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2회. “중국의 인텔리들, 어쩌다 자유를 잃었나?”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12회. “중국의 인텔리들, 어쩌다 자유를 잃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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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역사] 12回. “中國의 인텔리들, 어쩌다 自由를 잃었나?”

 

1. 중공정부가 외치는 자유와 민주란?

 

오늘날 중국 전역에선 2012년 12월 중공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채택된 24자 12단어의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흔히 볼 수 있다. 공공게시판, 건물벽, 관공서, 대학교정, 호텔로비, 택시계수기, 심지어는 화장실벽에도 어김없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이 적혀 있다. 국가의 목표로서 “부강, 민주, 문명(文明), 화해(和諧),” 사회적 지향으로서 “자유, 평등, 공정, 법치,” 공민(公民)의 덕목으로서 “애국, 경업(敬業), 성신(誠信), 우선(友善)”이다.

 

중국 전역에 나붙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포스터

 

부강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줄임말이다. 아편전쟁 이후 “자강(自强)”의 기치 아래 중국인들은 풍요롭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00년의 국치를 곱씹으며 달려 왔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은 핵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 및 시험에 성공해서 마침내 강병(强兵)의 꿈을 이뤘다 할 수 있다. 부국의 꿈은 그러나 아직도 아득히 멀기만 하다.

 

현재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난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3억2천5백만 인구의 미국 GDP는 19조 4천억 달러인데, 인구 14억의 중국의 GDP는 11조 9천억 달러이다. 경제규모로 중국은 미국의 61% 정도이지만, 2017년 현재 중국의 1인당 GDP(8천 달러)는 아직도 미국 1인당 GDP(5만 7천 달러)의 14%에 불과하다. 중국은 여전히 심각한 빈부격차, 지역격차의 심화 및 사회안전망 부재에 직면해 있다. 여전히 심각한 “빈곤(貧困)”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부강”을 최고의 국가목표로 강조하고 있다.

 

과연 “부강”이 “사회주의”의 핵심가치관이 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해방과 만민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유물론적 변증법, 역사적 유물론, 잉여가치설을 창시하지 않았나? 1980년대 이래 중공정부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한 마디로 이러한 근본적 질문들을 일축해 왔다. 중국식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서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 변조해 온 중국식 토착 사회주의라는 논리다. 중국식 사회주의는 정중간에 부강의 큰 깃발 펄럭이고 있고, 그 아래 민주, 문명, 화해, 자유, 평등 공정, 법치라는 색색의 작은 깃발들이 두루두루 꼽혀 있는 모습이다.

 

"부국강병으로 중화를 진흥하자!" 부강은 지난 150년 넘게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치이다.
"부국강병으로 중화를 진흥하자!" 아편전쟁 이래 "부강"은 150년의 세월 동안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지상의 가치이다.

 

아울러 공민 개개인은 “애국하며, 경업하고, 성실하고 미덥고, 이웃과 잘 지내는” 훌륭한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가 개개인의 도덕함양 및 윤리실천의 방법까지 가르치고 일깨우는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가권력에 대항해서 개인의 사적 영역을 확대해 온 자유주의 정치철학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이 열두 가지 가치 중에서 가장 불편한 단어는 단연 “자유”와 “민주”임에 틀림없다. 1989년 “자유의 여신상”을 들고 민주의 확대를 외쳤던 천안문의 시위대를 중국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불과 몇 년 전 민주의 이름으로 직선제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홍콩 학생들의 요구를 중국정부는 완강히 묵살했다. 그런 중국정부가 사회주의적 핵심가치로 공공연히 자유와 민주를 당당히 선양(宣揚)하고 있다니!

