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4回. “文字獄: 낙인찍고 재갈물리고” (1)

 

1. 혁명과 反혁명

 

지난 회에 소개했던 모우식(茅于軾) 선생은 과연 무엇 때문에 홀로 80대 후반 노구(老軀)를 이끌고 모택동을 비판하며 중공정부에 항거하고 있을까? 아니, 왜 오늘날 중국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억압에 결연히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것일까? 중국내 관변 이데올로그나 친중 성향의 학자들이 주장하듯, 중공정부의 유능한 협치(協治, governance)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중국에 비판적인 외국학자들이나 중국내 소수의 반체제 지식인들이 주장하듯, 레닌주의 중공정부의 권위주의적 억압 때문일까?

 

극좌·극우 전체주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대항엘리트(counter-elite)의 성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스탈린 정권 하에선 대숙청(1936-1938)으로 최소 60만의 정부 관료 및 당 간부들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히틀러 정권 역시 준군사조직을 동원해서 반대세력에 백색테러를 가하고 비판지식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모택동 정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더불어 중공정부는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비판지식인”들을 색출한 후“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문인, 예술가, 인문학자, 사회과학자는 물론 과학자들까지도 철저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다.

 

중공정부는 왜 건국 초기부터 그토록 지식인을 경계하고, 혐오하고, 탄압해야만 했을까? 중공 지도부는 만민평등의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를 건설을 위해선 마땅히 반혁명세력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성공은 인민의 복종을 요구한다. 인민의 복종은 이념의 통일에서 나온다. 이념의 통일을 위해선 반대의견의 제거가 요구된다. 반대의견의 제거를 위해선 반혁명세력의 척결이, 비판지식인의 숙청이 급선무다. 바로 이러한 혁명의 논리 위에서 중공정부는 “굴속에 몸을 숨긴 구렁이를 잡아 빼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작전으로 비판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앞으로 상세히 다루게 될 대기근(1958-1962)과 문화혁명(1966-1976)의 광기는 바로 1950년대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우파투쟁(1957-1959)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반우파 투쟁에선 최소 50만 명의 지식인들이 반혁명의 오명을 쓰고 구속되고, 사상개조를 강요당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결과 중공정부는 반대여론이 자랄 수 있는 정치적 토양 자체를 오염시켜 버렸다. 그 척박한 땅에서 20세기 초반 뿌려진 자유와 민주의 씨앗은 2018년 현재까지 제대로 착근(着根)조차 못한 듯하다.

 

앞으로 두 회에 걸쳐 본격적인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기 직전, 1956년 중국의 문단(文壇)에서 전개된 현대판 문자옥(文字獄), 이른바 “호풍 반혁명집단 안(胡風反革命集團案)”을 우선 살펴보자. 당의 기본노선에서 약간 벗어나 예술의 고유성을 조심스럽게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문학인들은 무기력하게 짓밟히고 파멸의 길에 내몰렸다. 광폭한 혁명의 시대에 반혁명의 낙인을 받으면 더는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기에······.

 

펑사이오린(Peng Xiaolian)과 루이자 웨이(S. Louisa Wei) 감독의 "호풍집단안" 관련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 폭풍(Storm under the Sun)"에서,  http://bqcc.com/en/portfolio/storm-under-the-sun/
펑사이오린(Peng Xiaolian)과 루이자 웨이(S. Louisa Wei) 감독의 "호풍집단안" 관련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 폭풍(Storm under the Sun)"에서 
http://bqcc.com/en/portfolio/storm-under-the-sun/

 

 

2. 혁명과 문학

 

펜은 과연 칼보다 강한가? 물론 그렇다.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언어에서 나온다. 주먹으로 상대방을 제압해도 말싸움에 지면 그는 기껏 깡패가 되고 만다. 무력(武力) 앞에서 인간은 끝끝내 승복하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논리를 만나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인간은 명분의 동물이며, 혁명은 도덕적 정당성을 요구한다. 때문에 혁명가는 무엇보다 훌륭한 문필가이어야만 한다. 멋진 말에 속아 목숨을 던지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영리하다는 호모사피엔스의 고유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1920-30년대 모택동은 중후한 간결체의 명쾌한 논리로 젊은 영혼들을 사로잡아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매번 성패(成敗)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그는 사분오열된 당(黨)의 중심을 잡는 중요한 문건을 발표했다. 명분과 논리를 빼앗긴 지도자는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자는 결국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그는 일찍부터 언어의 마력을 자각했고, 부단히 작문을 연습해 수사(修辭)의 달인이 되었다. 명분과 논리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그는 매번 논쟁에서 승리해서 권력의 기반을 닦았다. 예컨대 1937년 11월 항일투쟁 과정에서 모택동은 “우경(右傾) 기회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당내의 혁명동지들을 향해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모든 공산당원은 필시 다음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당이 총을 지휘함이 바로 우리의 원칙이다. 총은 결코 당을 지휘할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전쟁의 종식을 옹호하며 전쟁을 원치 않지만 전쟁은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없애기 위해선 반드시 총을 들어야만 한다.”

