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달 진술조서(上), “'시국수습방안은 정권찬탈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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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08 08:25:13
  • 최종수정 2019.01.0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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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를 유죄로 몰아놓은 권정달 전 보안사 정보처장의 역사적 증언
권정달 자신이 '시국수습방안' 마련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
'시국수습방안' 골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이것으로 권력 찬탈, 전두환 신군부 집권 길 열어
[편집자 주] 이 문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됐던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검찰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권정달 씨는 검찰 진술에서 “시국수습방안은 실질적인 집권 시나리오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신군부(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정달 씨는 서울의 봄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보안사에서 정보처장으로 근무하며 신군부 측에 서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하고, 이를 집행하여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수사가 진행되자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여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를 폭로한 것이다. 권정달의 진술조서는 내용을 상하 2회로 나누어 공개한다. 
권정달 전 자유총연맹 총재. 김영삼 정부 시절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가 시작된 12.12 및 5.18 사건에서 권정달 씨는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폭로하여 유죄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권정달 전 자유총연맹 총재. 김영삼 정부 시절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가 시작된 12.12 및 5.18 사건에서 권정달 씨는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폭로하여 유죄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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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달 진술조서(제3회) 1996년 1월 4일. 삼정호텔 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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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됐지요.
답 예.
문 사전에 진술인 등 보안사 참모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건의했나요.
답 제가 건의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전두환이 최 대통령이나 신 총리 등에게 자기가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하겠다고 말하고 다닐 때 보안사 참모들도 그 사실을 알고 중정 개편문제를 논의한 적은 있습니다. 전두환이 어떤 경위로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하려고 마음먹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 당시 보안사 핵심참모들인 진술인과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최예섭(崔禮燮) 기획처장 등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 서리 취임을 며칠 앞두고 이미지 홍보를 비롯해 중정 개편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사전에 이미지 홍보를 하기로 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허삼수가 자청해 중정에 가서 개편작업을 하겠다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한 실질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답 당시 보안사령부는 돈이 없었는데 중정부장 서리를 겸하면 예산문제에 융통성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전두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답 계엄령 하에서 합수본부장으로서 여러 곳에 격려금을 지급하다 보니 돈이 쪼들리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연유도 중정부장을 겸임한 이유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문 집권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데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실권자로 부상하자 군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집권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두환 사령관도 사람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과거와는 달라졌습니다. 하여간 당시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었는데 자연히 돈도 필요했겠지요.
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람을 접촉하는 것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답 12․12 사건 이후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시간이 갈수록 군권 이외에 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실력자로 평가됐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군부 내에서가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막강한 실력자로 행세해 마치 국가 최고 권력자인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하곤 했습니다.
문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한 것도 역시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요.
답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당시 보안사령부는 사실상 중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무리하면서까지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주된 이유는 중정의 풍부한 예산 사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침첩보 입수

 

