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진술(1980. 9.13), "내가 죽더라도 국민 손으로 민주주의 실현될 것…"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진술(1980. 9.13), "내가 죽더라도 국민 손으로 민주주의 실현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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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1.28 10:04:55
  • 최종수정 2019.01.28 17:58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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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원에 의해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잠도 잘 잤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나는 내 개인을 구원하고 옆에 있는 하느님의 자식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1980년 9월13일에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심 당시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 피고는 최후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죽고 사는 것도 하느님에게 맡긴다"면서, 국민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실현되고 국민이 공산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조국 통일이 이룩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최후변론을 마쳤다.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1980년 11월 3일 김대중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년형으로 다시 감형되었으며,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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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최후진술(제1심) 19차 공판
1980년 9월13일 오전 10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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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에서 감형되어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사형수에서 감형되어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박정희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법정 최후진술 이 순간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11월5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 광경입니다. 저는 이를 청와대 출발부터 하관까지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감회가 깊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 동정 등과 함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 모두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한 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한 유신세대가 가고 역사적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써 민주주의가 봇물 터지듯 거대한 희망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5월17일을 기해 우리 민주주의는 누구도 생각 못했던 가혹한 시련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80년대는 긴 눈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가 꽃이 되어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고, 안보의 힘으로 통일된 민주 사회가 틀림없이 올 것 같습니다.
부마사태는 우리 국민들이 자유를 위해 궐기한 획기적 사태였으며 10․26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신체제의 지도자 박정희가 돌아갔지만 패자도 승자도 없는 유신체제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세력은 지난 7년 동안 감옥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면서 싸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보복 반대

나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10․26 사태를 보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타협, 토론, 대화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나는 김홍일을 통해 시국수습방안으로 첫째 안보, 두 번째 화해 단결, 세 번째 조속한 민주주의를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협의체가 필요하여 최규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했습니다.
3월1일자 복권 성명에서도 일관해서 국민적 화해, 정치보복 반대, 정부와의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기자회견이나 강연이 있을 때마다 최규하 대통령에 의한 정치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겠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11월24일 YWCA 회의결과에 찬동을 하지 않아 동지들로부터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정부에 대화를 요청하고 정치보복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이 점에는 지금도 소신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차관급 이하는 그대로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 내용은 신문에도 났습니다. 저는 유신 잔당의 처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김종필씨도 국민들이 지지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했으며, 계속해서 정치보복 반대와 정국안정을 요청했습니다.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의 연설에서도 이를 공개적으로 요청한 이유는, 첫째 혼란으로 인해 민생안정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 폭력이나 혼란 조성이 아니라도 여론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국민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리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군과 충돌하면 혼란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역습의 기회를 주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유신 이후 취해 온 나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자중과 질서를 호소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5월17일 불안한 상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의 제1차적인 책임은 정부에게 있습니다. 10․26 사태 후 외국에서 한국 국민의 자제력에 대해 격려와 칭찬을 보냈고, 여러 외국 대사들도 만나보았으나 다 마찬가지로 평가했습니다.
1. 계엄령은 적의 포위 공격 하에서 질서가 혼란해졌을 때 선포되는 것입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대통령 서거로 인해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으로 비상계엄령은 해제되어야만 했습니다.
일부에서 김재규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지 암살이나 쿠데타에 의해 이룩되는 것은 아니라고 외신기자에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을 살해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국법질서에 의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학생들이 학내에서 떠드니 계엄령을 해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 최규하 내각은 과도정부라고 하면서도 헌정기간이나 헌법개정, 정권이양 시기 등을 왜 발표하지 않았냐는 점입니다. 허정 내각은 3개월 만에 헌법을 개정, 정권을 이양했습니다.
3. 헌법문제입니다. 국회의 개헌안이 국민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헌법에 대해 복안이 없다고 하면서 정부에서 개헌을 주도하겠다고 하여 저는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위의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학생데모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민, 공화당, 신민당, 재야, 학생 등이 일치된 주장을 했으나, 정부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조치를 끝내 취하지 않았습니다.