 

물론 자유와 민주는 중국의 헌법에 명시된 가치다. 중국의 헌법은 공민의 기본권으로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여행, 시위, 종교, 신앙의 자유까지 보장하고 있다. 다만 “국가는 ‘정상적’ 종교행위를 보장한다!”는 헌법 조항이 잘 보여주듯 중국정부는 국익 등의 이유에 따라 꽤나 편의적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공산당 정부가 선양하는 자유란 기껏 제국주의 침탈과 봉건지배를 벗어난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는 듯하다. 중국정부가 지향하는 민주 역시 “중앙의 통일영도”에 따른 “민주집중주의”로 공산당 일당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문제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갖는 창조적인 파괴력이다. 다른 “핵심가치관”과는 달리 자유와 민주는 개인의 기본권과 정치참여의 확장을 그 생명으로 삼는다. 인류사에서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 이래 대부분 정치혁명의 밑바탕엔 자유와 민주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 대한민국의 역사 역시 1948년 제헌헌법에 명시된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경제성장과 시민참여를 통해 지속적으로 실현되어 온 과정이었다. 요컨대, 독재정권 아래서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시민의 심장에서 분초를 읽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중공정부는 물론 자유와 민주의 파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둘을 다른 열 개의 “핵심가치관” 속에 섞어서 상쇄의 효과를 노린 듯하다. 민주를 외치는 집단에겐 “부강”과 “화해”를 제시하고, 자유를 부르짖는 개인에겐 “법치”와 “애국”을 요구할 수 있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쉽게 얻으려는 중국정부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까.

 

5년 전 북경의 자금성(紫金城) 부근에서 벽에 나붙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를 수첩에 적고 있는데, 공산당원으로 꽤나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중국인 친구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자유로 치면, 중국정부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다(对自由来说,中国政府在世界上最自由).”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나머지는 모두 자유가 없지!(其他都没有自由!)” 친구의 재기발랄함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서 대부분의 공민들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제대로 잘 이해하고 있다. 다만 막강한 일당독재의 권력 앞에서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없을 뿐이다. 여전히 일부의 지식인들은 다각적으로 산발적인 저항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입을 닫거나 말을 아낀다. 그들을 억누르는 과거사의 악몽이 조금도 씻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 1940년대 연안의 정풍운동(整風運動)

 

과연 중국의 지식인들은 언제, 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유를 잃었나?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우선 1940년대 항일전쟁 시기 섬서성 연안에서 일어났던 중국공산당 정부의 정풍운동(整風運動, 1942-44년)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당시 중공지도부는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국민당과의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무엇보다 당원 전체의 생각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이른바 “사상개조(思想改造)”의 혁명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모든 행동의 오류는 결국 생각의 오류에 기인하므로 생각의 변화가 더 근원적이라는 판단이었다. 1940년대 연안에서의 정풍운동은 이후 중국공산당 특유의 사상검증, 사상통제, 사상청소, 사상개조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1956년 “백화제방운동”과 곧바로 이어진 “반(反)우파운동”(1956-58) 역시 연안시절 정풍운동으로 소급된다.

 

1942년 당시 일본군은 만주에서 연안지역을 타고 장강이남 지역을 점령한 상태였다. 장개석은 중경을 임시수도로 삼아 장강이남 내륙에서 일본군과 힘겹고 소모적인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덕분에 대장정 이후 북서쪽 산간지대를 점령한 중공정부는 운 좋게도 일본군의 공격에서 비껴나 당 조직을 정비하며 신정부의 기틀을 마련해 갈 수 있었다. 소련 유학파 출신 정적들을 제압한 후 모스크바의 지도에서 벗어난 모택동은 과감히 독자 노선을 걸기 시작하고, 1945년에는 급기야 그의 사상이 중국공산당 헌장에 삽입되기에 이르는데······.

 

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rectification-movement/
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rectification-movement/

 

1942년 2월 1일 모택동은 “주관주의(主觀主義), 분파주의(分派主義) 및 형식주의(形式主義)”를 비판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당내의 이런 문제점을 직접 찾아내고 교정(敎正)하는 학습모임을 개최하라 요구한다. 여기서 주관주의란 중공지도부의 지시를 거스르거나 집단주의적 통일성을 해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의미한다.

