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38회. "변방의 중국몽": 좌파 주사파의 뿌리"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8回. "邊方의 中國夢": 左派 親中主義의 뿌리"

1. 1970년대 리영희의 “비판적 중국학”이란?

 

리영희는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구루(Guru)다. 현재 50-60대 한국 인텔리들은 젊은 시절 리영희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를 키웠다. 여러 논객들은 그를 “살아있는 신화”로, “한국현대사의 길잡이”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사상의 은사”로, “허구의 시대에 정직하게 살려고 했던 인간의 징표”로 미화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여러 차례 리영희의 저서를 통해 현실에 눈뜨고 가치관을 정립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예컨대 2010년 12월 7일 문재인은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이라 말한 바 있다. 나아가 그는 “우리 세대들에게나 학생운동, 민족운동 한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님 영향이 절대적 이었다”고까지 술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차례 리영희의 저서를 통해 현실에 눈뜨고 가치관을 정립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바로 엄청난 그의 “영향력” 때문에 오늘날 한국사회에 만연한 친중주의의 근원적 뿌리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리영희의 저작을 꼼꼼히 읽어야만 한다. 중국을 무기 삼아 한국을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그는 한국의 좌파들엔 “우상에 도전하는 실천적 이성”이며, 여전히 문대통령을 지배하는 “정신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스스로 1970년대 한국에서 “선악과 흑백의 이분법”을 넘어 “협소한 세계관”과 “왜곡된 가치관”에 찌든 대한민국의 식자층을 위해 “과감하게” “극우반공주의의 우상”을 깨기 위해 모택동에 대한 “이성적인" "재평가”를 시도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과연 그의 자평은 공정한가? 1976년, 모택동 사망 직후, 리영희는 모택동이야말로 “인간의 평등과 인간소외의 해소·극복”을 위한 “인간우선주의”와 “인간중심 사상제일주의”의 새로운 사회주의 이념을 제창한 위대한 혁명의 사상가라 찬양한다. 

 

리영희는 또 모택동의 사망 직후 막을 내린 문화혁명(1966-1976)에 대해서도 “모든 사회분자의 인간애”에 기초한 “웅장한 인류사적 실험”이라며 격찬한다. 나아가 모택동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능가하는 인간제일주의 사상가라고도 평가한다. 심지어 그는 당시 중국을 휩쓸었던 “모택동 인격숭배”(The Mao Cult)마저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스탈린과 달리 모택동은 74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장강(長江)에 들어가 직접 수영을 했으며, “군중에 섞여 경극을 감상”하고, 틈만 나면 “군중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신격화라면 신격화를 달성했다”고 쓰고 있다. (<<우상과 이성>><모택동의 교육사상>, 99-121)

 

리영희는 70년대부터 늘 선악과 흑백의 이분법을 지양하려 한다고 말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면서 사유의 균형을 강조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의 사유는 선악과 흑백의 이분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박정희 독재를 “악”과 “흑”으로, 모택동의 독재를 “선”과 “백”으로 생각했다. 과연 타당한 사고일까? 자유의 억압 정도, 인권탄압의 정도, 인신지배의 구체적 사례 등을 놓고 볼 때, 모택동 독재는 박정희 독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체주의 체제였음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모택동의 전체주의적 통치를 찬양할 필요는 전혀 없다. 

 

권위주의 정권의 비판을 위해 전체주의 정권을 옹호할 수 있을까? 전체주의의 옹호는 그 자체로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승인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리영희는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근간으로 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악이며, 반자본주의 명령경제의 모택동식의 전체주의 독재는 선(善)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어떤 사회과학의 이론을 끌어대도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좌파인텔리의 궤변일 뿐이다. 

 

리영희는 왜 그리도 희대의 독재자 모택동을 존경하고 흠모했을까? 인간본성에 대한 몰이해 때문은 아닌가? 나이브하게 인간의 기본욕구를 죄악시했기 때문은 아닐까? 70년대 리영희는 여러 저서를 통해 물질주의, 배금주의, 기능만능주의, 수정주의 등 현대자본주의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바로 인간의 기본욕망을 부정했기에 그는 너무나 섣불리 실상엔 눈을 가린 채로 문화혁명을 “인간개조혁명”이라 미화할 수 있었다. “인간소외의 극복”을 위한 “웅장한 인류사의 실험”이라 찬양했다.

 

2003년 인터뷰에서 그는 1957년 이후 합동통신의 외신기자로서 “중국혁명의 전 과정”을 “리얼타임”으로 접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모국어만큼이나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세계학계의 견해를 흡수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과연 그렇게 외국어에 능통하고 다양한 정보를 리얼타임으로 접했던 사람이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중국혁명이 초래한 인권유린과 인간파괴의 현실에는 눈을 감았을까? 모택동의 어록과 공산당 기관지의 선전물만을 고지곧대로 믿었기 때문일까? 돌이켜 보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현실에서 도피한 한 좌파인텔리의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다.     

 

2. 서구 좌익인텔리의 거짓과 위선

 

1965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프랑스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모택동을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에서 모택동은 말로에게 중국인구의 5% 정도가 “반혁명분자”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바로 그 5%에는  구체적으로 과거의 지주, 구(舊)부농, 구(舊)자본가, 지식인, 신문기자, 작가, 예술가와 그들의 자녀 등이 들어간다고도 했다. 왜 작가와 예술가가 포함되느냐는 말로의 질문에 모택동은 “일부 작가와예술가는 대개 국민당의 잔재로서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설명한다.