문 실권자로 부상한 전두환 입장에서는 계엄사령관 직책을 맡아서 국정을 통제 감독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리 실권자라도 군 서열상 바로 계엄사령관을 맡기 어려워 차선책으로 부총리급인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여 각료급 대책회의에 참석할 생각으로 중정부장 서리를 겸임한 것이 아닌가요.
답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는 1980년 3월 중순경 최 대통령에게 민간인 출신을 중정부장에 임명해 정보계통을 양립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그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같은 달 말경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중정부장을 겸직하겠다고 하자 “내 권한 밖이고 간여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견을 말하라면 반대”라고 의사표시를 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문의하여 반대를 했는데도, 전 장군이 밀어붙여 중정부장 서리를 차지했다고 하는데요. 최 대통령으로부터 전 장군이 중정부장 임명을 관철해 낸 구체적인 경위는.
답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 최 대통령이 당시 전 장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거나, 아니면 벌써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신군부로 넘어가 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답 제가 말씀드릴 성격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임명에 관련이 없는 신 총리를 찾아가 정보부장 겸직 문제를 협의한 것은 최 대통령이 전두환의 요구를 받고, 중정부장에 민간인을 임명해 정보계통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신 총리의 의견을 말하면서 전 장군의 겸직이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인 때문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문제로 전두환이 신 총리를 만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문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함으로써 국가 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함은 물론 공직서열상 부총리 급으로 격상되어 정부 내 공식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게다가 국방장관보다 상위에 올라섬으로써 군부 내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실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 사실이지요.
답 예.
문 1980년 5월 10일 중정에서 북괴동향을 보안사에 보고한 적이 있나요.
답 예. 그날 중정 2차장으로 해외담당인 김영선(金永先) 차장이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괴동향을 보고하겠다며 보안사령관실로 찾아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보안사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보안사령관실에서 김영선 차장이 북괴 동향을 보고했습니다. 일본 첩보에 의하면 북괴 남침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 전두환은 뭐라고 하던가요.
답 시국이 어수선한데 그런 첩보가 사실이라면 큰일이니 우선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문 그날은 최 대통령이 중동순방을 위해 출국한 날이 아닌가요.
답 예.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 북괴가 남침할 우려가 있다는 첩보도 있는데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강행해도 되는가요.
답 그런 첩보가 있으면 청와대에도 보고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강행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 다음날인 1980년 5월 11일 육본에서 첩보를 분석한 결과 북괴 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 사실을 알고 있나요.
답 처음 듣습니다. 저는 1980년 5월 10일 보안사에서 김영선 차장에게 동향 보고를 들은 후 별 생각 없이 흘러 넘겼습니다.
문 1980년 5월 12일 중정 담당국장이 임시 국무회의에서 북괴 남침위협을 보고한 일이 있고, 韓․美연합사 사령관 위컴 장군은 “전두환 장군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로 북한의 남침위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는데 알고 있나요.
답 저는 처음 듣습니다.
문 1980년 5월 10일 최 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나섰다가 5월 16일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지요.
답 예.
문 최 대통령이 귀국하는 날 청와대에서 열린 심야 시국관련 대책회의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는데 진술인도 동행했는가요.
답 저는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문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소위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해, 5월 12일 보고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의 주요 골자는 첫째 비상계엄 전국확대, 둘째 국회 해산, 셋째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였지요.
답 예.
문 진술인은 전회 진술서 시국수습방안 중 국회 해산은 없었으며, 정치활동 규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했는데 왜 전회와 다르게 진술하는가요.
답 시국수습방안 수립을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등과 제가 협의 과정에서 정치활동 규제방안 논의도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09시 30분경 주영복 장관에게 제가 국회 해산을 시국수습방안의 하나로서 보고했고, 이에 따라 주영복 장관이 같은 날 신현확 총리, 최 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건의를 했습니다. 많은 토의를 거친 끝에 마련된 최종적인 시국수습방안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가 틀림없습니다.
문 시국수습방안은 진술인 혼자 작성했나요.
답 제가 보안사 정보처장으로서 시국동향분석 및 그 대책 수립 등에 관한 업무를 전담했기 때문에, 제가 주무가 되어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내용 자체가 헌정질서 중단까지 초래될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는 사항들이고, 나아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군부의 전적인 지원과 동참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때문에 4명의 보안사 참모들과 의논해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그 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12․12 사태 이후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군부 핵심세력들과 초안내용을 검토하면서 그 실행과정에서의 병력동원 등을 협의한 후 시국수습방안을 확정했습니다.

 

5월 초부터 보안사에서 시국수습방안 검토

 

