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창출 기획자 허화평 신문조서(下), "3김 씨 조금 참고 기다렸어야"
5공 창출 기획자 허화평 신문조서(下), "3김 씨 조금 참고 기다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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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23 09:54:50
  • 최종수정 2019.01.0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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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이 민중혁명 노선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최규하 정부나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지요. 그 대표가 바로 김대중입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공 창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1차 피의자 신문조서다.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허화평, 그리고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로서 이들이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이며 그중에서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삼두마차의 리더였다는 것이다. 허화평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모든 정치적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실행된 것인 만큼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를 대표로 한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와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고 학생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사회혼란이 야기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을 도와 군부정권을 창출했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관련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5공 창출의 기획자 허화평 씨는 1980년 봄 당시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이 민중혁명 노선이며, 그 대표가 김대중이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5공 창출의 기획자 허화평 씨는 1980년 봄 당시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이 민중혁명 노선이며, 그 대표가 김대중이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나는 국보위와 관련 없다

-1980년 5월21일 신현확 총리가 사퇴한 것은 신군부에서 신 총리가 국보위 설치를 반대하는 데 불만을 품고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할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신 총리가 그 정보를 사전입수, 지레 겁을 먹고 사퇴한 것이 아닌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1980년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안이 의결됐는데 신군부 내에서 비상권력기구 설치가 최초로 논의된 때가 언제인가요.

"권정달 정보처장의 소관업무이기 때문에 본인은 알지 못합니다."

-당초에는 4․19기념일이 되면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므로 그 상황을 타고 국보위를 설치하기로 예정했다가 예상 밖으로 4․19가 조용하게 지나가자 5․17 계엄확대와 동시에 설치하려 했으나, 최 대통령의 반대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보류하고 있다가, 광주사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진압을 기다려 5월말 설치를 추진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정보처에서 작업을 해 오픈이 된 다음 참모들도 알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본인이 답변할 입장이 못됩니다."

-국보위, 또는 명칭과 관계없이 비상권력기구 설치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는가요.

"정보처에서 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 계획은 전 장군의 보안사 핵심참모이던 피의자와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 4명이 주도했고 실무작업은 권정달 정보처장이 정보처 요원과 법조계 인사들을 동원해 추진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설치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국보위는 이른바 혁명평의회의 성격을 갖는 비상권력기구인데, 합법의 외관을 갖추기 위해 계엄법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하는 형식을 밟은 것이 아닌가요.

"본인은 구체적인 진행사항을 알지 못합니다. 만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전 장군이 5월 중순에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국보위는 설치령에 규정된 대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 성격의 국보위이었나요. 아니면 혁명평의회 성격을 갖는 비상권력기구인 국보위이었나요.

"전 장군이 어떻게 보고했는지 본인은 알만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만 자문․보좌기관으로 국보위를 설치했으니까 그런 정도로 보고를 했겠지요."

-국보위원 24명 가운데 국무위원 8명, 대통령 비서실장 1명, 대통령 정치담당특보 1명 등 10명은 평소에도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14명은 모두 현역군인들로서 국방분야 이외에는 특별히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자문․보좌한다는 말인가요.

"국보위 출범 이후에는 전 장군이 거의 매일 최 대통령을 만나 업무보고를 하고 지침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 점에서 최 대통령에게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무슨 기구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왜 그것이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 대통령, 전두환과 사이 좋았다

-1980년 2월18일 각계 원료 23명으로 대통령 자문기관인 국정자문회의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자문․보좌기구로 국보위를 설치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 아닌가요.

"국정자문회의가 구성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구성원들로서는 비상시국하에서 대통령을 자문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니까 새로운 자문기구를 구성한 것이겠지요."

-1980년 5월17일 주영복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친 후 최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국보위 설치문제를 보고했을 때는 두 분 모두 반대했는데 그 후 어떻게 하여 설치가 승인됐는가요.

"그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보위 설치를 강행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요.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보좌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법적으로는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 형식을 빌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집권을 계획하고 있는 군부가 내각을 지휘하여 국정 장악하고, 장차 집권을 하게 될 군부의 실력자인 전 장군을 상임위원장으로서 내세워 최 대통령을 배제 내지 후선으로 제치고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국보위를 설치한 것이 아닌가요.

