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8회. “百花齊放, 右派사냥”

 

1. 못 다 핀 꽃송이들

 

1957년 4월 말부터 6월초까지 중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운동”이 일어났다. 백화제방이란,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모두 활짝 피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의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짝을 이루는 성어(成語)이다.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1894-1971)가 탈(脫)스탈린 운동을 전개한다. 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소련군은 탱크를 몰고 시위를 진압한다. 그런 국제정세를 묵묵히 지켜보던 모택동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비당원 관료집단을 향해 정부의 오류와 당내의 모순을 맘껏 비판하라 요구한다. 그는 사상문화계에서의 “백화제방”과 과학 분야에서의 “백가쟁명”을 부르짖는다. 덕분에 느닷없이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상의 자유와 사유의 다양성이 만개하는 듯했는데······.

 

백화제방의 단꿈은 그러나, 열흘도 못돼 시들고 마는 검붉은 꽃잎들처럼, 처참하게 부서졌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불과 5주 만에 거센 정부의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짧은 자유의 시간 동안 불만을 토로하고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곧 이어 전개된 “반우파투쟁(1957-1959)”에서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이 이끄는 중앙서기처(中央書記處)의 음흉한 기획에 따라 긴급 체포되었다. 전국적으로 최소 50만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 “괜찮아, 뭐든지 하고픈 말을 하라” 독촉하던 바로 그 정부가 “하고픈 말을 한” 지식인들을 모두 잡아넣다니? 너무나 표리부동해 못 믿을 만큼 황당무계하지만, 돌이켜보면 1940년대 정풍운동 때부터 중국공산당은 매번 똑같은 방법으로 지식분자를 숙청했다. 당의 발전을 위해 비판을 요구하고는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을 근거로 가혹한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는 그 치졸하고도 비겁한 폭력일 뿐이다!

 

바로 그런 국가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모택동은 “양모(陽謀)”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다. 음모(陰謀)가 나쁜 목적으로 몰래 꾸민 흉악한 계략이라면, 양모란 좋은 목적으로 공공연히 꾸민 공공선의 책략이란 의미이다. 바로 그 양모의 결과 1957년 이후 중국의 인민들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말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바싹 엎드려 숨죽이고 살아남는 침묵의 처세술을 익히거나 바람의 방향을 미리 감지해 재빨리 온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독심술(讀心術)을 터득했다. 더는 아무도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당의 지도부를 비판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국사회는 지적 암흑기를 거쳐야만 했다. 비판세력의 침묵과 순응세력의 가식(假飾)은 대약진운동(1958-1962)의 광기를 낳았다. 그 광기 속에서 최대 4천 5백 만의 아사자가 속출했다. 모택동의 양모(陽謀)는 인민을 굶겨 죽인 식인(食人)의 음모일 뿐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왜 그토록 무력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나? 그 과정을 되짚어 보자.

 

반체제 예술가 파주초(巴丢草 Badiucao)의 판화작품. 사상의 다양성을 탄압하는 모택동을 습근평(시진핑)에 빗댄 재치가 단연 돋보인다. https://twitter.com/badiucao
반체제 예술가 파주초(巴丢草 Badiucao)의 판화작품.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표어 아래 모택동을 습근평(시진핑)에 빗댄 재치가 단연 돋보인다.
https://twitter.com/badiucao

 

2. 인텔리들의 생존전략

 

22년 간 모택동의 주치의로 지냈던 이지수(李志綏, 1919-1997)는 1949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의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중공의 승세가 굳어질 무렵 그는 귀국을 결정했고, 그해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모택동이 건국을 성립을 선포하던 바로 그 순간엔 광장에 운집한 군중 속에 섞여서 열렬히 박수를 쳤다. 이지수처럼 외국에 살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이 서둘러 조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뉴욕에서 <<사세동당(四世同堂, The Yellow Storm, 1951)>>등의 작품을 번역·발표해 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노사(老舍, 1899-1966) 역시 1949년 12월 귀성길에 올랐다. 이처럼 외국을 떠돌던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공산당 정부의 신중국(新中國) 건설에 큰 희망을 품고 귀국했다. 대륙에 살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은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가는 대신 공산당 정부에 자발적으로 협조했다.

