踏査)하다가 우물 하나와 마주쳤다. 1948 치아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연명케 했던 바로 우물이었다. 어쩌면 그 우물 덕분에 어린 호마레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모택동 신화”를 해체(deconstruct)하는 최고의 권위자 "엔도 센세이"로 거듭났는지도 모른다. (계속)


<참고문헌>

張正隆, <<雪白血紅>>,香港天地圖書出版社, 2002. 

杜斌,, <<长春餓殍戰: 中國國共內戰最慘烈的圍困>>,白象文化, 2017. 

遠藤譽, <<卡子 : 出口なき 大地: 1948 満州 の 夜 と 霧>>, 東京: 読売新聞出版, 1984.

遠藤譽, <<毛沢東―日本軍と共謀した男>>, 東京: 新潮社, , 2016.

遠藤譽,<<卡子(チャーズ): 中国建国の残火>>, 東京 : 朝日新聞出版, 2012.

Homare Endo, Japanese Girl at the Siege of Changchun: How I Survived China’s Wartime Atrocity, Translated by Michael Brase, (Stone Bridge Pres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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