"의장이 대통령이고, 국보위 출범 이후 전 장군이 최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 열심히 모신 점에 비추어 자문․보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 장군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아 최 대통령을 보좌하면서부터는 최 대통령이 상당히 짐을 덜었으니까요. 당시 최 대통령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 전두환 장군이 다른 데 뜻이 있었다면 두 분 간의 관계가 그렇게 좋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국보위는 사실상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조치였지요.

"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 당시에는 전 장군이 주어진 직분 내에서도 국정에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인데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같은 타이틀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에 이미 신군부에 의해 설치 계획이 입안된 점이나 국보위 설치와 동시에 신군부가 국보위를 통해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장악하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점, 국보위 이름으로 혁명상황이 아니면 추진하기 어려운 과감한 조치들을 추진한 점 등에 비추어 국보위가 5․16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혁명위원회 성격의 비상기구 또는 사실상 군정기관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요.

"본인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국보위가 출범했다고 하여 내각이나 계엄사의 기능이 없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국보위의 이름으로 여러 조치들이 추진되고 집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시행된 것이고 국보위가 전횡한 것은 아닙니다. 최 대통령이 내각을 중시하느냐 국보위를 중시하느냐의 문제는 통치권자의 판단 문제이지요. 최 대통령으로서야 계엄사령관보다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자문받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설입니다"

-피의자가 국보위 분과위원 등의 선정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허문도의 검찰 수사기록을 보면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이 추천하여 문공분과위원으로 임명됐을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요청으로 허만일, 염길정을 추천한 일까지 있다고 진술했는데 어떤가요.

"허문도는 구미 출신의 박재홍 의원 추천으로 전 장군을 처음 만난 사람인데 전 장군의 호감을 사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맡았고, 그 인연으로 문공분과위원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과위원 인선작업은 정보처에서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삼수 인사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 등은 국보위 분과위원에 임명됐는데 피의자는 왜 아무 자리도 맡지 않았는가요.

"본인은 사령관실을 지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0년 6월13일 국보위가 확정 발표한 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 타개, 정치발전과 내실도모,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 등 4대 기본목표와 권력형 비리 등 공직자 축재․부조리 척결과 불신풍조 불식 등 각종 사회악 근절 등 9개 추진 지침의 입안경위는 어떠한가요.

"정보처에서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 등 3명이 9개 추진지침을 입안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소설입니다."

-피의자가 국보위 활동과 관련해 안건을 제출하거나 주요 안건에 대해 의견을 제출한 일이 있는가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피의자는 국보위가 설치령에 규정한 목적대로 또 그 범위 내에서 자문․보좌기관으로 운영됐다고 보는가요. 아니면 설치령에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 사실상 비상기구로 운영됐다고 보는가요.

"자문․보좌기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청교육이나 과외금지 등은 잘하는 조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보위 설치령 어디를 봐도 입법기능은 커녕 행정기능을 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는데 공무원 숙정, 사회악 사범 일소, 과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기능을 수반해야 하는 조치들을 국보위에서 어떻게 추진할 수 있는가요.

"대통령이 하겠다면 하는 것이지요. 내각에서도 그런 조치들을 할 수 있겠지만 최 대통령이 국보위에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면 국보위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이 하겠다면 하는 거지요"

-최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국보위를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하겠다고 재가를 받아 놓고 실제로는 무소불위의 기구로 운영했는데, 이는 결국 국보위의 성격․역할․권한 등에 관해 최 대통령을 속인 것이 아닌가요.

"최 대통령의 결재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 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이므로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6․12 특별담화에서 국보위의 성격 등에 대한 항간의 의구심에 대해 국보위는 자문․보좌기관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는 국보위의 역할을 자문․보좌기관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대통령의 담화가 누구의 압력에 대해 나온 것이 아니라면 대통령의 말씀 내용을 믿어야지요. 최 대통령의 생각대로 자문․보좌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981년 10월 전두환 대통령 명의로 발간된 국보위 백서를 보면 전 대통령이 국보위는 제5공화국 탄생의 산실이었고, 국보위가 추진해온 중요 정책은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고 발간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국보위가 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이 아니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기구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 아닌가요.