 

연안 중앙연구소(中央硏究所)의 학생을 보면, 82%는 도시지식인들이며, 74프로는 1937년 이후 입당했고, 79프로가 20대였다. 68프로가 연안에 오기 전 생산직에 종사한 경험이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항일전쟁기 형성된 강한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중공지도부의 입장에선 공산당 혁명투사가 되기엔 여전히 사상개조가 필요한 “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택동의 연설 이후에도 학생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고, 타인에 대한 비판도 철저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도시 출신 인텔리들로서 자유주의적, 자유방임적 태도를 견지했다. 공동체적 의식이 박약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었다. 부르주와의 민주주의에 매몰되기도 했고,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성향도 드러냈다. 그런 상황을 주시하던 중공지도부는 사상개조를 위한 일격의 충격파가 필수적이라 여겼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정풍운동에 나서지 못하자 중공지도부는 강압적으로 비판투쟁의 불씨를 당긴다. 그 작업은 당내 치안 및 정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강생(康生, 1898-1975)이 직접 맡았다. 그는 1942년 2월 12일 팔로군 강당에 모인 2천5백 명 당간부들 앞에서 주관주의와 분파주의를 비판하라는 모택동의 연설문 취지를 설명한 후, 모택동의 연설문과 논설문을 합친 교재를 제시하며 본격적인 사상개조의 학습을 실시하라 요구한다.

 

중국공산당 초기의 주요 지도자 왕명(王明, 1904-1974)의 측근으로 정치경력을 쌓은 강생은 서른 살의 나이로 1934년 정치국위원의 지위에 오른 당내의 기린아였다. 1930년대 4년간 모스크바에서 활약한 강생은 1936년 반혁명분자와 트로츠키주의자를 제거하는 이른바 “진반숙탁(鎭反肅托)”운동을 주도한다. 그는 소련비밀 경찰의 협조를 얻어 수백 명의 모스크바 중국유학생을 숙청했던 경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바로 그런 비밀정찰의 경험과 간지(奸智)로 하여 그는 연안시절 모택동의 총애를 받고, 정풍운동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후 그는 1960년대 문화혁명 과정에서도 간특하고 음험한 방법으로 모택동의 정적들을 숙청하는 비밀정찰 활동을 이어간 인물이다. 문화혁명기 강생은 최고의 권력을 누리지만, 모택동 사후 4인방에 비견되는 정치적 오명(汚名)을 쓰고 역사의 쓰레받기 속으로 쓸려갔다. 1980년 중국공산당은 당론으로 그의 당적을 파기하고, 혁명묘역에 묻혔던 그의 골회(骨灰)를 파버렸다. 결과적으로 중국현대사의 악인으로 기록됐지만, 강생은 모택동의 정치투쟁을 직접 도운 “모택동 만들기”의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연안 시절의 모택동과 강생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rectification-movement/
<연안 시절의 모택동과 강생>
http://alphahistory.com/chineserevolution/rectification-movement/

 

강생의 요구 후에도 학생 및 간부들의 정풍운동이 제대로 개시되지 못하자 강생은 다시 1942년 3월 18일 대규모의 동원집회를 열고 본격적인 비판투쟁을 시작한다. 1942년 4월부터는 모택동이 직접 정풍운동을 이끌었다. 공산당 각부서의 단체장과 학교장들이 이끄는 소(小)독서회에서 구성원들은 모두 강도 높은 사상개조를 강요받았다. 외견상 모택동의 연설과 논설을 강독하며, 또한 중국현대사, 당사, 정당정책, 조직정책, 군사문제 등을 공부하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의 사상교육 과정이었다.

 

당원들은 돌아가며 교과과정을 발제하고 주요 논쟁거리를 짚어가며 토론을 했는데, 무엇보다 자기반성이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 개개인 모두 학습태도,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인생사 전반에 관해 공개적으로 자기반성을 하고, 또 타인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해야만 했다. 아울러 학생들로 하여금 당내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처음엔 머뭇거리며 비판의 요령조차 터득하지 못했던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비판의 요구를 받자 슬금슬금 입을 열었다. 비판의 수위가 점점 고조되면서 지식인들은 마침내 공산당 최고 지도부를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자유로운” 비판의 시기는 약 3주 정도 지속되었다. 학생들이 붙인 벽보에는 당의 지도부를 향한 통렬한 비난과 조롱이 이어졌다. 학생들의 비판에 합세한 연안의 인텔리들은 <<해방일보(解放日報)>>의 지면을 통해 일제히 비판의 포문을 열고 당의 지도부를 쪼아대기 시작한다.

