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문혁춘추] 30회. “차르(Czar)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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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29 12:32:33
  • 최종수정 2018.12.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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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0회. “차르(Czar)의 유토피아”

 

1. 대약진의 신기루

 

대약진운동의 깃발이 중국 전역에 나부낄 때, 인민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토피아란 차르(Czar)의 의식을 점령한 신기루일 뿐이었다. 모두가 차르의 신기루를 바라보며 유토피아의 꿈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중공중앙의 고위급 관료부터 산간벽지의 농민들까지 모두가 한 입으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모두가 스스로 내뱉은 거짓부렁에 속아야만 했다. 불가능을 꿈꾸며 굶어죽던 시간이었다. 기만과 허위의 계절이었다. 

 

농촌의 현실에 입각해 생산 가능한 수확량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간부는 반혁명분자로, 수정주의자로, 부르주아 끄나풀로 몰렸다. 양계승의 <<묘비>> 제 1장에 따르면, 하남성 신양(信陽)현에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던 한 간부는 계속되는 취조 끝에 결국 맞아죽고 말았다. 진실을 말하면 맞아죽을 판이니 모두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통계를 조작했다. 한 마지기 땅에서 1,000킬로그램 이상의 곡물을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목표였으나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상급정부에서 그 예상치에 따라 곡물을 각출했다. 

 

농민들은 추수 직후 대부분의 곡물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렇게 정부가 곡식을 쓸어 가면, 바닥에 흩어진 곡식 낱알들을 주어먹다가 굶어야만 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다. 곡식을 숨기고 간부를 속이고 슬그머니 게으름 피우고 달아나는 소극적 저항도 있었다. 곡창을 털고 식량을 훔치고 간부들과 맞싸우는 격한 투쟁의 방법도 있었다. 온 마을이 들고 일어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인민의 저항은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의 공권력 앞에선 풀벌레 울음만큼 허약했다. 지방정부의 간부들은 저항하는 농민들에 폭력으로 다스렸다. 대기근 피해자들 중 많은 경우는 노예노동과 무차별 폭력에 희생되었다.  

 

그런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공중앙위의 최고지도자들은 지방을 순회하며 생산량 증대를 더더욱 종용했다. 1958년 8월 유소기(劉少奇, Liu Shaoqi, 1898-1969)는 산동성 수장진(壽張鎭)의 허위보고를 그대로 믿고 “혁명적 위업”을 격찬했다. 이후 지방을 시찰할 때마다 그는 “더 과감한 시도가 더 큰 수확”을 보장한다며 산동성 수장현을 보고 배우라 종용했다. 8월 4일 모택동은 하북성 서수(徐水)의 농촌을 시찰하던 중, 농민들에게 기쁜 얼굴로 “대체 그렇게 많이 남아도는 곡식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모택동의 그런 일화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무려 32만 명이 서수로 몰려 들었다. 중공중앙위는 이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로의 초기 이행이 시작되고 있다고 선전했다.

 

"15년 내로 더 높이 뛰어 영국을 추월하자!" https://www.npr.org/sections/pictureshow/2012/11/16/164785930/the-art-of-chinese-propaganda
"15년 내로 더 높이 뛰어 영국을 추월하자!" https://www.npr.org/sections/pictureshow/2012/11/16/164785930/the-art-of-chinese-propaganda

 

 

농촌의 현실은 비참하게 붕괴되었음에도 하급간부들은 성과를 조작해야만 했다. 우경분자의 낙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우경분자의 낙인을 받으면 곧 정치적 생명을 박탈당했다. 생물학적 연명도 불가능했다. 중공정부가 흔들어대는 대약진의 깃발은 그렇게 모든 인민을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건만, 간부들은 복지부동이었다. 그들은 군사작전에 불려 나온 하사관과도 같았다. 관영매체의 기자들이 취재를 나오거나 정부의 고위관료가 시찰을 나오면, 간부들은 인근 전답의 덜 자란 곡식을 파와선 주변 전답에 옮겨 심었다. 