 

그렇게 새 나라에 몰려든 중국의 인텔리들은 개국 직후 극심한 사상개조의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공인(工人), 농민(農民) 등의 무산계급계층과는 달리 인텔리들은 생각을 업으로 삼고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인텔리들은 지주집안의 출신들로 1930-40년대 교육계, 법조계, 의료계, 관계 등에서 국민당 정부에 직접 고용되거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중국의 인텔리들은 중공정부의 출범 당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외유학을 통해 서구의 교육을 직접 받았거나 중국내에서 서양인에 의해 교육을 받은 경우엔 더더욱 특별한 감시를 받았다. 공산정권 아래서 인텔리는 숙명적으로 봉건유습에 찌든 반동분자의 낙인을 받거나 반민족 콤프라도(comprador)로 분류되거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결국 중국의 인텔리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공인받아야만 했다. 

 

1950년에서 1951년에 걸쳐 중국공산당은 수만 명의 인텔리들에게 6-8개월의 사상개조 교육과정을 이수하라 강요했다. 당성이 투철한 공산당 간부가 직접 인텔리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의 사상을 강의하는 과정이었다. 인텔리들은 작은 그룹에 배속되어 “비판과 자아비판”의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가야 했다. 자아비판 세션에서 개개인은 자기 자신의 정치적·사상적 과오뿐만 아니라 부모 및 형제의 오류까지 낱낱이 다 까발리고 비판해야만 했다. 격리되어 죄의식 속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던 인텔리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낱낱이 실토하고 정부의 감시 아래서 처절한 반성의 자서전을 지어내야 했다. 자서전의 마지막엔 어김없이 봉건적 잔재와 부르주아 폐습을 말끔히 씻고 거듭날 수 있도록 인도해 준 중국공산당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만 했다.

 

미술가, 음악가, 작가, 연극인, 영화인, 교수, 교사, 의사, 과학자, 기술자, 언론인, 법조인, 관료, 하급관리, 출판업자, 대학원생, 대학생까지 지식이나 재능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철저한 사상통제에 시달렸다. 그렇게 “사상개조”의 험로를 통과한 인텔리들은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기계의 부속처럼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지만,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보균자와도 같았다. 병균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공산당은 그들의 사상을 정기적으로 소독(消毒)했다. 그런 소독에 만족할 수 없었던 모택동은 보균자 모두를 격리 수감하는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하다 생각했다.

 

 

3. 백화제방의 배경

 

1956년 2월 25일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는 당의 비밀회의에서 “인격숭배와 그 결과”라는 문건을 들고 와선 6시간에 걸쳐 스탈린 시대의 정치범죄와 정책오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대원수 스탈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판은 공산권 전역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우선 1956년 6월 폴란드에선 일군의 시위대가 소련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 이들은 폴란드 공산당 군대에 의해 신속히 진압되었지만, 시위대의 지지를 받던 블라디스로 고물카(Wladyslaw Gomulka, 1905-1982)는 곧 석방된 후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해 10월 22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선 수천 명의 학생들이 헝가리의 독립과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기의한다. 이틀 후엔 소련군 탱크가 시위대에 발포하지만, 시위가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고······. 소련군은 잠시 충돌을 피해 물러나지만 곧 회군의 명령을 받고 돌아와선 시위대와 격돌한다. 2,500명의 시위대와 700명의 소련군이 사망하고, 20만의 헝가리 국민들이 피난을 떠난 후에야 헝가리 사태는 소강상태에 이르게 된다.

 

1956년 헝가리 시위https://libcom.org/library/hungary-56-andy-anderson
1956년 헝가리 시위https://libcom.org/library/hungary-56-andy-anderson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봉기는 공산권 전역을 뒤흔드는 큰 파장을 불러왔다. 멀리서 그 사태를 관망하던 중국인들에게도 적잖은 심리적 영향을 끼쳤다고 사료된다. 1960년대 중국의 학자들은 그 당시 모택동이 직접 헝가리 소요사태를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권력기반이 약한 흐루쇼프를 설득해서 소련군의 헝가리 진압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한 헝가리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헝가리 혁명의 무력진압에 끼친 모택동의 영향은 과장된 반면, 중국의 국내정치에 끼친 헝가리 혁명의 영향을 오히려 축소되었다.

 

모택동은 당시 소련식 경제개발 모델의 제1차 5개년 계획(1953-57)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산업(수공업 포함) 분야에선 원래 계획의 121프로, 제조업 분야에선 141프로, 기계생산에서 178프로, 화학공업 분야에선 178프로를, 석탄생산은 115프로, 철강은 130프로 등등, 대부분 분야에서 목표치를 웃도는 초과실적을 달성한 상태였다. 사회주의 경제의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과정은 그러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많은 농민들은 곡물을 헐값에 정부에 넘기고는 생존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했다.  

