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회. "왜 다시 문혁(文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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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7.12.29 11:10:12
  • 최종수정 2018.06.0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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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宋在倫, 하버드 대학 박사)

-맥매스터 대학(McMaster University) 교수(중국역사/철학), 작가
-주요저서: 학술서적 Traces of Grand Peace (Harvard University) 및 영어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등. 

 
 

 

1. 여전히 중국은 미지의 대륙


2018년,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심한 변화가 예견된다.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의 경구처럼, “매사 극단으로 가면 변하게 마련이고, 변화는 막힌 것을 뚫고, 막힌 것이 뚫리면 오래도록 새로운 질서가 유지된다.” (窮則變,變則通,通則久)

현재의 핵비확산조약(NPT) 체제 하에선 그 어떤 문명국도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 전체주의 “깡패국가”(rogue state) 북한의 핵보유는 필연적으로 일본과 한국과 대만의 핵무장으로 이어지며, 전 세계 핵확산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간단한 이유 때문에 북한의 제6차 핵실험은 이미 낡은 국면의 맨 끝을 알리는 신호탄인 듯하다. 그 끝엔 과연 어떤 변화가 발생할까? 꽉 막힌 현상(現狀)이 뚫리려면, 극심한 변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전 지구적 신질서를 세우기 위한 창조적 변화임에랴.

조만간 닥칠 큰 변화를 예감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중국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려 한다. 14억 인구가 살고 있는 중국이란 대륙에 대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 말문을 열기도 전에 공포감이 몰려온다. 오늘날 중국은 너무나 무섭게 한반도를 압도하지만, 중국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지의 대륙이다. 

 

​양세번(梁世繁) 작품, “대지채회”(大地彩繪)
​양세번(梁世繁) 작품, “대지채회”(大地彩繪)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방중(國賓訪中)은 뼈아픈 외교참사였다. 의전(儀典)에 어긋난 홀대만으로도 충격적이다. 중국 경호팀의 대통령 수행기자 집단폭행은 상상을 절하는 반문명적 폭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북경대 연설문 내용이었다.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이며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라는 표현은 주권 국가 사이의 평등관계를 허무는 비상식적인 발언이다. 김산과 정율성의 사례를 끌어와 한국과 중국이 동지라고 선언하는 것 역시 전혀 설득력 없다. 입장 바꿔 중화인민공화국의 습근평(習近平, 시진핑) 주석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운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을 “조선혁명의 영수”라 칭송한 호적(胡適, 1891-1962)이 “중국인”이란 사실을 들어 중국과 한국이 동지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가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을 은근히 칭송하는 것 또한 어색하기만 하다. 논어, 삼국지, 수호지,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의 <중국의 붉은 별>,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글귀 등등 연설문에 삽입된 지식은 전혀 새롭지도 않고, 맥락에도 맞지 않고, 호소력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 북경대 연설 장면 (2017년 12월 15일)

​대체 그 연설문의 초안을 누가 썼을까? 연설문 담당이라는 전대협 문화부장 출신 신동호 비서관일까? 연설문 내용을 보면 1980년대 운동권 “커리큘럼” 냄새가 풀풀 난다. 무엇보다 그 연설문의 작성자는 현대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중국인의 정서를 알지도 못한다. 대통령의 연설문엔 새로운 지식, 빛나는 통찰, 미래적 비전, 외교적 위트, 문학적 감동이 담겨야만 한다. 촛불혁명으로 세운 정권, 그 정도 밖에 할 수 없나?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삼국지, 수호지를 반복해 읽어도 오늘날 중국을 이해할 수는 없다. 중국공산당 대장정(大長征)의 장쾌한 서사(敍事)를 접했다 해서 중국이란 거대한 대륙의 실상을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의 14억 인민이 헤쳐 온 현대사의 굴곡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국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중국인의 아픔을 느껴봐야 한다.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탐구해야만 한다.   


2. 하진(Ha Jin, 1956- )의 짧은 이야기 두 토막


비네트#1:


문화대혁명(1966-76)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엽 중국 정찰중대 정훈장교가 작성한 반성문이다. 그날 정찰대원들은 낙하훈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쭉 늘어서 병사들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장교는 부대원들에게 군가를 부르게 시켰는데, 묘하게도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이 어머니께 전하는 이별의 노래였다.


어머니, 안녕히! 어머니, 안녕히!
나팔소리 울려 퍼지니 총칼을 높이 들고
우리는 이제 싸우러 갑니다.
어머니 부디 몰래 눈물 흘리지 마세요!
이기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소서! 

