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11회. "빼앗긴 민국의 꿈, 개헌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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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3.15 09:46:13
  • 최종수정 2018.03.3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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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春秋: 現代中國 슬픈 歷史] 11. “빼앗긴 民國의 꿈, 改憲에 부쳐"

 

 

 

1. 사회주의 군주제? 철학의 빈곤

 

지난 3 11 중국에선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980 2964명이 표결에 참여했다. 찬성 2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의 거의 만장일치(99.8프로)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모두 21개의 수정 조항 11개는 반부패 운동을 주도할 국가감찰위원회를 정부 막강한 독립조직으로 정립하는 절차이다. 나머지 10 조항은 습근평(習近平, 시진핑) 개인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규정이다. 모택동 사후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던 중국 통치시스템이 다시금 오리무중이다. 대체 중국의 정체(政體) 무엇인가? 사회주의 군주제인가?

 

이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전문엔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등소평의 이름들과 나란히 습근평의 이름이 삽입된다.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삭제되어 습근평의 종신집권까지 가능해진다. 인민대표 99.8프로의 “찬성”이라는 법적 형식이 타당하다면,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오인(五人) 철인(哲人) 지배 아래 들어간 셈이다. 인류의 20% 개정헌법의 구속을 받게 되었다.

 

2018년 3월 13일 전인대 투표장면 http://chinaplus.cri.cn/special/npc-cppcc-2018/chinaplus-reports/1578/20180312/101561.html
2018년 3월 13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투표장면
http://chinaplus.cri.cn/special/npc-cppcc-2018/chinaplus-reports/1578/20180312/101561.html

 

대체 중국의 헌법(憲法)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등소평, 습근평 다섯 특정 개인들의 이름이 버젓이 등장해야만 할까? 헌법전문에 특정 개인의 사상을 삽입하는 발상은 과연 어디서 기인했을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유교전통 때문일까? 유교경전 중에서 이상적인 국가행정 조직도를 담고 있어 흔히 고대(古代) 헌법이라 인식되는 <<주례(周禮)>>왕이 나라를 세운다(惟王建)”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왕은 개성적 인격체가 아니라 최고통치자의 지위(地位, position) 의미할 뿐이다. 특정 개인의 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삼는 오늘날의 중국헌법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중국의 왕조사를 돌아보면, 창건군주는 흔히 조훈(祖訓) 혹은 가훈(家訓) 반포해 조대(朝代) 창건목적과 운영원칙을 밝히곤 했다. 국가를 집단의 소유물로 여기던 가산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 전통이다. 만약 그런 왕조시대의 유습이 오늘날 중국헌법에 영향을 미쳤다면, 반봉건 기치 아래 “낡은 생각, 낡은 이념, 낡은 전통, 낡은 습관” 사구(四舊) 척결을 부르짖던 지난 세월과 혁명운동은 무엇이었나? 겉으론 사회주의를 내걸고 속으론 황제지배체제를 이어가고 있나? 진정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은 100 “민국(民國)혁명”의 꿈을 저버린 퇴행의 조직, 역주행의 집단이다. 14 인구의 거대한 “문명국가(civilizational state) 현재 심각한 이념적 위기에 처해 있다. 마르크스의 저서 제목처럼 “철학의 빈곤”이 아닐 없다.

 

2. 원세개(袁世凱, 1859-1916) 오마주(hommage)?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인터넷에선 袁世凱 그의 제호(帝號) “홍헌洪憲 등의 단어가 금칙어가 되었다 한다. 중국의 많은 네티즌들이 이번 개헌을 비판하면서 습근평을 원세개에 비교하며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 최대 포털 baidu.com”에 들어가 袁世凱”와 習近平”을 동시에 검색하면 많은 기사가 이미 잘려나갔음을 쉽게 있다. 중국정부는 하필 袁世凱”를 금칙어로 삼아야만 했을까?

