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37회. "변방의 중국몽": NL 주사파의 친중주의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7回. "邊方의 中國夢": NL主思派의 親中主義

1. “NL주사파” 시대 유감

 

1990년 가을, 서울 도심 지하철 안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도심에서 모종의 정치집회를 마친 운동권들이 떼를 지어 전철을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퇴근길 붐비는 그 전철 안에서 학생 한 명이 불쑥 소리쳤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보나마나 그는 NL(민족해방노선)계 운동권이었다. 시민들은 힐끔힐끔 기세등등한 그 학생을 곁눈질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살얼음처럼 쫙 퍼지는데, 뒤쪽 끝에 서 있던 다른 학생이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통일논의 환상 속에 우리민중 죽어간다!” 

 

그는 분명히 PD(인민민주주의)계 운동권이었다. 이어서 두 집단은 운동권 약어와 은어를 섞어가며 자기들만의 논쟁을 이어갔다. 그 시절 흔해빠진 사회주의 운동권의 노선투쟁이었다. 그 시절 대학가 캠퍼스 어디를 가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공공연히 논하곤 했다. 하숙방, 카페, 술집, 서점가 곳곳에서도 운동권들은 어디서나 삼삼오오 모여서 혁명노선을 읊조리고 다녔다. 87년 대선 이후, 갑자기 찾아온 이른바 운동의 대중화시대였다. 대학가서 석 달 지나면 마르크시스트가 되고, 첫 학기 끝날 즈음엔 종교를 선택하듯 NL이나 PD 중 하나를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전철 안의 일반시민들은 피곤한 퇴근길에 난데없는 운동권의 “사투(사상투쟁)”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는데······. 용기를 낸 한 중년 신사가 준엄한 음성으로 꾸짖었다. 

 

“학생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베를린 장벽 무너지고 소련이 망하고 있는데, 무슨 철지난 혁명 얘기를 하고 있어. 지금이 625 직전인가? 공산당 만행을 알기는 알아? 당장 공산혁명이라도 일어나서 정말 김일성 지배받고 싶어?” 

 

용감한 시민의 그 한 마디가 운동권들의 입을 막았다. 다음 역에서 전철이 멈춰 서자 NL과 PD 모두 섞여서 내빼듯 전철을 빠져나갔다.

 

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의 가투장면
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의 가투장면

 

 

 

이 두 분파 중에서 친중 성향을 보인 집단은 단연 NL계열이었다. PD계열도 친중 성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대개 러시아 혁명을 동경하며 레닌을 숭배하던 부류였다. 반미·반일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NL계열은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더 시급하다 굳게 믿었다. NL계열이 친중 성향을 보인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중국공산당은 625 전쟁 당시 300만의 지원군과 군무요원을 파병해 김일성 정권을 구제한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주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치, 군사, 사상·문화 모든 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의 롤 모델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빅브라더였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은 당연히 모택동을 혁명의 지도자로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주체철학도 실은 모택동사상의 변종일 뿐이다. 모택동은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민대중의 주체역량, 사상개조, 자력갱생의 중화민족주의, 반외세 고립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김일성 주체철학은 모택동사상에다 수령론을 얹어놓은 전체주의 인격숭배의 이념일 뿐이다. 게다가 중국과 북한은 "운명공동체"였다.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에 속한 "대한민국"은 그들의 공적이었다. 바로 그런 현실인식에 따라 반미와 친중은 NL계운동권의 기본노선이었다. 반미와 친중과 친북은 머리가 딱 붙은 트리플렛(triplet, 세 쌍동이)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아래서도 대한민국 대학가는 온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일색이었다. 동녘, 새길, 소나무 등등 이른바 운동서적 전문출판사들은 앞 다퉈 구소련, 동유럽, 일본과 북한에서 생산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이론서들을 찍어냈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고 "북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과 같은 속류 운동서적도 당시 대학가의 베스트셀러였다. 87년 이후 노태우 정권시절에는 대학 서점가에 <<조선전사>>, <<김일성저작선> 등의 북한서적들도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2005년 1월 9일 외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발견된 주체사상 관련 문건들. 총학생회는 "이전 학생회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공개했다. 조선일보, 2005년 1월 9일, 채승우 기자 보도
2005년 1월 9일 외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발견된 주체사상 관련 문건들.
총학생회는 "이전 학생회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공개했다.
조선일보, 2005년 1월 9일, 채승우 기자 보도

 

 

 

 

2. 심대한 시대착오: 사회구성체논쟁

 

 

80년대 후반에는 좌파진영 논객들 사이에서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이 대유행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액션 플랜(action plan)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운동권이 크게 두 패로 나뉘어 논쟁을 벌인 것이다. “계급모순”을 강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전위성을 신뢰하는 이른바 PD계열은 대한민국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 생각했다. 반면 “민족모순”을 강조하고 모택동주의 “대중노선”(mass line)을 금과옥조로 여겼던NL주사파는 당시 대한민국이 “식민지반(半)봉건사회”라 주장했다. 

