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7회. “人類史 最大의 饑饉”

 

1.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지금껏 “문혁춘추”에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 및 1950년대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약진운동(1958-1962)에서 문화대혁명(1966-1976)까지 18년간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혁명의 노도(怒濤)와 광풍(狂風)을 돌아본다. 그 시기 중국의 역사는 무지와 망상, 광기와 폭력, 배신과 반역의 연속이었다. 과연 왜 중국인들은 그토록 참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을까? 

 

대약진운동은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인류사 최대의 기근을 초래했다. 1959년 모택동은 일부 책임을 시인하고 국가주석의 지위에서 물러나고, 유소기(劉少奇, 1898-1969, Liu Shaoqi)와 등소평(鄧小平, 1904-1997, Deng Xiaoping)은 무너진 경제를 다시 일으키는 실용주의 개혁의 첫발을 내딛지만······. 1966년 모택동은 권력 재장악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문화혁명을 일으킨다. 유소기와 등소평 등을 주자파(走資派)로 몰아 숙청한 후, 모택동은 최고지도자로 복귀한다. 영문 모르는 중국의 인민들을 문혁의 늪에 빠져 “십년호겁(十年浩劫)”을 겪어야만 했다. 대재난의 의미로 번역되는 호겁의 원뜻은 극심한 강탈, 위협, 급습 등을 의미한다. 10년간 전인민이 서로를 위협하고, 공격하고, 서로 뺐고 빼앗기는 대재난을 당했음을 뜻한다.

 

전국시대부터 북송 직전까지 무려 천 4백 년에 걸친 열여섯 조대(朝代)의 정치사를 완성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그 방대한 기록을 일컬어 통감(通鑑)이라 불렀다. 역사란 인간의 진면목을 반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란 뜻이다. 우리에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벌거벗은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투명한 유리거울과도 같다. 이제 그 유리거울 속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을 곰곰이 봤으면 한다! 대한민국이 용케도 피해갔던 “가지 않은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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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 당시의 포스터. "조직의 군사화, 행동의 전투화, 생활의 집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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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현재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 양계승(楊繼繩, 1940-, Yang Jisheng). 호북성 희수현(浠水縣) 출신이다. 1960년 북경의 청화대학에 입학한 후, 1964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줄곧 중국의 주요통신사인 신화사(新華社)에서 기자로서 30여 년을 보냈다. 이후 양계승은 <<중국개혁>>, <<중국기업가>>, <<방법>> 등의 정치저널을 편집하다가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종합월간지<<염황춘추>>의 부사장을 역임했다. <<염황춘추>>는 중국내 자유주의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저널의 권위지로 각광받았으나, 양계승은 2015년 중국정부의 압력으로 편집권을 잃고 만다.

 

그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역저 <<묘비>>의 저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양계승은 스스로 대기근을 탐구하기 시작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59년 4월 말 청년동맹의 회원으로 고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양계승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가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부친은 그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아사한다. 그 당시 젊은 양계승은 그러나 대약진의 오류를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더 헌신적인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고만 믿었다. 청화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그는 청년동맹의 서기로 활동했다가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대학 졸업 후 통신사의 기자로서 다양한 문서를 접하게 되면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그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거짓, 허위, 조작, 날조, 은폐, 억압, 탄압으로 점철된 중국공산당의 상징조작과 역사왜곡을 직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연재해라 여겼던 대약진운동의 참상이 잘못된 정책이 빚은 인재(人災)였음을 알게 되었다. 계속되는 중국정부의 거짓보도와 역사왜곡에 철두철미 속고살아왔음을 자각한 후, 양계승은 단말마 비명도 없이 역사의 쓰레받기로 쓸려간 수많은 원혼들을 위해 묘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명저 <<묘비>>는 그렇게 그의 부친과 함께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역사적 망각에 저항하는 한 지식인의 처절한 투쟁이다.

 

대기근의 기념비적 기록 "묘비"의 저자 양계성http://people.followcn.com/2017/01/15/yang-jisheng/
대기근의 기념비적 기록 "묘비"의 저자 양계승
http://people.followcn.com/2017/01/15/yang-jisheng/

 

2008년 홍콩에서 출판된 이 책은 출간 즉시 중국 밖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3년 영역본이 미국에서 출판된 후, 뉴욕의 맨하탄 연구소는 양계승에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 Hyek, 1899-1992)를 기리는 하이에크상을 수여했다. 2015년에는 양계승은 스웨덴에서 훌륭한 언론인을 기리는 슈티그 라알슨상(Stieg Larsson Prize)을 받았다. 2015년 겨울엔 하버드 대학에서 양심적이고 정직한 언론인에게 부여하는 라이어즈상(Louis M. Lyons Award)을 받게 되었지만, 중국정부가 이번에는 출국을 막아 양계승은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물론 이 책은 현재 대륙에선 출판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겼기에 중국정부는 이토록 양계승을 경계하고 감시해야만 할까? 우선 양계승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기근 피해자의 숫자부터 살펴보자.

