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33 回. “領導者의 어쭙잖은 辯明”

 

1. “사진 한 장 없다!”

 

스탈린의 대숙청(1936-38)이 시작되기 3-4년 전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에선 7백만에서 1천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餓死)했다. 소련공산당의 강제이주와 과도한 집산화 정책이 빚은 참상이었다.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명명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상은 그러나 소련연방이 해체되기 1년 전인 1990년에야 세상에야 알려졌다. 그때서야 우크라이나 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는 350장의 생생한 현장의 이미지들이 사진첩으로 묶여 대중에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이후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15개국에서 소련공산당의 제노사이드(genocide)로 규정하고 있다. 단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스탈린이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의도적 학살이라는 의미다. 

 

만약 그 사진들이 없었다면, 홀로도모르의 참상은 잊혔을까? 아마도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옛날이야기로 구전되거나 근거가 희박한 신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었으리라. 기록이 소멸된 대부분의 과거사가 그러하듯. 사진기의 발명은 인류 기록의 역사에서 문자의 발명을 넘어서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과거의 사진 앞에선 누구도 쉽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영어속담에 “그림은 천개 단어를 그린다(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란 말이 있다. 사진은 아마도 최소한 만 개의 단어를 찍고도 남음이 있다. 

 

1932-33년 우크라니아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참상. 홀로도모르란 굶겨죽이는 학살을 의미한다. 우클라이나 기근은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조직적인 학살http://vintagenewsdaily.com/28-horrifying-photos-of-holodomor-the-ukrainian-famine-that-killed-millions/
1932-33년 우크라니아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참상. 홀로도모르란 굶겨죽이는 학살을 의미한다. 우클라이나 기근은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조직적인 학살http://vintagenewsdaily.com/28-horrifying-photos-of-holodomor-the-ukrainian-famine-that-killed-millions/

 

중국의 대기근은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의 최소 네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그럼에도 대기근 당시 아사자의 사진은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모택동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이란 역저로 세계학계의 주목을 받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퀘터(Frank Dikötter) 교수는 2005-2009년까지 4년 넘게 중국 전역의 당안관(檔案館, 공문서보관소)을 뒤지고, 또 뒤졌다.

 

대기근 당시 지방정부의 간부들에 의해 작성된 공문서 더미엔 극한상황에서 저질러진 범죄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디퀘터 교수는 호남성 한 농촌에선 간부의 강압에 의해 소량의 식량을 훔친 어린 아들을 직접 생매장한 후 그 충격으로 곧 따라 죽은 아버지에 관한 기록도 발견했다. 또 1960년 2월 25일 감숙성에선 굶주린 형이 동생을 죽이고 잡아먹은 사건의 기록도 발견했다. 모두가 당시 지방정부의 간부가 남긴 문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 기록의 숲에서 디퀘터 교수는 대기근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단 한 장도 발견할 수 없었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라 대충 얼버무렸지만, 당안관의 많은 자료들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1950-60년대의 수사기록을 보면 범인의 얼굴, 변사체, 범죄 증거물, 범죄현장을 담은 사진들이 다수 발견된다. 대기근이 발생한 1958-62년의 사진들도 실은 매우 많은데, 그 사진들은 대부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경운기를 몰며 행복에 겨워 환히 웃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 황금물결 앞에서 즐겁게 뛰어 노는 농촌 아이들의 모습, 밀짚모자를 쓰고 농촌을 시찰하는 모택동, 1961년 호남성 기근현장을 시찰하는 유소기의 모습까지······.

 

4년 동안 대기근 관료를 수집하며 중국 전역을 떠돌던 디퀘터 교수는 2009년에야 단 한 번 현장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10년 넘게 대기근을 연구해 온 한 중국학자가 호남성 당위원회에 보관된 공안(公安)의 수사기록에서 발견한 사진이었다. 벽을 등지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한 청년이었다. 그의 발 앞에 놓인 솥에는 동강난 어린 아이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Frank Dikötter, “The Disappeared,” Foreign Policy, No. 198 [Jan/Feb, 2013], pp. 90-95)

 

디퀘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기근 당시 중국전역에선 최소한 4천 5백만이 아사했다. 놀랍게도 4천 5백만 아사자의 참상을 담은 사진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지방정부를 점령했던 홍위병들이 대기근 관련 사진들을 찾아내 선택적으로 인멸(湮滅)했을 수도 있다. 아니라면, 중국 정부기관 어딘가에 은밀히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의 기록사진들은 스탈린 사후 거의 4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았다. 중국에서 대기근 현장이 공개되려면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대약진 당시 굶주린 한 소년의 모습. 출처미상.
대약진 당시 굶주린 한 소년의 모습. 출처미상.