 

1911 신해혁명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공화주의 민국(民國) 혁명이었다. 중국에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 이래 2 넘게 지속된 황제지배체제는 마침내 종식되었다. 이제 국가는 이상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민의 공공물(res publica) 되었다. “국민주권”이 바로 공화주의의 핵심이다. 공화주의(republicanism) 모름지기 일인지배를 거부하는 반군주제(anti-monarchism) 생명으로 한다.

 

청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1911 10 10일의 무창봉기(武昌蜂起) 일종의 군사반란이었다. 지역의 반란세력은 곧바로 중앙의 임시정부를 결성하고 청조에 대항한 본격적인 혁명을 일으킨다. 청조는 10 14 원세개를 호광(湖廣) 총독으로 기용해서 혁명군을 진압하려 하지만, 원세개는 오히려 혁명 지도부와 화의(和議) 시도한다. 청조에 반기를 들고 혁명에 가담한 남방의 열일곱 ()단위 정부는 12 29일이 손문을 민국의 임시대표로 선출하고, 손문은 중화민국 1 임시대총통으로서 1912 1 1 남경에서 민국의 성립을 선포하지만······.

 

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yuan-shikai-first-warlord/
원세개 (袁世凱, 1859-1916)
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yuan-shikai-first-warlord/

 

 

황제로부터 혁명군진압의 전권(專權) 위임받은 원세개는 북양군(北洋軍) 내려 보내 무한(武漢) 진지까지 탈환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혁명의 완수를 위해 대규모 “남북전쟁”을 감당할 없었던 손문은 원세개에 총통직을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치로 민국혁명의 불씨를 살려가려 하고, 손문의 제안을 받아들인 원세개는 1 25 “공화(共和)”를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이어서 2 12 원세개는 황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중화민국을 조직하고 건립하라”는 황제의 조칙(詔勅) 받아낸다. 이로써 2 넘게 지속된 황제지배체제는 종결되었건만······.

 

원세개에 권력을 이양하기 직전 손문은 내각제 개헌을 통해 총통의 권력을 제약했다. 곧이은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은 최다의석을 차지하지만, 내각총리에 임명된 송교인(宋敎仁, 1882-1913) 상해에서 자객의 칼을 맞고 숨지고 만다. 격분한 손문은 중화혁명당을 결성하고 8 병력을 규합해 원세개를 몰아내는 이차혁명(二次革命)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원세개는 1913 10 6 국회선거를 통해 1 대총통의 지위에 오른 , 다음 국민당을 해산하고 의원증서까지 모두 몰수한다. 그는 임의로 중화민국약법을 수정해 책임 내각제를 총통제로 바꾸고, 1914년엔 12 29일엔 대총통의 임기를 무한 연장하는 선거법을 개정한다.

 

중화제국의 황제가 된 원세개 (1915년 12월)http://ww1blog.osborneink.com/?p=10219
중화제국의 황제가 된 원세개 (1915년 12월)http://ww1blog.osborneink.com/?p=10219

 

총통제에 만족할 없었던 원세개는 1915 12 국회 여러 국민단체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빌려 중화제국(中華帝國) 창건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제호(帝號) 홍헌(洪憲)이었다. “헌법(憲法) 널리 선양(宣揚)한다”는 뜻이다. 그의 제호에는 입헌군주제를 향한 그의 집념이 담겨 있다. 중화제국의 헌법은 실제로 황권을 제약하고 황실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근대적 입헌주의의 기본원칙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었다. 원세개를 단순히 황제 () 걸린 돈키호테적 몽상가로 수는 없다.

 

1913년부터 중국에 체류하며 원세개의 헌법자문관으로 활약했던 미국인 법학자 프랭크 굿나우(Frank J. Goodnow, 1859-1939) 중국 전통의 황제지배체제와 전통문화의 특성 정치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강력한 총통제를 헌법적 대안으로 제시했다. 중국사회에 팽배한 유가적 가족윤리, 종법제도, 정치적 분열상과 정치조직의 부재, 인민 자치정부 경험의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그는 서구식 대의제(代議制)가 당시의 중국에서 실현될 없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지도자로서 원세개를 신임했던 굿나우는 강력한 중앙집권식 정부의 확립을 권유했고, 다수 중국학자들 역시 일본, 독일 모델의 입헌군주제를 통한 근대화의 달성을 희구했다.