 

1956년 광서사건이 대표적이다. 그해 광서성의 농촌에선 과도한 곡물징수와 지방관료의 거짓보고 때문에 1,500명의 농부들이 굶어죽고, 12,000명이 집을 떠나 유랑 걸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국내적 문제들이 헝가리 소요와 맞물리면서 1956년 가을과 겨울 중국에서도 정부시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시위와 태업을 이어갔다. 동유럽 식의 사회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모택동은 다시금 정풍(整風)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한다. 1940년대 연안시절부터 당내개혁을 위해 그는 철저한 비판에 의한 시스템 개혁을 시도했었다. 모택동은 이번엔 비당원과 지식분자들에게 비판의 권리를 제공하려 했다. 그들의 비판을 수용해서 정부 각 부문과 당 조직 내부의 부패와 불합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중공 지도부에선 저항이 있었지만, 그는 강하게 정풍운동을 밀어붙였다.

 

1956년 2월 모택동은 과학정책의 기본원칙으로 “백가쟁명”을 채택하고, 4월 25일엔 다시금 사상문화 방면의 “백화제방”을 부르짖는다. 다음 달 모택동은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표출하고 직설적인 정부 비판을 요구하는 “백가쟁명”의 기본정신을 재천명한다. 이어서 중공 선전부장 육정일(陸定一, 1909-1996)이 “백화제방”의 기본정신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지식인의 참여를 독촉했다. 요컨대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은 정풍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권리를 보장한 후, 그들의 솔직한 문제제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갸륵한” 뜻이었다.

 

지식인들과 비당원 관료들은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1956년 초부터 모택동은 정풍의 바람을 일으켰지만, 1957년 4월 말에 가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다. 1950년대 초반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이른바 “숙반(淑反)운동”의 과정에서 최소 100만, 최대 2백40만이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살기(殺氣)를 감지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살얼음 걷듯 조심스럽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15-16회에 살펴본 바대로 1955년 “호풍집단”이 숙청된 후였기에 더더욱 중국의 인텔리들은 몸을 낮추고 입을 닫았다. 그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야만 했다.  

 

4. 곧고도 어리석은 영혼들

 

중화인민공화국은 분명 공산당 일당독재의 국가이다. 모든 공민의 정치활동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서 이뤄진다. 중국엔 그러나 공산당 이외에도 1920-30년대 창당된 다수의 참정당(參政黨)들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청년당(1923년 창당), 중국치공당(致公黨, 1925년 창당), 중국농공민주당 (1928년 창당), 중국민주사회당 (1946년 창당) 등등. 이들 상이한 조직들은 흔히 민주당파(民主黨派)라 통칭되는데, 민주당파는 모두 중국공산당 영도 하에서 다당합작(多黨合作)과 정치협상(政治協商)에 참여한다. 적어도 형식상 중국은 다당제를 표방하는데, 그 모든 정당이 실은 중국공산당의 하위조직이기에 중국은 여전히 일당독재 국가이다. 모택동은 바로 그 비당원 민주당파에 백화제방의 기회를 제공했다.

 

계속되는 정부의 요구가 이어지자 결국 인텔리들은 입을 열고야 말았다. 교통부장 장백균(章伯鈞, 1895-1965)이 선두에 나섰다. 당시 중국민주동맹의 부주석이며 농공민주당의 주석이었던 그는 국가행정기구와 공산당 조직의 구분을 요구한다. 공산당 조직이 정부의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비당원 관료들의 권한이 침해당한다는 논리였다. 양식(糧食)부장 장내기(章乃器, 1897-1977)는 공산당원의 위선과 분파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공산당원이 권력을 독점하고서 비당원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국방위원회부주석 용운(龍雲, 1884-1962)도 내전 당시 소련군대의 약탈행위를 비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치른 희생의 댓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당원 각료들의 정부 비판이 쏟아지자 많은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문예지 편집장은 여전히 존재하는 홍수, 가뭄, 기근, 실업, 병충해, 관료독재의 폐해를 고발하면서 “인민의 고통을 직시해야 하라!” 부르짖었다. 한 작가는 모택동 문예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일양적인 이론의 강요는 예술적 퇴보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한 신문사 편집장은 “최근 수년간 당과 인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바로 모든 세계가 당에 귀속된다는 사고방식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국가를 이끄는 당과 국가를 소유하는 당은 다르다”며 중국공산당의 권력독점과 책임회피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건국 초기 자본주의 상공인을 겨냥한 오반(五反)운동으로 큰 피해을 잆었던 한 공장장도 입을 열었다. 무조건 소련의 기술을 답습하라 요구하는 당 간부를 비판하면서 그는 “20년간 전기기술에 종사해왔는데, 소련 방식 다 좋은 건 절대 아니”라 선언했다. 문외한이 완장을 차고 전문가를 박해하는 모순에 대한 과감한 비판이었다. 한 대학교수는 공산당원들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개똥보다 하찮게 여기지 말라” 절규했다. 한 대학생도 입을 열었다. “참된 사회주의는 진실로 민주적이지만, 우리의 사회주의는 민주적이지 않다. 나는 이 사회를 봉건적 기초에 세워진 사회주의라 부른다. 우리는 결코 공산당이 인민에 베푼 자그마한 보상에 만족할 수는 없다.”