 

양계승이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1958년에서 1962년 사이 중국에선 3천 6백만 명의 인명이 아사(餓死)했다. 아울러 당시 인구의 자연증가율에 비춰 보면, 4천만 명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양계승은 대기근 당시 희생자의 숫자는 7천 6백만 명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중국정부는 대기근의 참상을 숨기기에 급급해 정확한 통계를 공표하지 않았고, 특히 대기근 당시 아사자의 문제를 극구 숨기려고만 했다. 당시 공안부에서 인구통계를 담당했던 관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중국정부는 각성에서 집계되던 인구통계를 극비에 부쳐졌다. 최고지도부의 소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상세한 인구변동 현황을 알 수 없었다. 그해 식량부의 부(副)부장직에 있었던 주백평(周伯萍, Zhou Boping)은 중국 성(省)단위 인구통계를 작성하던 중 전국적으로 인구가 수천만이나 줄어들었음을 확인했다.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자 주은래는 직접 전화를 걸어 당장 모든 자료를 소각하라 명했다고 한다. 이후로 중국정부는 당시의 인구를 공표하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대기근 당시 아사하거나 강제노동 및 국가폭력에 희생되어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인명의 숫자는 중국 국내외의 연구자들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중국내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편차가 크다. 아사자를 1천 7백만 정도로 파악하는 연구도 있지만, 대부분 3천 만 이상이라 파악한다. 양계승은 직접 12개가 넘는 성의 자료를 직접 살펴가며 구체적인 분석을 거듭한 끝에 3천 6백만 명의 아사자와 4천 만의 인구가 출생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2008년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퀘터(Frank Dikӧtter) 교수는 북경 올림픽 직전 잠시 개방된 중국 각 지방의 당안관(档案館)들을 돌며 당시의 정부문서 및 민간기록을 집중적으로 열람했다. 그의 집계에 따르면, 최소한 4천 5백만 명이 대약진 기간 중에 “비자연적 죽음”(unnatural deaths)에 내몰렸다. 여기서 “비자연적 죽음”이란, 단순히 식량부족에 시달리다 영양실조로 죽는 다양한 유형의 아사(餓死) 이외에도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국가폭력과 민간보복의 악순환을 모두 포함한다.

 

과연 왜 중국공산당은 이토록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는데도 숙수무책으로 대약진의 광풍을 이어가야만 했을까?

 

http://15650352.weebly.com/great-leap-forward-galler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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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약진의 몽상

 

1958년 5월 제8차 중국공산당 대회 2차 회의에선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끼는”(多快好省地)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 채택된다. 이로써 대약진운동의 기본방침이 정해졌다.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는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국가적 목표가 세워졌다. 중국공산당은 “대약진”의 총노선에 따라 전국의 인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1957년 말 농한기 중공정부는 수천만의 농민들을 댐과 저수지와 제방과 운하 공사에 동원했다. 때로는 1만 명의 농민들이 한 작업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간의숙소에서 생활했다. 공산당 맨 밑바닥의 간부들은 수시로 농민들에 야만적 폭행을 가하기 일쑤였다. 공포에 떨면서 많은 농민들은 보수도 없이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급식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삭막한 군대식 생활이었다. 이미 군사문화가 전 중국에 퍼져 있었다.

