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5回. "人民民主 人格殺害: 國家主席의 最後"

 

1. 몰아치는 문혁의 광풍

 

1966년 5월부터 1976년 9월, 10년간의 세월 동안 중국 전역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쳤다. 문혁을 직접 겪었던 중국의 중·노년층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중국에선 전국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대중집회가 열렸다. 동료에 대한 직접적 비판과 자아비판을 강요받던 비판회(批判會), 공공기관과 작업장에서 주자파(走資派), 수정주의자 등을 색출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집단린치를 가하는 투쟁회(鬪爭會), 모택동의 저서를 함께 강독하고 생활에 활용한다는 취지의 강용회(講用會), 반혁명세력을 규탄하는 성토회(聲討會) 등등.

 

전국에서 수도 없이 많은 집회가 매일매일 열렸다. 사람들은 노상 집회에 불려나가 혁명의 구호를 외쳐야만 했다. 정부기관, 학교, 공장, 농촌마을 곳곳에 대자보가 나붙었고, 담장 벽이나 건물 벽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혁명의 표어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 학생들까지 군장(軍裝) 차림으로 모택동의 어록이 적힌 작고 붉은 책 “소홍서(小紅書)”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홍위병으로 조직된 대학생과 중고생들은 수업을 받는 대신 계급투쟁의 현장에 동원되었다 각지의 홍위병들은 무임으로 기차를 타고 전국을 오르내리며 드라마틱한 군중집회에 참가했다. 1966년 8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이어졌던 이른바 대천연(大串聯)의 스펙터클이었다. 천연(串聯)이란 말은 본래 공학적 단어로 전류의 직렬연결을 의미한다. 직렬로 연결된 전도체처럼 전국의 홍위병들은 큰 연대를 이루고 교류하며 계급투쟁의 선전선동과 반란의 활동에 직접 나섰다. 

 

학업을 전폐하고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갔던 학생들은 그러나 곧 바로 “산상하향(山上下鄕)”이란 명분 아래 농촌 마을로 하방(下放)되고 말았다. 문혁의 지휘자 모택동은 홍위병 활동이 정치적 소용을 다하자 사냥개를 삶 듯 어린 그들을 농촌의 오지에 유폐시켜 버렸다. 불운한 문혁세대의 뼈저린 체험은 1980년대 이른바 "상흔(傷痕)문학"이란 새로운 장르로 표출됐을 정도였다.   

 

문화혁명(1966-1976) 당시 홍위병 집회의 모습. https://www.chinoiresie.info/grassroots-turmoil-in-chinas-cultural-revolution-a-half-century-perspective/
문화혁명(1966-1976) 당시 홍위병 집회의 모습.
https://www.chinoiresie.info/grassroots-turmoil-in-chinas-cultural-revolution-a-half-century-perspective/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대중조직들은 혁명의 열기 속에서 잠시 혁명적 혼연일체를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분열하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집단사이의 싸움은 서로를 비판하고 흠집 내는 말싸움을 넘어 점차 격렬한 폭력투쟁으로 이어졌다. 급기야는 군대 조직이 투입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대중집단 사이의 무장투쟁으로 비화됐다. 혁명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지몽매한 학살극이었다. 

 

수정주의자로 몰린 공산당과 정부기관 내부의 고위급 인사들은 줄줄이 대중집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집회에 불려나가면, 성난 군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모욕당하고 얻어맞고 짓밟혔다. 때론 목숨을 잃기도 했다. 문혁의 피해자는 위로는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 Liu Shaoqi) 부터 아래로는 지방 소학교의 이름 없는 교사들까지 수없이 많았다. 100만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고 1억 명이 정치적 피해자가 됐다고 흔히 말하지만,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는 밝히기 쉽지 않다. 통계적 수치만으로 피해자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으며,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정치문화엔 문혁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문화혁명의 드라마를 살펴보려 한다.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을 흔히“10년의 대동란(大動亂)” 혹은 “10년의 대참사”(=十年浩劫)라 부른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어떤 구성에 따라야 할까? 10년 간 8억-10억인의 중화대륙을 뒤흔든 문화혁명의 실상을 과연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우선 국가주석 유소기의 최후를 통해 문혁의 정치사를 조명해 볼까 한다. 대부분 연구자들이 동의하듯, 문혁의 발단은 국가주석 유소기에 대한 중국공산당 총서기 모택동의 원한과 증오, 혹은 시기와 질투였기 때문이다.  

