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6回. “江물과 人間의 鬪爭” (2)

 

1. 댐이 무너지다

 

1975년 8월 5일부터 7일까지 사흘에 걸쳐 하남성 주마점시를 강타한 태풍은 1천 밀리미터가 넘는 폭우를 쏟아 부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빗줄기는 흡사 소방관의 호수에서 쏟아지는 소화액과도 같았고, 그 빗줄기에 맞은 새떼들이 화살처럼 땅바닥에 내리꽂힐 정도였다. 남반구 호주의 기류와 남태평양의 기류가 충돌해 일으키는 태풍은 일반적으로 중국 동남부지역을 지역을 때리면서 약해지지만, 그해 여름의 태풍은 돌연히 북상해 장강과 중원지역을 강타했다.

 

사흘간의 폭풍우 앞에서 1950년-60년대 건설된 크고 작은 댐들은 하나씩 무너졌다. 8월 8일 아침 해가 뜨기 전, 하남성에선 모두 62개의 댐들이 붕괴했다. 판교댐의 수위는 118미터 안전선까지 치솟았으나 아무도 판교댐의 붕괴를 내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판교댐의 제방에 쭉 늘어서서 허리까지 잠긴 채 둑을 수리하고 있었다. 상황은 규모가 작은 석만탐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치고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자 관재탑에선 댐의 수문을 완전 개방해서 방류를 서둘렀으나 계곡수의 유입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판교댐과 석만탐댐은 8월 8일 새벽 1시 전후해서 모두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댐이 무너지자 판교댐에선 6억 입방미터의 물이, 석만탄댐에선 1억2천 입방미터의 물이 쏟아졌다. 인근 하천의 제방도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홍수의 도미노였다. 물난리는 동쪽의 안휘성까지 이어졌다. 29개의 현과 시가 파괴되고, 1천7백만 무의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1천백 만 명의 이재민과 최소 8만 6천, 최대 23만의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102킬로미터의 철로도 파괴되고, 18일 넘게 철도는 전면 두절되고, 48일간 화물유통이 멈춰 섰다.

 

석 달 후, 1975년 11월 수리전력부(水利電力部)의 부장(=장관) 전정영(錢正英, 1923-, Qian Zhengying)은 “자신에게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시인하고 사죄했다. 수리전력분야의 전문가였던 전전영은 “충분한 연구도 없이 큰 댐은 당연히 안전하리라고 믿었던” 오류와“소련의 안전 기준만을 맹신했던” 오류를 대참사의 근본원인이라 진단했다. 전전영은 그러나 대참사의 근본원인은 결국 언급하지 못했다. 회하유역 수자원의 최대 확보라는 정부의 무모한 정책에서 모든 문제가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2016년 10월 회하에 닥친 홍수 위기https://archive.shine.cn/nation/Chinas-thirdlongest-river-Huaihe-faces-significant-flood-risk/shdaily.shtml
2016년 10월 회하에 닥친 홍수 위기https://archive.shine.cn/nation/Chinas-thirdlongest-river-Huaihe-faces-significant-flood-risk/shdaily.shtml

 

 

2. 전문가는 경고했건만

 

판교댐과 석만탄댐의 붕괴 대중혁명의 광기와 관료집단의 졸속행정이 빚어낸 참혹한 인재(人災)였다. 대참사의 씨앗은 두 댐이 건설되었던 1950년대에 뿌려졌다. 회하유역 개발은 끊임없는 홍수로 해마다 침수되던 이 지역에 100개가 넘는 댐과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정부는 회하유역 수자원의 최대 확보를 주문했다. 최대한의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선 산간의 계곡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평지의 지류들도 가둬서 인공의 저수지를 최대한 늘리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렇게 물을 확보하면 저수지 주변의 침수지를 농지로 바꾸는 대규모 개간사업이 이어졌다. 작은 홍수로 질척해진 대지를 옥토로 바꾸려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판교댐과 석만탄댐은 회하로 흘러드는 두 지류에 건설되었다. 당시 시공을 맡았던 지방관료들은 그 회하지역 수자원 관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댐건설이 한창이던 1955년에서 1956년에 걸쳐 큰 문제점이 드러났다. 수문 부근에서 큰 금이 발견되면서 최초 설계의 오류가 보였던 것이다. 결국 소련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보수공사가 이뤄졌으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1950년대 초부터 30년 계획으로 추진되었지만, 대약진운동이 개시되던 1958년 중국정부는 이미 전국 방방곡곡에 회하개발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불굴의 혁명정신이 회하지역 홍수의 걱정을 모두 해결했다는 선전이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모든 인민에게 초능력의 발휘를 요구하던 잔혹한 혁명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판교댐과 석만탄댐이 건설된 직후 1957년에서 1959년에 걸쳐 하남성 주마점 지역에만 100개가 넘는 댐과 저수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중앙정치국 서열 8위였던 하남 출신의 담진림(譚震林, 1902-1983, Tan Zhenlin)은 관개(灌漑)를 위한 수자원의 최대 확보, 소규모 저수지 개발, 농촌 마을의 자력갱생이라는 회하유역 개발의 3 원칙을 천명한다. 수자원의 최대 확보를 위해선 산지에서 평원 지역에도 댐을 만들을 물을 가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하유역을 인공의 호수지대로 재건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때 수자원공학자 진성(陳惺, 1921 -, Chen Xing)은 정부의 무리한 시공에 경종을 울린다. 수자원의 최대 확보를 위해 평원에 저수지를 만들면, 지하수위가 안전선 이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지하수위가 올라가면 당연히 농지의 침수 위험이 고조된다. 아울러 토양의 염도도 높아지고, 과도한 알칼리화를 피할 수가 없다. 전문가로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진성은 평지에 댐을 건설해 저수지를 만드는 방식은 환경파괴로 이어지며, 결국 참혹한 재앙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지만······. 전문가의 신중함보다는 인민의 혁명성을 강조하던 시대였다. 진성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오로지 수자원의 최대 확보와 관개시설 확충이라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정부는 군사작전 치르듯 댐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남성뿐만 아니라 안휘성에서도 소규모의 저수지들이 독버섯 돋듯 생겨났다.

