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1回. “自由人의 亡命

 

1. “아, 천안문,” 어느 서글픈 추모회

 

지난 주 월요일 (2018년 6월 4일) 홍콩의 빅토리아 공원에 10만을 웃도는 대규모 시위군중이 모였다. 백발성성한 노인, 중년부인, 대학생, 어린이들까지 함께 모여 손에 촛불을 들고 29년 전 북경 천안문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중공정부의 일당독재를 규탄했다. 오늘날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한 중국 대륙의 어느 도시에서도 그 같은 추모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가의 공개토론도 열릴 수 없었으며, 천안문 사태를 조명하는 신문기사 하나 제대로 게재되지 못했다.

 

NPR과 BBC 특파원으로 10년간 중국에 주재했던 루이자 림(Louisa Lim)은 2014년 천안문 대학살 25주년을 맞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심층취재기를 출판했다. 책의 제목은 <<인민망각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이다. 제목 그대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1989년 대학살의 진상조사는커녕 공개토론도 제대로 열 수 없는 ‘망각’의 대륙이다. 중국 사람들은 그러나 정말 기억상실 속에서 기계의 부속처럼 둔탁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바로 다음 날 (2018년 6월 5일) 저녁, 중국 동남부의 한 대학에서 근무하는 한인 교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고 어지럽게 들려왔다. 십여 명의 중국인들이 만찬 중에 1989년 천안문사건에 대해 격론을 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찬 원탁에 뱅 둘러앉은 십여 명은 식사를 하며 다양한 주제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는데, 1989년 6월 4일 “천안문대학살”에 대해선 모두가 격분하며 정부의 폭력과 무책임을 규탄했다고 한다.

 

그 현장엔 64세의 홍위병출신 원로학자, 50대 초반의 64세대 중견학자, 40대의 소장 학자들, 30대 초반의 “팔영후”(80後, 빠링호우) 젊은 학자들까지 섞여 있었단다. 중국공산당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파,” 공산당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현재 중국정부를 비판하는 “원칙론자,” 중국식 제도개혁을 모색하는 “점진개혁파,” 등등. 서로 정치적 견해 차이는 분명했음에도, 표현, 언론, 집회, 양심의 자유를 열망하는 점에선 모두가 일치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공산당원들인데, 흥미롭게도 그중 한 교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최근 탈당했단다. 나와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그 탈당파 인사는 그날 그 자리에서 위채트(wechat, 微信) 대화방에 떠도는 천안문 관련 메시지를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놀랍게도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 메시지를 수신할 수 없었다. 천안문 학살 29주년을 맞아 위채트를 뜨겁게 달궜던 문자들이 하루 만에 정부에 검열을 당해서 더는 “퍼 나를” 수 없게 됐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서슬 퍼런 정부 검열의 칼날 아래서 몰래 무리지어 마음을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전체주의 일당독재의 어둠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나는 직접 그 교수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 부탁했다. 그 교수는 다시 내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여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중국정부가 “불온” 문자들을 중간에서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여, 상상할 수 있는가? 정부가 우리의 카톡 메시지를 다 들여다보고 불온한 톡은 모두 잘라버린다면?

 

중국 최대 SNS 위채트에서 2018년 6월 "천안문 대학살" 관련 메시지는 중국정부의 검열에 의해 삭제되었다.
중국 최대 SNS 위채트에서 2018년 6월 "천안문 대학살" 관련 메시지는 중국정부의 검열에 의해 삭제되었다. 2018년 6월 7일 한 중국인과의 위채트 대화를 캡쳐한 이미지. 위채트 바방에 떠도는 천안문 대학살 관련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는 요구에 중국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보안상 신원은 지우기로 한다). 