 

지난 25-26회에 걸쳐 살펴봤듯 하남의 인민들은 대규모 수리공사에 동원되었다. 결국 댐의 붕괴로 귀결된 날림 공사였음에도 관영매체는 이구동성으로 인민대중의 위대함을 칭송만 했다. 반우파투쟁 이후 정부의 무리한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제거된 상태였다. 지방정부의 관원들은 현장의 실상을 왜곡하는 허위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대약진운동의 정신적 지주는 최고지도자 모택동이었다. 자본과 기술력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모택동은 공산당의 지도력으로 혁명적 인민대중을 리드하면 사상초유의 생산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당시 소련에선 흐루쇼프가 스탈린격하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권엔 이념적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56년 2월 25일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20회 당 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인격숭배와 그 결과”라는 문건을 발표한다. 1930년대 소련에선 거의 2백 만의 정치범들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굴라그에 수용되었고, 그 중 68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흐루쇼프는 특히 볼세비키 당원들을 처형한 스탈린의 만행을 규탄했다. 공산권에서 스탈린의 권위가 흔들리자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에선 자유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모택동은 소련이 사회주의 혁명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중소이념분쟁이 격화되던 1954-1960년 당시 흐루쇼프는 중국에 거주하던 10만의 러시아인들을 본국으로 소환한다. 더는 소련식 발전모델을 맹신할 수 없었던 모택동은 자력갱생의 정신을 강조한다. 중국이 세계 최초로 공산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소련을 밀쳐내고 공산권의 종주국이 될 수 있다 믿었다. 이미 그는 10년 가까이 중화인민공화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조급해졌다. 15년 내 미국과 영국을 추월한다는 당시의 구호 속에 모택동 특유의 조급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끼면서"

 


 

4. 인민공사의 환상

 

대약진운동은 모택동사상이 실현된 결과였다. 역사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서 모택동은 중국의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코뮌(commune)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0년 전반에 걸쳐 중국의 농업집산화는 호조조(互助組)에서 초급농업생산합작사(초급사)로, 다시 고급농업생산합작사(고급사)로 집산화의 강도를 높여 갔다. 더 많은 농민들을 공동의 협동농장의 성원으로 조직해서 강도 높은 집단노동을 실시하려는 목적이었다. 1958년 7월 이후, 중국의 농촌조직은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다시금 인민공사(人民公社)로 재편되었다.

 

고급사는 농업합작을 기본목표로 했다. 이와 달리 모택동이 구상하는 인민공사는 농업생산뿐만 아니라 철강생산 등 농촌의 공업화까지 담당하는 보통 2만 명 규모의 코뮌이었다. 인민공사는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 농업, 상업, 문화, 교육, 군사 등 인민생활의 모든 분야를 담당했다.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라 농촌의 인민대중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목적이었다.

 

"공산주의는 천당이고, 인민공사는 천당으로 가는 다리이다."https://www.reddit.com/r/PropagandaPosters/comments/2xjv31/communism_is_heaven_and_peoples_commune_is_the/
"공산주의는 천당이고, 인민공사는 천당으로 가는 다리이다.
"https://www.reddit.com/r/PropagandaPosters/comments/2xjv31/communism_is_heaven_and_peoples_commune_is_the/

 

인민공사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든 농민들이 함께 일하고, 각자 필요한 만큼만 식량과 임금을 배급받는 시스템이었다. 공동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개개인은 우선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했다. 인민공사에는 공동주방이 마련되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밥을 지어 먹으면 에너지 손실을 막고 효율적 배급을 실현할 수 있는 계산이었다. 집집마다 수백 년 유지되던 부엌은 모두 사라졌다. 밥솥, 냄비 등 모든 주방용기는 철강생산을 위해 각출되었다. 소, 닭, 오리, 개 등등 집집마다 키우던 가축들도 모두 인민공사의 간부들이 와서 끌고 갔다. 낡고 더러운 움막들은 철거되었지만, 새집들이 일시에 마련될 순 없었다. 인민공사는 수천 년 농촌에서 땅을 부쳐 먹고 살면서 인민이 체득하고 있던 생존의 기반을 허물어버렸다.

 

당 기관지에는 곧 두 배, 때론 세 배를 웃도는 생산량 증식의 사례가 선전되었다. 농촌 간부들이 정해진 식량생산량을 초과달성하는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택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간부들은 거짓말 행진을 이어가는데······. (계속)

 

헨리 칼티어프레슨(Henri Cartier-Bresson) 촬영, 서안, 1958. 방과 후 학생들이 주부들의 지도에 따라 도로 블록을 깔고 있다. https://pro.magnumphotos.com/C.aspx?VP3=SearchResult&ALID=2TYRYDHXVND1
헨리 칼티어프레슨(Henri Cartier-Bresson) 촬영, 서안, 1958. 방과 후 어린 학생들이 주부들의 지도에 따라 도로 블록을 깔고 있다. 남녀노소 모든 인민을 동원하던 대약진운동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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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Yang Jisheng, Tombstone: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3)

Frank Dikötter,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loomsbur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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