문 보안사 내에서 시국수습방안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언제인가요.
답 1980년 3월 대학가가 개강하면서부터 학원소요는 물론 노사분규가 많아 시국이 시끄러워졌습니다. 또한 1980년 4월 하순부터는 학내문제에 국한됐던 대학가 시위가 ‘전두환 퇴진, 계엄해제’ 등 정치적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 양상도 더 격화됐습니다. 이에 같은 달 말경 보안사 핵심참모였던 허화평, 허삼수, 정도영, 이학봉과 저는 이런 시국상황에서는 군부가 전면에 나서 강력히 정국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그런 방안으로서 시국수습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됐습니다.
문 그렇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시국수습방안을 지시한 1980년 5월 초순 이전부터 보안사 내에서 논의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그 당시 저희들과 개별접촉, 주요 참모회의 등을 통해 참모들 사이에 이런 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1980년 5월 초순경, 주무 부서장인 저에게 시국수습방안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보처 산하에 4~5명으로 구성된 정세분석반을 활용해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문안작성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문 진술인이 1980년 5월 초순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을 지시받은 후 구체적 내용을 성안하게 된 경위를 진술하시오.
답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후부터 2~3일 동안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과 저는 집중적인 논의를 했는데,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에서 주로 만나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주요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문 시국수습방안을 이처럼 세 가지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당시는 지역계엄이 선포된 상황이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군부 실세였던 전두환 장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역계엄은 ‘물계엄’ 또는 ‘종이호랑이’로 비하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저와 보안사 참모들은 지역계엄만으로는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고 군부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선행조치로서 지역계엄보다 한층 강화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최규하 정부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내각이 소극적 역할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신군부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배제한 채 계엄사령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강력히 독려할 수 있는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방안이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제기됐습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기구를 통해 내각을 조종, 통제하는 기능을 군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마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계엄해제를 찬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신군부에 의한 정국장악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국회 해산 및 주요 정치인 연행 등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다각적인 고려 하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라는 시국수습방안이 만장일치로 작성됐던 것입니다.

 

합헌적 국회해산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문 국회 해산이란 어떤 방식에 의한 해산을 의미하나요.
답 제가 구상하기로는 대통령 재가를 받아 헌법상 절차에 의한 국회 해산을 하려고 했는데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비상계엄 상황을 이용, 무력에 의한 국회점거 봉쇄를 통한 사실상의 국회 해산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1980년 5월 18일 국회 점거 및 5월 20일 국회 등원 저지로 현실화됐습니다..
문 헌법상 절차에 의해 국회 해산을 할 경우 60일 이내에 재선거를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었나요.
답 재선거를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대책은 수립된 바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법적 문제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애당초 합헌적 절차에 의한 국회 해산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됩니다.
문 위와 같은 시국수습방안은 그 내용이 가히 혁명적인데, 이를 대통령이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답 최초 입안단계에서는 신군부가 정국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가가 그다지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국수습방안 내용 자체가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가가 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집약된 의사를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사실상의 압력을 행사해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재가를 기도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진술인과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 핵심참모들이 시국수습방안의 초안을 완성한 것은 언제인가요.
답 1980년 5월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정리 지시를 받은 날로부터 2~3일 정도 후로 기억합니다.
문 당시 국민 정서와 시국상황 등을 고려할 때,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군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 없이는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요.
답 그렇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지역계엄도 해제하고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전두환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만약 시국수습방안이 실행되어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가 정국을 장악할 경우 국민들의 저항과 반발이 한층 격화될 것은 명백했습니다. 따라서 전국계엄 하에서는 계엄군을 이용해 국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초동단계부터 강력히 제압하기 위해 군을 장악하고 있는 신군부 핵심세력들의 전폭적인 협조와 지지가 꼭 필요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적극적인 동참 없이는 사실상 시국수습방안 실행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신군부 주식회사 주주들과 긴밀히 협조

 