 

원세개의 중화제국(中華帝國) 그러나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 운남성에서 시작된 “호국(護國)전쟁”은 귀주와 광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원세개는 북양군의 무력을 재규합해 남방의 반란에 맞서려 하지만, 이미 반란에 가담한 각성에서 군사행동이 지속되자 원세개는 후에 결국 황제체제 폐기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로 병상에 누운 원세개는 1916 6 요독증(尿毒症)으로 사망하고 만다. 민국혁명을 뒤집어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 했던 원세개의 꿈은 그렇게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원세개의 죽음이 바로 민국혁명은 이미 불가역(不可逆) 역사적 대세임였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중국은 곧이어 10년이 넘는 세월 참혹한 군벌시대로 돌입하게 되는데, 역사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1912년부터 1928년까지 16 동안 무려 삼백 명의 군벌이 140회 이상 대규모 전투를 일으켰다. ()군벌 통일전선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1 국공합작을 이루게 된다. 민국혁명(民國革命)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친 셈이다. 바로 이유 때문에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과 대륙에서 공히 중국근대 혁명의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후의 중국역사는 민국혁명의 완수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있으리라.

 

1949 모택동은 스스로 손문의 공화혁명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서 민국의 이념을 실현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때문에 신중국의 국명(國名) 당시 지도부의 치열한 고민 끝에 1949 9 27 “인민정치협상회의”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라 정해졌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러나 명실상부한 공화국이 되었는가? 황제가 등장한 공화국은 더는 공화국일 없다.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순간, 공화국의 이상은 붕괴된 이치와도 같다.

 

지난 3 13 국가주석의 임기조항을 폐기한 전인대의 결정은 혹시 1911 이래 100 넘게 중국인이 꾸어 왔던 민국몽(民國夢) 찬탈(簒奪) 아닐까. 그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중국의 네티즌들은 즉각적으로 칭제건원(稱帝建元) 원세개를 떠올렸으리라. 이에 깜짝 놀란 중국정부는 SNS 쇄도하는 헌법, 헌법개정 등의 민감한 단어들과 함께 “원세개”란 키워드를 마구 삭제하고 있다. 대체 이런 촌극이 벌어져야만 하나?

 

호주의 멜번의 중국 영사관에서 민국혁명을 경축하며 청조의 깃발 대신 민국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장면http://www.nma.gov.au/collections/collection_interactives/endurance_scroll/harvest_of_endurance_html_version/explore_the_scroll/republican_victory
호주의 멜번의 중국 영사관에서 1911년 "민국혁명"을 경축하며 청조의 깃발 대신 중화민국의 새 깃발을 내걸고 있는 장면http://www.nma.gov.au/collections/collection_interactives/endurance_scroll/harvest_of_endurance_html_version/explore_the_scroll/republican_victory

 

3. 헌법과 개인숭배

 

다시금 지난 3 13 전인대의 개헌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 헌법 전문에는 이제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등소평, 습근평 이렇게 다섯 명의 이름이 나란히 열거된다. 아직 임기를 마치지도 않은 현직의 국가주석이 자신의 “사상(思想)”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서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천명한 셈이다.

 

사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 표현의 자유, 국가권력의 제한을 근간으로 삼는 자유주의 헌법사상에 비춰 본다면, 실로 위헌적(違憲的) 결정이 아닐 없다. 전통시대 중국의 황제들조차도 언필칭 “요순우탕 문무주공” 고대의 성왕(聖王) 칭송했을 , 스스로의 이름과 생각을 국가의 모법(母法)으로 삼지는 않았다. 황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념을 설파한 공자를 숭배함으로써 당대의 보편(普遍)이념을 선양하는 겸양(謙讓) 미덕을 발휘했다. 비근한 예로 청나라 절대군주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6-1796) 공묘(孔廟) 찾아가 공자상() 앞에서 여덟 차례 땅바닥에 머리를 찧는 고두(叩頭) 예를 갖췄다. 스스로 절대권위가 되기보단 당대의 보편가치를 수호하고 선양함으로써 “절대권력”을 유지했던 지나간 시대 절대군주의 통치술이다.