 

군가를 불렀거늘 병사들의 행진은 더 쳐지고 대오가 흐트러졌다. 눈시울을 붉히며 먼 산을 보거나 훌쩍이며 우는 병사도 있었다.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 주위를 보니 마을 사람들이 슬픔에 젖은 부대원들을 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꼭 장례식 행렬 같구먼!” 부대로 돌아와 정훈장교는 황급히 상급 연대의 정치위원에 통렬한 반성문을 써서 올린다. 다음부턴 혁명정신을 벼리고 적개심(敵愾心)을 고취하는 건전한 혁명가요를 부르게 하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비네트 #2:


도시의 홍위병이 산간벽지에서 이른바 “하방노동(下放勞動)”하던 1970년쯤으로 추정된다. 송화강(松花江)이 흐르는 러시아 접경지대의 한 군부대에서 발생한 사건. 설날 병사들은 적당히 술에 취해 농담을 주고받는데, 그들의 관심은 멀리 상해에서 왔다는 옆 마을 여자 대학생들에 쏠려 있었다. 병사들은 과연 누가 그 여학생들 앞에서 가장 의연히 군인의 본연을 지킬 수 있나 내기를 했다. 병사 한 명이 설날 인사를 하러 가겠다고 하자 또 한 명은 술 한 병 같이 나눠 마시고 오겠다고 했다. 그때 콩카이는 여학생 숙소로 가서 그들과 함께 빈 침대서 아무 일도 없이 자고 오겠다고 했다. 주변에서 폭소를 터뜨리자 그는 호기롭게 벌떡 일어나 담요를 싸들고는 진짜로 여학생 숙소를 향해 갔다.


여학생 숙소에 들어간 콩카이는 군복을 입은 채로 한 마디 말도 없이 담요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한다. 처음에 당황했던 다섯 명의 여대생들은 난데없는 틈입자를 반갑게 맞아준다. 농담을 걸고, 음식 냄새를 풍기고, 얼굴에 숯칠까지 하면서 말을 걸지만, 콩카이는 돌부처처럼 돌아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사건보고를 전해 듣고 놀란 중대장은 여학생 숙소를 직접 찾아가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지만, 여학생들은 한 마디 불평이 없었다. 덕분에 콩카이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철인(鐵人)이란 별명까지 얻었고, 얼마 후엔 분대장으로 선발되었다.


며칠 후 콩카이는 자신의 군복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한다. 그날 여학생 중 안말리가 몰래 넣어 놓은 것이었다. 이성교제는 군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소대장은 여학생이 “자본가”의 딸임을 알아내곤, 콩카이에게 관계를 끊을 것을 명령한다. 물론 안말리는 일반 인민이었지만, 자본가 출신 아버지는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콩 카이는 못 이기는 척 절교의 서신을 쓰지만, 며칠 후 두 사람은 멀리로 도망을 가버린다. 1년 뒤 장교는 익명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 속엔 두 사람이 살진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 뒷장에는 “죄송합니다!”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콩카이에 대한 미움이 일었지만, 소대장은 혹시나 콩카이와 계속 연락한다는 오해를 살까봐서 그 자리에서 사진을 불태워 버린다.   


두 차례나 펜/포크너상을 수상한 재미 중국인 대작가 하진의 첫 소설집 “말의 바다”(Ocean of Words)에 수록된 짧은 이야기들이다. 비네트 #1의 제목은 “보고서”(A Report)이고 비네트 #2는 “너무 늦은”(Too late)이다. 날마다 위대한 지도자의 어록을 암송하며 불굴의 혁명정신을 벼리던 “보고서”의 군인들도 어쩔 수 없이 섬약하고 잔정 많은 청년들일 뿐이다. “자본가” 딸과의 결혼을 선택한 콩카이는 문화대혁명의 정신을 따라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거듭나기엔 “너무 늦은” 로맨티시스트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혁기의 중국인들은 고원한 “혁명”의 이상과 사적인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하진 (Ha Jin, 1956-  ), 재미 중국작가, 2004년 모습
하진 (Ha Jin, 1956- ), 재미 중국작가, 2004년 모습

문혁(文革) 바람이 여전히 거세던 1960년대 말 하진은 13세의 나이로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6년간 복무하며 고교과정을 독학한다. 이후 흑룡강(黑龍江)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산동(山東)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를 취득한다. 1989년 천안문 학살을 목도한 하진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특히 한국전쟁의 중공군 포로의 이야기 “전쟁쓰레기(War Trash)”(2004년 발표)는 국제전의 소용돌이에서 소모품으로 버려진 한 개인의 실존적 아이러니를 형상화한 대작(大作)이다.


