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인류사최대의 기근 (3): "언론이 인민을 굶겨죽이다!"

[文革春秋現代中國 슬픈 歷史] 29人類史 最大 饑饉(3) "言論이 人民을 굶겨죽이다​​​​​​!"

 

1. 노병의 직언, 정치적 자살

 

1959년 7월 2일부터 강서성 여산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덕회는 서북소조(西北小租)에 배속되었다. 대약진 당시 중국 서북지역의 상황을 점검하는 토론분과였다. 토론 과정에서 팽덕회는 당시 중국전역에서 발생하는“좌의 오류”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정부조직에 만연해 있던 모럴해저드를 뼈아프게 지적했다. 팽덕회의 진단에 의하면, 공산당 간부들은“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 득의망형(得意忘形, 들떠서 처지를 잊어버림)해서 머리가 더워졌고,” 그 결과 제대로 된 점검도 검증도 없이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다 고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승리를 쟁취하면 들떠서 익숙한 경험조차 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무산계급이 자본계급과 연대하면 우의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자본계급과 결렬되면 좌의 오류를 쉽게 범한다.”

 

“우의 오류”란 자본가의 이기심과 독점욕이 빚은 구조적 착오를 의미하는 듯하다. 반면 좌의 오류란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의 달성을 위해 무리한 수단과 과도한 방법을 사용하는 실수 정도를 의미하는 듯하다. 계급철폐와 인간해방을 꿈꾸는 순수한 동기의 공산주의자들이 경험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착한”오류를 범했다는 논리다. 대숙청(1936-1938)이 한창 진행될 당시 스탈린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서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정리한<<볼셰비키당사, 속성강좌(1938)>>를 출간했다. 성경을 대신해서 역사의 중요한 문제점들에 대한 공식 답안을 정리했다는 이 책자에서 스탈린은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에 관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저지른 대숙청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인류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경험부족 때문에 오류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팽덕회도 일단은 대약진의 오류가 경험부족 때문이라는 스탈린식 변명을 차용했다. 반우파운동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상의 입장 표명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팽덕회는 마을마다 뒷마당에 소규모 용광로를 만들고 수천만의 농민들을 동원해 고작 쓸모없는 고철만을 생산해낸 토법연강(土法鍊鋼)의 정책에 대해선 준엄한 비판을 쏟아놓았다. “전민(全民)”을 동원해서 15년 만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대약진식 철강생산은 이미 대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런 팽덕회의 직언에도 불구하고 분과회의는 열흘 넘게 수박겉핥기에 머물고 있었다. 

 

 

"혁명을 붙잡고 생산, 공작, 전략을 촉진하라. 각방면의 작업을 더 좋게 완수하라."
http://www.iisg.nl/landsberger/

 

공산사회 건설을 꿈꾸는 모택동 앞에선 그 누구도 대약진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고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빅브라더’를 향하여 움직이던 상황이었다. 모택동은 태양에, 인민은 해바라기에 비유되던 시절이었다. 인격숭배가 늘 마뜩찮았던 팽덕회는 더더욱 분기(憤氣)를 가눌 수 없었다. 그는 여산회의야 말로 굶주리는 농민들을 살리는 마지막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화려한 거짓말을 지어낼 때, 팽덕회만은 진실을 말하는 어린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1959년 7월 12일 밤, 팽덕회는 모택동이 머물던 여산의 별장을 직접 찾았다. 항일투쟁과 국공내전 당시 팽덕회는 큰 일이 터지면 불쑥 모택동의 숙소로 찾아가곤 했었다. 잠자던 모택동은 기꺼이 일어나서 팽덕회를 맞았고, 두 사람은 침상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그때까지도 팽덕회는 여전히 모택동를 신뢰하고 있었으리라. 대약진의 실상을 알릴 수만 있다면, 모택동은 자신의 직언을 수용하리라고 믿었으리라.

 

 

"연안시절 팽덕회와 모택동은 함께 거닐며 대화하며 일을 했다."
"연안시절 팽덕회와 모택동은 함께 거닐며 대화하며 일을 했다."