 

1970년대 리영희의 중국관련 저서들은 대한민국 좌익 친중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도 리영희의 가르침에 포박당해 있다. 리영희의 중국학은 그러나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공상적 신화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모택동은 “블랙리스트”를 미리 짜서 비판적 문화·예술인의 입을 막은 것이다. 물론 리영희는 모택동의 바로 그런 “블랙리스팅”(blacklisting)에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불과 5프로의 반혁명 세력을 제거하면 유토피아가 실현된다는 망상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리영희는 바로 그 5프로의 “인민의 적”을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95프로의 인민이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혁명을 통해서만 혁명가로 단련되듯, 반혁명분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만 혁명분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공산주의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중국공산당의 고전적 가르침이다.  뒤집어 보면, 소수의 흉악하고 탐욕스러운 “적폐세력”만 암(癌)을 도려내듯 죄다 처단하면 나머지 국민은 바로 그 적폐청산의 과정을 통해서 “무적폐의 새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망념(妄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1978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기치 아래 전 중국을 실용주의 경제노선으로 이끌고 갔다. 그 결과 연평균 10프로의 경제성장을 무려 30년 가까이 이룩했다. 등소평의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capitalist roader)의 개혁이 성공하면 할수록, 리영희는 입을 굳게 닫고 중국을 외면했다. 우상파괴를 외치던 그의 “이성”은 모택동 우상의 몰락 앞에서 마비된 것일까? 리영희의 “이성”은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밥 떨어진 태엽시계처럼 멈춰 섰다. 그의 “이성”은 모택동이라는 우상을 만들고 사망한 것일까. 

 

1934년 12월 대낮 레닌그라드의 거리에서 당시 볼셰비키당의 영수(領袖)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Kirov, 1886-1934)가 총을 맞고 쓰러지자 스탈린은 그 사건을 빌미로 두 달 내 무려 200명의 당내 반대파를 처형했다. 계속된 공포정은 1936-38년의 “대숙청”으로 이어져 최소 150만 명 이상이 구속되고, 최소 78만 명이 총살되었다. 제정러시아 차르(Tsar) 정권은 1825년에서 1910년 사이 3,932명을 처형했다. 1주일에 한 명 꼴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1937년-38년 사이 하루 평균 1천 명을 학살했다.

 

그런 현실 앞에서도 당시 소련을 방문했던 구미의 좌파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의 위업”을 찬양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였다. 스탈린에 숙청당한 볼셰비키 당원들을 보면서도 그는 스탈린을 찬양했다. 누군가 실무능력이 없는 그들의 “목에 밧줄을 묶어 사다리 밑으로 떨어뜨려야”했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그 당시 소련을 직접 방문했던 유럽 지식인들 중에 스탈린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인물은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 밖에는 없었다. 1930년대 일시적으로 공산주의에 매료됐던 지드는 1936년 실제로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선 <<소련으로부터의 귀환>>이란 소책자를 출간했다. 그 책자에서 지드는 혁명의 부속물로 전락해서 획일적 사유, 문화적 고립, 경제적 궁핍을 강요받는 러시아 민중의 참담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고발했다. 그 때문에 유럽의 좌익세력은 격분하여 “안티-지드”를 부르짖기도 했다.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와 그의 저서 <<소련의로부터의 귀환>>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1905-1983)이 1955년의 역저 <<지식인의 아편>>을 집필한 배경이다. 유럽의 유수한 좌파지식인들은 그렇게 공산주의라는 달콤한 이념의 아편에 중독되어 공산전체주의 정권의 참혹한 실상에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어둠에는 극언의 비판을 일삼다가 스탈린 독재 아래서 죽어간 수수 많은 인민의 고통에 대해선 침묵했던 것이다. 좌파 인텔리겐치아는 왜 늘 그렇게 정신분열적 행위모순, 이율배반적 허위의식, “내로남불”의 자가당착을 범해야만 할까? 유토피아의 이념에 눈이 멀어 인간의 현실을 외면한 결과는 아닌가?

 

3. 중국신화를 해체하기 위해

 

리영희의 “중국 찬양”은 바로 그런 유럽 좌파의 스탈린 찬양을 꼭 빼닮았다. 리영희는 모택동이란 우상을 만들어 신나게 세일즈를 하고 나선 그 우상이 처참하게 망가진 후에도 애프터서비스를 거부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좌파지식인이다. 그에겐 오른쪽 눈 자체가 없다. 바로 그런 “짝눈”의 리영희가 오늘날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절대적 우상이다.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 좌파 친중주의의 밑동이다. 그런 그가 좌파의 우상을 넘어서 지식인의 사표가 되고, 나아가 국민적 우상이 된 듯하자. 사회심리적인 병리현상이자 위기의 징후라면 무리일까?

 

돌이켜 보면, 거듭되는 문재인 정권의 외교참사의 밑바닥엔 편향되고 왜곡된“중국인식”이 놓여 있지 않나 싶다. 문대통령의 왜곡된 중국인식은 그 시대 운동권 세력을 지배했던 그릇된 역사인식에 기인한다. 리영희의 이른바“비판적 중국학”은 “현대중국의 아픈 역사”를 외면하고 역사의 실상을 왜곡한 맹목적 중국 찬양의 기록일 뿐이다. 오늘 한국좌파의 구루 리영희가 만든 공상적 중국신화를 깨기 위해서 우리는 모택동의 마지막 반란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참혹한 실상을 깊이 깊이 들여야 봐야만 한다. 

 

1966년 북경에서 사용됐던 포스터. 문화혁명 당시 적인(敵人), 곧 인민의 적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준다. (Jean Vincent/AFP/Getty Images) https://www.theepochtimes.com/china-cultural-revolution-personal-memoir_1506297.html
1966년 북경에서 사용됐던 포스터. 문화혁명 당시 적인(敵人), 곧 인민의 적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준다.
(Jean Vincent/AFP/Getty Images) https://www.theepochtimes.com/china-cultural-revolution-personal-memoir_1506297.html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관련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