최규하 정부에 대한 비판

학생들이 데모를 하게 된 전술적인 잘못 때문에 이렇게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발표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고, 국회도 5월20일에 소집하게 되었으므로 국회 개회를 보고 그 뒤에 데모를 해야 되는데 왜 12일날 데모는 안한다고 해놓고 13일에 거리로 뛰어나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지지한 유신이 있었던 반면 민주화를 갈망하고 있는 다수 재야 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박 대통령과 같은 막강한 힘도 성공 못했으며, 이미 우리 국민은 억압만으로 끌고 갈 수 없고 지적으로 민주주의를 끌고 갈 만큼 성숙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불행이 없게 하기 위해선, 정상적으로 대통령이 바꿔진 적이 없는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이 두 세력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협상하여 서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박관념이나 타도 당한다는 느낌이 없는 풍토가 조성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을 '김대중 일당'이라고 했습니다. 내란음모라고 하는데, 이 김대중이 수십만 학생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크게 생각했다면, 어째서 정부는 내가 요청한 대화를 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의심스럽습니다. 동학제에 가서 대통령, 계엄사령관, 공화당․신민당 총재, 재야 등의 5자 회담을 요청하고 시국수습을 제안했는데 거부했습니다. 5월14일 기자회견에서 데모 중지를 요청했는데 왜 정부가 보도조차 못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이야기해서 민주주의가 먼저 되는 게 중요한데, 과연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를 의심해 신민당 입당을 그만두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정성과 노력을 다하려 했습니다. 내란을 통해 정권을 잡으려 했다고 검찰관이 이야기했는데 그 정반대입니다. 학생데모로 정권이 간단히 무너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지금은 4․19 때와 다릅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 혼란이고, 내가 제일 바라는 것은 선거였습니다. 3金씨가 물망 대상인데 내가 다른 사람보다지지 세력이 적다고는 생각 안했고, 선거를 순조롭게 하면 내가 집권하거나 4년 후 집권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관해서 간디와 같은 비폭력 저항을 주장했습니다.
공소장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찰관은 나를 출생 이후 일관된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1946년 여름에 좌익은 그만두었습니다. 1946년 10월경의 파출소 습격사건 때도 알리바이가 성립돼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좌익 사상으로 한번도 기소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6․25 때 살해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며 야당생활 중 문제된 일도 없었는데, 34년 전의 이야기를 가지고 공산주의자인양 몰아세우는 것은 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인도적인 면에 있어서 유감스럽고 서글픕니다.
정태묵 사건도, 그는 당시 내 선거구에서 합법적으로 돌아다닌 사람입니다. 누구도 간첩인 줄 몰랐습니다. 한두 번 만난 적은 있으나 나와 모의한 사실은 없습니다.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조사를 받으면서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나와 참고로 20~30분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한민통 혐의는 말도 안 돼

일본 한민통 문제입니다.
이것이 제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972년 일본에 병 치료차 갔다가 10월17일 유신발표를 봤습니다. 대통령도 국헌을 문란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중대한 국법을 어긴 것입니다. 대통령도 선서를 했으면, 대통령이 잘못하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대통령에 출마하여 국민에게 46%의 지지를 얻은 사람으로서 위법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해외 망명의 원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것이지, 내 자신이 스스로 가족을 다 여기 놓고 망명해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귀국 후 해외 활동의 모든 문제가 조사되었지만 외무부장관도 지난날의 외국 활동에 대해 문제삼지 않겠다고 신문에도 발표되었습니다.
그후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도 받고 3~4차례 조사 받았으나, 이 문제는 단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10․26 사태 후 복권까지 되었는데, 다시 이것이 나타나 내 목숨을 앗아가려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국가보안법 제1조엔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집단을 구성한 괴수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되어 있는데, 저는 정부 참칭은커녕 대한민국 절대 지지를 주장했습니다. 망명 정부를 세우자는 것을 제가 막았습니다. 한민통 강령은 국가보안법 제1조 1항의 반국가단체로서의 강령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위장으로 할 수 있다고 검찰관이 말했는데 위장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관련자가 문제라고 하는데 제가 발기인 그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접촉한 사람은 김재화, 배동호, 정재준, 조활준 등 네 사람뿐입니다. 김재화는 민단을 창설하여 일본에서 공산당과 싸운 사람이고 국회의원까지 했으며, 정부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고, 당시 구속되었다 무죄를 받았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배동호는 민단 사무총장을 지낸 사람으로, 베트콩파라고 하지만 일본명으로 비슷하게 부르는 것뿐입니다. 림창영이 북괴에 간다고 했을 때 말렸다고 했으며, 민단에 복귀하려 하는데 안받아 줘서 못들어 간다고 했습니다. 정재준은 대한민국에서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고 조활준은 사상을 의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곽동의에 대해선 김재화에게 질문까지 했는데 그가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사실이 있으며, 니가타에서 철도길에 목을 베고 북송을 반대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북에 갔다 왔다는 것은 1977년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 정보부의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중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그 사람들과 나와의 문제가 문제점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민통 자체가 반국가 단체라 했지만, 미국에선 준비위원회까지 만들었는데 미국 한민통은 미국의 모든 단체 중 제일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단체입니다. 림창영 같이 이북과 친한 사람은 제명까지 시켰습니다. 제가 한민통을 만든 정신은 유신 체제를 반대하고 싸우는 것이지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단체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어이없는 혐의에 휘말려