 

눈속임을 위해 빽빽하게 옮겨 심은 곡식들은 이내 시들고 말았지만, 그렇게 철저히 숨기지 않고서는 상부의 추궁을 피할 길이 없었다. 농민들은 수확량의 증대를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척박한 토양에 단백질을 제공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큰 가마솥에 수십 마리의 개를 넣고 끌인 후, 그 국물을 땅위에 뿌렸다. 물론 그런 비과학적 방법으로 대지의 소출량이 증대할리 만무했다. 개란 개는 모두 삶아 땅바닥에 뿌렸건만 유토피아의 꿈은 멀어져만 갔다.

 

참혹한 현실은 아랑곳없이 모택동은 연일 인민공사의 성과를 극찬했다. 그의 눈에 인민공사는 산업, 농업, 상업, 교육, 군사조직까지 결합된 가장 효율적인 공산주의 초기단계의 인민공동체였다. 모택동이 그렇게 강한 드라이브를 걸자 전국적으로 음지의 독버섯처럼 인민공사가 돋아났다. 1958년 10월 말까지 중국의 농촌에선 무려 26,576개의 인민공사가 창건되었다. 전체 농가의 호수로 보면, 99.1프로의 참여율이었다. 잔뜩 고무된 모택동은 여러 성을 시찰하면서 각 지방의 경쟁을 부추겼다. 예컨대 안휘의 한 인민공사에서 무상급식을 실시하자 모택동은 당장 그 방법을 승인하며 전국적으로 선전했다. 유소기도 동시에 전국을 돌면서 대약진의 성과를 선전했다. 강소성에선 3백만 이상의 농민이 철강생산에 동원되었다. 유소기는 대약진에 나선 농민들이 “불평불만도 없고 임금시비도 하지 않는다며”치켜세웠다.

 

중국을 공산권의 종주국으로 만들겠다는 모택동의 야심이 대약진운동의 심적 동기였다. 장개석의 추격을 피해 섬서성의 오지로 대장정을 떠나던 시절 모택동 사상은 구체화되었다. 그는 객관적인 물적 조건을 넘어서는 인민대중의 불굴의 정신력만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근본동력임을 확신했다. 그는 역사의 비약적 발전을 믿었다. 마르크스, 레닌 등이 밝힌 역사의 합법칙성을 알고 슬기롭게 현실의 조건에 대처하기 때문에 중국의 인민대중은 지주전호제의 봉건사회를 탈피해 곧바로 사회주의로의 직행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대약진”의 이상은 인민대중의 집체적 희생을 요구했다.

 

인민공사 뒷마당의 용광로!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자는 구호 아래 전개된 철강증산운동에 동원된 농민들.  https://everydaylifeinmaoistchina.org/2017/05/10/smelting-steel-in-a-backyard-furnace-in-1959/
인민공사 뒷마당의 용광로! 철강생산에 동원된 농민들.
https://everydaylifeinmaoistchina.org/2017/05/10/smelting-steel-in-a-backyard-furnace-in-1959/

 

