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상고이유서(1980년 11월26일), "본인 생명은 귀 대법원 재판부에 달려 있으니…"
김대중 상고이유서(1980년 11월26일), "본인 생명은 귀 대법원 재판부에 달려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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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1.21 09:42:16
  • 최종수정 2019.01.2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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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보충서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한 것은 그런 독재체제로는 결코 국민의 행복이나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 역사가 납득할 수 있는 심판을 내려 달라"고 요구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변호인이 제출한 상고이유서, 그리고 김대중 피고의 자필로 작성한 상고이유(보충)서다. 김대중 피고는 자필 상고이유(보충)서에서 "본인은 전 정치생활을 통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나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면서 "재판부가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 공정한 판결을 내려 역사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심판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사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연합뉴스 제공)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사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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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서 1980년 11월26일
피고인 김대중·예춘호·고은태 위 피고인 등 변호인 허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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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변란 목적 없었다

1. 원심은 공소사실을 모두 그대로 인정하여 피고인 등에게 유죄판결을 했는 바, 이는 증거법규에 위반한 채증을 한 위법과 대법원 판례에 상반하는 판단을 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 명백합니다.
(1) 피고인 김대중에 대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사실에 관해 원심은 피고인 김대중이 1973년 7월13일 14시경 동경소재 플라자호텔에서 공소 외 배동호․김재화․김종충․곽동의 등과 만나 일본에도 한민통을 만들어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등의 한민통 조직의 필요성과 취지를 설명하여 이들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할 것을 합의한 후, 같은 해 8월4일 10시경 동경 파레스호텔에서 이들과 재차 회합하여 8월13일 한민통 발기대회를 열고, 8월15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선언대회를 갖기로 하는 한편, 한민통의 강령과 인사문제를 확정하여 반국가 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를 구성하여 그 수괴가 된 다음 수차에 걸쳐 그 구성원과 통신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첫째, 피고인에게는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일관된 자유 민주주의 신봉자로서 3선의 국회의원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반공에 철저한 보수야당인 신민당 대통령후보로서 5백40만표의 국민 지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피고인인 한민통 일본본부의 조직을 의도했고 논의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통일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 것일 뿐 반(反)국가 단체를 조직한 것이 아닙니다. 피고인이 의도한 한민통 일본본부는 이미 조직된 한민통 미국본부와 아울러 한민통 총본부 산하조직의 하나입니다.
한민통 미국본부를 조직할 당시 피고인은 발기인 대회에서 대한민국 절대지지와 선(先) 민주화 후(後) 통일이라는 양대 원칙을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민주회복을 통해 유신체제에는 반대하더라도 반국가적 행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망명정부 수립제의를 반국가적인 행위라 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여 좌절시켰습니다.
피고인이 주도하여 조직한 한민통 미국본부에 대해 반국가 단체조직으로 공소제기하지 않은 사실은 한민통이 반국가 단체가 아니라는 반증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한민통 미국본부뿐만 아니라 한민통 일본본부의 조직에 있어서도, 피고인은 '대한민국 절대지지'와 '선(先)민주화 후(後)통일'의 원칙과 그 밖에 당시까지 시행해 온 '조총련과의 국경일 공동행사 중지'를 주장하여 관철시켰습니다. 이는 검찰에서 증거로 제출하여 유죄의 증거로 사용된 민족시보(1973년 8월21일자)에 게재된 한민통 일본본부 경과보고 내용에 의해서도 명백합니다.