 

NL주사파들은 대한민국이 "미제의 식민지"라 굳게 믿었다. 그들에게 당면한 운동의 목표는 "민족해방"이었다. 그들은 "민족해방"을 위해선, 김일성 혁명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제국주의자들 및 그 "부역자"들과 맞싸우기에 "남조선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NL주사파들은 북한은 이미 "주체적으로 우뚝 선 사회주의 조국"이지만, 미제 식민지로서의 남한은 자본주의에도 이르지 못한 후기봉건사회라고 진단했다.

    

삼성, 현대 등 굴지의 재벌기업이 해마다 10프로 달하는 경제성장을 이끌며 매년 수십만의 고용을 창출하던 시절이었다. 80년대 후반이며 중산층의 소비가 급증하면서 "마이카(my car)"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의 대한민국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주장이나 "봉건사회"라는 주장 모두 기껏 몽환적인 현실파악에 불과했다. 아니, 현실을 모르는 인텔리겐챠의 치기어린 관념유희였다. 

 

80년대 후반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 관련 출판물들 (바른정당 부대변인 고성원 블로그에서)
80년대 후반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 관련 출판물들 (바른정당 부대변인 고성원 블로그에서)

 

도긴개긴 큰 차이도 없지만 그래도 둘 중에선 NL주사파가 더 감상적이고, 주정적이고,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집단이었음은 틀림없는데, 놀랍게도 1990년대부터 NL주사파가 점점 세를 확장했다. 급기야 대학 학생회가 하나씩 NL계로 통합되어 갔다.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원조 주사파 김영환의 고백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단파라디오를 청취하며 북한의 지령을 채록하는 김일성 추종세력이었음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NL계와 PD계는 모두 꽤나 부자연스런 번역문투의 현학적인 상투어를 잔뜩 나열해 가며 대한민국 체제의 전복과 사회주의 혁명의 당위를 역설했었다. 운동권 "사투"는 대학가의 문화가 되었다. 위에 언급했듯 술집, 카페, 하숙방, 강의실, 심지어는 버스 안에서도 "신식국독자"냐 "식민직반봉건"이냐 논쟁을 벌이는 풍경을 흔히 접할 수 있었다. 음유시인 정태춘씨가 어느 날 "신식국독자"로 입장을 정리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독서계에선 남로당의 빨치산 투쟁을 칭송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돌풍을 일으켰다. 빨치산 소재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이병주의 <<지리산>>과는 달리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전편엔 김일성 치하 북한이 “민족사의 정통”이란 주장이 암시되어 있다. 빨치산 전사들은 결국 “친일반역의 이승만 도당”에 잡혀 결국엔 “개죽음” 당해 효수(梟首)된다. 하지만 그들의 “민족해방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980년대 현실에서 지상의 과제는 바로 “반외세 민족해방의 자주투쟁”이란 주장이다. 북한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노선과 동궤를 타고 있다.

 

당시 대학가 집회에서 널리 불리던 운동가요의 가사가 그 시대의 정신을 웅변한다.

 

“식민지 조국의 품안에 태어나/ 이 땅에 발 딛고 하루를 살아도

민족을 위해 이 목숨 할 일 있다면/  미국 놈 몰아내는 그 일이어라!”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또 싸워서 찾은 이 나라

쪽발이 양키 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파쇼 앞세우는 수탈의 나라

이 땅의 민중들은 피를 흘린다!” 

 

그런 분위기에서 80년대 대학가는 점점 더 주사파의 온상으로 변해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임종석이 바로 당시의 주사파가 장악했던 전대협 의장이었다. 임종석을 위시한 전대협 출신 주사파 운동권들이 청와대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중추기관에 포진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업임원의 72%, 국회의원의 44%가 바로 이제 586이 되어버린 386세대이다(중앙일보, 2019년 9월 23일 자). 당시 주사파 집단이 신봉했던 주체사상은 과연 어떤 사상이었을까? 

