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진술조서 "전두환 장군, 눈물 흘리며 대통령직 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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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05 09:26:12
  • 최종수정 2018.12.0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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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의 개혁조치들 의도는 좋았으나 절차상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
"광주사태 심각해진 원인은 광주에 퍼진 악성 유언비어, 시민들이 군에 대항한 광주지역의 특성 때문"
"광주사태 후 군에서 책임자를 엄벌했어야 하는데 미온적으로 처리한 것이 문제"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와 5·18, 5공화국 창출의 한 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조서의 일부 내용이다. 12·12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도와 5공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당시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가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수사 과정에서 검찰 진술을 했는데, "민주주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상대적인 다수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민화위(民和委)를 설치하고 수차례 광주를 방문해 광주사태 피해자를 위로하는 등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 내용을 통해 독자들은 논란이 되고 있는 12·12, 5·17, 5·18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당시의 주인공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현실인식인 시국관, 사고방식 등을 다각도로 검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재임 중 조성한 비자금, 그리고 5.18특별법으로 구속 수감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연합뉴스 제공)
재임 중 조성한 비자금, 그리고 5.18특별법으로 구속 수감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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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신문조서(제5회) 1995년 12월29일 서울구치소 수사접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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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에 자주 갔으나 이유는 잘 몰라

 

-피의자는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8월 20일까지 수도경비사령관(이하 수경사)으로 재직한 사실이 있지요.

"예."

-당시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으므로 이 기간 동안 서울지역 계엄분소장으로 활동했지요.

"예."

-1980년 초 피의자를 비롯한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 이른바 신군부 핵심인사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자주 방문했다는데,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실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주 간 것으로 추측되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피의자를 비롯한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 이른바 신군부 주도세력이 보안사에 수시로 모여 정치상황을 비판하면서 전 장군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권유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정권을 장악하기로 하고, 그에 필요한 이른바 집권 시나이로 내지 집권계획을 기획, 입안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1980년 2월경 보안사에서는 정보처 산하에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설치해 비상계엄 하에서 언론검열 업무를 처리하면서 3월 중순경에 'K­공작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목적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 구축'에 두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분석을 통해 협조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함과 동시에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만이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언론통제를 이용, 여론에 주입시키는 것이었는데 1단계 공작기간을 3월 24일부터 5월 31일로 정해 추진한 사실이 있습니까.

"K­공작계획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K­공작계획은 그 실시 시기, 내용, 구체적인 시행과정 등에 비추어 볼 때 언론을 통해 3김씨 등 기성 정치인들간의 경쟁을 왜곡 선전하고, 북한의 남침위협을 과장하며, 최규하 정부의 허약성을 강조하는 등 여론을 조작해 신군부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1979년 10월26일 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서울 태릉 및 문무대로 이동해 서울지역의 계엄업무를 수행하던 20사단 병력은 정국이 안정됨에 따라 1980년 2월5일 육본 작명(작전명령) 제6­80호에 따라 원주둔지인 양평으로 복귀한 것은 사실이지요.

"예."

 

학생시위 우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측에서는 언론검열을 통해 K­공작계획을 실행할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해제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신학기 개학을 앞둔 1980년 2월18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1/4분기 이전에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실시를 완료하도록 지시했지요.

"예, 그 무렵 그런 지시가 내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수경사령관인 피의자는 1980년 3월6일 수경사령부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1․3․5․9공수여단장, 20․26․30사단장,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서울시경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80년도 제1차 충정회의를 개최해 수도권 소요사태를 점검한 사실이 있지요.

"예."

-회의 결과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하는 핵심세력을 이상주의적 맹목저항 세력으로 규정하고, 문제 학생과 교수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며, 군 투입을 요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강경한 응징조치가 요망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예."

-위 충정회의는 신군부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학생운동권의 정당한 저항을 조기 제압할 목적으로 개최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기가 되면서 학생시위가 상당히 격렬해질 것이 예상됐기 때문에 충정훈련이 강화되었습니다."

-19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국무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겸직 금지조항을 위반하면서 중정부장 서리직을 겸직했지요.

"예."

-전두환 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함으로써 군사정보는 물론, 국내 민간정보와 중정의 막대한 예산을 장악하고, 공식 서열상으로 지위가 격상돼 정부 내의 실력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0․26 이후 중정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력자가 그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임명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1980년 4월 30일 육본에서 이희성 참모총장 주재로 전군 계엄지휘관회의가 개최되어 학원, 노동계의 소요사태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국가안보 차원의 단호한 조치를 천명하고, 예하부대에 소요진압태세 확립 지시를 시달한 사실이 있지요.

"예."

-1980년 5월 초순경부터는 학생들과 재야 민주인사들이 일제히 군부와 유신 관료 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규탄하며 전두환 사령관의 퇴진 등을 요구하고, 정치권에서도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시국상황이 전개됐지요.

"예."

기억이 없습니다

-신군부측에서는 이런 시국상황을 기화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다음 보안사와 중정의 막강한 권한과 조직력을 이용해 계엄군을 장악하고, 피의자 등의 집권 기도를 저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의했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또한, 행정 각부를 통제․조정하는 초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해 대통령과 내각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을 연행․구금하고,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피의자 등 신군부의 집권기반을 확고히 한 다음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할 것을 결의했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같은해 5월 초순경 전두환 사령관이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라는 명목으로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검거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무렵 피의자를 비롯한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 이른바 신군부 주도세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에서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을 설명듣고 이를 저지하기로 결의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7일 육작명 제18­80호로 특전사 예하 4개 여단(1․5․11․13)과 20사단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해, 14개 대학과 20개 주요 보안목표에 병력을 배치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9일 15시부터 16시 사이 육본에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피의자, 2군사령부 작전처장, 육본 작전교육참모부장, 수경사 작전참모 등과 함께 소요사태 대비책을 논의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날 논의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시위로 국내사정이 어수선해 항간에는 군부 등장설이 파다해 대통령으로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 시기여서 최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반대하는 견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등 신군부측에서 강력하게 주장해 1980년 5월 10일 최 대통령이 중동순방을 하게 되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는 최 대통령을 국정 수행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정부가 시국 수습에 성의가 없다는 것을 부각시켜 군부의 정권탈취 명분을 축적하는 한편, 신군부측이 대통령 不在 중에 정권탈취를 위한 제반조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치인, 부정축재자 체포에 수경사 병력 동원