한민통 결성에 직접 관여 안돼

또한 피고인이 한민통 일본본부 조직을 논의한 김재화는 在日 거류민단 본부장과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시 신민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되었다가 조총련 자금을 반입한 혐의로 구속되어 후보 사퇴를 한 바 있으나 무죄가 확정되었고, 제8대 국회의원이 되어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재직했던 점으로 보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함은 당연합니다.
배동호는 민단본부 상위의장, 정재준은 동경민단 본부장 등을 지낸 사람으로 민단 내의 세력다툼으로 비주류 입장을 취한 데 불과할 뿐, 반국가적 인사가 아니었음은 항소심 증인인 윤효동의 진술로도 분명합니다. 공소 외 곽동의가 조총련에 포섭되어 북괴를 방문했다 하나 그것은 1977년의 일입니다.
항소심에서의 검찰신청 증인 윤효동의 증언에 의하더라도 한민통 구성원은 대부분 민단 비주류입니다. 증인은 민단 비주류인 자를 포섭키 위해 1947년경부터 민단에 위장침투했으며 한민통 구성원 중 증인이 포섭한 사람은 곽동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민통 일본본부가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조직된 반국가 단체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언인 것입니다.
둘째, 피고인은 한민통 일본본부의 결성을 논의한 사실이 있을 뿐 실제 결성한 사실이 없습니다. 원심판결은 1973년 8월4일 10시경 동경소재 파레스호텔에서 공소 외 김재화․배동호․조활준․김종충․곽동의 등과 한민통 일본본부의 강령 및 인사문제, 8월13일 발기인대회, 8월15일 선언대회를 갖기로 확정했다고 인정하고 있으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민통 결성을 논의하던 중 조총련과의 국경일 공동 경축행사 중지를 주장하는 피고인의 의견에 대해 곽동의가 "8․15 공동행사를 위해 장소까지 마련했고, 또 남북이 왕래하고 있는 시점에서 공동 경축행사를 중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므로, 피고인은 "그렇다면 같이 한민통을 조직할 수 없다" 하고 퇴장했습니다.
다음 날 김재화 등이 피고인 숙소로 찾아와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화 후 통일, 조총련과의 공동행사 중지'라는 3대 원칙하에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결성준비위원은 피고인과 민단 비주류 측에서 절반씩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8월8일 납치됨으로써 준비위원을 추천하지도 못한 채 강제로 귀국했고, 그 후에는 전혀 관여한 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구성원이 될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준비위원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령과 인사문제를 확정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피고인은 한민통 일본본부의 조직을 예비하던 단계에서 타의로 중지하고 만 것이며, 그 후 결성된 한민통은 피고인과는 법률적으로 무관한 것입니다.
원심이 피고인이 반국가 단체를 구성하고 수괴가 되었다고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한 것은 어떤 범죄의 공모에 가담한 사람이 실제 실행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소위 '공모공동정범의 이론'을 근거로 한 것 같으나, 공모자 중의 어떤 사람이 다른 공모자가 실행행위에 이르기 전에 그 공모관계에서 이탈한 때에는 그 이후의 다른 공모자의 행위에 관해 공동정범으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며, 그 이탈의 의사표시는 반드시 명시임을 요하지 않는다는 1972년 4월20일자 대법원 판결에 위반한 것입니다.

반국가 단체 활동도 인정 안돼

셋째, 피고인은 반국가 단체의 수괴, 즉 한민통 일본본부의 의장에 취임한 바가 없습니다. 피고인은 1973년 7월6일 결성한 한민통 미국본부의 의장이나 간부직을 맡은 바 없으며, 공소 외 안병국 목사가 의장직을 맡았습니다. 피고인은 미국․일본․캐나다 등 각국에 한민통 외국본부를 결성한 다음, 이를 총괄 지도하는 한민통 총본부를 결성하여 그 의장에 취임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산하 단체 의장직을 겸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한민통 미국본부의 의장직을 맡지 않았던 피고인이 거주하지도 않은 일본에서 의장직에 취임하기로 동의했다는 것은 경험칙에 반해 논리의 모순입니다.
피고인이 한민통 일본본부의 의장 취임에 동의한 바 없고, 취임 사실이 없으므로 이 단체의 의장이 아니라는 것은 1979년 1월9일 미국에 있는 문명자 기자와의 대담과 1979년 2월 AP통신 동경지국 洪기자와의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이는 1심 중인 이태영의 증언과 상피고인 김녹영, 김상현의 법정진술에서도 명백히 밝혀진 것입니다.
피고인의 의도대로 한민통 일본본부가 결성되었다면 공소 외 김재화가 이 단체 의장직에 취임했을 것이나 피고인이 납치된 후 이들이 자의로 피고인을 의장에 추대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피고인이 의장에 추대된 것은 오히려 피고인과 이들 간에 인사문제에 대한 사전 합의가 없었다는 반증에 불과합니다.
넷째, 피고인은 1973년 8월 강제귀국 후 수사기관에서 해외활동에 관해 철저한 조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입건 처벌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상황을 보아 피고인의 일본에서 행위가 국가보안법의 구성요건에 충족하는 위법이 없었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다섯째, 원심이 인정한 반공법 위반 사실은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의 의장 취임에 동의한 바 없어 무효이니 의장직에서 퇴임시켜 달라는 연락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단체의 이익을 위한 통신연락이 아니었습니다.