하진은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몸소 체험한 증인이다. 문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증언에 귀 기울여 봤다면, 지난 12월 문대통령의 북경대 연설문에 결코 박수를 보낼 수 없으리라. 역경의 현대사를 헤쳐 온 중국 사람들은 정부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진부한 혁명의 신화에 열광할 만큼 천진하지도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청와대를 장악한 전대협 출신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 80년대 운동권 커리큘럼을 버리고 이제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공부해 보자고. 


3. 아직도 덜 지나간 혁명의 바람 


1966년 5월, 거대한 대륙 중국은 다시금 거대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대약진운동(1958-1962)의 참화 속에서 수천 만 명이 아사(餓死)한 후 불과 4년 만이었다. 중국의 최고영도자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은 소련서 불기 시작한 수정주의(修正主義) 바람을 타고 중국 전역에 “반혁명세력”이 퍼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반혁명세력”을 모조리 도려내기 위해 그는 노련한 통치술로 대중의 마음에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대중은 즉각적으로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문혁은 소수의 부르주와 "적폐세력"의 제거를 위해 다수가 일으킨 사회주의 재건운동이었다.

 

홍위병 (1966) Universal History Archive/UIG via Getty Images

이 운동의 주역은 젊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모택동의 어록을 손에 들고 “홍위병” 조직을 결성했다. 홍위병의 대규모 집회가 이어지자 최고영도자 모택동은 “조반유리(造反有理)”란 한 마디로 그들에게 초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홍위병 세력은 학교, 관공서, 병원, 신문사, 방송국, 지방정부, 공장 등 사회 모든 기관에서 반혁명분자를 색출했다. 당시 국가행정의 최고영수 유소기와 등소평부터 아래로는 소학교 교사들까지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이른바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당해야만 했다.


갈수록 격해진 홍위병 운동은 여러 집단으로 분열되어 결국엔 서로 죽고 죽이는 무장투쟁의 광기로 비화되었다. 수습의 책임은 인민해방군에 맡겨졌다. 진압부대와의 시가전에서 수만 사람들이 사살되고 나서야 홍위병 운동은 수그러들었다. 지방의 농촌에 보내진 홍위병들은 하방노동에 시달리며 길게는 10년 간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사인방이 주도한 혁명의 광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은 채 1976년까지 이어졌다.


문혁의 광기에서 학살된 인명은 최소 40만에서 최대 300만까지 집계(集計)된다. 영구히 불구가 된 사람 역시 그 정도로 추산된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바로 흔히 문혁(文革)이라 줄여 부르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無産階級文化大革命)이다.

 

홍군(紅軍)과 홍위병 GraphicaArtis/Getty Images

문혁은 1976년 9월 모택동의 죽음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모택동 사후 불과 두 달 만에 10년 간 온 중국을 쥐고 흔들던 문혁의 주동세력 “사인방(四人幇)”은 전격적으로 구속되어 극형에 처해졌다. 홍위병의 “비판투쟁”에 끌려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한 채 비참하게 쓰러져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는 1980년 복권되어 사후 11년 만에 공식적으로 불멸의 영도자로 부활했다. 억눌렸던 수 백 만의 희생자들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개개인의 체험을 글로 표현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의 상흔문학(傷痕文學)이 새로운 장르로 생겨났을 정도였다.


문혁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여풍(餘風)은 여전히 남아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듯하다. 40년간 지속된 “개혁개방”으로 오늘날 중국은 경제규모 세계2위의 최첨단 정보사회로 변화했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자유와 인권은 여전히 제한되고 있다. 시민사회가 급성장했음에도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는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다. 1982년 개정헌법에 따라 노동자들의  파업권은 박탈되었다. 1989년 천안문의 진상 역시 여전히 안개에 가려져 있고, 해외를 떠도는 당시의 주동자들에겐 귀국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밑엔 10년 간 전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던 문혁 시절의 기억이 깔려 있는 듯하다. 1989년 천안문 학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자유주의 정치학자 엄가기(嚴家祺, 1942 -)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문혁의 혼란을 겪었기에 1978년 이후 중국인들은 보다 자유롭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의 건설을 위해 “개혁개방”에 매진할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집단폭력과 군중심리의 위험을 뼈저리게 체험했기에 일당독재 속에서 안정을 희구하며 체념의 지혜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다수 중국인들 사이에서 그 시대의 악몽이 살아 있기에 문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문혁은 또한 우리 스스로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의 거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어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하게 가꿔가려면 더 많은 학습과 고뇌가 요구된다. 2018년, 다시금 옷깃 여미고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깊이깊이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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