"그저 짧은 글귀에 불과했어요. 제대로 된 토론도 아니었어요 대륙에선 허락되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전달하려고 했는데, 시종 정상적으로 가지 않았어요. 민감한 주제라 제한된 듯해요... 한번 선생님께 보내보지요.... 방금 전달했는데요. 그림 이미지 옆에 문자가 적힌 파일입니다.  저는 지금 볼 수 있는데요. 혹시 받으셨는지요. 받으면 곧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하하. 받을 수가 없네요."(필자)
"그렇다면 엄격하게 제한된 겁니다."

 

2. 과양(戈揚, 1916-2009), 천안문의 자유인

 

해마다 “천안문대학살” 혹은 “1989년 민운(民運, 민주화운동)”이 거론될 때마다 나는 2009년 뉴욕에서 93세의 나이로 타계한 중국 언론의 양심 여성투사 과양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과양의 모습을 미국 PBS 다큐멘터리 <<중국, 혁명의 세기(China, A Century of Revolution)>>제 2편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가롬하고 긴 얼굴의 70대의 할머니가 형안(炯眼)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1950년대 모택동의 자가당착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29개의 범죄 혐의를 받았지. 그 중의 하나가 백화제방운동을 지지했다는 죄목이었어. 그 운동은 모택동이  시작한 건데, 어떻게 그 운동을 지지했다고 범죄가 될 수 있지?” 강직하고도 단아한 70대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과양의 인터뷰 장면, PBS 다큐멘터리 "China, A Century of Revolution" II에서https://www.youtube.com/watch?v=PJyoX_vrlns
과양의 인터뷰 장면, PBS 다큐멘터리 "China, A Century of Revolution"(2)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PJyoX_vrlns

 

과양(본명, 樹佩花)은 1916년 강소(江蘇)성 해안(海安)에서 나고 자랐다. 1935년 10대의 나이로 중공의 외곽조직에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이후 사범대학에 입학하지만 곧바로 항일전쟁의 전장으로 달려가고, 1938년 3월에서 4월까지 산동성 남부에서 벌어졌던 태아장(台兒莊) 전투에 몸소 참가한다. 이후 과양은 <<귀주일보貴州日報>>의 기자로 발탁되어 언론계에 입문한다. 1940년대 초 중경(重慶)에서 근대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의 아내 송경령(宋慶齡, 1893-1981)의 지도 아래 여성 주도의 '신생활운동'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그 과정에서 과양은 이후 주은래(周恩來, 1898-1976) 총리의 아내로서 1980년대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주석을 역임하는(1983-88) 등영초(鄧穎超, 1904-1992)와 깊은 친분을 쌓는다. 

 

1940년대 10년 동안 과양은 언론계에서 명망은 얻어 3명의 다른 여기자들과 함께 1950년대 중국신문계의 4대 화단(花旦, 스타)으로 꼽혔다. 1950년에는 종합교양지 <<신관찰>>의 주편(主編, 편집장)에 추대된다. 모택동의 비서였던 호교목(胡喬木, 1912-1992)의 뜻이었다. 과양은 편집장이 되면 자신의 “뜻대로 만들겠노라”선언하고, 호교목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신관찰>>은 광범위한 독자층의 사랑을 얻어 발행부수 제2위의 1950년대 최고수준의 저널이 되었다. 특히 민중의 희로애락을 담은 “생활의 작은 이야기”와 특권층의 부정비리와 관료주의를 풍자한 “소비평” 등의 연재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큰 인기를 누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과양에게 일생일대의 시련이 닥쳤다. 바로 반우파운동이었다. 1957년 백화제방운동이 시작되자 과양은 언론인의 정도를 따라 앞장서서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관료행정의 부패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의 억압적 분위기에선 오로지 “골방에서만 마음속의 진심을 말할 수 있다”면서 “교조주의는 인간을 속박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의 근본적 개혁을 촉구하는 과양의 직언직설은 공산당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반우파운동이 개시되자 과양은 곧바로 우파의 멍에를 쓰고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양과 함께 중국신문계의 4대 화단으로 꼽혔던 다른 세 사람의 여기자들 역시 필화에 휩싸였다. 그 중 1957년 당시 <<인민일보>>의 부편집장이었던 양강(楊剛, 1905-1957)은 반우파운동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기장을 분실한 양강은 자신의 사적인 기록이 공개될 경우 자신에게 몰아닥칠 반우파투쟁의 폭풍이 두려워 결국 목숨을 끊은 것이다. <<여행가>>지의 주편(主編)이었던 팽자강(彭子岡, 1914-1988)은 과양과 함께 반우파로 몰려 노동교양에 처해지고, 1979년 복권될 때까지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문회보(文彙報)>>의 북경주재 주임이었던 포희수(浦熙修, 1910-1970)는 반우파운동에 부역함으로써 가까스로 우파의 낙인을 피해갔지만, 문화혁명 당시 다시 불려가 수난을 당하고는 향년 6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3. 노동교양, 고되게 일을 해서 생각을 바꾸라!