인민공사는 곡물생산의 책무와 더불어 철강생산의 기지가 되어야 했다. 농촌에서 대체 어떻게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가? 모택동은 마을마다 작은 용광로를 만들고 인민대중이 모두 토착적인 방법에 따라 각자 소량의 철강을 생산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민공사의 농민들은 땅을 부치기에도 힘이 들었건만, 간부들은 대규모 인원을 징발해서 날마다 철강생산에 투입했다. 15년 만에 미국을 앞지르는 강력한 군사대국을 만들기 위해선 대규모 철강생산이 필수적이었다. 중공중앙정부는 중국을 순식간에 세계 최강의 철강생산국으로 만드는 발전전략으로 마을마다 소규모 용광로를 만들라 명령했다. 그렇게 전인민이 철강을 만들면 15년 이내에 중국은 영국을 앞지르는 거대한 철강생산국이 된다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결과는 참혹한 실패였다. 집집마다 모든 쇠붙이를 갹출해서 녹이고 담금질을 했건만, 농민들이 생산한 철강은 툭 치면 부서지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의 아궁이에 쏟아 넣은 연료는 그렇게 고철을 녹이는 허망한 불씨로 소멸됐다. 농민들은 결국 곡식도 없이, 땔감도 없이 참담한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농민들은 성과 없는 국책사업에 불려나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가고 있었다. 이미 기근이 닥친 농촌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농민들이 사지가 퉁퉁 부어오르는 부종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모택동의 야심은 경쟁적인 허위보고를 낳고, 허위보고가 각출량을 늘리고, 곡식을 빼앗긴 농민들은 굶주려야만 했다. 죽음의 사기극에 모두가 말려든 상황이었다. 악화일로의 현실을 외면한 채로 관영매체는 날마다 거짓보도만 일삼고 있었다. 관료조직은 통계를 날조하고, 지식인들은 눈치만 보며 입을 닫았다. 하급 지방정부의 말단 간부들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로봇처럼 인민을 향한 폭력을 자행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차르의 선의지를 믿는다고? 가장 잔혹한 국가폭력은 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뻔한 결과를 예상 못하고 무리한 정책을 입안하는 위정자는 곧 인민의 적일 수밖에 없다. 

 

 

"뒷마당 용광로", 대약진 당시 모택동의 철강생산의 실험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https://everydaylifeinmaoistchina.org/2017/05/10/smelting-steel-in-a-backyard-furnace-in-1959/

 

 

 

2. 여산(廬山)의 비판자들

 

그런 현실을 알게 된 팽덕회는 여산회의에서 모택동에 직필의 상소문을 올렸다. 팽덕회가 먼저 치고나가자 세 명의 인사들이 조심스럽게 대약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7월 19일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극성(黃克誠, 1902-1985, Huang Kecheng)은 소련 농민공사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인민공사의 무모함을 고발했다. 같은 날, 호남성위의 제1서기였던 주소주(周小舟, 1912-1966) 또한 팽덕회를 지지하는 발언을 남겼다. 이틀 후인 7월 21일, 중공중앙 정치국의 후보위원 장문천(張聞天, 1899-1976, Zhang Wentian)이 가세하여 3시간 걸친 장광설로 대약진의 “주관주의적 오류”를 비판했다.

 

1930년대 모택동은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채 맹목적으로 개인의 의지만을 따르는 극단적 사유경향이라 비판한 바 있다. 팽덕회를 비롯한 대약진운동의 비판자들은 대약진의 망상이야 말로 주관주의의 오류라 지적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차르의 폭주를 주관주의의 오류라 비판한 셈이다. 29회에 언급한 대로 모택동은 1959년 7월 23일 팽덕회의 의견서를 인쇄해서 회의 참석자 모두에게 배포하라 지시했다. 팽덕회에 동조하는 세 명이 정체를 드러내자 곧바로 반격을 개시한 셈이다. 모택동의 의중을 파악한 참석자들은 팽덕회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세력”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정치국 확대회의가 막을 내린 8월 1일, 모택동은 다시금 팽덕회의 정치적 야심을 비판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임표는 팽덕회가 무력을 확충하는“초병매마”(招兵買馬, 병력을 키우고 전마를 사들임)의 야심가라고 공격했다. 당시 군부의 실세였던 팽덕회를 향한 선전포고와 같은 선언이었다. 한 달간 지속된 중앙위원회 정치국확대회의는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막을 내렸다.

 

바로 다음 날인 8월 2일 곧바로 제8기 중앙위 8중전회(中全會)가 이어졌다. 1956년 결성된 제8기 중앙위원회의 여덟 번째 전체회의란 의미이다. 75명의 중앙위원들과 74명의 중앙위원 후보들, 그리고 14명의 지방정부 고위간부가 참석한 이 회의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쟁점이 “팽덕회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에 탄핵이었고, 두 번째 쟁점이 1959년 경제계획의 조정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미 전날 모택동은 과녁을 향해 정조준을 명했고, 임표는 충실하게 명령을 따라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이제 중공중앙 지도부의 전원이 돌아가며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를 향해 십자포화를 가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반론을 제기하며 자기변호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8중전회는 공식적으로 “팽덕회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의 오류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모택동의 암시를 따라 중앙위원회가 만장일치로 팽덕회 집단에 내린 정치적 사형선고인데, 결의문의 죽죽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을 뜯어보면 인신공격성 음해에 불과해 보일뿐이다.

