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1980년 9월13일에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심 당시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 피고는 최후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죽고 사는 것도 하느님에게 맡긴다"면서, 국민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실현되고 국민이 공산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조국 통일이 이룩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최후변론을 마쳤다.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1980년 11월 3일 김대중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년형으로 다시 감형되었으며, 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변호인이 제출한 상고이유서, 그리고 김대중 피고의 자필로 작성한 상고이유(보충)서다. 김대중 피고는 자필 상고이유(보충)서에서 "본인은 전 정치생활을 통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나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면서 "재판부가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 공정한 판결을 내려 역사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심판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17일, 학생들의 시위 격화로 숨 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에서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결정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회의록이다. 출전은 월간지 '신동아' 1986년 10월호에 게재됐던 것인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 측 증거자료로 활용됐고, 또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이날 회의는 오전 10시~15시까지 국방부에서 군단장급(3성 장군) 이상의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4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종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다.이날 회의에서 주영복 국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편집자 주] 이 글은 1980년 사면 복권된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 1980년 3월26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연설한 '민족혼과 더불어' 연설 전문으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 증거물로 제출됐다. 이 연설은 김대중 의장이 1975년 이래 처음 공개된 장소에서 갖는 대중연설이란 의미와 함께 1980년의 시국을 바라보는 김대중 의장의 시국관과 정치참여 의지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이 연설문 원고엔 몇 년만에 처음 대중연설을 시작하는 흥분된 분위기, 그리고 과열된 청중들의 반응 등이 느껴진다.김대중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최규하 정권에서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을 역임한 이원홍씨의 검찰 진술조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녀 10월 26일 시해되고 1980년 이원홍씨는 1980년 당시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으로서 최규하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면서 그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인물이다. 이원홍씨는 검찰 진술에서 "1980년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데모가 많았다." "당시 상황에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이원홍씨의 진술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속내를 어느 정도 유추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당시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검찰 진술조서다.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이 이른바 보안사가 주도한 ‘K-공작’이라 명명된 신군부의 배후조종에 의해 단행된 언론 통폐합이다. 언론 통폐합 조치로 인해 중앙지는 7개지에서 6개로 줄었고, 경제지도 2개지로 정리되었으며 지방지는 1도 1지 원칙 하에 14개가 10개지로
[편집자 주] 1979년~1980년에 이르는 정치적 격류 속에서 이학봉씨의 존재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날고 기는 이 나라의 세도가들이 그의 호령 한 마디에 영어의 몸이 됐기 때문.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수부 수사단장으로서 이학봉씨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을 건의하고 직접 조사한 장본인이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김종필 부정축재사건 등 현대사를 뒤흔든 대형 사건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당시 보안사 5인방이라 불리며 전두환 장군을 도와 5공 창출의 핵심이 됐던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보안사 5인방 중 전두환 장군의 집권에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공 창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1차 피의자 신문조서다.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허화평, 그리고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로서 이들이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이며 그중에서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삼두마차의 리더였다는 것이다. 허화평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모든 정치적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실행된 것인 만큼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를 대표로 한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
[편집자 주] 이 문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됐던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검찰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권정달 씨는 1980년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 을 작성 집행하여 전두환 권력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 정부에서 수사가 진행되자 검찰 진술에서 “시국수습방안은 실질적인 집권 시나리오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신군부(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정달 씨의 진술 내용은 상하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됐던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검찰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권정달 씨는 검찰 진술에서 “시국수습방안은 실질적인 집권 시나리오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신군부(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정달 씨는 서울의 봄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보안사에서 정보처장으로 근무하며 신군부 측에 서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하고, 이를 집행하여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와 5·18, 5공화국 창출의 한 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조서의 일부 내용이다. 12·12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도와 5공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당시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가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수사 과정에서 검찰 진술을 했는데, "민주주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상대적인 다수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광주시민의 명예회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부터 제5공화국이 탄생한 1980년 12월 31일까지의 주요 일지를 정리한 자료다. 박정희 시해사건과 유신체제의 붕괴, 이를 기회로 삼아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경쟁하기 시작한 3김 씨(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들의 선전선동으로 대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가 격화되었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와중에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국제물가가 폭등하면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혼란이 가열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
[편집자 주] 이 자료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수사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은 정치 보복”이라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합천에서 강제 연행돼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찰로부터 세 차례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된다. 이 신문에서 전 전 대통령은 “12·12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의심받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도 본인의
[편집자 주] 이 자료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수사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은 정치 보복”이라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합천에서 강제 연행돼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찰로부터 세 차례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된다. 이 신문에서 전 전 대통령은 “12·12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의심받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도 본인
[편집자 주] 이 자료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 수사 당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은 정치 보복”이라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합천에서 강제 연행돼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찰로부터 세 차례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된다.이 신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의심받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