 

3. “주체사상”과 친중주의

 

1989년 한 운동권 친구가 내게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문건을 건네면서 일독을 권했다. 당시 대학가 주사파들 사이에서는 성경처럼 읽히던 글이었다. 금단의 열매를 씹는 느낌으로 그 문건을 정독했는데, “역사는 위대한 수령의 영도를 통해 발전”하며, “인민대중은 무조건적 복종”해야 한다는 인격숭배의 논리가 담긴 실로 황당무계한 수령 유일독재의 변론(辯論)이었다. 그 문건은 전편에 걸쳐 김일성의 주체사상이야 말로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한계를 창의적으로 극복한 새로운 혁명이론이라 격찬하고 있다. 이 문건의 저자는 바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모택동의 사상, 즉 마오주의(Maoism)의 북한식 변종이다. 객관적인 물적 토대(objective material basis)를 강조하는 정통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과는 달리 마오이즘은 인간의 “주관적 능동성”(subjective activity)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관적 능동성이란, 영웅적 의지에 따라 현실의 객관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주체적 의지와 능력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전단계로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조 상태에서 자체적 모순에 의해 도래하는 역사의 최종단계이다. 문제는 모택동이나 김일성이 활약하던 당시의 동아시아는 90프로의 인구가 농민이었다는 객관적 현실이었다. 농경사회에선 우선 자본주의로 가야 하는데, 이들은 단계를 건너 뛰어 공산주의로 바로 돌입하려 했다. 때문에 그들은 역사의 법칙을 간파한 깨어있는 영도자의 영웅적 실천을 강조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한 강한 정신적 무장을 통해 보통 사람들을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개조론), 바로 그런 믿음은 미증유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정당화하는 파괴적 이념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마오주의나 김일성사상은 기껏 후발(後發) 사회주의 문화권의 “정신승리법”에 지나지 않는다. 

 

모택동은 실제로 “대약진운동”(1958-62년)을 통해 바로 “창의적 인민대중의 주관적 능동성”을 극대화하려 했다. 그 결과 최대 4천5백 만의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모택동사상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물구나무 세운 유심주의(唯心主義) 철학에 불과하다. 크게 보면,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 이래 이어지는 관념론(觀念論)과 심(心)의 자발성(自發性)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객관적 현실에 대한 탐구도 없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이 모택동은 전 중국인민에게 일양적인 사회개조의 철학을 강요했다. 사회개조의 목적에 따라 인간개조가 진행되었다. 인간개조를 위해선 전체주의적 감시와 처벌이 있어야만 했다. 

 

"인민의 태양" 모택동은 유토피아의 몽상이 빗어낸 혁명의 페르소나(persona)에 불과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모택동조차 역사적 아이콘 모택동의 연기를 했던 주역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모택동을 그대로 본떠 스스로 "인민의 태양"을 자처했던 김일성은 모택동의 충실한 모방자였다. 그는 모택동이 사후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선 후에도 죽을 때까지 16년 간이나 수령유일주의를 붙잡고 늘어졌다. 김일성은 명실 공히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세습왕정의 수괴일 뿐이었다. 바로 그런 최악의 전체주의 전제군주 김일성을 숭배하고 추종하던 집단이 1980년대 후반, 아니 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대학가를 쥐락펴락했다. 

 

"모택동 사상이 햇빛처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비춘다!" (1966) 모택동은 태양에 비유되었다. 북한은 김일성을 태양으로 숭배한다. 일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생일을 태양절이라 부른다. 김일성 컬트(cult)는 모택동 컬트의 모방이다. https://chineseposters.net/themes/mao-cult.php
"모택동 사상이 햇빛처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비춘다!" (1966)
모택동은 태양에 비유되었다. 북한은 김일성을 태양으로 숭배한다.
일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생일을 태양절이라 부른다.
김일성 컬트(cult)는 모택동 컬트의 모방이다.
https://chineseposters.net/themes/mao-cult.php

 

1980년대 후반이면 이미 구소련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동구의 공산권은 냉전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 세계사적 조류와는 정반대로 대한민국의 대학가와 사회운동권은 시대착오적으로 “주체사상”의 포로가 되어갔다. 소련의 고르바초프(1932- )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들고 나왔을 때, 대한민국의 좌익집단은 “사회주의 재건 운동”이라 우겨대고 있었다. 당시 좌파지식인들 중에선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마르크시즘 경제학을 전공했던 정운영 선생만이 소련식의 개혁은 결국 “사회주의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교조적 좌익세력은 그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1990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친중주의는 바로 1980년대 그런 분위기에서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그 당시 좌파세력이 탐독했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 <<8억 인과의 대화>>(1977), <<10억 인의 나라>>(1983), <<우상과 이성>>(1977/1980) 등은 노골적인 중국공산당 찬양을 담고 있었다. 그 저서들을 통해서 리영희는 대약진운동을 아름답게 왜곡하고, 중국인들이 흔히 “10년의 대참사(十年浩劫)”라 부르는 문화혁명을 위대한 혁명이라 극찬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은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여러 번 리영희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표한 바 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허술함과 사상적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계속>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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