 

-1980년 5월 14일과 5월 15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의 35개 대학,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면서 가두시위를 했지만, 이런 대규모 시위가 신군부측 정권탈취 기도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 1980년 5월 15일 밤 대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하기로 하고 자진해산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저는 도리어 학생 시위가 더욱 격화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14일과 5월15일 수경사 30경비단과 헌병단 병력을 출동시켜 중앙청 특정지역 봉쇄 충정작전을 실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예."

-1980년 5월14일 10시15분경 육본에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황영시 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수경사 참모장 유재구 준장 등이 모여 논의한 내용이 무엇인가요.

"논의 내용은 잘 모릅니다. 다만 당시는 시위가 격화되어 있을 때이므로 그 대책을 논의했을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이미 계엄군 전면 투입준비를 지시해 전국 주요 대학과 기관 및 시설에 계엄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 사실이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1980년 5월15일 전두환 장군이 이학봉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사실을 알려주면서 소위 시위 배후조종자 등 검거준비 지시를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그 무렵 피의자로부터 중정이나 보안사의 요청이 있으면 병력을 지원해 주라는 지시를 받고 예하부대에 병력지원 지시를 하달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렇다면 피의자는 전두환 장군이나 이학봉 수사국장으로부터 소위 시위 배후조종자 등 검거계획을 설명받았기 때문에 작전참모에게 이런 지시를 한 것이 아닌가요.

"수경사가 병력을 지원해 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관례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해 5월16일 전국 총학생회장단 결의로 향후 시위를 자제하고 정치정세를 관망하기로 함에 따라 시위가 중단되어 평온이 회복됐고, 북한의 남침동향도 없는 등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사유가 전혀 없었지요.

"저는 도리어 학생시위가 격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16일 보안사에서는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해 5월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실시 방안을 통보하고, 소위 시위 주동자, 배후조종자 등 일제검거 대상자 검거 지시를 하달했지요.

"예."

-피의자는 1980년 5월 17일 09~10시 30분 육본에서 열린 육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있지요.

"예."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이른바 신군부의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날 11시부터 국방부에서 열린 예정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보안사가 준비한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적극 찬성발언을 해 회의 분위기를 주도하기로 결의했지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신군부 측에서 시국수습방안으로 국회 해산을 검토한 이유는 정치권에서 임시국회를 소집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정치일정을 단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계엄확대 지지발언

 

-1980년 5월 17일 09시3 0분경 전두환 사령관이 권정달을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내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임을 통보하면서 시국수습방안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의사항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해 재가를 받아 줄 것을 요청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이에 따라 주영복 장관은 1980년 5월17일 11시경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해 안종훈 장군 등 일부 군 지휘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을 건의할 것을 결의한 후 참석자 전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았지요.

"예."

-피의자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적극 지지발언을 했지요.

"본인이 적극적으로 지지 발언한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만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을 뿐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은 논의한 사실이 없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주영복 장관이 독자적으로 소집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신군부 측 요청에 따라 신군부가 계획한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을 추진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군부가 비상기구를 설치하려 한 동기는 무엇이며, 그 구체적 방안은 어떠했는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저녁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전군 지휘관들의 결집된 뜻이라는 설명과 함께 최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제시했으나, 최 대통령께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은 국무회의에 상정해 심의하도록 하고, 그외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는 재가를 거절했다는데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만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을 뿐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은 논의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참석자 전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은 것을 기화로 전군 주요지휘관의 일치된 의견인 것처럼 최 대통령과 신 총리를 속여 재가를 받으려 했다가 거절당한 것 아닌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최 대통령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 해산, 5․16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비상기구 설치, 각급학교 휴교 조치 등을 건의했으나, 최 대통령은 "그 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고, 특히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만 국무회의에 상정해 심의하고 나머지는 거부했다고 하는데요.

"저는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신군부 측에서는 신 총리의 비협조적인 자세로 인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되더라도 제대로 통과될지 불투명하다고 판단하고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병력을 배치, 국무위원들을 위협해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에 대한 의결을 강제하기로 모의했던 것 아닌가요.

"저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그날 국무회의 개최여부가 결정되기도 전인 1980년 5월 17일 16시 50분경 육본에서 1․2․3군 및 관구, 사단의 각 작전참모에게 정위치 대기 지시를 하달한 것은 사실이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17일 17시경 수경사령관실에서 피의자는 박동원 작전참모에게 "오늘 저녁에 중앙청에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내외곽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지요.

"예."

-그때 30경비단 소속은 외곽경비를, 헌병단 소속 병력은 회의장 주변 등 내부경비를 맡도록 지시했는데 2개 부대에게 별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관례상 이 부대들이 내외곽 경비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의자의 지시에 의해 이현우 30경비단장은 1980년 5월17일 17시경 3백40여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광화문 앞에 전차 4대와 장갑차 등을 배치, 중앙청을 에워싼 다음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성환옥 헌병단장은 2백50여명의 헌병을 출동시켜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 입구까지 집총한 병력을 1m 간격으로 도열시키고, 특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한 계단에 1명씩 집총한 헌병을 배치하고, 중앙청 각 사무실을 수색해 일하던 공무원들을 밖으로 내쫓아 5층에 있는 방에 감금하고, 외부에서 중앙청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절단함으로써 국무회의장을 완전히 차단했지요.