 

대약진운동 시기 진성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아시아 최대규모의 평원 인공호수인 주마점시의 숙압호(宿鴨湖, Suyahu) 저수지를 직접 설계했다. 처음엔 진성의 설계대로 공사가 시작됐지만, 얼마 못가 지방정부의 수자원관리위원은 설계도면을 바꾼다. 진성은 본래 수문의 개수를 열두 개로 설계했었는데, 그 설계가 너무나 보수적이라면서 일곱 개나 수문을 줄여서 수문을 다섯 개만 만들기로 결정했다. 지방정부는 그런 식으로 안전기준을 무시한 채 수문의 개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시공의 편의를 도모했던 것이다. 더 신속하게 더 많은 댐을 건설해야지만 대약진의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혁명투사임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너진 판교댐의 모습, https://www.internationalrivers.org/resources/the-forgotten-legacy-of-the-banqiao-dam-collapse-7821
무너진 판교댐의 모습, https://www.internationalrivers.org/resources/the-forgotten-legacy-of-the-banqiao-dam-collapse-7821

 

3. 대약진의 미망

 

대약진운동이 대기근을 몰고 오면서 하남성의 인민들도 3년의 고난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 시기 하남성에선 광범위한 홍수와 기근이 발생한다. 1961년 하남성 제1서기로 파견된 유건훈(劉建勳, 1913-1983, Liu Jianxun)은 철저한 조사 끝에 무리한 댐건설과 저수지 개발이 하남성에 발생한 홍수의 원인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1950년대 댐건설을 비판했던 진성을 불러 와서 자문을 구하는데·······.

 

진성은 대약진운동 당시 우파분자로 몰려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대약진 운동 당시 농촌에선 집집마다 뒷마당 용광로가 만들어졌다. 그 소형 용광로에 손목시계, 숟가락, 쇠못, 녹슨 쟁기 등등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모아다 녹이고 있었다. 15년 안에 미국의 철강생산량을 따라잡는다는 환상적인 혁명의 주술에 전국의 인민이 포박당한 상황이었다. 그때 진성은 민간의 쇠붙이를 모아서 철강생산을 하겠다는 발상을 비과학적이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댐건설의 광기도 정면에서 비판했기 때문에 그는 우파로 몰려서 강제노역에 내몰려 있었다.

 

1961년 대약진운동의 폐해가 대기근을 몰고 오자 지방정부에선 일탈감시와 오류수정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댐과 저수지 공사에 대해서도 정부차원의 감사가 이뤄졌다. 감사를 통해서 회하유역 개발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위험한 댐들은 재건되거나 완전히 철거하는 공사가 이어졌다. 중앙정부는 그러나 수자원의 최대 확보라는 원칙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대약진 이후에게 지속적으로 댐건설이 이어졌다.

 

1975년 당시 석만탄댐은 제방을 1.9미터나 더 높인 상태였고, 판교댐의 수용 수량 역시 설계 당시의 안전 기준을 3천2백만 입방미터를 웃도는 상태였다. 하남성 정부는 댐의 안전수위 기준을 상향조정했다. 결국 판교댐과 석만탄댐의 붕괴는 혁명의 광기와 졸속한 관료행정이 낳은 처참한 인재(人災)였다.

 

2009년 진성은 89세의 나이로 한 평생 수자원관리에 몸담았던 경험을 응축해서 “치수에는 끝이 없다”는 의미의 저서 <<치수무지경治水無止境>>를 펴낸다. 그는 말한다. “과학적 치수는 수리(水利, 물의 이로움)를 주지만, 비과학적 치수는 수해(水害)를 불러온다.” 회하유역 개발이야 말로 혁명의 광풍 속에서 무리하게 추진됐던 비과학적 치수의 전형이었다.

 

돌이켜 보면 궁금해진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왜 그리도 무모한 속도전의 유혹에 빠져야만 했을까? 과연 왜, 무엇 때문에 과학과 합리와 단계적 절차를 건너 뛴 채로 역사적 비약만을 추구했을까? 왜 그토록 어리석은 “대약진”의 함정에 빠져야만 했을까? (계속)

 

대약진운동 당시 선전 포스터, https://chineseposters.net/themes/great-leap-forward.php
대약진운동 당시 선전 포스터, https://chineseposters.net/themes/great-leap-forward.php

 

<참고문헌>

Micah S. Muscolino, The Ecology of War in China: Henan Province, the Yellow River, and Beyond, 1938-1950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Peter C. Perdue, “Is There a Chinese View of Technology and Nature?” In Martin Reuss and Stephen H. Cutcliffe, eds, The Illusory Boundary: Environment
and Technology in History (Charlottesvill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0). 

Yi Si, "The World's Most Catastrophic Dam Failures: The Ausut 1975 Collapse of the Banqiao and Shimantan Dams," in Dai Qing, ed., The River Dragon Has Come! The Three Gorges Dam and the Fate of China’s Yangtze River and Its People (Routledge, 1998). 

Yang Jisheng, Tombstone: China's Great Famine, 1958-1962 (Farrar, Straus and Giroux, 2013)

"共和国的足迹——1951年:'一定要把淮河修好'” (http://www.gov.cn/test/2009-08/03/content_1382280.htm)

http://factsanddetails.com/china/cat15/sub103/item448.html

陈惺, <<治水无止境>> (水利水电出版社, 2009)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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