 

 

2. 스탈린의 어쭙잖은 변명

 

어쭙잖은 변명. 영어로는 흔히 “a lame excuse”라 한다. 누군가 씻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른 후 변명을 늘어놓는 데 그 모습이 꼭 ‘절뚝거리며’(lame) 다리를 저는 모양새를 닮았다는 비유다. 세상의 그 어떤 범죄자의 변명보다도 더 어쭙잖은 변명은 바로 공산권의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의 작품이었다. 대숙청과 대기근으로 2천 만 명이 넘는 무고한 인민을 희생시킨 스탈린의 변명은 어쭙잖을뿐더러 기괴하기까지 하다.

 

1938년 10월, 대숙청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가 한 달 전이었다. 스탈린은 정치국 특별회의를 소집해서“소련공산당사 속성코스”란 제목의 짧은 역사책의 편찬을 논의한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출판되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이 직접 개입해서 만든 스탈린의 작품이었다. 이 책자의 러시아어 초판 인쇄부수가 1천200만부가 달했다. 1938년에서 1953년 사이 67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모두 301쇄에 걸쳐 4천 2백만 부가 배포되었다. 이 책자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던 1956년까지 소련마르크시즘의 바이블이 되었다. 1950년대 중국에서도 이 책은 사회주의 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의 운동권 역시“속성코스”의 일본어 번역을 중역(重譯)해서 스탈린식 사회주의이론을 학습하기도 했었다.

 

대숙청(1936-38)의 칼날을 휘둘러 볼셰비키 당내의 신구교체를 이룬 후, 스탈린은 아마도 모종의 심각한 내면적 갈등을 겪었던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탐구에 의하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 해도 범행 후 내면적 갈등을 겪게 된다. 도끼로 수전노 노파와 노파의 조카딸을 쳐 죽인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 소냐를 찾아가 죄를 고백한 후, 소냐의 당부에 따라 도심의 대로에서 스스로 더럽힌 대지(大地)에 키스하고는 곧 자수한다. 스탈린은 대숙청 기간 동안 많게는 1천2백 만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고 1천 만 명을 기근으로 내몰아 죽인 희대의 사이코패스(psychopath)였다. 물론 최고의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반성하고 사죄하는 대신 과거사를 새로 써서 스스로의 정치범죄를 합리화하려 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속성코스”는 볼셰비키 혁명 이래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을 미화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줄줄이 나열하고 있으며, 스탈린의 “위대한 영도력”을 노골적으로 칭송하고 있다. ‘객관적’ 수치와 그럴싸한 디테일로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을 미화하고 윤색했지만, 사실왜곡과 통계조작으로 가득 차 있다. 1956년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화운동을 개시하면서 바로 “속성코스”를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그는 1962년 “속성코스”를 수정해 새로운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편찬했다. 결국 “속성코스”는 소련공산당에 의해 파기된 스탈린주의 교과서인 셈이었다.

 

문제는 소련에선 1956년 이후 폐기된 “속성코스”가 중국에선 1960년 초반에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모택동은 급속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소련의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 자문을 구하고, 또 소련의 혁명이론서들을 탐독했다. 스탈린은 모택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모택동은“속성코스”에 제시된 소비에트 모델을 따라 스탈린 집산화의 방식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 했다.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면서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분명해졌을 때, 모택동을 비롯한 중공의 영도자들은 다시금 “속성코스”에 제시된 스탈린의 변명을 꺼내들었다.

 

스탈린은 대숙청에 대해선 좌우 극단주의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혁명투쟁이었다고 합리화했고, 정책실패에 대해선 과도한 열망과 경험적 미성숙 때문이라 둘러댔다. 인류사 최초로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선 그 정도의 오류를 불가피했다는 항변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바로 그 논리를 차용해서 대약진운동의 오류를 적당히 합리화했다. 대약진운동의 기본방향은 옳았으나 그 과정에서 적잖은 잘못도 저질러졌다는 공산당지도부의 어쭙잖은 변명이었다.