내란 모의는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

(2) 피고인 김대중, 예춘호, 고은태 등에 대한 내란 음모사실에 대해 원심은 피고인 등이 문익환․이문영․김상현․이신범․조성우․이해찬․이석표․송기원․설훈․심재철, 공소 외 장기표 등과 일시 또는 순차적으로 공모하여,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해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과정에서 예상되는 희생을 각오하고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 주요관서를 점거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점인 김대중 피고인을 사태수습 인물로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끈다는 모의를 했다는 등 내란음모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임의성이 없는 피고인들의 검찰에서의 자백과 불법증거를 사용한 채증법칙의 위법입니다.
첫재, 내란의 구체적인 모의가 1980년 5월1일 피고인 김대중의 집과 5월12일 북악파크호텔 521호실에서 있었던 것으로 원심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내란죄는 집단적인 범죄로서 동조 가능한 사람을 예의 검토 타진하여 공모하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내란 목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조하지 않을 우려가 있는 다수인이 공개된 장소에서 내란을 모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1일과 5월12일 같은 방에 모여서 이야기하던 사람 중 일부는 내란 음모죄로, 일부는 계엄법 위반죄로 유죄를 인정하고, 나머지 상당수는 입건되지 않았음은 바로 同所에서 내란이 모의된 사실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1980년 5월12일 북악파크호텔 521호실에서 공소 외 장기표가 학생폭력 시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하여 피고인들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종교․사회학계의 지도자들 모임에서 일개 복학생이 이처럼 무모하고 황당한 내란을 제의하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이의나 토론 없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은 상식에 반합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장소에는 내란 음모죄가 인정된 사람 외에 상당수의 사람이 있었는 바, 일부가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나머지가 동조치 않았다고 분류한 것은 너무나도 인위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째, 비상계엄하에서 각목을 가진 학생이 무장한 군경과 대치하여 정부를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칙에 반합니다.
넷째, 만일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키로 모의되었다면 군경의 포섭이나 지지세력 확보에 노력했어야 할 것임에도 일견 기록에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기 확보를 위한 노력도 없었습니다.
다섯째, 내란목적의 자금살포나 사용계획이 없었습니다.
여섯째, 내란을 음모했다면 실행의 착수시기가 정해졌을 것임에도 그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5월 중순경 또는 5월22일로 인정한 것 같으나, 5월22일은 제2국민선언문에 명시된 날짜로 내란을 기도하면서 그 날짜를 미리 공표한다는 것은 상식에 반합니다.
일곱째, 원심판결은 5월17일 08시경 피고인 등은 북악파크호텔에서 전일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의 시국대책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조치가 발표될 때까지 관망하다가 계속 불투명하면 국민적 봉기를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는 바로 피고인들이 내란을 음모한 사실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피고인 등이 대통령에게 기대한 것은 그간 성명을 통하여 주장해 온 계엄령의 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일정 단축 등이지 정권의 양여나 피고인 김대중을 중심한 과도정부 수립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내란 음모했다는 주된 모임이 소위 국민연합 모임입니다. 이는 공소 외 윤보선이 주된 역할을 했던 조직체이고, 당시는 피고인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포기 문제로 양인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신문에 게재된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연합 모임에서 김대중을 위한 내란음모가 이루어질 수도 또 논의될 수도 없었습니다.
아홉째, 5월 중순의 학생데모 사태에 임하여 피고인 김대중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학생들은 학원 내로 돌아가라고 호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 피고인 측근이나 영향권 내에 있는 단체의 구성원이 데모나 데모의 선동에 가담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재판 공개주의에도 위배

이상의 제반이유를 종합해 볼 때 임의성이 없는 검찰에서의 피고인들의 자백을 근거로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인정한 원심판결은 채증법칙에 위반한 위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68년 3월5일 대법원 판결인 대규모 학생시위 주동자들에게 피고인들은 학생시위를 체계 있고 조직화된 것으로 광범위하게 전개하여 한일협정 비준의 무효화를 하려는 데 있었을 뿐, 직접적으로 국가의 기본 조직을 강압으로 해산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케 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민중이 시위에 호응함으로써 폭동화되면 국회가 스스로 해산하게 되리라는 사태의 현출을 예상한 것에 불과하므로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폭동할 것을 음모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는 판례에 상반하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설사 학생데모가 격화되어 혼란에 빠졌을 때 국민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과도정부 수립을 모의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1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죄가 아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한 예에 비추어 보더라도 본건을 내란음모를 이유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은 지나친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2. 남용된 사전증인심문을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원심판결은 헌법의 공개재판 원칙과 형사소송법의 대원리인 공판중심주의에 위반한 것입니다. 원심은 공소유지에 필요한 증인 대부분을 법정에서 조사하지 않고 사전증인심문조서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습니다.
군법회의법 제257조 2의 2항 사전증인심문제도를 거의 무제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문이 1973년에 개정된 후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은 지금까지 개정 전의 증거보전 신청절차의 범주를 크게 넘지 않게 운영되어 왔기 때문으로 생각되나, 원심에서와 같이 활용될 때 이 조문은 헌법 제110조에 위반되는 위헌법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재판공개의 원칙은 심리와 판결의 공개이고, 심리의 공개는 심리절차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 외에 증인심문의 공개로서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반대 심문권을 보장한다는 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개재판주의 공판중심주의 증거재판주의 등의 절차가 중세암흑주의의 규문절차에서 탈피하여 인권보장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 분명할진대, 이러한 사전증인심문제도의 인용은 형사절차를 중세 규문주의로 되돌릴 우려가 크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3. 원심은 피고인들이 제출한 재판부 기피신청에 대한 결정의 항고권을 박탈한 위법이 있습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항소심 재판부가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음을 이유로 기피신청을 제기한 바, 원칙으로 소송 진행을 정지해야 할 것임에도 급속을 요한다는 이유로 소송을 진행하여 선고했습니다. 항소심에서의 구속기간이 많이 남았고 별다른 증거조사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급속을 요한다는 사정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각결정 후 즉시 항고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선고했음은 피고인들의 기피신청을 박탈한 위법이 있습니다.
4. 군검찰에서의 피고인들의 자백은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상태에서 진술한 임의성이 없는 자백임에도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음은 헌법 제 11조6항과 군법회의법 제 352조에 위반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원심판결은 헌법과 법률위반 및 대법원 판례에 위반한 판단을 하여 판결에 영향을 끼친 위법이 있으므로, 이를 파기하고 상당한 재판을 구하기 위해 본건 상고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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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보충)서 1980년 11월26일 피고인 김대중(자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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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서는 나의 본심