 

경비참모는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모택동이 수면 중이라는 이유였다. 접견을 거부당한 팽덕회는 당장 참모 왕승광(王承光, Wang Chengguang)을 불러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이틀에 걸쳐 왕승광과 함께 작성한 6천 7백 자의 의견서를 긴히 모택동에 전달했다. 과거 조정의 대신이 황제에 올린 장문의 상소문과 유사한 형식이라 흔히 만언서(萬言書)라 불리는 문건이다. 비서를 통해서 팽덕회의 의견서를 받아본 모택동은 이틀 후(7월 16일) 짧은 회신을 보내왔다. “인쇄해서 각 동지에게 참고하도록 배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는 그 문건에 “팽덕회동지의 의견서”라는 제목을 직접 달아놓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7월 23일), 모택동은 정치국확대회의에서 팽덕회의 의견서에 대한 날선 비판을 내뱉었다. 그는 팽덕회가 당내 우파에서 불과 30킬로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의 의중을 분명히 드러나자 참석자들은 비판의 화살을 팽덕회의 심장에 정조준했다. 여론재판의 말화살이 팽덕회에 집중적으로 쏟아지자 승세를 잡은 모택동은 노회한 사냥꾼의 본능을 발휘해 그의 목을 조여 갔다.

 

7월 31일 중공중앙상위의 회의에서 모택동은 공개적으로 팽덕회를 공격했다. 그는 팽덕회가 노선투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하며, 자신과 팽덕회의 관계는 “3할은 조화롭지만, 7할은 어긋난다”는 말도 남겼다. 다음 날 그는 더 구체적으로 팽덕회에 비판의 창끝을 겨눈다. 그는 “팽덕회의 서신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기획되고 조직됐으며, 목적을 담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좌중을 노려보며 말을 맺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를 비판하는지 한 번 들어봅시다!”

 

8월 2일부터 제8회8차 전회(全會)가 열렸다. 전회가 시작되기 전 모택동은 팽덕회가 당내에 잠입한 우경분자라 이미 단정한 상태였다. 이념의 칼을 빼들고 자신을 공격해 오는 사람들에 휩싸인 채 팽덕회는 자기변호를 이어갔다.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결국 크게 화를 내며 토론자들의 공격에 맞섰다. 연안시절부터 정보통으로 모택동을 도와 배후에서 정풍(整風)을 주도했던 강생(康生, Kang Sheng, 1898-1975)은 특히 집요하게 그를 추궁했다. 참지 못한 팽덕회는 “그래 내가 야심가고 모택동을 권좌에서 내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지? 난 절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하고 소리쳤다.

 

열흘 넘게 중공지도부의 핵심인물들에 둘러싸여 사상검증을 받으며 생존투쟁에 내몰렸던 팽덕회는 결국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몰려 국방부장의 지위를 잃고 밀려나고 만다. 8월 16일, 제8회8차 전회를 마감하면서 중공중앙은 “팽덕회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 착오에 관한 결의”를 채택한다. 팽덕회는 결국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결의안의 모든 내용에 동의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의 정치생명은 거기서 사실상 종료되었다.

 

전회의 폐막식에서 모택동은 묘하게도 명나라 가정(嘉靖, 재위 1522-1566) 황제에 직언했다가 파직된 충신 해서(海瑞, 1514-1587)에 관해 언급한다. 팽덕회와 해서의 닮은꼴을 인정한 것일까? 모택동은 한 마디 툭 내뱉는다. “해서가 이사를 갔구먼, 우경(右傾)사령부로 이사를 갔어. [팽덕회는] 우파 해서로군.” 모택동은 명나라 충신 해서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했고, 1959년 4월 역사학자 오함은 모택동의 그런 뜻을 받들어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쓴다. 이 희곡은 북경경극단에 의해 공연되기까지 하는데, 1965년 11월 이 희곡은 팽덕회를 옹호하는 음험한 수정주의자의 작품으로 비판받으면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이후 다시 깊이 파헤쳐야할 정치적 희비극의 한 장면이다.