 

스탈린과 모택동
"우리들의 위대한 승리의 깃발, 모택동과 스탈린",
모택동과 스탈린의 동지적 유대를 강조하는 포스터 (출처: npr.org)

 

3. 중공 지도부의 자아비판

 

대약진 3년 간 중국 전역은 생지옥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중앙정부는 6억 인구를 먹여 살려야 했지만, 정부가 개입할수록 기근의 피해는 확대될 뿐이었다. 지방뿐만 아니라 북경, 천진, 상해에서도 “급고(急告)”가 잇달았다. 문자 그대로 급고란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구원요청의 호소문이다. 총리 주은래(周恩來, 1898-1976, Zhou Enlai)와 부총리 이선념(李先念, 1909-1991, Li Xiannian)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민원(民怨)과 투서가 쌓여갔다.

 

더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공중앙은 1960년 12월부터 출구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하여 1961년 1월 본격적인 논의가 전개되었다. 1961년 3월 14일 광동성 광주(廣州, Guangzhou)인 중공지도부는 열흘 간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농업, 상업, 산업, 곡물수입, 인구재배치까지 심도 있게 논의됐으나 난마처럼 얽힌 총체적 난국이었다. 중공지도부는 해결책을 찾기 전에 우선 현장의 실태조사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회의를 파해야만 했다.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 Liu Shaoqi)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유소기는 1961년 4월 2일 고향 호남성으로 내려가 영향(寧鄕, Ningxiang), 상담(湘潭, Xiangtan), 장사(長沙, Changsha) 등지를 돌며 농촌 현실을 시찰했다. 영도자의 의례적인 순방이 아니라 44일에 걸친 심층조사였다. 기근으로 폐허가 된 농촌 마을의 한 현장에서 유소기에 말했다고 한다.

 

“삼분천재, 칠분인화(三分天災 七分人禍).” 

 

대기근의 30프로는 천재지변이지만, 70프로는 인간이 만든 재앙이란 의미였다. 유소기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유소기로서 대약진운동을 부정하려면 스스로의 정치적 과오를 인정해야만 했다. 직접 고향 땅에서 참혹한 농촌의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소기는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가선 본격적인 대약진의 출구전략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61년 12월 둘째 주 중공중앙에 보고된 정부보고서에 의하면 당시의 경제상황은 암울했다. 농업부문 지원책은 약간의 성과를 보였지만, 식량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농업부분의 생산량을 회복세를 보였지만, 산업부문의 노동력은 줄고 있었다. 그 해 역시 대기근의 영향으로 여섯 개 성의 인구는 급감을 기록했다. 사천성의 경우 17.61 퍼밀의 감소를 보였다. 대기근이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산업 생산량도 목표량보다 40프로 이상 감소하는 경제적 참사가 이어졌다.

 

극심한 경제난이 이어지는데, 한동안 잠잠했던 중소분쟁이 또 시작되었다. 1961년 10월 17일-3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차 소련공산당 전국대표회의에 주은래는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한다. 그해 4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은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2506 공격여단’을 창설해 쿠바를 침공했으나 케네디 행정부가 국제여론을 인식해 공군지원을 중단했다. 사흘 만에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군의 반격으로 피그만 침공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쿠바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봉쇄한 후 잔뜩 들떠 있던 흐루쇼프는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회의에 참석한 주은래를 향해 “더는 모택동을 인내할 수 없다”며 중국을 압박했고, 모욕을 느낀 주은래는 일정을 앞당겨 북경으로 돌아갔다. 흐루쇼프의 공격 소식을 듣고 격분한 모택동은 몸소 공항에 나가 귀국하는 주은래를 맞이했다. 흐루쇼프의 반격으로 모택동은 내우외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스스로 고안했던 인민공사, 뒷마당 용광로 등등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발전전략 없인 범국가적 경제적 파산을 극복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모택동은 대규모의 토론회를 기획한다. 중앙정부의 고급관료들 뿐만 아니라 궁벽한 농촌 마을의 풀뿌리 간부들까지 불러 모아 그들의 실체험담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명분이었다.

 

1962년 1월11일에서 2월 7일까지 28일간에 걸쳐 북경에서는 확대 중앙공작회의가 개최됐다. 중앙정부는 물론, 전국 성(省)과 시(市) 자치구, 주요 공장, 광산, 군대의 책임간부들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7천 명이 참가한 회의였다. 중국공산당 성립 이후 최대 규모의 대회였다. 이 대회를 가리켜 흔히 “7천인대회”라 부른다. 이 대회에 참석한 “7천인”의 대부분은 대기근의 고통을 직접 겪었던 농민들이 아니라 그런 농민들을 대약진의 광풍 속에 몰아넣었던 정부 맨 밑바닥의 하급간부들이었다.