 

1966년 북경 천안문 광장의 집회
1966년 북경 천안문 광장의 집회. 광장에 몰려온 홍위병들이 모두 손에 모택동어록집을 들고 있다. 

 

 

2. 국가주석의 최후

 

1969년 11월 12일 중국 하남(河南)성 개봉(開封)시 혁명위원회 건물 한 구석. 싸늘한 빈 방의 초라한 침상에 눕혀진 채 전(前)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는 의식을 잃고 고독하게 숨을 거뒀다. 향년 71세, 만 일흔 한 번째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둔 날이었다. 직접적 사인(死因)은 악성폐렴과 당뇨합병증이었으나······.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1967년 2월 이후 유소기는 더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미 3년 간 그는 늘 죽음의 문턱을 들락거렸다. 날마다 홍위병 집회에 불려가 수만 군중의 저주와 욕설을 들으며 고개를 조아린 채 모욕을 견디어야 했다.

 

“사인방(四人幇)”에 장악당한 관영매체는 천편일률의 거짓보도와 허위날조를 이어갔다. 홍위병은 광기의 인민재판으로 유소기에 자백을 강요했다. 계속되는 인격살해와 마녀사냥에도 진정 그의 범죄가 무엇인지 확정할 순 없었다. 1966년 4인방 강청(江靑)의 지시에 따라 특별조사단은 무려 40만 명을 동원해 일제침략기 4백 만 건의 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급기야 반역, 배신, 항복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내서 유소기를 처벌했다. 훗날 재조사를 통해서 다 밝혀지지만, 특별조사단의 판결은 재판도 없이 극형을 미리 정해 놓고 처형을 위해 없는 죄를 꾸며내는 최악의 인민재판이었다. 무자비한 정치폭력이었다. 

 

대기근의 참상 이후 가까스로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켜 인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있던 유소기의 인격을 중국공산당 내부의 극좌세력이 살해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난 군중의 광기어린 폭력. 관영매체 거짓언론의 가짜뉴스, 허위보도, 모략중상, 사기날조. 4인방을 위시한 문혁 권력집단의 탈헌법적, 초법률적 정치폭력. 강직하고도 침착한 성품이었지만, 유소기 역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1년 전부턴 화장실도 갈 수 없어 온몸에 욕창(蓐瘡)이 돋아나고 음식을 씹을 수 없어 콧구멍에 튜브를 끼고 연명해야만 했다. 가택연금 상태의 유소기는 결국 무너졌다.

 

홍위병의 집회에서 집단 린치에 시달리는 유소기의 모습 (1966)https://www.reddit.com/r/China/comments/36cv2u/beijings_tiananmen_guanchang_in_1966/
홍위병의 집회에서 집단 린치에 시달리는 유소기의 모습 (1966)
https://www.reddit.com/r/China/comments/36cv2u/beijings_tiananmen_guanchang_in_1966/

 

1969년 10월, 유소기를 감시하던 간수(看守)는 해어진 그의 바지를 벗기고는 야윈 몸을 침대 시트에 둘둘 말아 들것에 실은 후, 군용비행기에 태워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갔다. 곧이어 유소기를 진료한 의사들은 고급 의료품을 요구했으나 상부는 냉혹하게 거부했다. 유소기는 결국 그렇게 고의적인 의료 방치의 결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숨을 거둔 방 밖에는 중무장한 2개 분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넉 대의 기관총까지 거치(据置)된 상태였다. 삼엄한 경계령이 떨어졌음에도 누구도 방에 갇힌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주자파(走資派)의 우두머리라는 정보만 전해졌을 뿐이다. 주자파란, 자본주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대혁명의 만조기(滿潮期)! 주자파로 몰리면 곧 파멸이었다. 목숨을 건사한다 해도 뭇매를 맞고 불구가 되기 일쑤였다. 외상(外傷)이 경미할 경우에도 회복불능의 정신장애를 겪어야 했다.

 

유소기의 시신은 이틀 후 어둑어둑한 새벽 어스름을 타고 군용 지프차에 실려 화장터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遺骸)는 인민폐 30원의 상자에 담겨 보관되었다. 유해번호 123, 유해 주인의 이름은 유위황(劉衛皇)으로 기재되었다. 여기서 ‘위황’이란 황제를 보위한다는 뜻. 유소기는 “죽어서 모택동을 보위”하란 의미일까.