"제가 수경사령관으로서 중앙청 경호 경비를 지시한 것은 사실이나, 구체적인 내용까지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공포분위기 조성 안했다

 

-1980년 5월17일 17시경에는 전혀 국무회의가 예정되어 있지도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병력을 배치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날 헌병단장 성환옥의 지시에 의해 중앙청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절단한 헌병단 통신과장 김경일 대위는 1980년 5월17일 13시경 성환옥 헌병단장이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극비지시"라면서 같은 날 17시 중앙청 기자실의 전화선을 절단하라고 지시했는데, 중앙청 통신실 공무원들이 반대해 하는 수 없이 중앙청 시험실에 들어가 외부로 연결되는 모든 전화선을 절단했다는데요. 5월 17일 13시경 그런 지시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런 지시를 할 이유도 없고, 지시한 사실도 없습니다."

-그날 피의자가 이런 지시를 한 것은 국무회의 진행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고, 만약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이 부결될 경우 국무위원들을 감금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기 위한 사전조치 아닌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인사들과 상의해 국무위원들을 위협해서 비상계엄 확대선포안 의결을 강제하기 위해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병력을 배치한 것이지요.

"전두환 사령관과 상의한 사실은 없고, 수경사령관이 일반적인 경호, 경비 차원에서 지시한 것입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이희성은 피의자와 전두환 장군이 상의해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병력을 배치했다고 진술하는데 피의자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의 진술에 의하면, 중앙청은 특정경비지역으로서 청와대 경호실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으며, 육본에서는 관할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경호실 통제를 받아야 하나, 특정구역 경비는 수경사 고유임무이므로 당연히 경비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청와대 경호실과도 사전에 협조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환옥 등의 진술에 따르면 경호실과 사전 논의한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요.

"비상계엄하이기 때문에, 저는 자율적으로 협조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신군부 세력들은 중앙청 국무회의장 안팎에 군병력을 배치, 위압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강제해 결국 헌법기관인 국무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는 그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당시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신현확 총리 및 국무위원 전원은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 입구까지 집총한 헌병이 1m 간격으로 도열하고, 특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한계단에 1명씩 집총한 헌병이 배치되어 있어 위협을 느꼈답니다. 주영복 장관은 헌병단 병력이 워낙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어 국방부장관인 자신이 들어가는데도 무서워서 다리가 떨렸다고 진술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날 국무회의 개최 여부가 결정되기도 전인 1980년 5월17일 16시50분경 육본에서는 계엄 확대에 따른 전면적 병력 투입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일부 부대 병력은 이동까지 한 점을 미루어 보면 신군부 측에서는 국무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력 전면 투입을 강행할 방침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1980년 5월 17일 23시경부터 수경사 병력을 출동시켜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소위 소요 배후조종 또는 부정축재 혐의로 검거했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피의자는 박동원 작전참모, 성환옥 헌병단장에게 합수부나 중정에서 병력을 요청하면 즉각 지원하라고 사전에 지시했나요.

"그것은 수경사의 당연한 임무이므로 그렇게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날 특별히 제가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1980년 5월 17일 23시 00분경 성환옥 헌병단장이 중정 최규희 부국장으로부터 병력지원 요청을 받고 장교 1명과 헌병 18명을 지원해 그날 23시30분경 김대중을 검거해 중정에 인계한 후 5월18일 아침에 수경사령부 작전참모 박동원을 통해 피의자에게 사후 보고했지요.

"사후 보고된 사실은 기억이 없습니다."

-김대중 연행보고를 받고 육본에 보고하거나 성환옥 헌병단장에게 다른 지시를 한 사실이 있는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17일 22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군에 진압부대 투입작전 명령을 하달했나요.

"아마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대비해 그런 지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피의자도 수경사 예하부대와 작전 통제하에 있는 1․5․11․13공수여단 및 20사단 등에 병력을 출동시켜 1980년 5월18일 02시까지 국가 주요보안 목표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나요.

"예."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24시경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과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대학교 휴교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대통령의 재가 없이 발령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국회 개회되면 정국 안정에 도움 안 돼

 

-수도군단에서는 5월18일 01시45분경 33사단 101연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을 출동시켜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봉쇄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18일 02시 30분 1백36개 주요 보안목표에 2만5천명의 계엄군을 배치, 완료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20일 10시경 33사단 101연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제104회 임시국회 개회식에 참석하려는 황낙주 의원 등 국회의원 38명의 등원을 무력으로 지지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를 하달해 국회활동을 포함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그에 따라 국회의원의 의사당 출입을 금지하라는 지침을 시달함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제104회 임시국회 개회식에 참석하려는 국회의원 38명의 등원을 무력으로 저지한 것이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날 피의자가 사령관인 수경사령부에서도 계엄포고 제10호에 따라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으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은 절대로 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출입자 통제지침을 예하부대에 시달해 신민당사에 출동한 33경비단 병력 및 공화당사에 출동한 헌병단 병력이 각 정당 당사를 점령해 국회의원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신군부는 포고령 10호로써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는데, 아무리 계엄하라 하더라도 포고령으로 국회의 통상적인 활동은 금지시킬 수 없는 것 아니나요. 특히 그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자고 소집된 국회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 아닌가요.

"그 당시 국회가 개회되면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의자 등 신군부측에서 이와 같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해 제104회 임시국회를 열지 못하게 함으로써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요.

"국회의원 등원을 막은 것은 사실입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1980년 5월20일 09시 상도동 자택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려 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헌병단 병력을 출동시켜 그날 09시부터 김영삼 총재의 집 주위를 에워싸고 김 총재를 가택 연금한 사실이 있지요.