 

1957년 반우파투쟁의 한 장면
1957년 반우파투쟁의 한 장면

 

5. 모택동의 양모(陽謀)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57년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불과 5주에 걸쳐 진행된 백화제방의 정풍운동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처음 2주 반 동안, 모택동은 허심탄회하게 비당원 각료들의 비판을 경청하려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장백균, 장내기, 용운이 통렬한 비판을 쏟아내자 모택동은 내심 분노에 휩싸였다. 북경에선 학생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비당원 각료들의 발언에 자극받은 지식분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사태를 목도하면서 모택동은 사회 곳곳에 반혁명 세력이 잠복하고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1957년 오월 중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비판세력의 숙청을 위해 함정을 파기 시작한다. 공산당 지도부에선 당장 백가쟁명을 중단하고 비판세력을 숙청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모택동은 당장 반격하는 대신 더 시간을 갖고 대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불만에 가득 찬 인텔리들과 비당원 관료집단을 향해 당과 정부를 더 혹독하게 비판하라고 격려한다. 모택동의 고무를 받고 더욱 들뜬 지식인들은 비판의 수위를 점점 더 높여간다. 모택동은 사악한 의도를 숨긴 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촘촘한 그물 속으로 물고기를 몰아가는 어부처럼 지식분자들을 유인한다.

 

1957년 7월 1일 백화제방 운동이 막을 내리고 곧바로 본격적인 우파사냥이 개시된 직후, 모택동은 <<인민일보>>에 자신이 손수 작성한 사설(社說) “문회보의 자산계급 편중은 비판되어야”를 게재한다. 이 사설에서 모택동은 5주 넘게 지속된 백화제방 기간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정 기간 동안은 올바른 생각은 언급조차 않았고, 틀린 생각을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잘못인가? 5월 8일에서 6월 7일까지 본보(本報)를 포함한 모든 당보(黨報)는 중공 중앙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 목적은 모든 잡귀와 잡배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날뛰도록 하고, 독초를 크게 키우려는 것이었다. 세상엔 원래 이런 무리들이 존재함을 인민들이 직접 보고 겁먹게 함으로써 그런 추악한 무리들을 손쉽게 섬멸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공산당은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이러한 계급투쟁은 회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혹자는 이를 음모라 하지만, 우리는 양모(陽謀)라 한다. 왜냐면 미리 '인민의 적'(敵人)에게 다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잡신잡배들이 모두 동굴 밖으로 나와야만 우리가 그들을 섬멸할 수가 있다. 독초가 땅을 뚫고 나와야만 쉽게 베어버릴 수 있다." (<<毛澤東選集>>, 제5권, 436—437.)

 

모택동 양모에 걸려든 수많은 인텔리들은 과연 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을까? 모택동은 어떻게 그리도 일사분란하게 비판세력을 모조리 끌어내 “섬멸”할 수 있었을까? 모택동의 양모는 등소평이 이끄는 바로 중앙서기처(中央書記處)를 통해 치밀하게 기획되고, 또 실행되었다. (계속)

 

1957년 당시 모택동의 모습. http://history.eastday.com/eastday/history/h/20150401/u1a8648674.html
1957년 당시 모택동의 모습. http://history.eastday.com/eastday/history/h/20150401/u1a8648674.html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丁抒, <<陽謀: 反右派運動始末>> (香港《開放》雜志社,2007)

毛澤東, <<毛澤東選集>>(人民出版社, 1991)

Yen-lin Chung, “The Witch-Hunting Vanguard: The Central Secretariat's Roles and Activities in the Anti-Rightist Campaign,” The China Quarterly, No. 206 (JUNE 2011), pp. 391-411.

Jonathan D. Spenc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 Inc., 2012)

Péter Vámos, “Evolution and Revolution: Sino-Hungarian Relations and the 1956 Revolution,” The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Working Paper Series #54

Sources of Chinese Tradition: From 1600 Through the Twentieth Century, compiled by Wm. Theodore de Bary and Richard Lufrano, 2nd ed., vol. 2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46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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