 

명나라 충신 해서의 직언을 기린 북경경극단의 "해서파관"의 한 장면. 이후 이 작품은 팽덕회를 칭송하고 모택동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해서파관의 비판은 1966년 문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해서파관의 원작자 역사학자 오함은 문혁 당시 희생된다.
명나라 충신 해서의 직언을 기린 북경경극단의 "해서파관"의 한 장면. 이후 이 작품은 팽덕회를 칭송하고 모택동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해서파관의 비판은 1966년 문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해서파관의 원작자 역사학자 오함은 문혁 당시 희생된다.

 

2.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대체 팽덕회의 의견서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기에 모택동은 그토록 격분해서 그의 정치적 생명을 앗아야만 했을까? 팽덕회의 의견서를 직접 읽어보면 허탈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 정도 얘기를 했다는 이유로 모택동은 팽덕회의 단죄에 그토록 광분해야만 했을까? 모택동은 과연 그렇게도 옹졸한 사람이었을까? 물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파헤쳐 보면, 어긋나는 중소관계와 중국의 핵무기 개발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내막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선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하고······.

 

여산회의 기조연설에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에 관해 “위대한 성취이나 많은 문제점이 있으며, 풍부한 경험을 얻었으니 전도가 밝다”고 선언했다. 7월 14일 모택동에 올린 팽덕회의 의견서는 기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아 보인다. 팽덕회는 완곡하게 에둘러 우국충정을 전했을 뿐이었다.

 

천하의 무골(武骨) 팽덕회는 우선 스스로 “삼국지의 영웅 장비(張飛)를 닮아 투박하고 정교하지 못하다”는 말로 의견서를 서두를 연다. 곧이어 그는 국가의 공식통계를 인용해서 대약진의 위대한 성과를 칭송한다. 공업부문, 농업부문, 국가재정수입방면에서 전년 대비 각각 66.1%, 25%, 43.5%가 급증하는 세계적 성과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그 결과 대약진은 중국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발전모델이 되었다며 모택동의 지도력에 찬사까지 보낸다. 팽덕회는 심지어 1958년 농촌에서 시작된 인민공사의 위업을 칭송하기까지 한다. 인민공사는 “농민들이 궁핍과 곤궁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해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올바른 도정이며, 비록 소유제의 문제에서 혼란이 있고 실행과정 상 결점과 실수가 드러나 엄중한 상황이지만, 무창, 정주, 상해 등에서 개최된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미 그런 문제점들은 해결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런 공치사를 남발한 후에야 팽덕회는 대약진의 문제점을 점검한다. 그는 경험부족, 인식지체, 물자결핍, 생산의 비효율성이 농촌 현실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고 충언한다. 관료층에 만연한 조급한 성과주의 때문에 아무도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진단이다. 아울러 그는 1959년 이래 업무추진력이 떨어지고 통제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1958년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실업문제를 해소한 것은 “인구가 많고 경제가 낙후된” 중국의 실정에서 매우 큰 성과라는 말을 덧붙인다. 또 그는 전민이 동원된 철강생산은 물력, 재력, 인력의 낭비를 초래했지만, 전국규모의 대규모 지질 조사는 큰 성과라 과장한다. 마치 모택동이 화를 낼까 봐 슬금슬금 달래는 듯하다.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론 큰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글의 말미에서 팽덕회는 당시 중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두 개의 큰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관료집단에 몰아치는 부과풍(浮誇風)과 소자산계급(쁘띠부르주아지)의 광열성(狂熱性)이었다. 부과풍이란, 지방정부 각단위의 간부들이 통계를 과장하고 조작해서 허위정보로 상부를 속이는 풍조를 의미한다. 소자본계급의 광열성이란, 중공지도부의 고급관료들 모두가 “대약진의 성과와 군중운동의 정열에 미혹되어”한 걸음에 공산주의로 발돋움하려는 이념적 과욕을 의미한다. 팽덕회는 바로 그런 부과풍이 중국 전역의 지방정부 기층조직에 만연해 있으며, 소자산계급의 광열성이 중앙정부의 지도부를 사로잡았다고 지적한다.