 

“1958년 대약진 이후 전당전민이 일치단결하여 적극적으로 공작을 하는데, 팽덕회는 마음속으로 중앙의 영도력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며서 반당활동을 진행하고 적당한 기회를 노려 자신의 동조자와 주총자들과 함께 당과 모택동 동지를 향한 공격을 가했으며, 여산회의를 그런 음모를 실현하는 기회로 삼았다. 팽덕회동지가 과거에 혁명에 이로운 활동을 한 바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당중앙과 인민해방군에서 그가 점한 지위 때문에, 또한 스스로 솔직담백하고 소탈한 인격을 가장해왔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이미 일련의 사람들을 미혹시켰고, 일련의 사람들을 미혹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당과 인민해방군의 전도에 매우 큰 위험이 되고 있다. 진실로 이러하기 때문에 바로 이 위군자(僞君子), 야심가, 음모가의 진면목을 폭로하여 반당적 분열활동을 제지하는 것이야 말로 곧 당을 위하고, 또 당에 충성하고, 인민해방군에 충성하고, 사회주의사업에 충성하는 인민을 위하는 중요한 임무이다.”

 

이에 대해 팽덕회는 결연히 맞서 자기변호를 했다. 인민공사 뒷마당에 작은 용광로를 짓는 원시적인 철강생산의 방법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로 귀결됐고, 그 때문에 농민들은 추수를 하지 못해 굶주리게 되었다고 항변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약진운동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선언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반성하는 대신 당당히 맞서는 팽덕회의 태도는 다시금 그를 반당분자로 몰고 가는 빌미가 되었다. 그쯤 되면 합리와 상식은 통하지 않는 마녀사냥이자 인민재판일 뿐이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21세기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가짜뉴스와 조작보도는 대중의 눈과 귀를 마비시키곤 한다. 하물며 1950년대의 꽉 닫힌 전체주의 공산국가임에랴.

 

3, 팽덕회는 왜 팽(烹)당했나?

 

팽덕회가 모택동에 팽(烹)당한 내막을 캐다 보면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이 발견된다. 첫째, 팽덕회를 국방부장에서 해임한 후 후 모택동은 임표를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는 사실이다. 모택동은 일찍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또 혁명이란 무력투쟁을 통해 지배세력의 전복이라 말한 적도 있다. 군사력이 정치권력의 근거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대약진운동 비판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군부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음직하다. 꼬리 흔드는 충견처럼 살살거리는 임표로 하여금 뻣뻣하고도 도도한 팽덕회를 물어뜯게 함으로써 모택동은 군부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국방부장의 지위에 오른 임표는 실제로 모택동의 오른팔이 되어 이후 6년 후 발생하는 문화대혁명 당시 제2인자의 입지를 굳힌다.

 

둘째, 팽덕회의 제거는 모택동이 중공중앙 정치국의 권력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여산회의에서 팽덕회 집단을 비판하고 모욕주고 탄핵해마지 않았던 제8기 중앙위원회의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곧 모택동에 버림을 받았다. 대약진운동의 광풍 속에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모택동의 의도를 따라 팽덕회의 제거에 앞장섰지만, 결국 그들 자신이 모택동에 의해 팽(烹)을 당하고 만 셈이다. 과연 모택동은 정치국의 권력자들을 제거할 계획을 미리 세웠을까? 물론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팽덕회를 숙청함으로써 모택동은 군부를 장악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권력투쟁의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이었던 주덕은 팽덕회를 격하게 비판하기 보단 은근히 감싸고 돌았고, 그 때문에 모택동의 분노를 사서 얼마 후 해임된다.    http://www.sohu.com/a/259293853_505355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이었던 주덕은 팽덕회를 격하게 비판하기 보단 은근히 감싸고 돌았고, 그 때문에 모택동의 분노를 사서 얼마 후 해임된다.
http://www.sohu.com/a/259293853_505355