 

 

3. 왕실미(王實味, 1907-1947)의 저항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강생은 품에 숨기고 있던 정풍(整風)의 비수를 꺼내 유난히 강경하고도 현란한 논설로 예술의 독립성과 지식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한 명의 문인(文人)의 목에 겨누었다. “닭 한 마리를 잡아 원숭이 떼를 좇는” 노련한 사상통제의 방법이었다. 한 명만 정조준해서 제대로 때리면 나머지는 숨거나 엎어져 용서를 빌게 마련이다. 거의 10년 전 모스크바에서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면서 터득한 비밀정찰의 노하우(knowhow)였다.

 

그는 바로 왕실미였다. 하남성 개봉(開封) 출신으로 1925년 북경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한 인물. 문학연구회 동인으로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지만 자주 필명을 바꾼 탓에 큰 문명(文名)을 떨치진 못한다. 그는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상해를 배경으로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전개한다. 트로츠키의 자서전을 번역소개하기도 하고, 상해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편찬하는 문예저널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한다. 1930년 그는 <<휴식>>이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는데, 한 평론가는 이 소설에서 “히스테리에 가까운 열정”이 느껴진다고 평한다. 이후 왕실미의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1936년 그는 연안의 중공정부를 찾아간다. 이후 200만 단어 분량의 마르크스-레닌 전집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정풍운동이 시작된 문제의 중앙연구원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치기도 한다. 연안의 엘리트 그룹에 속하길 열망했으나 고작 연구원 신분에 머물렀던 왕실미는 중공지도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정풍운동이 불붙기 1년 전 왕실미는 모택동의 정치비서 진백달(陳伯達, 1904-1989)과 사회주의 혁명에 부합하는 문학형식을 놓고 이른바 문체(文體) 논쟁을 벌인다. 왕실미는 <<아큐정전>>의 작가 노신(魯迅, 루쉰, 1881-1936)을 흠모했다. 노신을 위시한 다수의 “5.4운동” 세대는 다양한 양식을 실험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던 모던한 인텔리들이었다. 그들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으며, 사해동포의 이상과 개방적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지향했다. 5.4운동에서 이어진 "개인주의"와 "세계주의"의 이상를 마음에 품고 왕실미는 중공지도부를 향해 “대중에게 문화를 넘겨주고, 대중에게 자유를 주라!”고 주장했다.

 

왕실미의 이 같은 주장은 모택동의 정치비서 진백달의 입장에선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모택동의 문예이론에 따르면, 문학이란 중앙당의 명령에 따르는 혁명 운동의 일환이었다. 군사대결의 전장에서 총으로 싸우는 군인들처럼 문인과 예술가들은 이념투쟁의 전쟁에서 “붓으로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만 한다. 1942년 5월 연암포럼에서 제시된 모택동의 예술이론에 따르면,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에 종속된다.

 

왕실미는 “들에 핀 백합화”(野白合花)란 제목의 사설에서 모택동의 여성편력과 연안 중공지도부의 도덕적 해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심지어 당의 핵심간부들이 대중을 약탈하고 억압한다고 분개한다. 또한 “정치인과 예술인”이란 평론에선 본격적으로 공산당의 지도이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정치인은 정책입안을 맡고, 인간의 정신개조는 예술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요구하는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정풍운동의 문제를 놓고 중공지도부의 간부들과 담화를 나누고 있는 모택동>
http://cpc.people.com.cn/GB/33837/2534403.html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는 그러나 3주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꽤나 광폭한 표현의 자유를 누리던 연안의 인텔리들은 결국엔 중공지도부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모택동의 의지대로 정풍운동을 전개하던 강생과 진백달은 많은 비판적 지식분자 중에서 특히 왕실미를 선택했다. 표현의 과격성 외에도 모택동 사상에 반하는 명백한 이념적 오류가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1942년 5월 27일 중앙연구소의 간부들은 왕실미를 표적 삼아 비판하기 시작한다. 왕실미는 그러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뻣뻣한 자세로 맞서며 용감하게 자기변론을 이어간다. 주변 학생들은 그런 그를 감싸고돌며 오히려 그의 사상에 동조하기도 한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자 중공지도부는 폭압적인 방법으로 “사상탄압”을 개시한다. 왕실미를 추종하는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모욕주고, 왕실미의 주장에 동조하는 작가들은 겁박해 침묵케 한다. 권력으로 논리를 제압하고, 집단의 가치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을 말살한 경우다. 