 

그 대참사를 겪고 나서 1978년 북경 서단(西單) 거리의 붉은 벽돌 벽에는 수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자유와 민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그 유명한 “민주장(民主牆)운동”이었다. 1978년 12월, 바로 그 “민주주의의 벽”에 걸린 한 장의 대자보엔 큰 글씨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체 유소기가 뭔 잘못을 했지?”

 

거의 10년 간 그 누구도 입 밖에 내뱉지 못하던 한 마디의 질문이었다. “민주주의의 벽”에 나붙은 바로 그 질문은 유소기의 복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국 1980년 2월 최고영도인 등소평(鄧小平, 1904-1997, Deng Xiaoping)은 중국공산당 11차 중앙위 5차 전회에서 "유소기 동지의 복권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한다. 이 결정문에 따르면, 문혁 당시 유소기에 가해진 처벌은 부당한 박해였다. 또한 “반역자, 배신자, 배반자” 등 유소기에 들씌워진 오명은 모두 음해성 누명이었다. 감옥에서 고독하게 숨을 거둔지 11년 만에 유소기는 다시금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거듭 났다.

 

타도 유소기! 문혁당시의 케리커쳐.
타도 유소기! 문혁 당시의 반유소기 만화

 

50년의 세월이 지나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새벽부터 온종일 확성기에 터져나오던 반유소기의 선전선동, 관영매체가 쏟아내던 끝없는 가짜뉴스, 음해성 허위보도, 인신공격과 인격살해의 유언비어, 거짓선동에 속은 성난 군중들이 외치던 "유소기" 처단의 구호들. 과연 누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유소기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죽인 것일까? 광장에 운집했던 인민들일까? 그를 끌어내 손가락질하고 욕설을 퍼붓던 홍위병들인가? 사인방이 장악한 관영매체였을까? 사인방을 지배하던 모택동이었을까? 아니면, 모택동을 농락한 사인방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모택동은 순수하게 중국인민의 의지에 따라 주자파의 우두머리 유소기를 처형한 것일까?

 

모두가 공모해서 유소기를 죽인 것이다. 구태여 범인의 이름을 부르자면, ‘인민민주주의’다. 다수가 “인민”의 이름을 선점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이 생겨난다. 인민 앞에선 헌법도, 법률도, 양심도, 도덕도 무력해진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정치인, 언론인, 정치학자들이 감상적으로 칭송하는 “직접민주주의”도 실은 중국식 "인민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의 지배 (rule of law)를 벗어난 민주주의는 다수통치(majoritarian rule)이며 군중지배(mob rule)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은 최악의 정치제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대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아나키가 된다. 유소기의 인격은 "인민민주"에 의해 살해되었다. 

 

1989년 천안문대도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지식인 엄가기(嚴家其, 1942- , Yan Jiaqi) 교수는 묻는다. “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반도(叛徒, 반혁명분자), 내간(內奸, 내부의 간첩), 공적(工賊,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로 몰려 일체의 재판받을 권리까지 잃어야만 했을까?” 문혁 당시 유소기의 처단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수많은 군중을 생생히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때 그 수많은 중국인들이 실제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유소기를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가? 대기근의 참상에서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킨 위대한 공적을 쌓은 바로 그 유소기를? 왜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토록 그를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아가야만 했을까? 진정 유소기는 왜 그토록 무기력하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가주석의 권력을 완전히 박탈당해야만 했을까? 모택동은 과연 어떤 방법을 써서 유소기를 제거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아직 문혁이 시작되기 한두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계속)

 

1998년 제작된 유소기 우표. 문화혁명 기간 준 감옥에서 병사한 유소기는 1981년 중국공산당 정부에 의해 완전히 복권되었다.
1998년 제작된 유소기 우표. 문화혁명 기간 준 감옥에서 병사한 유소기는 1980년 2월 중국공산당 정부에 의해 완전히 복권되었다.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대학 교수)

<참고문헌>


高皋、严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6)

錢庠理中華人民共和國史·5卷 歷史的變局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 1962-1965》 (香港: 香港中文大學, 2008)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 3: The Coming of the Cataclysm, 1961-6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Dittmer, Lowell, Liu Shao-ch’i and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The Politics of Mass Critic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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