"저는 사후에 보고받아 알게 됐으나, 사전에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혹시 김 총재 가택연금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 신군부 주도세력과 상의해 결정한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피의자 지시에 의해 김영삼 총재를 연금하기 위해 상도동 김 총재 자택 현장에 출동한 헌병단장 성환옥 대령 및 10중대장 임대식 대위는 그 당시 김영삼 총재 연금 상황을 수경사령부 작전처를 통해 즉시 육본에 보고했으며, 김 총재 자택에 보안사 요원 2명이 나와 있었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 총재의 가택연금은 피의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 신군부 주도세력과 상의해 결정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어떠한가요.

"의논한 사실이 없습니다."

-김 총재 연금에 대해 최 대통령에게 사전 또는 사후에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나요.

"모르는 일입니다."

-10․26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육본 계엄계획에 따라 서울 강북지역에 대한 계엄업무는 수경사가 담당하고, 강남지역에 대한 계엄업무는 수도군단이 맡고 있었지요.

"예."

-김영삼 총재의 자택이 있는 상도동은 한강 이남 지역으로 수도군단 계엄분소 관할지역인데 수경사에서 헌병 병력이 출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마 합수부 요구에 따라 병력이 출동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김대중, 김종필 등 기성 정치인 등을 체포 구금하고, 김영삼 총재를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가택연금하고,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것은 결국 피의자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고 신군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한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이라고 보여지는데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계엄사령관 작명에 따라…

 

-그 후 5공 헌법부칙에 정치활동 규제 근거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정치활동 규제법을 제정해 상당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결국 5․17 계엄 확대에 따른 정치활동 규제 조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된 1980년 5월17일 24시 전인 같은 해 5월 초순경 이미 전국 주요대학 등에 군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해두었다가 계엄확대와 동시에 광주지역에 7공수여단 33․35대대를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도록 조치한 사실이 있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이 피의자 등의 불법적인 계엄확대 등 정권탈취 기도와, 그 과정에서의 헌법파괴 행위에 저항하는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건 직후부터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13시 00~15시 30분경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최로 육군회관에서 열린 오찬 모임에 주영복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해․공군 참모총장,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인 피의자 등이 참석한 사실이 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신군부의 의도대로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자축하면서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향후 일정을 점검하는 한편,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의한 것이 아닌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이 피의자 등의 불법적인 계엄확대 조치에 저항해 발생한 민주화 요구시위를 계엄군을 이용해 초동단계에서 강경진압해 타 지역으로의 확산을 차단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권탈취 및 국헌문란 기도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제압하기로 결의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1980년 5월18일 15시 육작명 제19­80호로 수경사의 작전 통제하에 있던 11특전여단을 광주에 추가투입하기 위해 이 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해제한 사실이 있지요.

"그것은 계엄사령관의 작전명령에 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광주사태는 모른다"

 

-1980년 5월18일 16시 수경사 계엄사무소에서 제4차 계엄협의회를 개최해 비상계엄선포 배경, 비상계엄하의 과업으로 정의로운 사회구현, 새로운 정치질서 정립 방안 등을 설명하면서 계엄업무 시행지침을 시달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의자는 3김은 국가관이 부족하고,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비판하면서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정 정치인, 범법자를 척결하고 공무원의 부정을 말소하며 각종 제도적 모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 출동한 7공수 33․35대대 병력은 비상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제창하며 민주화 요구시위를 하는 학생들과 이를 구경하던 시민들을 상대로 M16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M16 소총에 대검을 착검해 사용하는 등 잔학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해 그결과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지요.

"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11공수여단을 광주에 증파하고, 5월 20일 다시 3공수여단 병력을 광주에 증파하고, 그날 오후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1백여 대의 택시를 동원해 금남로를 따라 차량시위를 하면서 전남도청 앞으로 진출한 사실이 있지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3공수여단 병력은 최루탄을 난사한 후 기사들을 차량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방법으로 시위를 강경진압하고, 같은 날 24시경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병력이 시위대에 의해 퇴로를 차단 당하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지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계엄사에서 자위권 보유가 공식 천명된 5월21일 19시30분경보다 이틀 전에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1980년 5월20일 피의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과 상의해 20사단 병력을 광주지역에 추가투입하기로 결정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피의자는 1980년 5월 20일 21시 20사단 1개 연대 병력을 광주에 투입하도록 작전통제권을 해제하고, 5월 21일 01시 나머지 20사단 병력의 작전통제권을 해제해 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계엄사령관의 작전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1980년 5월 21일 13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해 계엄군 쪽으로 돌진하자, 전남도청 앞에 배치된 병력과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해 두었던 저격병들에게 발포명령을 하달, 시위대를 향해 집단적으로 발포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광주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발포에 대항해 화순 등 인근지역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 총과 탄약 및 다이너마이트 등을 확보해 무장을 하기 시작하자 강경진압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이를 방임하고, 1980년 5월 21일 저녁 광주 시내로부터 계엄군을 철수시킴으로써 광주 시민들의 무장과 무정부 상태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이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21일부터 5월22일까지 3공수여단 병력은 여러 차례 광주교도소 앞을 지나가거나 담양으로 진출하려는 시위대나, 담양으로 가는 주민들에게 총을 무차별 난사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 22일 20사단 62연대 2대대 병력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한다는 구실로 통합병원 인근에서 시위대와 민가에 총을 난사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23일 7공수여단 35대대 병력은 광주-화순 간 국도를 지나가던 버스에 집중 사격을 가하고, 부상자인 성명불상의 남자 2명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 총으로 쏴 살해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 23일 주남마을을 출발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이 송암동 부근에서 시위대 수명을 발견하고 그들과 부근에 있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사실이 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3군 참모총장과 석고대죄…