문 그렇다면 시국수습방안 입안 단계부터 신군부 핵심세력들과의 긴밀한 협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그렇습니다. 저를 비롯한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이 시국수습방안 초안을 마련한 후부터 1980년 5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그 확정안을 보고할 때까지 사이에 앞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보안사 핵심참모 5명과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수시로 모여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긴밀히 협의했던 것입니다.
문 보안사 핵심참모 5명과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위와 같은 협의를 위해 처음 모인 것은 언제인가요.
답 1980년 5월 4일경으로 생각됩니다.
문 이 모임에 참석한 신군부 핵심세력은 누구누구였나요.
답 12․12 사태의 주역들로서 그 당시 ‘12․12 사태로 설립된 신군부 주식회사의 주주(株主)들’로 행세하며 군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유학성 3군사령관, 황영시 참모차장, 차규헌 육사 교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은 확실히 모였으며, 나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위와 같은 협의를 위해 처음 모인 장소는 어디인가요.
답 보안사령관실 옆에 있는 대기실 용도의 작은 방에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문 그러한 모임을 갖기 위한 연락은 누가 담당했나요.
답 당시 보안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허화평 비서실장이 연락해 이른바 신군부 측 장성 등을 보안사로 불러 사전 협의를 거치는 것이 당연한 절차로 인식됐습니다. 그 때도 전두환 장군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허화평 비서실장이 직접 연락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후에도 신군부 장성들에 대한 연락은 허화평 비서실장이 전담했습니다.
문 첫번째 모임에서는 무엇이 논의됐나요.
답 제가 우선 허화평 등 보안사 핵심참모 4명과 함께 작성한 시국수습방안 초안 내용 즉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방안과 그 필요성을 차트에 기재해 보고했습니다. 그 후 참석자들 전원은 시국수습을 위해선 군부가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고 주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그 방안의 일환으로 시국수습방안을 조속히 실행에 옮길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국수습방안은 저희들이 마련한 초안대로 확정됐습니다.
문 그 당시 참석했던 신군부 측 장성들 중 진술인이 보고한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없었나요.
답 제가 보고한 방안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의사를 표명했을 뿐 그에 관한 구체적 의견을 발표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그 후부터 1980년 5월 16일까지 사이에 황영시 등 신군부 측 장성들과 시국수습방안에 관해 더 이상 논의한 사실은 없나요.
답 그렇지는 않습니다.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측 장성들과 보안사측 핵심참모 5명이 한자리에 모여 시국수습방안을 협의한 것은 위와 같은 모임 한 번 뿐이었으나, 그 뒤에도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은 수시로 전두환 장군을 혼자 또는 몇몇이 함께 찾아와 그에 관한 협의를 했습니다.
문 최종적으로 확정된 시국수습방안이 전두환 장군에게 보고된 것은 언제인가요.
답 1980년 5월 12일경으로 기억합니다.
문 진술인이 혼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나요.
답 저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이 함께 보안사령관실을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혼자 보고했는지 아니면 참모들과 함께 보고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문 최종적으로 확정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받은 전두환 장군은 뭐라고 하던가요.
답 수립과정에서 수시로 핵심참모들이 전두환 장군에게 보고해 보안사령관도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드린 시국수습방안 보고서를 검토하고 아무 이의 제기가 없었습니다.
문 전 장군은 시국수습방안을 언제 실행에 옮기려고 했나요.
답 당시 전두환 장군은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의 재판진행 상황에 대해 대단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재판이 끝난 후(1980년 5월 20일 이후)에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생각했으며, 핵심참모들 생각도 동일했습니다.
문 검찰 조사결과에 의하면, 진술인 등은 시국수습방안을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의결한 다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려고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시국수습방안의 시행을 앞당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1980년 5월 15일 저녁 무렵 전두환 장군, 저를 비롯한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이 신군부 측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노태우, 정호용 등과 협의해 1980년 5월 20일 이후 시행하려던 당초 계획을 갑자기 변경해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다음날인 5월 17일 24시를 기해 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행일자를 앞당긴 이유는 첫째, 5월 15일~16일경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5월 22일 이후 다시 전국 규모의 대규모 시위를 재개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둘째, 여야 합의로 국회를 소집해 계엄해제를 결의할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런 움직임이 있기 이전에 시국수습방안을 시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문 시국수습방안 시행일을 앞당긴 것은 누구 제의에 의한 것인지 기억하나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결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시국수습방안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재가 절차를 거쳐야 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절차를 밟으려고 했나요.
답 시국수습방안이 확정되자 전두환 사령관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등과 상의해 최 대통령의 귀국 다음날인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 지지 결의를 한 다음, 주영복 장관이 대통령에게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결집된 의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국수습방안을 건의해 재가토록 하고, 그 다음 임시 국무회의에서 의결 절차를 거쳐 시행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17일로 일정 당겨지다

 