 

왕실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린다. 스탈린의 비판자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는 스탈린의 “일국(一國)사회주의론”에 맞서 영구혁명론을 제창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였다. 당시 유행했던 “한간탁패”(漢奸托牌)라는 말은 바로 친일부역자와 트로츠키주의자를 동일시하는 성어(成語)다. 왕실미가 트로츠키주의자의 낙인을 받는 순간, 그는 친일부역자,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 세계주의자로 전락하고 만다.   


왕실미는 그럼에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그는 “개인과 당의 이해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서 당당히 공산당의 억압을 고발한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갔노라며 그 어떤 협박도 두렵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또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란 혐의를 전면 부정하면서 오히려 중공지도부가 트로츠키 수법을 쓰고 있다고 조롱한다. 특히 그는 모택동의 정치비서 진백달이야말로 기회주의자며 분파주의자라 비판한다. 그런 왕실미의 격정적인 자기변호는 그러나 허망한 절규로 끝나고 말았다.

1942년 6월 8일-11일 나흘에 걸쳐 왕실미는 1천 명 이상의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비난받는다. 모택동의 정치비서 진백달은 왕실미가 사상적으로 인민을 배반하고, 국가를 저버리고, 마르크시즘과 혁명을 모독한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부르주아계급과 일본제국주의와 국제파시즘의 주구(走狗)라며 공개적으로 모욕한다. 왕실미는 곧바로 당적을 빼앗긴 후 구속되어 “노동교양”의 형벌을 받고 외부와 단절된다. 1947년 장개석의 군대가 연안에 몰려올 때 여전히 수감 중이던 왕실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시 홍콩 언론은 사회부의 수장으로서 안보문제를 담당했던 강생의 소행이라 단정했다. 1962년 모택동은 왕실미의 처형은 하급부서의 잘못이라 말했지만, 정풍운동 당시의 왕실미 비판 그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라 굳게 믿었다.

 

"왕실미, 묻혀버린 작가!"http://www.imdb.com/title/tt6332936/mediaviewer/rm1397570304
"왕실미, 묻혀버린 작가!"http://www.imdb.com/title/tt6332936/mediaviewer/rm1397570304

 

1944년 몇 명의 언론인들이 왕실미를 접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범한 트로츠키주의의 오류를 시인하며, 문학이나 번역작업엔 관심을 끊고 오로지 "정치"에만 매진할 뜻을 비쳤다 한다. 과거의 오류를 모두 교정하고 중국공산주의 혁명에 헌신하겠다는 선언이었을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권력 앞에 항복했음일까? 아니면 중공지도부의 의도대로 그의 "사상"은 "개조"되었을까? 어떤 기자는 그가 정풍의 과정에서 뇌손상을 입었다고 보도했고, 또 어떤 기자는 그가 심각한 정신착란에 시달린다고 보도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치밀한 “사상개조”의 고문을 받으면서 결국엔 빅브라더를 구세주처럼 영접하게 된다. 연안의 소비에트 정부에서 거침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견해를 목소리 높여 씩씩하게 외치던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 왕실미는 정풍운동을 겪고, 또 가혹한 노동교양의 과정을 거치면서 1984의 윈스턴처럼 진심으로 "모택동"을 숭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뿔싸! 자유를 잃은 지식인은 헐벗고 굶주린 노예보다도 나약하거늘! 

 

왕실미가 겪었던 “사상개조”의 비극은 그러나 중국전역에서 앞으로 펼쳐질 공산독재의 실상을 예시하는 자그마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1950년대 내내 더욱 거세게 몰아친 사상개조의 돌풍은 1960년대가 되면 급기야 “문화혁명”의 쓰나미로 폭발하고 만다. (계속)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Merle Goldman, Literary Dissent in Communist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Timothy Cheek, "The Fading of Wild Lilies: Wang Shiwei and Mao Zedong's Yan'an Talks in the First CPCRectification Movement," The Australian Journal of Chinese Affairs, No. 11 (Jan., 1984), pp. 25-58.

Peter J. Seybolt, "Terror and Conformity: Counterespionage Campaigns, Rectification, and Mass Movements,1942-1943," Modern China, Vol. 12, No. 1 (Jan., 1986), pp. 3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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