 

과양은 반우파투쟁(1957-59) 당시 벽지의 공장, 농촌, 광산 등지에 하방(下放)당해 “노동교양”의 이름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55만 우경분자 중의 한 명이었다. 단기일 노역 이후 풀려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과양은 무려 21년의 긴 세월을 노동교양의 굴레를 쓰고 살았다. 노동교양이란 과연 어떤 과정이었나?

 

1955년 8월에 처음 도입된 “노동교양제도”(줄여서 勞敎)는 “잠복한 반혁명세력의 완전한 제거”를 위한 사회통제의 방편이었다. 인권유린의 온상으로 악명 높은 중국의 노개(勞改, Laogai, 勞動改造의 줄임말)와는 또 다른 제도이다. 노개는 중범죄자에 노동형을 가하는 말 그대로의 강제수용소, 스탈린식 굴라그(glug)이다. 반면 노교의 본래 목적은 사기꾼, 공갈범, 상습폭력배 등등 반사회적 ‘부랑인’들을 행정상으로 억류하고 그들에 “신성한” 노동의 기회를 제공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교도(矯導)하는 “재교육”에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 노교는 반사회적 인물들을 격리·수용하는 강제노동의 감옥으로 기능했다. 반우파운동 과정에서 색출된 최소 55만의 우파 혹은 우경분자들은 반사회적 잡범들과 함께 노교로 끌려가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중국공산당은 지식인의 입을 막기 위해 늘 “노동을 통해 사상개조”를 강조했다. 그런 공산당 지도부의 조치를 보면, 노동자·농민의 고통을 모르는 채 입만 놀려대는 “백수(白手)의 먹물들”에 대한 혐오와 열등의식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후 문화혁명 당시 혁명놀이에 빠져 극단으로 치닫던 홍위병들을 사그리 몰아서 산간벽지의 농촌마을로 추방했던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의 조치 역시도 소위 “지식분자”를 경계하고, 혐오하고, 질시하는 반지성주의 계급의식의 발로였다.

 

바로 그런 계급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보면, 함부로 입을 놀리고 펜대를 휘두르는 인텔리들의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억압되어야만 했다. 문인, 기자, 인문·사회분야의 지식인들이 특히 요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잠재적 위험인물들을 색출해서 신성한 노동의 기회를 주고, 고된 노동을 통해 스스로 숭고한 삶의 의미를 직접 깨닫게 하는, “재교육”이야 말로 노동교양의 정신이었다. 1957년 8월 4일자 <<인민일보>>는 “왜 노동교양제도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악질분자들에 대해선 일상적인 설득과 교육의 방법은 효력이 없다. 간단한 처벌의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과 집단과 기업체에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 그들이 다른 직업을 구하려 해도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개조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방법만이 가장 적합하다. 인민정부는 오랜 연구와 숙고에 따라 그들은 구금해서 ‘노동을 통해 재교육’하는 방법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국가가 악질분자를 구금하고, 최적의 노동을 할당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국영의 농장과 공장에서 그들을 생산에 참여케 함으로써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을 통한 재교육은 악질분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 먹고 사는 길이며, 동시에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개조하는 과정이다.”