"설치 당시 의도는 자문․보좌기구였지만 대통령직에 오르고 나서 보니 국보위에서 추진한 각종 개혁 조치들이 5공화국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니까 국보위를 5공화국의 산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으로 설치한 국보위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 소관사항인 위와 같은 조치들을 입안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 조치라는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최 대통령이 답변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치가 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집행된 것이므로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소․고발인들은 피고소․고발인들이 폭동으로 12․12 사건, 5․18 사건, 5․20 국회 봉쇄 사건 등을 일으켜 국가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킨 후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후에 이를 입법기관으로까지 변경했으므로 국보위 활동은 내란수행 과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대통령이 통치권 차원에서 행한 일이므로 내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최 대통령이 내란수괴라는 말입니까. 1979년 12월12일 밤 대통령의 재가 지연이라는 소동이 있고 나서부터는 모든 일을 최 대통령에게 사전보고해 결심을 받은 후 집행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에서 추진한 개혁조치들 예컨대 공무원 숙정, 과외금지 조치, 폭력배 검거 등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환심을 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군부가 사회 각 부분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집권과는 관계 없습니다. 비상계엄하에서 여러 가지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대통령 결재를 받아 추진한 것입니다. 국보위에서 그런 조치들을 취한다고 해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국보위 활동에 국민 호응 대단

-최규하 대통령은 스스로를 위기관리정부․과도정부라고 성격을 규정했고, 과도정부는 정치일정을 차질없이 진행,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그 역할인데 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위와 같은 과감한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결국 개혁을 빙자해 군부 집권의 당위성, 필요성,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런 조치들을 추진한 것이 아닌가요.

"국보위에서 추진한 조치들은 비상시국하에서 한시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이지 평상시에는 추진하기 어려운 조치이지요. 누가 새 정부를 맡든지 간에 새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판단하에 통치권자가 결심하여 추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통치권자가 비상시기를 이용해 국민의 편에 서서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요."

-일부에서는 국보위가 추진한 여러 조치들이 최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시행된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는 최 대통령이 능동적으로 그런 조치를 추진했다고는 보기 어렵고 군부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힘으로 밀어붙이니까 힘에 밀려 방임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최 대통령을 모욕하는 발언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각종 조치들 가운데 나중에 문제가 안 된 부분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요.

"국보위가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것이니까 무조건 부정하는 바람에 문제가 야기된 것이지 당시에는 국민들의 호응과 참여가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조치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국가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조치들은 후임 정부에 미루고 군부가 집권을 계획할 것이 아니라, 과도 정부가 정치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한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논쟁이 근원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그런 이야기는 거듭 말하지만 민중혁명을 도모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치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그들인데 지금와서 군부의 역할에 시비 거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 출범 후인 1980년 6월12일 최 대통령,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신두영 감사원장 및 전 국무위원과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등이 배석한 가운데 국가 기강 확립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때 1980년 10월 말까지 개헌안 확정, 1981년 상반기 선거,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공공질서 확립과 사회 안정이 이룩된다면 학원정상화 및 정치활동의 재개를 포함, 우리나라의 경제․사회발전에 상응하는 정치발전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의 뜻이 좌절되어 중도에 하야하고 전 장군이 두 달 후에 집권했는데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배경을 알고 있는가요.

"일부 정치권에서 정치일정을 가지고 계속 시비를 제기하니까 그런 담화를 발표한 것이겠지요."

 

최 대통령 하야는 본인의 결심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의 집권의도를 눈치 채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본인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군부가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최 대통령이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것은 자신의 주도하에 정치일정을 추진, 정부를 이양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 때는 이미 3김 씨가 이런저런 이유로 배제된 마당이므로 과연 어떤 생각에서 어떤 세력을 염두에 두고 이런 담화를 발표한 것인가요.

"3김 씨에 대한 체포 조치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정상대로 갔다면 새 헌법에 따른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계엄해제 등 모든 조치가 이루어졌겠지요."

-박 대통령의 사망으로 어느 날 갑자기 공석이 된 권좌를 적어도 3김 씨에게는 물려줄 수 없다는 점에 최 대통령과 신군부 간에 의견 합치가 있어, 그에 따라 3김 씨가 아닌 신군부에 정권을 이양할 생각으로 이런 담화를 발표한 것은 아닌가요.

"그 문제는 최 대통령과 전 장군 등 몇몇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구체적 정치일정을 공개적으로 밝혔음에도 신군부가 최 대통령을 담화 발표 후 3개월도 안된 시점에서 하야케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는가요.