외국에서 연설 중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고 했는데, 저는 미군 철수를 반대했습니다.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고, 북한은 자유는 없어도 빵이 보장된다"는 연설 내용 중 여기서 한 마디 저기서 한 마디 한 걸 붙여서 해놨습니다. "이북은 빵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한 취지는 이북은 배급제도이기 때문에 밥 먹여주고 병원에서 치료해주고 교육을 시켜주는데, 대한민국은 직장이 없으면 굶게 되고 또 자유도 없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공산당을 이길 수 있느냐는 연설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한민통의 조직에 대해 협의는 했으나 바로 귀국했으며, 8월13일 발기대회, 8월15일 선언대회 등과 이후의 결성은 저하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본인의 승낙이나 입회원서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의장이 됩니까. 일본에 갈 때 송원영 의원, 김녹영 의원, 이태영 선생에게 계속해서 내 이름을 한민통에서 빼라고 했습니다. 미국 문명자 기자가 전화로 한민통 의장이 아니냐고 물어 나는 수락한 사실도 없고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일본 한민통 의장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 한민통이 어떤 활동과 反국가활동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미군 철수를 반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은 있습니다. 내가 만들려고 했던 단체를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내 이름을 넣어 미군 철수를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느낍니다.
내란 문제는 가슴 아픕니다.
전연 본의 아니게 어이없는 혐의에 말려들었습니다. 데모하라고 자금 주고 했다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김대중이 아니었으면 지금 제 옆의 피고인들이 안 받았을 것이고, 나왔다 하더라도 중형의 구형은 안나왔을 것입니다. 다른 피고인들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내란을 하려면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5월1일 우리 집에서 민주제도연구소 취임 승낙서도 다 받지 못하고 단 두 번 만난 것뿐입니다. 내란음모 하는 자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보는가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5월12일 북악파크호텔에서 장기표가 화염병을 가지고 뭐라고 했다는데 우리들이 일개 학생 말 한 마디에 토론도 없이 만장일치로 좋다고 했겠습니까. 설사 그렇더라도 구체적인 준비와 계획이 있었을 텐데 그것도 없고 여기 우리들 중 한 사람도 승인한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정치문화연구소를 저의 사조직이라고 하는데, 학생 데모가 났을 때 누구 하나 데모에 참가하거나 끼어든 적이 없습니다. 나서서 선동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전혀 없으니 거짓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내란음모의 장본인이 5월11일 5자회동을 요청, 시국수습을 주장하고, 5월12일 모임에서 신민당 입당문제 상의시 공산당에게 경고하고, 학생 데모와 국민의 자제를 요청했고, 5월14일 동아일보 신문기자에게 학생은 데모를 중지하고 모든 것을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겠습니까. 5월15일은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서울은 장충단 공원에서 지방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말에 이런 일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면 수습 대책을 발표할 것이고, 20일 국회에서 밝혀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5월22일 내가 듣기에는 계엄령 해제, 정치 일정 단축, 정부주도 개헌 포기 등이 임박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보고 국민적인 투쟁을 하자고 했습니다. 투쟁을 하려면 그때 또 협의를 해야지요. 아무리 죄와 벌을 받아도 내가 잘못이 있다고 납득이 가야 합니다. 팸플릿 돌린 것은 계엄포고 위반으로, 미화(美貨) 및 일화(日貨) 등이 있어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것은 좋습니다.

누구에게도 원한 없다

저는 관용은 바라지 않으나 이분들(상피고인)에게 최대의 관용을 바랍니다. 제가 책임을 지니 저들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80년대는 우리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세워져 우리 국민의 능력으로 통일이 되어 민주주의가 꽃 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혼란과 격돌 없이 토론과 관용과 이해로 민주주의가 올 것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데 대해 기뻐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재야 민주세력도 억울함이 없도록 국민총화로 민주주의를 이룩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원에 의해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잠도 잘 잤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나는 내 개인을 구원하고 옆에 있는 하느님의 자식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자유는 민주주의뿐입니다. 공산주의를 막고 원하는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원한이 없습니다. 10․26 사태 후 나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 사건으로 이렇게 만든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죽고 사는 것도 하느님에게 맡기겠습니다. 국민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실현되고 국민이 공산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조국 통일이 이룩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더라도 우리 힘만으로 민주주의가 성취되고 정치보복은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랍니다.
재판부에 감사드립니다. 변호인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군 교도소, 법무부 교도소 관계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국내외 기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검찰관의 노고와 그외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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