 

<<인민일보>>의 선전대로 노동교양은 아름다운 제도였을까? 마르크스주의의 상투적 표현을 빌자면, “노동”의 주체를 소외시키는 국가폭력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는 아니었을까? 현재까지도 중국의 인권운동가들과 일부지식인들은 노동교양제도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 전체주의적 사회통제의 핵심에 놓인 “노동개조”와 “노동교양”에 대해선 차후에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강제노동 수용서 노개(Laogai)의 모습,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asia/i-was-sentenced-to-life-in-a-chinese-labour-camp-this-is-my-story-1790465.html
강제노동 수용서 노개(Laogai)의 모습,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asia/i-was-sentenced-to-life-in-a-chinese-labour-camp-this-is-my-story-1790465.html

 

4. 우경분자(右傾分子)의 부활

 

21년간의 “노동교양”의 과정에서 과양은 과연 정부의 의도대로 재교육을 받고 자신의 사상을 개조할 수 있었을까? 이후 과양의 경력을 추적해 보면 21년의 중노동도 그녀의 정신을 꺾을 수 없었음이 증명된다. 1978년 등소평 집권과 더불어 영어(囹圄) 상태를 벗어난 과양은 <<신관찰>>을 복간해서 편집장으로 복귀한다. 21년간 창의적인 활동이 박탈당했지만, 과양은 어렵지 않게 언론인의 옛 감각을 되찾아 왕성하게 활동한다.

 

<<신관찰>>은 1980년대 중국에서 당대 최고의 교양종합지로 거듭났다. 문화혁명 당시에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민일보>>, <<해방군보解放軍報>>와 <<홍기紅旗>>가 언론계의 “양보일간”이라 불렸다. 그 당시는 “양보일간”이 여론을 지배하는 최고권력의 기관지였다. 1980년대에는 <<세계경제도보>>, <<경제학주보>>와 과양이 편집한 <<신관찰>>이 새로운 “양보일간”의 지위에 올랐다. 과양은 그렇게 언론계에 복귀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계속 새로운 난관이 이어졌다.

 

개혁개방은 시작되었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정치적 민주화를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앞으로 다루게 될 민주장운동(民主牆運動, 1978..11-1979.12) 이후 정부는 더욱 억압의 고삐를 당기고 있었다. 1980년 12월 등소평은 다시금 “자산계급의 자유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망명지식인 법학자 곽라기(郭羅基, 1932- )의 회고에 따르면, <<해방군보>>는 문화혁명의 참상을 고발한 작가 백화(白樺, 1930- )의 시나리오 <<고련苦戀>>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반자유화”의 사상전이 개시되었다. 문화혁명기 사상통제의 냄새를 맡은 지식인들은 정부의 탄압에 큰 반감을 느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과양은 작가 백화의 원고를 청탁한다. 1981월 7월 25일 <<신관찰>> 제14호는 백화의 에세이 “봄바람은 푸근하게 나를 감싸고”를 게재한다. 이 에세이에는 “비록 비바람이 있지만, 봄바람, 봄비이며,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백화의 에세이를 게재함으로써 과양은 정부의 “반자유화”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결기를 보였다.

 

5. 천안문의 시위대

 