 

물론 모택동의 독재권력은 민주집중제로 포장된 중국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에서 연원했다. 1921년 창당 이래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공산당은 모두 여덟 차례 전국대표회의를 통해서 중앙정부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1945년 7차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중앙위원회를 구성한 후로는 10년 넘게 새로운 지도부는 출범하지 않았다. 1956년 9월 15-27일에야 중공중앙은 제8차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제8기 중앙위원회를 재구성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한참 추진되고 있던 시기였다. 정치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치국(政治局) 상임위원으로는 주석 모택동과 더불어,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 이부춘(李富春, 19700-1975), 이선념(李先念, 1909-1992), 팽진(彭眞, 1902-1997) 등의 대표적 행정개혁가들과 함께 주덕(朱德, 1886-1976, Zhu De), 팽덕회, 임표, 하룡(賀龍, 1896-1969), 진의(陳毅, 1901-1972) 등의 군장성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유소기, 등소평, 진의, 팽진, 이부춘, 이신념 등은 10년 후 문화혁명 과정에서 모두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된다. 1969년 중병을 앓던 유소기는 옥중에 방치된 채 병사했고, 다른 인사들은 산간벽지에 하방(下放)되었다. 많은 경우 중앙의 간부를 공장에 보내 현장의 경험을 직접 얻게 하는 이른바 “준점”(蹲點, 무릎 꿇고 점검하다)에 처해졌다. 민주집정제의 집단지도체제가 차르의 일인독재로 귀결된 셈이었다. 

 

셋째, 모택동과 팽덕회의 대결은 1950년대 후반 중소분쟁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으로 볼 수도 있다. 모택동은 소련의 핵기술을 흡수해 서둘러 핵보유국의 꿈을 실현하려 했지만, 군의 영도자였던 팽덕회는 소비에트의 핵우산 아래 들어가 재래식 군장비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려 했다. 바로 그런 군사전략적 차이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고조시킨 국제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중소관계를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다.

 

4. 스푸트니크와 ICBM

 

여산회의 1년 전이었다. 1957년 8월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발사에 성공했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스푸트니크(인공위성)가 보기 좋게 대기권 진입했다. 우주산업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서가는 극적인 장면이 전파를 타고 지구 전역에 중계되었다. 곧바로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행사를 빛내기 위한 사회주의 종주국의 “우주쇼”라 할만 했다. 11월 초 공산권의 64개 국가의 공산당 및 노동당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었다. 11월 2일 모택동 역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볼셰비키 혁명 40주년을 기리면서 공산권 지도자들은 서구자본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반제동맹을 결의한다. 소련공산당 서기 흐루쇼프로선 공산권 내의 리더십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계속>

 

 

1957년 소련의 기념우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putnik-stamp-ussr.jpg
1957년 소련의 기념우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putnik-stamp-ussr.jpg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지난 한 해 문혁춘추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9년에도 꾸준히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이어가겠습니다. 

 

<참고문헌> 

Roderick MacFarqua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Vol.2: The Great Leap Forward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3).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王焰主编,《彭德怀年谱》(北京: 人民出版社出版,1998)

彭德怀传记组, <<彭德怀全传>>(1-4册)(中国大百科,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ürgen Domes, Peng Te-huai: The Man and the Image (Stanford Uniersity Press, 1985).

Yang Jisheng, Tombstone: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3)

Frank Dikötter,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loomsbury, 2011)

Michael Schoenhals, "Yang Xianzhen's Critique of the Great Leap Forward," Modern Asian Studies, Vol. 26, No. 3 (Jul., 1992), pp. 59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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