 

어쩌면 모택동은 바로 그런 지방의 하급간부들에 발언권을 부여해서 대약진운동의 후퇴를 막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7천인대회는 대약진, 인민공사, 총동원이라는 이른바 삼면홍기(三面紅旗)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그러나 결코 대약진을 수호하려는 모택동의 의도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무엇보다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구체적 해결책의 모색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7천인대회의 한 장면. http://history.sina.com.cn/bk/jgcqs/2014-02-23/232483276.shtml
7천인대회의 한 장면. http://history.sina.com.cn/bk/jgcqs/2014-02-23/232483276.shtml

 

이 회의에서 유소기는 지난 12년간의 중공정부의 사회주의 혁명과정을 총결산하는 중요한 기조연설을 한다. 유소기의 연설문을 보면, 모택동과의 정문충돌을 피하면서 이부춘(李富春, 1900-1975, Li Fuchun)과 박일보(薄一波, 1908-2007, Bo Yibo) 등 국가경제의 계획을 담당했던 중앙정치국의 위원들에 정책실패의 책임을 추궁했다. 그는 분명하게 인민공사, 대약진, 총동원 등 모택동의 삼면홍기가 정당한 사회주의 발전전략이었음을 재확인한다.

 

결국 대약진운동의 원칙은 옳았지만, 구체적인 실행과정에선 간부들의 과도한 열정과 경험미숙 때문에 많은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어쭙잖은 변명이었다. 1938년 스탈린이“속성코스”에서 제시했던 그 논리 그대로였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의 최고영도자 지위에 오른 등소평 역시도 1980년의 연설에서 같은 논리로 대약진운동의 과오를 덮고 간다. 그는 대약진의 고조기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모두 “머리에서 뜨겁게 열이 났기”(头脑发热) 때문에 실행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고 어쭙잖은 변명을 한다.

 

1981년 7월 1일 등소평 정부가 발표한 “중국공산당 주요 역사문제 해결안”이라는 중대한 문서에서도 “중앙정부 및 하급관료군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교만과 자만에 빠졌다”고 당시의 정책실패 원인을 분석한다. 스탈린이 “속성코스”에서 1929년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소련의 지방간부들이 보인 과도한 정열이라 설명한 바 있다. “속성코스”의 중국어 번역본에는 큰 “성취 때문에 머리에서 뜨겁게 열이 났다”(成就而头脑发热)는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유소기의 어쭙잖은 변명은 모택동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동시에 출구전략을 모색했던 국가주석 유소기의 노회한 전술이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모택동은 중앙정부의 명의로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수천 명의 지방 간부들이 법적으로 처벌되었다. 대기근의 책임은 그렇게 편의적인 출구찾기로 대충 엉성하게 마무리됐다. 지금까지도 중공정부는 대기근의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 적어도 과거사의 오류에 대해서 중국정부는 대충 덮어두고 넘어가자는 역사적 편의주의를 발휘한다. 언로가 막혀 있는 공산당 일당독재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7천인대회 이후 대약진의 출구를 찾은 유소기와 등소평은 투톱체제의 새로운 리더십을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신경제라 불리는 경제살리기 개혁을 추진했다. 1962년 7월 7일 등소평은 중공청년단 전체대회에서 코뮌 방식의 집산화에 역행하는 “호구별 책임제”(包干到戶)“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사천성 농민들의 속담을 소개한다.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이후 누런 고양이가 흰 고양이로 와전되어 이른바 등소평의 저 유명한“흑묘백묘론”이 되었다. (계속)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대학 교수)
 

 

<참고문헌>

张素华, 《变局:七千人大会始末, 1962.1.11-2.7》 (北京: 中华书局出版社, 2006)。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Frank Dikötter, The Disappeared, Foreign Policy, No. 198 (JANUARY/FEBRUARY 2013), pp. 90-95.

http://www.holodomoreducation.org/news.php/news/4

Felix Wemheuer, “Dealing with Responsibility for the Great Leap Famine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 China Quarterly, No. 201 (MARCH 2010), pp. 176-194

Felix Wemheuer, "Regime Changes of Memories: Creating Official History of the Ukrainian and Chinese Famine under State Socialism and after the Cold War,"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n and Eurasian History, Vol. 10, No. 1 (2009), pp. 31-59.

Hua-yu Li, “Stalin’s "SHORT COURSE" and Mao’s Socialist Economic Transformation of China in the Early 1950s,” Russian History, Vol. 29, No. 2/4, THE SOVIET GLOBAL IMPACT: 1945-1991, pp. 357-376.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 3: The Coming of the Cataclysm, 1961-6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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