"최 대통령의 하여 부분에 대해서는 참모들에게 물어보아야 해답이 안 나옵니다. 그것은 최 대통령의 결심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최 대통령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요."

-군부가 집권을 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결정하기 않고 있던 중, 최 대통령이 1981년 6월 말 이전이라는 정치일정을 제시하자 군부 내에서 집권 시기에 관해 의견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집권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론이 나서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을 하야시킨 것이 아닌가요.

"그런 중대한 사안은 군부 내에서 여러 사람들이 관여해 협의할 성질이 아닙니다."

-1980년 9월29일 국보위 설치령을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령으로 개정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이 주도한 일이므로 본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5공화국 헌법 개정안에서 처음에는 국보위가 국회권한 대행기구로 되어 있었으나 최종단계에서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의 아이디어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국보위는 설치 당시부터 비상권력기구로서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이 입법권한도 행사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요."

"본인의 관심 밖의 일입니다."

-1980년 10월27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같은 날 삼청동 국보위 사무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대리한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첫 회의를 열어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심의 통과시켰다고 하는데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입법권한을 갖게된 근거가 무엇이었는가요.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보위 설치 직후부터 국보위 법사분과위원회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 때는 국보위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으므로 참모들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국보위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하기 전에도 보안사 한용원 정보1과장이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피의자의 요청으로 유신헌법을 대신할 헌법개정 방향을 검토한 일이 있다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나요.

"본인은 한용원 정보1과장에게 그런 지시를 한 일이 없습니다. 한용원은 권정달 정보처장의 휘하 사람이므로 본인이 일을 시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한 우병규의 진술에 의하면 이 위원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의 선출시기 등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문, 본문 121조, 부칙 7조로 된 헌법 개정안을 마련, 조문화까지 마친 상태에서 계엄포고령 10호로 사실상 국회가 문을 닫고 정치활동이 금지됨으로써 백지화됐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마련한 개정 헌법안을 잘 이용하면 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이 모여 또 다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국보위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헌법개정 문제가 당시 현안이었으니까 역시 대통령을 자문․보좌하는 차원에서 작업이 된 것이겠지요."

 

대통령 직선제 원했다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국보위에 헌법개정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도록 했다는 것은 전두환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집권에 뜻을 두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한 명백한 증거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국보위에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국보위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들이 최 대통령에게 보고됐기 때문에 이 문제도 당연히 보고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헌법 개정안 골격이 마련된 뒤인 1980년 7월15일경 전 장군이 피의자와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그리고 중정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사령관실에 소집한 다음 노태우 장군을 모셔오라고 해 권정달 정보처장이 개헌안의 골격을 설명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대통령 임기 문제에 관해 논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 장군은 안정론을 내세워 간선제를, 허삼수 인사처장은 국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직선제를 주장하여 논란을 벌이다 전 장군이 간선제에 낙점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과 허삼수 인사처장이 나서서 국민들에게 바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만 결론은 다르게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미국식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참모들이 직선제를 건의할 수야 있지만 결론은 보안사령관 등 상부에서 결정하는 일이니까 구체적인 이유까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 당초 신군부 내의 합의는 6년이었으나 전 장군의 주장으로 7년으로 연장됐다고 하는데 그 경위가 어떠한가요.

"5년, 6년, 7년 등 여러 안이 검토된 것으로 아는데 최종적으로 어떻게 7년으로 결정이 됐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피의자가 우병규로부터 임기연장 사실을 통보받고 굉장히 화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인은 우병규로부터 그런 통보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 때 최 대통령이 1980년 6월12일 특별담화에서 밝힌 정치일정은 곤란하므로 일정을 앞당기는 문제,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문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선거 준비 및 신당 창당 문제 등에 관해서도 논의가 됐다고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가요.

"대통령 선출방법과 임기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가 됐지 대통령 하야나 신당 창당 등은 거론된 바가 없습니다."

-5공화국 헌법 부칙으로 기존의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정치활동 규제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정치인들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정치행태를 정화하기 위한 조치로 알고 있습니다."

-5․17 계엄확대 조치,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금지 조치, 군 병력에 의한 국회 점령과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 김종필․김대중․김영삼 등 이른바 3김의 체포․구속․연금 등 제거조치로 사실상 국회와 정당 기능이 마비되고 정치인을 제거한 상황을 사후에 헌법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가요.