문 전두환이 노태우, 정호용 등과 이런 시행절차에 관해 상의했다고 진술하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답 당시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 등은 일주일에 3~4번 씩 보안사에 와서 전두환과 시국수습방안의 시행방법 등을 상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국수습방안 시행절차는 전두환 사령관이 보안사 참모들과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의 지지결의 유도, 비상 국무회의에서의 의결을 위해서는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 등과 사전 협의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진술하는 것입니다.
문 전두환 사령관은 최 대통령에게 언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했나요.
답 1980년 5월 17일 10시경 전두환 사령관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압니다.
문 당시 주영복 장관이 신현확 총리,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배석한 상태에서 최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했으나, 최 대통령은 “그 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고, 특히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외의 나머지 두 가지 방안은 수용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문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해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지지결의를 유도한 것도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전두환 사령관이 사전에 주영복 장관에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토록 요청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아시다시피 1980년 5월 17일 09시 30분경 전 장군의 지시에 따라 제가 주영복 장관에게 찾아가 시국수습방안 세 가지를 그날 10시 개최 예정이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안건으로 상정해 결의하고, 이를 토대로 대통령 재가를 받아달라는 것이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라고 말했습니다. 사전에 이 문제에 대해 전 장군이 주영복 장관과 사전교감이 없었다면, 대령인 제가 국방부장관에게 가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 유병현 합참의장의 진술에 의하면 주영복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시작 전 자신의 방에 들른 유병현에게 “외부 요청을 받고 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라 했고, 유병현이 “외부가 어디냐”고 묻자 엄지손가락으로 보안사 쪽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유병현의 진술과 진술인의 진술 내용을 종합하면 1980년 5월 16일 전두환이 주영복 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지휘관들의 지지 결의를 위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그렇다면 전두환은 한편으로는 1980년 5월 17일 10시경 최 대통령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미리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의를 거쳐 주영복 장관이 최 대통령에게 건의해 재가를 받도록 했다는 말인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이 확정되기 전인 5월 초부터 이학봉 대공처장은 소요 배후세력으로 지목한 이른바 국기(國紀)문란 사범 명단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누구 지시로 한 것인가요.
답 자세한 것은 잘 알지 못하나 시국수습방안 확정 과정에서 이학봉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사령관에게 보고해 조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문 이른바 부정축재자는 진술인이 맡고 있던 정보처에서 선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것이 아니고, 당시 정보처에서 존안하고 있던 각종 비위자료를 대공처의 이학봉에게 건네주어 이학봉 수사국장이 처리 대상자를 선별했습니다.

 

시위 예방 위해 사전에 군부대 이동

 