모택동 이후 중공정부의 최고권력자는 등소평이었다. 등소평은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모택동의 직책을 이어받는 대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림했다. 중공중앙의 주석(1981-1982)이자 중앙위원회 총서기(1982-1987)였던 호요방(胡耀邦, Hu Yaobang, 1915-1989)이었다. 호요방은 개혁개방 초기 과거사정리와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 평반운동을 이끌었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1987년 대학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열풍이 고조되자 중국공산당은 “자산계급 자유화”를 지지했다는 혐의로 호요방을 압박해 직위를 내려놓게 했다. 호요방은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호요방의 갑작스런 죽음은 중국인민들에게 큰 충격파를 던졌다. 호요방 사망 나흘 만에 과양은 <<세계경제도보>>의 주편 장위국(張偉國)과 함께 좌담회를 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지식인들의 열망을 담아 호요방의 복권과 반자유화운동의 철폐를 부르짖었다. 두 사람의 대담은 <<세계경제도보>>에 다섯 면에 걸쳐 게재되었다. 시기로 보나 메시지로 보나 당시 막 들불처럼 일어나던 천안문민주화운동과 직결되는 사건이었다. 결국 장위국은 64운동 이후 20개월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1989년 4월 22일 천안문의 인민대회당에서는 호요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과양은 바로 그날 인민대회당 건물 안에서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창문 밖으로 구름 떼처럼 광장에 모여든 젊은 대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64민운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후 과양은 남긴 짧은 시 한 수를 남겼다.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적은 짧은 노트도 함께 옮긴다. 

 

"조자양이 호야방에 대한 애도문을 낭송한 후, 우리는 그의 시신에 이별을 고했다. 인민대회당의 커다란 유리문을 지나갈 때, 광장에 운집해 있는 수만 명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광장에 배치된 군대는 인민대회장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곤봉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곳에 멍하니 서서 나는 학생들의 분노와 유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매우 긴장된 순간이었다. 대회장 내에 있던 관원들 중에선 학생들이 대회당으로 돌격해 올까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한 군인이 정중히 우리에게 다가와서 앞으로 가라고 했다. 한 병사가 내 손을 잡아끌 때 나는 말했다. '난 여기 좀 서 있을께. 나는 공산당원이야. 전쟁 당시엔 당에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기도 했었지. 이런 일은 이미 겪어 봤어. 하지만 너희들처럼 학생들을 얕보고 괴롭히는 당원들은 본 적이 없어!' 그 병사는 내 말을 듣고는 곧장 가버렸다. 

 

한 조각 땅이 둘로 나뉘어 있네.

폭력의 장벽이 갈라놓았네.

이쪽은 차갑고 무심한 얼음산이고,

저쪽은 진정(眞情)의 바다로구나.

一片土地分成两边,

中间隔着暴力的墙。

这边是冷漠的冰山,

那边是真情的海洋。

 

[호]요방의 시신은 이곳에 있고

요방의 영혼은 저곳에 있네.

우리는 모두 저곳에서 왔나니

저곳이 없다면 어찌 이곳이 있으리요?

耀邦的尸体在这边,

耀邦的灵魂在那边。

我们都是来自那边,

没有那边哪有这边。

 

 

1989년 4월 22일, 호요방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요든 학생들과 대치한 군인들  http://foreignpolicy.com/2015/06/04/china-tiananmen-beijing-protest-martial/
1989년 4월 22일, 호요방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요든 학생들과 대치한 군인들
http://foreignpolicy.com/2015/06/04/china-tiananmen-beijing-protest-martial/

 

 

6. 망명객의 노래

 

과양은 그해 5월 1919년 54운동의 7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회에 초빙을 받아 도미의 기회를 얻는다. 과양이 학회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 인민정부 정무원 총리 이붕(李鵬, 1928- )은 북경에서 계엄령을 선포한다. 긴장 속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과양은 북경의 등영초에 전화를 걸어 발포여부를 물었고, 등영초는 절대로 발포는 없을 것이라 대답하지만, 며칠 후 대규모의 탱크 부대가 천안문광장의 시위대를 짓밟고 학생들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한다. 미국에서 방송으로 대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과양은 21년의 노동교양 과정에서도 신앙처럼 견지했던 공산당을 향한 믿음을 송두리째 버리고 만다. 당적을 버린 과양은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 공동묘지 근처의 허름한 방에서 망명객의 삶을 시작한다. 