"본인이 헌법개정 작업에 관여한 일이 없으므로 구체적인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만 정치인 정화차원에서 일시적으로 묶어두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안사에서 신당 창당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권정달 정보처장 주도하에 신당 창당 작업을 진행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에 개입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후로서 당시 권정달 정보처장은 현역 신분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당 창당에 관여 안 해

-신당 창당 과정에서 전두환, 정호용 장관과 가까운 권익현, 김윤환 의원이 신당 창당과 관련한 작업을 시작했으나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이 그 사람들을 밀어내고 보안사에서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권익현, 김윤환 의원이 신당 창당 작업에 관여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신당 창당과 관련, 일부에서는 공화당을 등에 업을 경우 언젠가 제기될지도 모를 정동성 시비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정권장악에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공화당 숙정을 전제로 한 존속을 주장했는데,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한용원 정보1과장 등이 18년간의 집권기간 중 공화당이 극도로 무기력해졌고, 유신의 모태라는 이미지를 씻기 어려우며, 당 간부들이 부패했다는 점을 들어 공화당 해체와 신당 창당을 주장, 결국 신당을 창당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나 허삼수 인사처장은 신당 창당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나 허삼수 인사처장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원기 부총리 증언에 의하면 1980년 초여름 무렵 전 장군 요청으로 국무회의를 소집, 예비비에서 1백억 원을 지원했다는데 그 돈이 신당 창당에 사용되지 않았나요.

"본인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비서실 운영에 들어가는 돈에 대해서만 집행할 뿐입니다."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이 하야했는데, 신군부 내에서 처음으로 최 대통령 하야를 논의하고 방안을 검토한 때가 언제인가요.

"최 대통령 하야 문제는 참모들이 일체 관여한 일이 없으므로 언제 그런 검토가 시작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최 대통령이 국보위가 출범한 이후인 1980년 6월12일 특별담화를 통해 국보위를 자문․보좌기관으로 규정하고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밝히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 구체적으로 최 대통령 하야 문제를 검토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 그런 문제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참모들과 검토할 사항이 아니지요."

-국정운영의 주도권이 신군부 쪽으로 넘어와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끌어내릴 수도 없어 최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압력을 가해 고립시키는 한편, 원로들을 동원, 설득전을 펴는 양면작전을 구사해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그런 방침이 있었는지 여부를 알만한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신군부측에서 최 대통령 하야를 설득해 줄 원로로 신현확, 김정렬 전 국무총리를 선정하고, 노태우 장군이 고교 선배인 신현확 총리에게 최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 총리가 거절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금시초문입니다."

어떻게 대통령을 협박할 수 있습니까?

-신 총리가 거절하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군 등이 1930년 동경유학 시절부터 최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인 김정렬에게 하야를 설득하도록 요청, 金 전 총리가 밀사로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본인도 들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최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설득에 나섰을 때 최 대통령이 "국민들은 군인들이 나서는 것보다 나 같이 별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도정권을 끌고 가기를 원한다."며 하야를 거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김재규 내란사건과 관련하여 전 장군과 육본 검찰부장 전창열 중령이 1979년 12월1일 22시경 최 대통령을 조사하면서 1979년 10월26일 밤 최규하 국무총리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대처를 하지 않아 내란방조 혐의가 있는 듯 진술했으나 김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조서를 정리해 준 일이 있었는데요. 최 대통령이 김정렬의 수회에 걸친 하야 설득을 거부하자 다시 이를 문제삼아 구속 등 사법조치까지 검토했다는데 사실인가요.

"12․12 사건으로 최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것은 본인도 알고 있지만 그때 일을 문제 삼아 사법조치까지 검토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1980년 7월30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무려 5시간 동안 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끝에 최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결심을 받아냈다는데 그 때 설득을 했나요. 아니면 내란방조 등의 혐의를 문제 삼아 협박을 했나요.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사망했으니까 최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당시 사정을 알 수 있겠지요."

-최 대통령이 사법조치도 불사하겠다면서 끝까지 하야를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대통령을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김정렬 전 총리가 최 대통령 하야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초대 민정당 대표를 권했으나 본인이 사양하자 5공 말기에 국무총리로 임명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김정렬씨가 국무총리를 할 때 본인은 한국에 없었으므로 그 배경을 알 수 없습니다."

-1980년 7월31일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을 청와대로 불러 하야 결심을 밝히면서 "내 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 했으나 전 장군은 이를 사양했다는데, 하야를 하라고 해놓고 사양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설령 사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요."