문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1980년 5월 17일 24시 이전인 5월 3일에는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하고, 5월 8일에는 13공수여단을 3공수여단 주둔지로 이동시켰습니다. 5월 10일에는 11공수여단을 1공수여단 주둔지로 이동시키고, 5월 14일에는 3공수여단이 국립묘지에 진주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20사단 61․62연대가 잠실체육관,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했으며, 5월 16일에는 20사단 60연대가 태릉으로 이동했는데요. 이러한 계엄군의 이동은 시국수습방안의 일환이었던 비상계엄 전국확대의 준비를 위한 것입니까.
답 예. 위와 같이 병력 이동시기는 시국수습방안에 관해 신군부 핵심세력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과 전두환 사령관 및 저를 비롯한 보안사 핵심참모들 사이에 긴밀한 협의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 협의 과정에서 전두환 장군이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대비한 효율적인 병력운동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황영시 참모차장이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과 협조해 병력 이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답 우선 황영시가 비상계엄 전국확대안 논의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시국수습방안 시행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 그 준비작업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또 전두환이 아무리 실권자라 해도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바로 지시하기에는 깐깐한 성격의 이희성 사령관이 부담이 됐던 것입니다. 마침 황영시가 육군 참모차장으로,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상에 있었기 때문에 황영시를 통해 조치를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유관 지휘관으로서 당시 군부 실세였던 노태우 수경사령관 및 정호용 특전사령관과도 사전 협의가 됐을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최종적으로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답 정보처 문관으로 근무하던 윤두열이 정리했습니다.
문 전회에는 정보처 정세분석반에서 작성했다고 진술했는데 윤두열이 정세분석반원이었나요.
답 그렇습니다.
문 윤두열은 자신은 중보반이었지 정세분석반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데 아니란 말인가요.
답 저희 보안사에서는 각 팀별로 명칭 없이 일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하는 일에 따라 편의상 명칭을 붙였습니다. 윤두열도 당시 다른 문관 몇 명과 함께 청와대나 국방부 등 상부에 보고할 문서를 각 과에서 취합한 후 맞춤법을 고치는 등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윤두열과 함께 일하는 팀이 중요한 보고서를 만든다고 해 약칭으로 ‘중보반’으로 불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각지에서 정보처로 올라오는 각종 동향을 분석해 정리하다 보니 정세분석반으로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윤두열은 자신의 소속이 중보반이라고만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 윤두열은 자신이 시국수습방안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답 아닙니다. 제가 사령관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시켰다면 윤두열에게 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문 윤두열은 자신이 그 보고서를 만든 사실이 없을뿐더러 그렇게 중요한 보고서를 기안할 능력도 없다고 하는데 아니란 말인가요.
답 시국수습방안의 골격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 참모들과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군 지휘관들의 확대모임에서 정해졌습니다. 때문에 윤두열에게는 이미 만들어진 골격을 토대로 적절한 문구로 포장해 보고서를 만드는 일만 시켰습니다. 그 정도 능력은 윤두열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윤두열은 그러한 일을 수년간 해온 문관이었습니다.
문 위와 같이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계엄사령관과는 사전에 협의가 없었나요.
답 제가 알기로는 계엄사령관과는 사전에 논의가 안된 것으로 압니다.
문 계엄확대와 동시에 발포된 포고령 10호에 의해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김종필․김대중․김영삼 등 이른바 3김이 체포․구속․연금되어 정치활동이 봉쇄되고, 국회도 계엄군이 점령해 국회의원 등원이 저지되어 임시국회가 열리지 못하는 등 국회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이런 조치들이 시국수습방안에 포함되어 있었나요.
답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에서는 국회 해산이 주 내용이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그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한 군 지휘관들 가운데 안종훈(安宗勳) 당시 군수사령관이 이의를 제기하자 정호용, 노태우, 박준병 등이 나서서 군이 강력하게 개입해 시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발언했다는데 알고 있나요.
답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문 정호용, 노태우, 박준병 등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석상에서 안종훈 군수사령관의 반대의사 표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면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역설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답 그것은 정호용,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부터 시행 준비단계에 이르기까지 보안사령관은 물론 보안사 핵심참모들과 긴밀히 협의해 왔습니다. 때문에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시국수습방안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그 전면 시행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치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사전에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될 비상계엄 전국확대 등 안건에 대해 회의 참석자 전원이 만장일치로 지지토록 유도하기 위한 준비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호용, 노태우 등이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 하에 움직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유병현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회의 시작 전 장관실에서 합참의장, 각 군 총장 등과 간담회를 하면서 진술인이 주영복 장관에게 건네준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유병현이 이의를 제기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말문이 막히면 주영복이 수시로 옆방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옆방에 보안사측의 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했다는데 진술인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답 저는 주영복 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을 의제로 상정해달라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전하고 곧바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누가 있었다면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부터 보안사측과 긴밀히 협의해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등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문 주영복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진술인이 제시한 회의 의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비상협의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세 가지였으나 유병현 등의 반대로 비상계엄 확대문제만 상정하고, 나머지 두 가지 안건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메모지에 국가보위비상협의기구를 뜻하는 ‘협’자와 국회 해산을 뜻하는 ‘국’이라고 기재한 후 신현확 총리 및 최 대통령에게 그런 안건 세 가지를 모두 건의했다는데 이에 관해 알고 있나요.
답 제가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그 이후 상황을 들은 적이 없지만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문 주영복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면서 참석자들로부터 백지서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요청에 따른 것인가요.
답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주영복 장관이 전두환 장군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직 비상계엄 전국확대 안건만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의결했다는 점에 심적 부담을 느낀 나머지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연서명 문서를 제시하고, 마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세 가지 안간 모두에 대해 지휘관들의 지지 결의가 있었다면서 재가를 받아내려고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권장악 위한 집권 시나리오

 