 

-그 과정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병력의 매복공격으로 11공수여단 장병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11공수 병력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부근 마을 청년 수명을 총과 대검을 사용해 잔인하게 살해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 23일 10시 45분~11시 육본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방문해 무엇인가 보고한 사실이 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신군부 주도세력인 피의자와 정호용 특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광주 시내 재진입 작전인 상무 충정작전을 결정해 보고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상무 충정작전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980년 5월24일에는 도청 진압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공수여단을 철수시키면서 공수여단이 맡고 있던 임무를 20사단이 인계받은 것은 사실이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980년 5월25일 11시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광주 시내 재진입 작전을 1980년 5월 7일 00시 01분 이후 실시할 것을 결정할 때 피의자도 회의에 참석했나요.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같은 날 11시 10분~12시 15분경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이희성 총장,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만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광주 시내 재진입 작전을 1980년 5월27일 00시01분 이후 실시할 것을 결정함과 동시에 그날 오후 최 대통령의 광주방문을 결정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12시15분~14시30분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 보안사령관, 피의자 등이 오찬회의를 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광주 시내 재진입 작전을 1980년 5월 27일 00시 01분 이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함과 동시에, 그날 오후 최 대통령의 광주 방문을 결정했지요.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기억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 무렵 어느 장소에서인지 주영복 장관을 만났는데, 그가 저에게 애절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광주사태 이후 최 대통령이 일주일 가까이 두문불출하시면서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무슨 조치를 하시지도 않아서 큰 일'이라고 걱정을 많이 하면서 '오늘쯤 3군 참모총장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하고 대통령을 광주로 모시고 내려가 시민들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하도록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라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와 함께 같은 날 14시 30분~16시 20분 청와대로 최 대통령을 방문해 회의결과를 보고한 후 최 대통령과 함께 광주로 내려간 사실이 있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최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의 적극 권유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신군부가 최 대통령의 광주 방문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신군부가 최 대통령의 광주 방문을 추진한 진짜 이유는 그 시점까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그 사실을 그동안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추인받고 향후 상무충정 작전을 승인받기 위한 것이었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광주 현지상황 워낙 다급

 

-1980년 5월 27일 01시 00분경 광주 재장악을 위한 상무 충정작전을 개시해 11공수여단 병력은 광주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을 점령하고, 7공수여단 병력은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3공수여단 병력은 시위대가 있던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20사단 병력은 공수부대로부터 점령지역을 인계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소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등 시위대와 충돌과정에서 많은 광주시민을 살해한 끝에 광주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게 되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광주에 처음 투입되었던 7공수 2개 대대 이외에 11공수, 3공수, 20사단이 투입되었는데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증파 요청을 받은 바 없었음에도 병력을 추가로 투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수경사 작전 통제하에 있던 공수특전부대나 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하기 위해 작전통제를 해제해 준 것은 사실이지요.

"수경사가 작전통제를 해제해 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 광주 현지 사정이 워낙 다급해졌기 때문에 상부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부대의 작전통제를 해제하는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이나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과 상의했을 것인데도 추가로 병력을 투입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요.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신군부의 주도세력인 피의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과 상의해 신군부의 정권탈취 및 국헌문란 기도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강경진압하라고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에 지시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자신들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현지에 상주한 최예섭 보안사 기획처장과 홍성율 제1군단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인 피의자, 수시로 광주에 내려간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이른바 신군부 실력자들이 대책을 협의해 발포명령을 하는 등 진압부대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는데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피의자는 광주사태가 진압된 이후인 1980년 5월27일 11시25분경 육본에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피의자는 광주사태와 관련해 광주 현지에 내려간 사실이 있는가요.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습니다."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의 진술에 의하면 1980년 5월 29일 피의자가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 사령관실로 소준열 장군을 만나러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도 광주에 간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광주사태 기간 중이나 그 직후에는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으나, 광주사태가 끝나고 한달인가 지난 후 소준열 장군을 위로하기 위해 광주에 가서 그를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백남이 작전참모가 저를 광주에서 보았다면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피의자는 광주시위 진압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저는 광주사태 당시 수경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광주시위 진압문제는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기간 중에 제가 이희성 참모총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을 만났다면 그것은 다른 일로 만났거나 수경사 작전통제하에 있는 부대의 작전통제권 해제 문제로 만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피의자는 광주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광주시위 진압에 관여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후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원인에 대해 평소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자면 광주사태가 심각해진 원인은 첫째, 광주에 퍼진 악성 유언비어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공수대원이 대검으로 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처녀 유방을 도려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해 광주시민을 자극했습니다.

둘째, 광주지역의 특성 때문입니다. 서울은 시위가 자주 발생하나, 군인이 출동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전혀 대항을 하지 않는데, 광주 시민들은 이전에 군병력이 투입된 사례가 전혀 없어 군인을 경찰병력과 같이 생각해 함부로 군인에게 투석하는 등이 과잉진압을 부른 것입니다.

셋째, 광주사태 직후 군에서 책임자를 적발해 엄벌했어야 하는데 미온적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민화위를 설치하고 수회 광주를 방문해 광주사태 피해자를 위로하는 등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박동진 외무에게 국보위 설명

 

-국보위 설치 계획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핵심참모인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등 4명이 주도해 수립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피의자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핵심 멤버였던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등과 사전에 협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초기부터 구체적인 논의를 한 것은 없고, 보안사 쪽에서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국보위 비슷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원래는 1980년 3월 말경 보안사팀이 정권 장악에 뜻을 두고 집권계획 연구에 착수해, 같은 해 4월 말경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로서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과 그 위원 인선 등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국보위는 당초 계엄확대와 동시에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권력기구로 계획되었는데, 최 대통령과 신 총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긴급조치의 발동은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설치를 반대하자, 그후 합법적인 외관을 갖추기 위해 대통령령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계획이 변경된 것이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은 특히 수경사령관인 피의자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강한 반대의사를 표시한다고 해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피의자를 청와대로 불러 설득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 무렵 제가 최 대통령을 가끔 만난 사실은 있으나, 그 문제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26일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 박동진 외무가 배석한 가운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했는데, 그 자리에서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그 안을 반대했나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피의자는 박동진 외무장관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 국보위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박 장관을 설득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보안사령관실에서 박동진 장관을 만나 그에게 국보위 설치의 필요성을 설명한 사실은 기억이 납니다."