 

전두환, “내가 언제 대통령 되고 싶어 대통령이 됐느냐”

-피의자는 최 대통령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하야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시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신이 계속 국정을 이끌고 가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판단,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980년 8월8일 전 장군이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지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 1979년 10월26일 이전에는 군대 밖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들도 나를 몰랐고 국제사회도 나를 몰랐다. 그 때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왔고 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나는 국민들의 주시를 받게 됐다. 한국에서의 지도력은 단순히 본인이 원한다거나 야망만 가지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명에 맡겨야 한다. 한국은 명백히 군부의 리더십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해 집권의지를 분명하게 공표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최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결심을 통보받은 이후인가요. 아니면 하야 결심을 미루고 있는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한 것인가요.

"언제 전 장군이 그런 회견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내가 언제 하고 싶어서 대통령 했느냐, 상황에 밀려서 대통령이 된 것일 뿐이다. 대통령 자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느냐는 말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1980년 8월11일 전 장군이 MBC TV와 특별회견을 하고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표로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군부가 창출하고자 했던 새 공화국의 지도이념 성안 작업은 이미 1980년 3월 말경 허문도의 소개로 전 장군을 만난 김영작이 허문도의 부탁으로 착수했던 것이며, 처음에는 창조적 민족주의가 새 공화국의 지도 이념으로 제시됐다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민주복지국가로 낙착됐다는데 사실인가요.

"창조적이라는 말은 허문도가 자주 사용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허문도와 김영작이 지도이념 성안작업에 참여했다는 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듣습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민주복지국가 건설이나 정의사회구현 등의 구호는 국보위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8월21일 군 지휘관들이 모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 장군의 대통령 추대를 결의했는데, 그 모임은 누구의 요청에 따라 소집된 것인가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소집 문제는 우리 선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니까 주재자인 국방부장관이 소집한 것이겠지요."

-군 지휘관들이 모여 현역 대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결의할 수 있는 것인가요.

"특수상황에서 발생된 일이라고 봅니다."

-10․26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80년 9월1일 전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뜻을 모으고 그것을 위한 방안을 처음 검토하기 시작한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요.

"정권장악에 뜻을 두고 그 방안을 검토한 일이 없었습니다."

 

전두환 집권의욕의 단서들

-1980년 1월 하순경 최영희 전 유정회 의장이 김종필씨를 밀어주도록 설득하기 위해 전 장군을 만나 "계엄당국이 이렇게 시국을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빨리 가닥을 잡고 수습해야 하는데 유일한 대안이 김종필이다. 공화당 기반과 행정부, 군부가 김종필을 도와주면 아무리 야세(野勢)가 강해도 이길 수 있다. 全사령관이 나서서 김종필을 밀어달라"고 했더니 전 장군은 "국민들이 김종필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부패비리 등 흠이 많아요. 김종필뿐만 아니라 3김 씨 모두 안됩니다."라고 3김 불가론을 펴, "그렇다면 군이 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지 않는가. 3김 씨가 아닌 다른 누구를 옹립하든지 아니면 직접 나서든지 해야 하는데 어느 쪽인가. 당신이 직접 나서겠는가"라고 되물었더니, 전 장군이 "그래서 고민입니다. 여러 가지를 놓고 생각 중입니다."라고 대답해 직감적으로 전 장군의 집권욕을 읽었다는데요. 그 때 이미 집권을 위한 검토가 시작된 것 아닌가요.

"본인도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소설입니다. 위와 같은 말을 할 정도라면 친분관계가 있어야 하는 데 두 분 사이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바깥에서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기억으로는 최영희 전 의장이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 1980년 3월 초순 무렵 강창성 전 해운항만청장이 보안사령관실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났을 때 전 장군이 "김종필은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은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은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라면서 3김 불가론을 제기하자, 강 청장이 "이번만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직접 뽑은 문민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라고 응답했고, 전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군이 당분간 정권을 맡아주어야 한다고 졸라댑니다. 심지어 야당 정치인까지 저를 찾아와 당신이 직접 대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강 청장이 또 다시 "전 장군이 군인으로서 정권을 잡는다면 박 대통령 이상 가는 실패나 불행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느냐"고 말하자, 전 장군이 "최 대통령은 참 멍청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뒤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발언해 집권할 뜻을 표명했답니다. 그 때 벌써 집권 의사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강창성은 전 장군과 사감(私感)이 많은 사람입니다.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 때 하나회 제거문제로 전 장군과 앙금이 생긴 이래 해운항만청장 재직 때의 비리문제로 구속되자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 장군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창성이는 절대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창성이 보안사령관실에서 전 장군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절대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민간인들이 보안사령관실 자주 다녀가

-12․12 사건을 주도한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이 전 장군에게 집권을 설득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 사람들이 자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대화내용은 모르는 일이지요."