문 주영복 장관이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전군 지휘관들이 모여 내린 결론임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제안설명을 하면서도 군부 의견이란 점을 강조한 점으로 볼 때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데 군부 결의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요.
답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진술인이 전두환 장군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핵심참모와 신군부 측 핵심세력과 긴밀히 협의해 수립한 시국수습방안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는 내각 기능을 배제하고 신군부가 전면 등장해 정국을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초동단계부터 강력히 제압하기 위해 공수부대 등 진압병력 투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1980년 5월 18일~5월 27일 사이 광주사태 진압과정에서 공수부대에 의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제압했다는 점. 둘째, 국회 해산은 비록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명백한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가 헌정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라는 점. 실제 5월 18일 국회봉쇄, 5월 20일 국회 등원 저지, 5월 17일~20일 사이의 주요 정치인 연행, 구금, 연금 등의 조치로 사실상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 셋째,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는 비록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운용과정에서 사실상 내각을 조종․통제하고, 대통령 고유권한마저 침해하는 등 내각과 대통령의 권한을 사실상 형해화시킴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초헌법적 권력기구로서 운용됐던 점.
이를 감안할 때, 결국 진술인 등이 수립․시행했던 시국수습방안은 신군부 세력들이 헌법기관인 국회, 내각,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집권 시나리오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시국수습방안은 수립단계부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고 정국장악을 기도하기 위해 마련됐던 것입니다. 때문에 전두환과 보안사 핵심참모들, 그리고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긴밀히 협의해 이를 수립하고 그 시행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비록 제가 신군부 세력의 핵심 측근이 아니면서도 정보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불가피하게 시국수습방안 주무 실무자로서 역할을 담당했지만, 시국수습방안은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정국을 장악하고 정권을 장악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시행과정을 고려하면 사실상 헌정질서를 중단하거나 헌법기관인 국회․내각 등의 권한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시국수습방안 수립 당시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정권찬탈 의도까지 있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행과정에서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국헌(國憲)을 문란하게 하고서라도 자신들이 집권하기 위해 시국수습방안을 수립․시행했다는 것을 비로소 감지하게 됐습니다.

 

‘정치활동 규제’가 ‘정치활동 금지’로

 

문 1980년 5월 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심의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국무회의 소집은 언제 결정된 것인가요.
답 저는 몰랐습니다.
문 그때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양쪽에 약 1m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고, 외부와 연결된 통신선까지 절단해 연락을 차단했다고 하는데요. 그런 조치는 누가 지시한 것인가요.
답 나중에 알고 보니 노태우 사령관이 지시했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도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문 그런 정황을 보면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 전국확대안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힘이 두려워 부득이 찬성한 것이 아닌가요.
답 그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단순히 소요를 진압할 목적뿐이었다면 굳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지 않고도 계엄사령관 명령으로 군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계엄확대와 동시에 비상기구 설치나 국회 해산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요.
답 그렇기는 합니다.
문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경우 지역계엄과는 군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요.
답 계엄사령관이 국방부장관 등 내각의 통제를 넘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받는 체제로 전환됨으로써 결국 행정․사법 업무를 관장하는 것입니다.
문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됐습니다. 포고령상의 모든 정치활동 금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이었나요.
답 저는 ‘정치활동 규제’로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계엄사에서 ‘모든 정치활동 금지’로 확대해 포고령 문안을 만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는 국회의원, 정당인, 일반 국민들에 의한 일제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포고령 10호가 보안사로부터 지침을 받아서 입안됐다는데 진술인이 그 지침을 작성해 건네준 것이 아닌가요.
답 제가 계엄사측에 그런 지침을 건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보안사에서 그런 지침을 만든다면 어느 부서에서 만드나요.
답 당연히 저희 정보처에서 만드는데, 제가 그것을 만들어 계엄사로 넘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1980년 5월17일 22시를 전후해 김종필, 이후락(李厚洛), 박종규(朴鐘圭), 이세호(李世鎬), 김진만(金振晩), 김종락(金鍾珞), 이병희, 오원철(吳源哲) 등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 예춘호(芮春浩), 문익환(文益煥), 김동길(金東吉), 인명진(印名鎭), 고은(高銀), 이영희(李泳禧) 등을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계엄사에 연행했는데요. 이런 조치들은 언제, 어떤 경위로 결정된 것인가요.
답 소요 배후조종자는 이학봉 수사국장이 알아서 선별 처리했습니다. 부정축재자는 정보처 존안자료를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넘겨주자 이학봉이 선별해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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