 

팽덕회의 의견서를 끝까지 읽은 모택동은 맨 마지막의 “소자산계급의 광열성”이란 표현에서 격분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팽덕회의 의견서가 여산회의 참석자 전체에 배포된 7월 23일 오전 정치국확대 회의에서 모택동은 “한 사람이 이처럼 중대한 시점에서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며 팽덕회를 지목했다. 그날 팽덕회는 참모 왕승광에게 말했다.“소자산계급의 광열성이란 표현은 본래 안 쓸 수 있었지만, 좀 강하게 써서 주석을 자극하는 것도 장점이 있다”고. 팽덕회는 모택동이 혁명의 광기에 휩싸여 “실사구시의 기풍”을 잃을 채 “좌의 오류”를 범하는 소자산계급분자라 모욕한 셈이었다.

 

모택동은 청년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이론서를 들척이며 식자연하는 쁘띠부르주아 인텔리를 가장 경멸했다.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라는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 이론가 집단에 맞서 1930-40년대 모택동은 중국농촌의 현실에 맞는 자생력 혁명이론을 생산했다. 대중노선과 실사구시는 그에겐 등불과도 같은 구호였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팽덕회는 모택동 자신이 혁명의 광기에 휩싸여 농민의 참혹한 현실에 눈감는 “좌의 오류”를 범했다고 일갈했다. 아마도 모택동은 날카롭게 그의 약점을 파고드는 팽덕회의 직설에 격분했던 듯하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떤 사람이 정치지도자가 되는가? 높은 지력, 뛰어난 용기, 남다른 덕망, 대중적 인기를 모두 갖췄다 해도 남다른 권력의지가 없으면 절대로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바로 그 “남다른 권력의지”란 무엇일까?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도덕적 의무감일까? 허무에 맞서 불멸을 얻으려는 자아실현의 욕구일까? 아니면, 한 비뚤어진 인간의 열등감의 발로일까?

 

팽덕회를 비판하는 문혁기의 풍자만화
팽덕회를 비판하는 문혁기의 풍자만화 (1967)

 

 

3. 대약진의 현실

 

여산회의가 개최되던 1959년 7월이면, 1년 이상 지속된 대약진운동이 진행된 상태였다. 1958년 1월부터 중공중앙위는 대약진운동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일단 당내의 급진노선에 조심스레 경종을 울리던 당서열 3위의 주은래(周恩來, Zhou Enlai, 1898-1976)가 “우경일탈(右傾逸脫)”의 혐의를 쓰고 비판의 화살을 맞았다. 그해 초 그는 두 번이나 자아비판을 하고선 모택동이 “진실의 대변자”라 선언해야 했다. 주은래가 그런 곤경을 겪을 정도니 다른 인물들은 좌고우면의 기회조차 없었다. 모두가 앞 다퉈 모택동의 뜻을 따라 대약진의 일로로 매진해야만 했다.

 

덕분에 중공중앙위는 지방의 현실에 맞지도 않는 무리한 산업발전 전략을 졸속하게 입안해야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보통 2만 명의 인구를 한 단위로 하는 인민공사의 건립이었다. 1958년 5월 5일 하남성 사하산(嵖岈山, Chayashan) 위성(衛星) 인민공사가 최초였다. 여기서 위성이란, 소련의 스푸트니크을 의미한다. 1957년 10월과 11월 소련은 성공적으로 스푸트니크를 대기권에 진입시켰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격양된 모택동은 중국의 농민들을 향해 농업생산량의 증대를 요구했다. 소련이 위성을 쏘아 올렸듯 중국의 근로대중은 집체노동을 통해 생산의 위성을 발사해야 한다는 비유였다. 대약진운동의 사회심리학적 배경엔 그처럼 시작부터 나이브한 낙관주의와 병적인 조급증이 범벅되어 있었다.

 

물론 단기성과를 요구하며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약진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었다. 1958년 봄 대약진운동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후, 운남성에서 특히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운남성 지방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8년 3월부터 9월까지 운남 육랑현(陸良縣)에선 33,319명의 부종(浮腫) 환자가 발생했다. 부종이란 극도의 기근에 시달리다 팔다리가 퉁퉁 붓는 괴질이다. 육랑현 전체 인구의 13프로 이상의 주민이 굶주렸고, 2.04프로의 인구는 결국 아사하고 말았다. 1958년 10월 26일엔 운남성의 녹권(禄勸)현에선 대규모 반혁명 소요가 발생했다. 진압과정에서 31명이 맞아죽고, 50명이 투옥되었다. 운남 동북부의 조통(昭通, Zhaotong)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기존의 촌락을 무리하게 인민공사로 재편하고 공공주방을 만들어 집체생활을 강요하고, 강제노역에 동원한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공중앙은 모택동의 지시를 따라 대약진의 박차를 고조시키기만 했다. 운남성의 기근 따위는 먼지방의 국부적인 현상일 뿐이라 인식했던 것이다.