 

천안문 대학살이 미국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과양도 한때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망명객의 삶은 빈곤과 무위의 연속일 뿐이었다. 특히나 한 평생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슴에 품고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 고군분투했던 과양 같은 애국자로선 이역만리 낯선 나라의 삶은 늘 신산스럽기만 했다. 과양은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70세를 훌쩍 넘긴 나이로 그녀는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식탁, 거실소파, 침실벽, 화장대 등등 집안의 모든 곳에 영어 단어를 써붙여 놓고 앉으나 서나 영어를 익히고 또 익혔다. 직접 영어로 자서저을 쓰겠다는 꿈을 키우면서 컴퓨터도 열심히 배웠다.  

 

젊은 시절, 과양은 지상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공산주의는 그 이상이 최고점이었다. 모택동은 젊은이들의 영혼에 계급혁명의 주술을 걸고 민족해방의 불씨를 지폈다. 젊은 시절 과양은 마르크스에 감동받고 모택동의 연설에 마음을 빼았겼다. 젊은 시절 혁명에 몸을 던진 과양은 이런 글로 남긴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라는 천당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은 다시는 울 일이 없으리. 너무나 심하게 웃다가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중국공산당 신4군의 전투에 참여하며 배웠던 군가를 그녀는 늙어서도 이따금 부르곤 했다. "천만 번 싸우며 비바람 맞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린다 해도, 천만 번 옮겨다니며 싸우며 깊은 산에서 야영을 해도." 신4군 부대에서 배웠던 군가 중엔 이런 아름다운 노랫말도 섞여 있었다.

 

너의 발밑의 검은 그림자를 돌아보지 말라,

고개 들어 눈앞의 아침 노을을 보라!" 

别回顾你脚边的黑影, 头望前面朝霞。

 

젊은 시절 그녀의 이상주의는 참혹한 전체주의 공산독재의 현실로 되돌아왔다.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 시위를 이어가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탱크에 짓밟히고 기관총 총탄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의 숫자는 적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식투쟁으로 자유와 개혁을 부르짖던 시위군중을 중공정부는 무참히 짓밟았다. 그런 백주의 대학살이 자행됐음에도 29년 간 진상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적을 버린 과양은 결국 국적도 포기했다. 망명객이 되어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시민권의 취득이 불가피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노후보조금을 받기 위한 조치였다. 시민권을 받기 위해 "성조기에 대한 충성맹세"를 선서하던 날, 과양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옛날에 우리는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노래 부르지 않았던가? 미제국주의는 아직 타도하지 못했는데, 내가 스스로 미제국주의 분자가 되었구나. 미국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분투하며 이루려했던 자유, 민주, 평등을 얻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미국 시민이 되어 생활보조금과 무상치료를 받게 된 후 과양은 말했다. “우리는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위해 분투했는데,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직접 누리게 될 줄이야.”


2002년 86세의 과양은 뉴욕에서 우연히 재회해서 새로운 인연을 맺은 동향출신의 저명한 반공문인 사마로(司馬璐, 83세)씨와 맨하튼 이민국 법정에서 결혼신고를 했다. 7년 후 점차 진행된 치매로 의식을 잃은 과양은 뉴욕에서 흐릿한 동공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며 조용히 숨을 거두웠다. 향년 93세. 

 

http://www.visiontimes.com/2016/06/03/tiananmen-massacre-australian-reporters-recount-of-events.html
http://www.visiontimes.com/2016/06/03/tiananmen-massacre-australian-reporters-recount-of-events.html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본문에 기술된 과양의 일대기는 아래 두 추모사에 근거해서 재구성한 내용이다.  

郭罗基, “送戈扬,”《动向》杂志2009年2月号.

严家祺, “晚年戈扬在纽约的生活,” 香港《苹果日报》(2012-4-1)

노동교양제도에 대해선 다음 두 자료를 참조했다. 

YU JIANRONG and Stacy Mosher, “The Two Stages of the Re-education Through Labour System: From Tool of PoliticalStruggle to Means of Social Governance,” China Perspectives, No. 2 (82) (2010), pp. 66-72.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Terror, Repression, edited by Mark Kram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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