-수경사령관인 피의자가 박동진 외무부장관을 보안사령관실로부터 불러낸 이유는 무엇이나요.

"그 당시 보안사 쪽에서 조치한 것 같은데 제가 부른 일은 없고, 그가 반대한다고 해서 면담한 사실은 있습니다."

-박동진 외무부장관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신군부측에서 비상기구를 설치하려는 기미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발상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표시했답니다. 얼마 후 보안사에 불려가서 사령관실에서 피의자를 만났는데 피의자가 국보위 설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분명히 진술하는데요.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박동진 장관이 국보위 설치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미국 등 외국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고 해 제가 그 논거를 설명해 드린 것 같습니다."

-1980년 5월 27일 16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주재로 열린 제46회 국무회의에서 국보위 설치령이 원안대로 의결되었으나, 광주사태 하에서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바로 발표하기 곤란하고 국보위 위원 인선이 완료되지 않아 발표를 연기하다가 5월 31일 대통령령 제9897호로 공고함으로써 국보위가 출범하게 되었지요.

"예."

 

의도는 좋았으나…

 

-국보위 설치령 제2조에 따른 당연직 위원으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등 9명이 임명되고, 피의자 등 10명이 임명직 위원으로 임명되었지요.

"예."

-국보위 위임을 받은 사항을 심의조정하기 위해 상임위원회를 두었는데, 피의자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해 국보위의 실권을 장악했나요.

"예."

-1980년 6월13일 국보위 운영분과위원회는 국보위 운영의 4대 기본목표를 국가안보태세 강화, 합리적 경제정책 뒷받침, 정치발전을 위한 내실 도모, 국가기강 확립으로 확정하고, 9개 추진지침으로 계급의식의 선동이나 정부 전복기도의 근본적 제거, 불법시위나 소요행위 근절, 사회적 비리 척결, 정치풍토쇄신,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언론풍토 조성,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건전한 노사관 확립, 각종 사회악 근절, 과열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 쇄신 등으로 정한 것은 사실이지요.

"예."

-1980년 7월 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김만기 정화분과위원장은 최 대통령에게 관계부처의 장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2급 이상 공무원의 숙정결과를 마련하겠다고 보고하고, 최 대통령은 적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공정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했나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다만 그 무렵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의자 등 신군부는 합리적인 기준없이 일방적으로 해직대상 공무원을 선정해 각 기관에 통보해 강제로 해직시킬 것을 강요한 결과 1980년 7월9일부터 7월31일까지 사이에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천4백18명 등 공직자 5천4백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 산하단체 등 1백27개 기관 임직원 3천1백11명 등 총 8천6백1명이 강제해직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의도는 좋았으나 절차상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 상임위원회에서는 1980년 8월4일 조직․상습폭력, 치기배 기타 퇴폐적인 각종 사회적 독소를 뿌리 뽑기 위한 사회악 일소특별조치를 발표하고 소위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교육 제5호에 따라 그때부터 11월 27일 제4차 단속까지 모두 5만7천5백61명을 검거해 그중 3천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만8천2백59명을 군부대 순화교육, 이른바 삼청교육에 회부했으며, 1만6천2백50명을 훈방조치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것 역시 의도는 좋았으나 절차상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당시 언론은 모두 폭력배 단속에 대해서는 잘한다고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피의자 등 신군부의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무리하게 삼청교육을 추진하다보니 선량한 국민들을 불량배로 몰아 삼청교육을 보낸 사례도 많이 발생했고, 아무 법적 근거없이 함부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요.

"절차상 약간 문제가 있었으나 의도는 좋았고,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지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국보위는 자문기구

 

-국보위가 존속하는 동안 최 대통령이 직접 국보위 전체 회의를 주재한 것은 발족하던 날인 1980년 5월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명장 수여식과 6월5일 삼청동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보위 현판식 등 두 번밖에 없었지요.

"예."

-그렇다면 국보위가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로 설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장인 대통령이 두 번밖에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던 것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려는 목적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국보위가 법적으로는 대통령령에 의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을 강력히 조정, 통제하면서 국정 전반을 장악했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상임위원장 전두환 등 신군부가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은 아닌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피의자와 전두환은 대위 시절인 5․16 때 이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으로 함께 일했으며, 유학성은 국가재건최고회의사무위원회 보좌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피의자 등은 국보위를 혁명평의회 성격의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형태로 운영한 것은 아닌가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권까지를 가진 강력한 기구임에 반해 국보위는 대통령 자문기구이기 때문에 성격상 차이점이 많습니다."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에 불과한 국보위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의 소관사항인 공무원 숙정, 사회악 사범 일소, 과외금지 등 조치를 입안해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인 조치이므로 그 자체가 국헌문란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대답할 성질의 사항이 아닙니다."