-1980년 초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이 보안사령관실을 자주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보안사령관실을 자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기 전까지 가끔 온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 이유를 본인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피의자를 비롯한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김진영, 장세동, 이현우 등 실세 대령들도 수시로 모여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전 장군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 알기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1980년 초에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야당 정치인이 있었는가요.

"민간인들이 많이 다녀간 것은 사실이나 구체적으로 누가 다녀갔는지에 대해선 기억에 없습니다."

-관련자들의 진술과 지금까지 질문한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1980년 1월경에는 군부집권 방안 검토가 시작됐고, 1980년 3월경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결론이 나 그에 필요한 집권시나리오 내지 집권계획을 기획․입안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요.

"군부에서 집권계획을 기획․입안한 사실이 없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는 마당에 집권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계획은 없었다 해도 대강의 구상이라도 서 있었을 것이 아닌가요.

"그런 구상도 서 있지 않았습니다."

-한용원 보안사 정보처 정보1과장은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3김 씨와 그 측근을 배제하고, 언론을 조종하며, 노동을 통제한다면 정권장악이 가능하다고 보고, 소요사태가 확대․심화되어 정정이 불안해지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화대 선포하고, 계엄업무 수행병력을 증강 배치해 3김 씨 및 그 측근의 배제작업과 더불어 국보위를 설치,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정권기반을 구축하기로 집권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한용원이가 무슨 문제가 있어 장군 진급을 못하고 중도 하차하니까 악의적으로 그런 주장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용원과 강창성이는 동일 티켓으로 보면 됩니다."

 

집권 시나리오는 없었다

-권정달 정보처장은 오래 전부터 정권장악을 구상했지만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고, 최 대통령이 밝혀온 정치일정에 맞추어 간다는 것이 기본입장이었으나 소요사태가 심해지고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내부에서도 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갈 중심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이 강하게 제기되어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장군 등이 전 장군에게 조기 집권을 권유했고, 보안사 참모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일을 추진했다는데 어떤가요.

"오래 전부터 정권장악을 구상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로서는 최 대통령이 밝혀 온 정치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피의자의 주장대로 군부가 적극적으로 집권할 계획을 가지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해도, 혹시 있을지도 모를 군부 집권에 대비해 대책이라도 세워 두었을 것 아닌가요.

"그런 대책도 세운 일이 없었습니다."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었는데 어떻게 집권을 하게 됐는가요.

"10․26 이후 전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 수사 등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중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혼란 수습 과정에서 취해진 각종 조치들로 인해 전 장군이 자연스럽게 실력자로 부상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광주사태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는 등 최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터지자 하야를 포함해 거취문제에 많은 고민을 하다 결국 하야하게 되니까 전 장군이 상황에 떠밀려 권좌에 오른 것이지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것은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중혁명을 위해 혼란을 조성한 정치인이나 재야세력의 덕분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몇몇 사람이 모여 시나리오를 만들어 추진할 수 있습니까.

또 전 장군이 집권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는데 어떻게 각본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습니까. 만약 집권계획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라면 단시일 내에 해치울 일이지 오랫동안 질질 끌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12․12 사건으로 전 장군에게 힘이 쏠려 있었는데 힘이 없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겠습니까. 지금 와서 보면 모든 일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추진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단연코 시나리오는 없었습니다."

-피의자가 집권계획을 기획, 입안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피의자의 구체적인 분담 임무가 무엇이었나요.

"일부에서 전두환 장군이 머리가 나쁘니까 참모들이 계획을 세웠을 것이 아니냐라고 추측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두환 장군이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닐 뿐만 아니라 누차 말하지만 집권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피의자가 한용원 정보1과장에게 5․16에 관한 연구를 지시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집권계획을 입안하기 위한 사전준비 조치가 아니었는가요.