 

헌법의 전문에 박아 넣을 만큼 개인의 사상이 과연 무오류의 절대적 권위를, 초시간적 보편 가치를 가질 있을까? 아마도 한때 모택동은 그럴 없으리라 생각했던 듯하다. 1956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8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1945년의 7 중국공산당대회 이후 11 만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후로는 첫째로 열리는 기념비적 전국대표대회였다. 놀랍게도 대회에선 중국공산당의 헌장(=당장黨章) 명시된 “모택동 사상”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항일전쟁이 끝나지 않은 1945 4 23 연안에서 중국공산당 7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중공 내부에서 모택동은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대회당에는 거대한 모택동의 초상이 내걸렸고, 아래엔 “모택동의 기치 아래 승리전진”이란 표어가 나붙었다. 당시 채택된 중국공산당의 헌장에는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적 통일사상인 모택동사상을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 이후 1954 헌법의 전문에 자연스럽게 중국공산당의 헌장에 적힌 그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이 3 국가이념으로 채택되었다. 8차 대표대회의 당장(黨章)에선 그러나 모택동 사상을 삭제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는 구절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유소기(劉少奇, 1898-1969) “정치보고, 등소평(鄧小平, 1904-1997) “당장개정보고”(修改黨章報告) 8 결의 에서 모두 모택동 사상은 언급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모든 대회 대표들이 발언을 때에도 모두 모택동 사상은 거론되지 않았다.

 

중공의 지도부는 중국공산당 헌장에서 모택동 사상을 삭제하려 했을까. 중국 밖의 많은 학자들은 당시 소련에서 불기 시작한 스탈린 격하 운동에 부응해 중공지도부 내에서도 개인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형성됐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당시 유소기, 등소평, 팽덕회(彭德懷, 1898-1974) 등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모택동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결과 모택동 사상은 헌장에서 삭제되고 대신 집단영도의 중요성이 강조됐다는 해석이다.

 

이와 달리 중국의 학자들은 흔히 중국공산당 8 전국대표회의에서 모택동 사상이 삭제된 이유는 바로 모택동 본인의 결정이라 주장한다. 1948 이후 모택동은 이미 보고서를 검열할 “모택동 사상”을 삭제하라 명령했으며, 이후 사료를 살펴보면 점은 더욱 분명하다 한다.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바로 모택동 본인이 먼저 나서서 “모택동 사상”의 언급을 경계했다는 주장이다.

 

만약 중국학자들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모택동은 자신의 개인숭배에 주저했던 듯하다. 물론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모택동의 개인숭배는 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극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권력에 중독된 모택동은 개인숭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1970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의 인터뷰에서 모택동은 “민중을 자극하기 위해선 우상숭배가 필요하다”면서 “중국인들이 3 년간 황제숭배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습관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중국인들은 2018 오늘날까지 황제숭배의 습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인민대표단의 99.8프로의 찬성률은 바로 그런 황제체제의 관성을 의미할까?

 

https://chineseposters.net/themes/mao-cult.php
"모택동 동지는 당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시다."(1969)
https://chineseposters.net/themes/mao-cult.php

 

 

4. 헌법전문(憲法前文), 무엇을 담을 것인가?