 

이 구절은 모택동 생전은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경구로 인용된다. 단 하나의 문건을 정부의 지침으로 만드는 그의 능력이 놀랍다. 문학·예술 방면에서도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1942년 5월 2일, 모택동은 공산당 혁명기지의 연안포럼에서 유명한 “문학과 예술에 관한 강연”을 한다. 이 강연에서 그가 밝힌 문예(文藝)와 혁명의 관계는 1950년대 이후 중국 문예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혁명”에서 문인, 예술가, 지식인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왜 그들의 존재가 문제가 될까? 문인이나 예술가들은 남달리 세상에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야 그냥 술자리서 투덜거리고 넘어갈 얘기를 문인들은 미주알고주알 글로 엮거나 그림을 그려서 세상에 내놓고야 만다. 인간은 누구나 표현의 욕구를 갖는데, 문인과 예술가들은 그 중에서 가장 표현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공산정부의 권력을 가늠하는데 문예이론만큼 중요한 기준도 없다. 바로 그 문예이론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본원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문예이론에 따르면, 문학과 예술은 혁명이란 기계의 부속물이자 강력한 무기이다. 이 무기를 잘 사용하면, 문예는 인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묶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군인들이 전장에서 싸우듯, 문학·예술인들은 문화의 전선에서 부르주아 예술에 맞서 투쟁해야만 한다. 요컨대 문학과 예술은 혁명에 종속된다는 논리였다.

 

혁명의 시대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혁명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가치를 인정받는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생산한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함으로써 혁명에 기여한다. 군인은 총칼을 들고 혁명에 기여한다. 과학자는 과학기술의 개발로 혁명에 기여한다. 그렇다면 문인은 과연 무엇을 생산해서 혁명에 기여하는가? 문학예술인의 창작물은 치열한 선전·선동을 통해 인민대중의 계급의식을 일깨우고 혁명정신을 고취해야만 한다. 혁명운동을 벗어난 어떤 창작행위도 의미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퇴폐, 말초, 유미, 탐미, 자학, 냉소, 희화, 파괴, 분열, 사생활, 개인주의의 모든 표현은 퇴락한 부르주아 문화의 산물로 여겨져 철저히 배격되었다.

 

모택동의 문예이론은 곧 1950년대 이후 중국사회의 사고방식을 결정짓는 지도이념이 되었다. 요컨대 중공정부의 지도 아래선 혁명의식을 둔화시키고 계급의식을 희석시키는 그 어떤 표현도 허용되지 않았다. 혁명은 절대선(絶對善)이기 때문에 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세력, 모든 생각, 모든 행위는 반혁명의 절대악(絶對惡)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중공정부의 요구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인민대중의 영혼에 혁명의 주술을 걸기 위해 혁명의 창작에 집체적으로 참여했다. 물론 모든 문인이 그런 숨 막히는 사상통일과 이념의 획일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3. 호풍(胡風, 1902-1985)의 문예이론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많은 문학·예술인들은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실존적 선택을 요구받았다. 5.4운동 시기 자유주의 사상가 호적(胡適, 1891-1962)이나 재미 문필가 임어당(林語堂, 1895-1976) 등의 지식인들은 국민당의 편에 섰고, 1930년대 좌익작가연맹을 이끌었던 <<아큐정전>>의 노신(魯迅, 1881-1936)을 위시해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 1892-1978), 소설가 모순(茅盾, 1896-1981), 평론가 호풍, 소설가 노사(老舍, 1899-1966), 페미니즘 작가 정령(丁玲, 1904-1986), 평론가 주양(周揚, 1904-1986) 등등은 공산당 운동에 참여했다. 물론 왼쪽에 줄을 선 문인들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들 중엔 남달리 도식적이고 독단적인 이들도 있었고, 은밀히 사적인 표현 욕구를 억누를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그런 개개인의 차이는 1950년대 현실에서 문예논쟁으로 표출되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의 각조직과 대학교수의 자리를 놓고 다른 분파들끼리 부딪히고 싸웠다고 볼 수도 있다.