 

당시 중공정부는 전국의 농민들을 인민공사라는 인구 2만 정도의 코뮨에 배속시켰다. 인민공사는 사회주의 이상실현의 공동체라 선전되었지만, 실제로는 노동력의 총동원을 위한 농촌의 군사화에 불과했다. 인민공사의 일원이 된 농민들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병사들과 같이 간부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앞지른다”는 구호 아래 농민들은 밤낮으로 가혹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중앙정부는 전국의 인민공사에 생산량의 비약적 증가를 요구했다. 인민공사들은 앞 다퉈 전년도 곡물 수확량을 수배나 상회하는 환상적인 목표량을 발표했다. 그렇게 발표된 수치들은 신문, 라이오, 확성기, 벽보 등등 모든 관영매체를 통해 날마다 전국에 홍보되었다. 1958년 5월 29일 인민일보엔 “속도가 대약진운동 총노선의 영혼”이라는 사설이 실리더니, 6월 8일자엔 하남성 수평현의 위성공사에서 1무당 1,007.5킬로의 밀이 생산됐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1무라면 고작 666.7 제곱미터로, 한국의 한 마지기(661제곱미터) 혹은 200평 정도와 엇비슷한 넓이의 땅이다.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16년 현재 평당 쌀 생산량은 1.8킬로그램으로 논 한 마지기 생산량은 360킬로그램 정도다. 1958년 하남성 중원평야의 200평 규모 농지에서 1,000킬로가 넘는 곡물이 생산될 수 있겠는가? 농촌현실을 아는 사람에겐 터무니없는 소리였음에도 인민일보의 이 기사는 혁명적 위업의 성과로 중국 전역에 선전되었다. 부과풍, 즉 허황된 과장의 풍조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부과풍의 거짓 선전물
1958년 당시 부과풍의 거짓 선전물

 

그당시 중국의 수많은 언론인들은 대체 다 무엇을 하고 있었나? 모두가 대약진의 광풍에 휩싸여 거짓보도, 허위조작을 일삼고 있었을 뿐이었다. 진실을 말하려 해도 도무지 검열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뻔히 거짓인지 알면서도 공산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가짜뉴스를 생산했던 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의 꿈은 그렇게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요컨대 “벌거벗은 임금님의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거짓말에 동참했던 관영언론이야 말로 인류사 최대규모의 기근을 낳은 주범이었다.

 

다시 팽덕회의 직언을 훑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팽덕회는 부과풍과 광열성을 대약진운동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다시 말해, 그는 혁명의 광기에 사로잡혀 통계를 조작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허위의식이야 말로 인민을 굶겨죽이는 근본원인임을 직시했고, 정의감에 사로잡혀 직언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 생명을 마감했다. (계속)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호북성 마성시에서 올벼 36,900근(500g)이&nbsp;생산되는 천하제일의 농지가 출현했다.인민공사가 출현했다고 선전하는 인민일보의 전형적인 부과풍 기사
호북성 마성시에서 올벼 36,900근(500g)이&nbsp;생산되는 천하제일의 농지가 출현했다.인민공사가 출현했다고 선전하는 인민일보의 전형적인 부과풍 기사

 

  <참고문헌> 

Roderick MacFarqua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2: The Great Leap Forward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3).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王焰主编,《彭德怀年谱》(北京: 人民出版社出版,1998)

彭德怀传记组, <<彭德怀全传>>(1-4册)(中国大百科,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ürgen Domes, Peng Te-huai: The Man and the Image (Stanford Uniersity Press, 1985).

Yang Jisheng, Tombstone: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3)

Frank Dikötter,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loomsbur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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