 

중국의 헌법전문은 국가의 기본이념 외에도 아편전쟁 이래 중국현대사에 관한 국가 공식의 역사서술이 담겨 있다. 세계 최장(最長) 이란의 헌법전문은 “이슬람혁명”의 주요사건을 서술하며, 코란을 직접 인용해서 이슬람 율법의 절대권위를 강조한다. 반면 미국의 헌법전문은 자유와 평화의 일반규정을 담은 소략한 52개의 단어(200 원고지 반장 분량)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기본법 전문은 불과 48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헌법전문에는 헌법 형성의 연혁과 국가의 이념적 기초가 서술된다. 미국헌법처럼 역사가 오랜 헌법일수록 간략하고, 신생국가의 헌법일수록 경향이 보인다. 자유주의 헌법일수록 높은 추상수준의 기초원리만을 기술한다. 반면 비자유주의(illiberal) 헌법일수록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는 경향이 보인다. 헌법 제정 개정의 연혁을 간명하게 적는 헌법이 있는가 하면 특정 역사인식을 정통사관으로 강요하는 고압적인 헌법도 있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 표현을 빌면, 자유주의 헌법전문은 얇고(thin), 비자유주의 헌법전문은 두껍다(thick). 자유주의 헌법은 최대한 많은 구성원, 최대한 다양한 집단을 포용하기 때문에 전문(前文) 얇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비자유주의 헌법은 특정역사관, 특정 종교관, 특정사상까지 강요하기 때문에 전문(前文) 두꺼워 수밖에 없다. 얇은 헌법은 그만큼 다양한 집단, 다양한 사상에 개방적이다. 구성원에게 많은 요구조건을 내거는 두터운 헌법은 역으로 한정적이고 폐쇄적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국회헌법개정자문위(2014) 국회헌법개정특위 자문위(2018) 보고서에서는 헌법전문에 제헌헌법의 전문에 덧붙여 기본원리와 함께 개정과정을 적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상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신성시하는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할 , 당연한 귀결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결코 역사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없다. 국가가 물러선 공간에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이 형성된다. 시민들은 사상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경쟁한다.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증인의 증언이 쌓여갈수록 역사해석은 극적으로 뒤바뀌고 달라진다. 다양한 역사해석이 길항하는 사상의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은 반칙행위만 적발하고 처벌하는 머물러야 한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만인평등" 이념은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수정헌법 13, 14, 15조”(Reconstruction Amendments)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지만, 미국의 헌법엔 남북전쟁이라는 구체적 사건 자체가 헌법전(憲法典) 내에서 거론되지 않는다. “수정헌법 12, 14, 15조”는 남북전쟁의 결과이지만, 남북전쟁에 관해 국가가 구체적인 역사해석을 내릴 권리는 없다. 국가가 개인에게 특정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할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병균 제거하듯 특정 역사해석을 “소독하고”(sanitize), 특정 역사해석을 국가공식의 입장으로 채택해 모든 구성원에 강요하는 헌법은 자유주의 기본원칙에 반한다. 요컨대 자유주의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국가의 유권해석이란 있을 없다.

 

부득이 헌법전문에 역사서술을 넣으려면, 헌법 형성의 연혁에 관한 객관적 서술에 그쳐야 것이다. 건국 이후에 전개되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국가의 공식입장을 헌법전문에 독점적으로 넣으려는 발상은 전체주의적 월권이다. 건국에 버금가는 체제전환 사태를 겪은 국가의 헌법에서는 전형적으로 과거사 반성이 나타나지만(남아공, 일본, 독일, 동구권), 경우에도 특정 사건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민국의 꿈을 저버리는 중국의 현재 상황을 관망하면서 최근 “개헌”을 둘러싸고 이념전쟁에 휩싸인 대한민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앞으로 채택될 개정헌법의 전문(前文) 200 원고지 반장 분량으로 축약하는 안은 어떤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제1과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08100017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제1과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08100017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沈志,“中共八大为什么不提泽东思想”《历史教学2005年第5

Noel Pugach, “Embarrassed Monarchist: Frank J. Goodnow and Constitutional Development in China,1913-1915,”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42, No. 4 (Nov., 1973), pp. 499-517

Justin O. Frosini, Constitutional Preambles At a Crossroads between Politics and Law (Finito di stampare nel mese di luglio 2012)

Michael Walzer, Think and Thin: Moral Argument at Home and Abroad (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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