본인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고이유를 보충해서 진술합니다.
1. 본인에 대한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및 내란음모 등에 관한 법률적 측면에 대해서는 본인의 변호인인 허경만, 김동정, 박영호씨 등이 원심판결의 부당성을 소상히 논급하고, 그들은 한결 같이 본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귀 대법원 재판부의 공정한 판결을 요청했으므로 본인은 이에 더 첨가하지 않겠습니다.
2. 본인이 여기서 보충 진술코자 하는 것은 원심판결에서 유죄로 인정한 사실들에 대한 실제의 행위, 또는 체험 당사자로서의 진실 된 내용과 경위에 대한 개진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본인이 여기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수사기관에서 작성 제출한 자필진술서를 그대로 상고이유로 받아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뜻을 여기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수사기관에서 세 가지 부문의 자술서 즉, 첫째, 해방 이후의 본인의 사상과 정치적 경력, 둘째, 1972년 10월유신 이후부터 1973년 8월의 강제 귀국 시까지의 본인의 해외에서의 정치적 활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소신, 셋째, 1979년 10월26일 10․26 사태 이후의 정치적 신념과 그에 의한 행동 등 이상 3종의 진술서를 작성 제출했습니다. 이 진술서들의 내용은 본인의 숨김없는 신념과 활동을 그대로 기술한 것임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맹세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3종의 진술서를 본인의 상고이유 보충서의 내용으로 그대로 수용해서 이를 받아 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은 본인의 거짓없는 주장의 일관성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감히 이를 요청합니다.
3. 다음에 말씀드릴 것은 본인이 1․2심의 군법회의 법정에서의 검안심문과 변호인의 반대심문에 대한 답변, 고소인에 대한 본인의 심문내용 역시 사실 그대로를 진술한 것이며 추호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합니다.
특히 1심에서 본인이 행한 최후진술은 사건에 대한 진상의 설명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한 국민, 그리고 정치에 종사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애국충정을 말씀한 것이오니 특별히 그 녹음을 청취해 주시면 감사하겠으며 사건의 진실발견에도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4. 본인은 이미 말씀드린 자술서에도 세세히 논급한 바와 같이 본인의 전 정치생활을 통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나의 생명과 같이 사랑해 왔습니다. 북괴와 공산주의는 해방 직후와 6․25 당시의 본인의 산 체험을 통해 이를 증오하고 반대해 왔습니다.
본인은 안정되고 강력한 민주체제의 확립만이 자유와 정의의 구현을 통한 국민적 단합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러한 국민의 자발적인 단결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 있는 반공과 안보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이러한 본인의 소신은 국내외에서 행해진 모든 연설이나 저술을 통해 수없이 강조되었습니다. 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것은 그러한 독재체제로서는 결코 국민의 행복이나 국가안보에 기여할 수 없다는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우리의 민주주의 실현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민의 성숙된 민주역량을 기반으로 성취하는 것만이 유일하고 바람직한 길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10․26 사태 이후는 일관해서 이와 같은 자세를 견지해 왔는데 이는 각종보도나 기타 많은 증거물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5. 이제 본인의 생명은 귀 대법원 재판부의 판결 여하에 달려 있음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귀 재판부가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서 만인으로 하여금 승복하고, 역사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심판이 있으시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우신 은총이 심판부 제위에 임하시기를 기구해 마지않습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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