 

주양은 1930년 좌익작가동맹의 결성 때부터 적극적으로 활약했던 좌파문인이자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1950년대 학계와 문화계의 요직에 자기 사람들을 박아 놓고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던 문예계의 관방 리더였다. "문예차르"(沙皇)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문예계에서 그의 권력을 막강했다. 1950년대 초 중공정부 주도의 사상개조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주양파는 정부요직을 점하고 거세게 캠페인을 주도했다. 반면 호풍은 상해를 배경으로 주양의 반대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모택동의 문예이론에서 벗어나 예술의 고유성을 나름 강조했는데, 그때문에 "주관주의"의 낙인을 받게 된다. 주양과 호풍 모두 표면적으로 모택동 사상을 신봉하던 좌익문인들이었다. 구태여 두 사람을 구분하자면 주양은 좌파평론가, 호풍은 우파평론가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호풍은 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감히 모택동의 문예이론에 이의를 제기했을까? 호북성 동부 기춘(蕲春) 출신인 호풍은 1929년 일본유학을 시작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1933년 본국으로 송환된다. 상해에서 좌익작가동맹에 가담한 호풍은 특히 노신과 긴밀한 교우관계를 맺는다. 항일전쟁 시기 주은래의 교시에 따라 홍콩과 중경으로 옮겨가며 문화운동을 전개해서 내전시기 중국문예계에서 상당한 이름을 얻는다.

 

호풍집단(호풍과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신중국”의 도래를 환영하지만 정권 초기부터 중공정부의 문예정책에 대해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때문에 1951년 “사상개조운동” 때부터 호풍집단은 관변 문인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공격당한다. 1951년 말 문학재개조 운동이 일어나자 더더욱 격심한 비판에 시달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호풍집단은 비주류로 밀려나고 만다.

 

호풍은 그러나 반체제인사는 아니었다. 그는 “모택동의 계몽적 영도”를 칭송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을 수용했다. 중공정부의 기본이념을 따라 그는 봉건주의,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비판했고, 소련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문학적으로도 그는 중공정부의 기본노선에 대체적으로 동의했다. 일부 평론에서 그는 참된 작가라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반론에 동의하면서도 호풍은 스스로의 문예이론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작가란 현실에서 인간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고 기록하는 예술가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 해도, 작가는 그런 외적인 이념을 따라 작품을 구성하기 보단 인간의 현실을 묘사하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는 인민대중의 삶을 탐구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부합하는 위대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창작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을 부인하고, 노동자, 농민, 군인만이 아니라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이 문학적 형상화의 대상이라 주장했으며, 또한 전통적 표현양식을 넘어 문학적 실험을 강조했다. 1930년대 이래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일면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호풍의 그런 입장엔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는 은밀하지만 파격적인 의제(議題)가 담겨 있었다.

 

호풍은 공산당의 기본노선에 동조하지만, 예술가로서 1930년대 이래 스스로 쌓아올린 모든 생각을 다 포기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전 인민에 똑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당시 중공정부의 사상개조 운동에 그는 반발했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모택동의 연안 연설(1942년 5월)에 대해서 호풍은 “모두가 모택동의 연설만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물론 그는 모택동에 직접 맞서기 보단, 모택동을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는 관변 문인집단을 공격한 것이다. 그는 주양을 위시한 관변문인들이 모택동 연설문을 악용해 사익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문학적 리얼리즘을 죽인 결과, 중국의 문화가 쇠퇴하고 만다고 생각했다.

 

http://www.chinafile.com/reporting-opinion/caixin-media/praise-hu-feng
호풍(좌)과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의 체포장(우)
http://www.chinafile.com/reporting-opinion/caixin-media/praise-hu-feng

 

4. 적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원숭이

 

호풍은 여러 문인들과 사적으로 많은 편지글을 주고받았다. 이 편지글들은 1955년 호풍집단을 단죄하는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편지글에서 제자들은 호풍보다 더 격렬하게 모택동의 추종세력 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문예이론 자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작가에게 무산계급을 칭송하고 혁명적 영웅들을 칭송하라 요구했다. 호풍의 문하생들은 그런 모택동의 요구야 말로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비판했다. 상상력을 차단하는 모택동의 일방적인 문예이론은 1940년대 연안시절에는 절실했지만, 신중국의 현실에선 생명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호풍과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은 인민의 생활을 세밀하고 관찰하고,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고, 새로운 테마를 상상해야 한다고 믿었다 .

 

한 제자는 격양된 어조로 관변문인들의 형식주의를 비판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런 식의 방법이야 말로 히틀러 방식이 아닙니까? 앙드레 지드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그는 소련 방문 후 스탈린 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한 프랑스 문인 앙드레 지드까지 동원해서 중공정부의 문예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인민대학의 강사는 호풍에 보낸 편지에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교사는 자신의 뇌를 써서 사고해야 하지만, 이제 당은 교사에게 머리를 쓰리 말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호풍은 창의성 말살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이념의 모든 영역에서 행동해야만 한다. 기계주의가 판을 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해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터.” 이어서 그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로 남긴다. “이제 나는 공격을 위해 칼을 갈고 있다. 반격의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표적을 노려보고 있으니 이제 스스로의 목을 잘라 저 더러운 철제장벽을 향해 던지려 한다.”