-1980년 6월5일 국보위 상임위원회 산하에 14개의 분과위원회를 설치해 각 분과위원회 결정으로 공무원 숙정, 삼청교육 등 사회악 일소, 언론통폐합, 김종필 등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와 부정축재 재산에 대한 몰수 등 계엄업무와 무관한 조치들을 국무회의 의결도 없이 결정, 집행함으로써 계엄업무에 관한 자문기구인 국보위의 권한을 넘어 사실상 내각 기능을 무력화시킨 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대답할 성질이 아닙니다."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6월 말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해 개헌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하고,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과 박철언, 우병규 법사분과위원이 주도해 같은 해 7월 중순까지 개헌안 시안을 만들도록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박철언 통해 헌법개정 소식들어

 

-국보위 설치 직후, 법사분과위원들로 하여금 정부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와 별도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것은 결국 집권을 염두에 두고 다음 공화국의 헌정구도를 그려보고자 한 것이 아닌가요.

"제가 대답할 성질이 아닙니다."

-권정달, 허화평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보안사의 정도영 보안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중정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 등이 1980년 7월 15일 10시경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대통령 선출 방법,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 헌법 개정안, 정치일정 단축 방안, 최 대통령의 하야 문제 등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의자는 안정론을 내세워 간선제를, 허삼수 인사처장은 국민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직선제를 주장해 논란을 벌이다가 전두환 사령관이 간선제로 낙점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러한 회의에 참석하거나 논의한 기억이 없습니다."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대답할 성질이 아닙니다."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헌법개정 작업의 진행 상황을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일이 있는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우병규의 진술에 의하면 권정달, 허화평, 피의자 등의 의견을 수렴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해 헌법개정안을 확정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 때 피의자는 박철언을 통해 헌법 개정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는데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가요.

"그 당시 박철언을 통해 헌법개정 작업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가끔 들은 사실은 있으나 달리 관여한 사실은 없습니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의 진술에 의하면 당초에는 최 대통령이 밝혀온 정치일정에 맞추어 가자는 것이 신군부의 기본 입장이었는데, 광주사건을 겪으면서 신군부 내부에서 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확고한 중심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이 강하게 제기되어 피의자 및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등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조기집권을 권유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해 신당 창당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여러 이야기를 한 사실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전 장군 집권을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피의자 전두환이 1980년 6월20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 이상연 보안사 정보처 보좌관, 윤석순 중정 총무부국장 등에게 창당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잘 알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피의자 등 신군부가 사실상 모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등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신군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의 창출을 위해 헌법 개정작업과 함께 신당 창당을 추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예."

-그 며칠 전에 전두환 사령관이 피의자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주던가요.

"예."

 

군 원로들이 전두환 추대

 

-최 대통령의 하야 결심 과정에 피의자 등 신군부가 강요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피의자 등 신군부는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로 마음먹고, 최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압력을 가해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한편, 김정렬씨 등 원로들을 동원해 설득전을 펴는 양면작전을 구사해 최 대통령이 하야토록 압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저는 구체적인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김정렬씨가 최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최 대통령 사임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정렬씨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피의자가 지난 5월 검찰에 제출한 진술서를 보면 "청와대에 다녀온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피의자에게 최 대통령이 대통령을 맡아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자 피의자는 운명일지도 모르니 군부 원로들 의견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 사실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그래서 전두환 사령관은 군 원로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절차를 밟았나요.

"예, 그 무렵 날짜는 잘 모르겠으나, 저녁시간에 공군총장 관사에서 국방부장관을 위시해 각군 총장, 각군 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참석자들이 '결국 전 장군이 맡는 길밖에 더 있느냐'고 건의하고 전두환 사령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비장한 자세로 이 건의를 수용했습니다."

-1980년 8월 21일 군 지휘관들이 모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추대를 결의했는데 그 모임은 피의자가 주도해 소집된 것인가요.

"제가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전군 지휘관회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군 지휘관들이 모여 현역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결의하는 것은 군인의 정치관여를 금지하는 군인복무규율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1980년 8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이 예편되고 같은 날 피의자가 후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요.

"예."

-19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0년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했지요.

"예."

-피의자는 수경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80년 8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간담회를 개최해 3김씨의 작태와 안보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토론하면서 전두환 장군이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자임을 강조한 사실이 있지요.

"예."

-수경사 1980년 부대사에 보면 그날 안보간담회에서는 피의자가 직접 참석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작전참모가 북괴 및 대북정보를 설명하고, 합수단에서 선정한 강사인 국제승공연합회 총무국장 황인태가 안보강연을 하고, 통대 대의원들 중 3명이 정부시책 지지결의를 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인가요.

"예."

-현역 군인인 피의자가 통대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전두환 장군이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임을 강조하면서 1980년 8월27일 실시될 대통령선거에서 전 장군을 지지해 달라고 발언한 것은 군인의 정치관여를 금지하는 군인복무 규율에 정면으로 위배될뿐더러 군형법상의 정치관여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문도가 언론통폐합 주장

 

-1980년 9월경 허문도 정무1비서관이 피의자를 찾아와 언론통폐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 당시 허문도 정무1비서관이 저를 찾아와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허비서관이 평소 언론통폐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피의자는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에게 언론통폐합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저는 그런 지시를 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만약 제가 그런 지시를 했다면 허문도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1980년 10월 중순경 피의자는 권정달 정보처장을 대동하고 그가 마련한 언론통폐합에 대한 의견서를 가지고 청와대를 방문해 이광표 문공부장관,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허문도 정무1비서관 등이 배석한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에게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있지요.

"허문도가 주장하는 언론통폐합 방안에 반대하는 보고를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결론이 났는가요.

"저는 언론통폐합이 문제점이 많으므로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말했고, 전 대통령도 제 의견에 동의해 보류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 11월12일 피의자가 초도 순시차 강원도 속초에 가 있던 중 보안사 비서실로부터 이광표 문공부장관이 언론통폐합에 관한 대통령 결재 서류를 갖고 왔다는 연락을 받고 헬기편으로 급히 보안사로 돌아온 사실이 있는가요.

"예."