"한용원에게 그런 지시를 한 일이 없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연상케 하는 국보위 구성이나 전 장군의 4성 장군 예편, 집권 후 서둘러 미국을 찾아간 점 등은 박정희 장군 등장 때와 유사한데 이것이 5․16을 연구한 결과 아닌가요.

"역사는 결코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5․16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연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처음 구상대로 되지 않고 상황 변화에 따라 변경이 있었다 해도, 어쨌든 집권 시나리오 내지 집권계획을 핵심들이 논의, 검토, 입안했을 터인데 이에 누가 관여했나요.

"집권계획에 관해 논의하고 검토한 일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터질 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이지 집권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취한 조치들이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처럼 비쳐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당시에 취한 조치들이 적절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집권계획의 입안․추진에 보안사 소속이 아닌 사람들도 관여한 사람이 있는가요.

"당시 여러 사람들이 전 장군에게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했겠지만 집권계획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조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의자를 비롯한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 5인방이 수시로 노태우, 정호용 등 12․12 주도세력과 모임을 가지면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면서, 일부에서는 혁명의 성격으로 추진하자고 주장하고, 또 일부에서는 법적 모양새를 갖추자고 주장하여 결국 후자의 방법으로 결론이 났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논의가 있었던 일은 절대 없습니다."

-집권계획의 종착점은 결국 최규하 대통령이 자리를 물러나고 그 자리를 군부가 추대하는 인물이 차지하는 것인데, 그에 대한 계획은 어떠했나요.

"최 대통령의 하야 문제가 집권계획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이는 처음 계획대로 진행된 것인가요.

"계획에 따라 추진된 일이 아니라 최 대통령이 갑자기 하야하니까 당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전면에 나서 집권을 해야 했던 당위성 내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군이 나서서 국가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 장군이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어 집권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3김이 조금 참고 기다렸어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김종필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과 그의 추종세력을 소요배후조종 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이어 강제 은퇴시킨 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3김 씨를 포함한 구정치인 8백53명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는데, 아무리 처해진 국가상황이 긴박을 요하는 중대국면이라 하더라도 정치인의 세대교체 내지 정치질서 재편은 국민의 심판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진리 아닌가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당연히 국민의 심판에 맡겨야겠지만 위기상황에서는 부득이한 면이 있지요."

-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해 피의자는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정상이 아니지요. 3김 씨가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정치발전과 더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전두환 정권과 관련하여 제도로서의 군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인맥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도당적 이익추구에 급급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전두환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들의 도덕성 문제 때문이겠지요."

-박정희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전두환 장군이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박정희 장군은 군사작전을 통해 집권한 전형적인 혁명이고, 전두환 장군은 군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떠밀려 집권한 것이므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피의자가 전 장군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쯤인가요.

"전 장군이 소령일 때, 그러니까 본인이 중위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비서실장을 맡기 전에는 보안사에서 일한 적이 없었는가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대공과에서 근무한 일이 있습니다."

-보안사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최강의 권력기관으로서 때로는 국민 위에, 때로는 정당 위에, 때로는 군부 위에 군림해 왔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업무영역이 광범위하다 보니까 그런 주장이 제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안사의 존립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군부 쿠데타 방지인데, 이런 임무를 띠고 있는 보안사가 직접 정치개입을 계획, 추진할 경우 막을 방법이 없지 않는가요.

"보안사가 정치개입을 계획, 추진한 일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역사에 맡겨 두어야

-고소․고발인들은 신군부 세력들이 행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보위 설치, 최 대통령 하야 등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내란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일부에서 집권과정을 문제삼고 있지만 결국 모든 조치들이 최 대통령의 결재과정을 거쳐 시행된 것이므로 내란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부분적으로 잘못이 있다 해도 그런 점만 부각시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장군이 대통령이 된 과정에 대해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내란행위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검찰이 그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피의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을 수사기관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 주장에 대하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5․6공 정권과 관련하여 손해를 본 소수가 있는 반면, 이익을 본 다수가 있으므로 손해를 본 몇몇 사람들 주장에 귀 기울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 심판이 내려진 마당에 사법처리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진술 도중에 여러 차례에 걸친 민중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최규하 정부나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지요. 그 대표가 바로 김대중입니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나 사실이 있는가요.

"역사는 역사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이 국가발전에 여러 가지 기여를 한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본인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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