 

https://www.sutori.com/item/untitled-6511-8e62
1955년 호풍집단이 숙청될 당시의 포스터. 
"혁명을 다잡고 생산을 촉진하라!"
"상해 시위원회의 자산계급반동노선의 새로운 반격을 철저히 분쇄하라."
https://www.sutori.com/item/untitled-6511-8e62

 

 

나이브하게도 호풍은 중공정부가, 아니 “영민한 모택동 동지”가 예술의 고유성과 작가의 창의성을 강조하는 스스로의 문예이론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문화예술계를 장악한 관변문인들을 제거하고 중국의 문화를 찬란히 꽃피울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호풍은 치밀한 계획 아래 반대세력이 장악한 문단 내에서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유기>>의 한 장면 그대로 “벌레로 변해 적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손오공의 전술이었다. 섣불리 자신들의 입장을 공개하기 보단, 권력집단과 타협하여 정부 내의 요직에 아군을 잠입시켜야만 “문학전쟁”을 도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호풍집단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출판의 공간을 확보해야만 했다.

 

와신상담의 노력으로 호풍은 2년에 걸쳐 권력과 타협하여 문단내의 입지를 굳히고 요직에 자기 사람들을 앉힌다. 상해가 근거지였던 호풍집단은 지방의 작가연맹, 선전부서 및 출판사 등에서 주요한 자리를 점하기 시작했다. 1953년 호풍은 <<인민문학>>의 편집위원으로 발탁되고, 중국작가동맹의 지휘부에 올라선다. 그렇게 새롭게 자리를 굳힌 호풍은 드디어 1954년 7월 모택동을 향해 비장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중앙정부에 올리는데······. 

 

그는 다섯 개의 칼이 작가를 위협하고 있다고 쓴다. 작가의 목을 겨눈 첫번 째 칼은 작가가 완벽한 세계관을 갖춰야 한다는 당의 요구이다. 둘째 칼은 작가는 오로지 노동자, 농민, 군인만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압박이다. 셋째 칼은 사상개조 이후에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정부의 주장이다. 넷째 칼은 전통적 양식만이 민족양식으로 허용된다는 낡은 발상이다. 다섯째 칼은 특정 주제가 다른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문예 관료의 독단이다. 

 

그는 모택동에게 주양을 위시한 관변문인들이 다섯 개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작가정신을 말살한다고 고발한다. 아울러 그는 호풍집단의 새로운 문예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모택동을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호풍이 야기한 문학전쟁은 얼마 후 정치심판으로 비화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2,100명이 불려가 조사를 받고 92명이 체포되고, 62명이 격리되고, 73명이 정직당하는 현대판 문자옥이 발생한다.

1956년 78명이 호풍분자로 낙인찍히고, 그 중에서 23명은 골수분자로 분류된다. 호풍은 1955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4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후, 1980년에야 중공정부는 “호풍 반혁명집단 안(案)”의 판결은 근거없는 정치탄압으로 시정된다. 중공정부는 10년간의 대참사를 야기한 문화혁명과 마찬가지로 "호풍사건" 또한 부당한 인권유린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한 셈이다. 

대체 왜 최고 권력자 모택동은 일개 문인집단을 향해 이토록 격심한 현대판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켜야만 했을까? (계속)

 

우문(牛文, 1955년 12월) 작품. "위험한 길: 호풍반혁명집단과 잠복한 모든 반혁명분자를 견결히 숙청하라!"(危险的道路-坚决肃清胡凤反革命集团和一切暗藏的反革命分子) (重庆人民出版社)  https://chineseposters.net/posters/d25-29.php
우문(牛文, 1955년 12월) 작품. "위험한 길: 호풍반혁명집단과 잠복한 모든 반혁명분자를 견결히 숙청하라!"
https://chineseposters.net/posters/d25-29.php

 

< 참고문헌>

<<毛澤東全集>>, “战争和战略问题”(一九三八年十一月六日) https://www.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381106.htm

Merle Goldman, Literary Dissent in Communist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丁抒, <<陽謀: 反右派運動始末>> (香港《開放》雜志社,2007)

호풍사건관련 기록영화. Storm under the Sun (short English version, reedited 2014), https://www.youtube.com/watch?v=QpBCzHQPEak&t=233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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