-1980년 11월 12일 16시경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실에 도착하자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李光杓 문공부장관이 대통령 결재를 받은 서류를 피의자에게 건네주면서 집행을 의뢰했지요.

"예."

-피의자는 "문공부가 처리하지 왜 우리한테 넘기는거요, 왜 악역을 맡겨요"라면서 화를 내자 사색이 된 이 장관이 "각하께서 보안사 협조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라면서 대통령의 지시임을 강조했지요.

"예."

-이광표 문공부장관이 전달한 전두환 대통령의 최종 재가문서의 제목이 '언론창달계획'이었는가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방사는 1도사 원칙밖에 기재되어 있지 않아 "이것으로 어떻게 집행하느냐"고 난색을 표시하자 이상재가 세부 집행사항이 들어있는 서류를 꺼내면서 "그것에 대해 이미 전두환 대통령의 결심을 얻은 바 있다"고 말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한용원 정보처장이 이상재와 서로 다투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방사에 대한 세부 집행계획은 언제 대통령 결재를 받았는가요.

"저는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원래 지방사에 대한 세부 집행계획은 없었으며, 이상재가 자기 마음대로 적당히 언론사를 통폐합시킨 것은 아닌가요.

"저는 모르는 사항입니다."

 

사주들에게 강제로 각서받아

 

-그날 저녁 6시경에 중앙사는 보안사가 사주를 불러 각서를 받고, 지방사는 각 지구 보안대장이 사주를 불러 강제로 각서를 받은 일이 있나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각서 내용은 '본인은 새 시대를 맞아 국가의 언론정책에 적극 호응해 본인이(대표이사, 이사, 사장 등)으로 되어 있는 (주식회사 ○○○○)을 다음과 같이 조치할 것을 다짐해 이에 각서하며, 이 각서에 의한 조치에 대해 앞으로 민․형사소송 및 행정소송 등 여하한 방식에 의해서도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전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 맞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각서 내용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날 언론사 사주들이 작성한 각서가 모두 위와 같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사주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고 이상재가 사전에 준비한 각서 모델을 보여주면서 강요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45개 언론사 사주로부터 포기각서를 받아 이를 취합해 문공부에 넘겨주어 후속처리를 하게 했지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날 언론사 사주들은 순순히 각서를 쓰지 않으려 했으며, 특히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반발이 심했고, TBC는 이병철 회장이 포기각서를 쓰지 않으려고 몇 시간이나 버텼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지방지를 1도사 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공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체제로 개편하는 등 64개 매체(신문 28, 방송 29, 통신 7)를 신문 14, 방송 3, 통신 1개로 통폐합하고, 그 과정에서 3백5명의 언론인이 추가 해직되었지요.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1980년 10월경 보류하기로 했던 언론통폐합계획을 1980년 11월12일에 이르러 갑자기 다시 추진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비상계엄 해제를 앞두고 저항세력 제거 필요성이 대두되고, 후에 체제홍보의 근간을 이루는 언론사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강제로 언론통폐합 조치를 단행한 것 아닌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5공화국 헌법부칙에서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데 대한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유는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중지, 군 병력에 의한 국회점령과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 김종필․김대중․김영삼 등 이른바 3김씨의 체포․구속․연금 등 주요 정치인 제거 조치로 국회가 사실상 정지되고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활동이 규제된 헌정중단 상황을 헌법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제5공화국헌법 공포일인 1980년 10월 27일 13시경 입법권한이 없는 국보위 전체회의를 열어 동 헌법부칙 제6조에 근거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운영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임의로 제정했지요.

"저는 회의에 참석한 바도 없고, 그 배경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10월29일 위헌적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해 그때부터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국가보안법 등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해 국회의 기능을 대신 수행하도록 한 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국회 권한을 대행할 기구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기로 계획하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즉 1980년 5월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마련한 신군부의 소위 시국수습방안에 위와 같은 과도입법기구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보위는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대통령의 자문기관에 불과해 하등 입법권한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김대중과 재야인사 등이 내란음모 등을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세력을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을 불법적으로 체포, 감금하고, 고문, 가혹행위 등을 통해 내란음모 등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사법부가 내린 판단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1980년 8월, 10․26 사건의 피고인 김재규에 대한 내란목적 살인사건의 상고심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으로 볼 증거가 없고 국민의 저항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 판사를 보안사 수사관들이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가 고문하면서 사직을 강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같은 해 8월9일 같은 재판에서 같은 취지의 소수의견을 냈던 다른 대법원 판사 4명도 보안사 요원에 의해 강제 사직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의 1심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대법원 판사 5명을 강제로 사직시키고, 이 사건의 1심재판에서부터 대법원 재판에 이르기까지 보안사 요원들이 상주하면서 군 판사 및 대법원 판사들을 감시해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김대중이 내란음모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없음에도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분위기를 형성해 사법살인을 기도했다가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징역 20년으로 감형해 미수에 그쳤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적인 것

 

-피의자 등 신군부는 1981년 1월23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이 확정된 다음날 비상계엄을 해제했는데, 비상계엄 하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재판진행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피의자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등을 통한 간접선거에 의해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나 5공화국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에 의해 통과된 것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는 당시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다른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진상이 은폐되고, 계엄령 하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거나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없었던 대의기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국민이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피의자들의 내란행위에 대해 승인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그런 견해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피의자가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이 사건 내란행위에 의해 창출된 제5공화국의 질서가 국민의 저항으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국민의 의사에 따른 새로운 헌법질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그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채 국민의 상대적인 다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에 불과해, 이 사건 내란행위에 대해 국민의 승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그런 의견에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가는 몇 나라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상대적인 다수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피의자는 신군부 주도세력으로 전두환 장군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역사 앞에 진실을 밝힌다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모든 사실을 밝힐 용의가 없는가요.

"지금까지 모두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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