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인류사최대의 기근 (2): "정치가 인민을 굶겨죽이다!"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人類史 最大의 饑饉”(2)

 

대약진은 대기근으로 귀결되었다. 1958년-1962년 중국 전역에서 3천6백만에서 4천5백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야만 했을까?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의 와중에 대체 중공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던가?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Amartia Sen, 1933)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말한다. <<묘비>>의 저자 양계승은 1950-60년대 중국의 기근은 정치적 억압에서 비롯된 인재라 단정한다. 1950년대 중국의 전체주의 정치문화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대기근의 참사를 초래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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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투(批鬪), 광기의 인민재판

 

1967년 7월 말, 무더운 날이었다. 북경항공대학(北京航空航天大學)에서 대규모의 홍위병(紅衛兵) 대회가 열렸다. 구름처럼 몰려온 군중들 앞에 70세의 노인이 한 명 끌려 나왔다. 등 뒤로 양손이 묶인 노인의 목에는 널빤지가 걸려 있었다. 널빤지에 붙은 종이엔 휘갈겨 쓴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삼반분자팽덕회(三反分子彭德懷).” 삼반(三反)이란, “反공산당, 反사회주의, 反모택동사상”이라는 의미다.

 

팽덕회(彭德懷, 1898-1974, Peng Dehuai)는 1959년까지 중공중앙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중국현대사의 걸출한 장군(將軍)이다. 그는 중일전쟁 당시 중국서북전선을 수호하고, 섬서지역에서 국민당의 공격을 막아 모택동을 보위했다. 또 국공내전 당시엔 섬서지역에서 국민당을 패주시킨 후 신강 지역까지 확보하는 무공까지 세운 바 있다. 한국전쟁 당시엔 중공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팽덕회는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의 휴전협정에 직접 서명했던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병사들 사이에선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던 인민해방군의 대원수였다.

 

그런 팽덕회가 홍위병 집회에 붙들려 나와 수만 명 군중 앞에서 반혁명분자의 낙인을 받고 집단폭행을 당했다. 홍위병들은 겁먹은 멍한 얼굴로 군중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그의 머리를 잡고 바닥 쪽으로 꺾었다. 홍위병들은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주자파, 반동분자, 배신자, 반역자, 반혁명분자, 수정주의자 등등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잔혹한 모욕의 언사를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집회에 모인 군중들은 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모욕하고 인격을 모독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대는 잔혹한 인격살해였다. 

 

홍위병 집회에 소환되어 "비투"당하는 팽덕회
홍위병 집회에 소환되어 "비투"당하는 팽덕회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집회에서 일어났던 전형적인 비투(批鬪)였다. 비투란 적인(敵人)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말이 좋아 비투일 뿐, 실상은 광기의 집단폭행일 뿐이었다. 비투 집회에서 홍위병들은 “반혁명분자들”을 무릎 굻리고, 욕설을 퍼붓고, 자백을 강요하다가 감정이 격앙되면, 머리털 뜯고, 뺨때리고, 침 뱉고, 주먹질하고, 발길질하고, 몽둥이질까지 해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천 명, 수만의 군중들은 비투가 절정에 오르면 가슴이 터지도록 혁명의 구호를 외치며 형장에 넘어진 죄인을 향해 증오를 쏟아냈다. 그런 무지몽매한 집단폭력을 견디지 못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이후 충격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희생자도 많았다.  

 

반혁명분자들에겐 반론의 기회도, 항변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불구속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묵비권 보장, 공정재판의 권리 등등 최소한의 피의자 인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야만적인 인민재판이었다. 바로 그 현장에 참석했던 비투의 과정을 목격한 인민해방군 광주(廣州)지구 사령관 황영승(黃永勝. 1910-1983)은 귀가해서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너무나 잔혹하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기 있는가. 수십 년 함께 혁명에 헌신했던 오랜 동지들이다. 잘못을 했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 그날 팽덕회에 가해진 폭력은 그러나 그간 그가 겪어왔던 온갖 수모와 고난에 비하면 그리 가혹한 형벌도 아니었다. 

 

2. 노병의 고난(苦難)

 

1966년 12월 중엽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이 이끄는 문혁의 지도부는 이미 팽덕회 체포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북경항공대의 “북항홍기(北航紅旗)”와 지질학원의 “동방홍(東方紅),” 두 개의 홍위병 조직에는 곧 팽덕회 체포령을 하달됐다. 1959년 모택동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약진운동의 참상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직에서 파면된 팽덕회는 6년 간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1965년에야 당시 경제개혁을 주도하던 유소기와 등소평의 배려로 중국 서남지역의 군수산업 개발의 책임을 맡고 사천성의 성도로 파견된다. 당시 그에게 부여된 직책은 서남 삼선(三線) 건설위원회의 제3부주임이었다.  

 

1966년 12월 25일 새벽 2, 3시 경으로 짐작된다. 이 두 개의 홍위병 조직은 팽덕회를 체포하기 위해 사천(四川)성 성도(成都)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 들이닥쳤다. 먼저 도착해 팽덕회를 포박한 북항홍기의 멤버들은 그를 끌고 성도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역사(驛舍)의 골방에 가뒀다. 한발 늦은 동방홍의 멤버들은 신경질적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모두 부숴버리고 곧 기차역으로 향했다. 팽덕회의 보디가드들이 새벽 4시에 현장에 갔을 땐 이미 팽덕회는 끌려간 후였다.

 

주은래는 홍위병들에게 팽덕회를 군대에 인수하라 지시했다. 혁명동지의 옛정을 생각해 팽덕회가 홍위병에 비투당하는 사태만은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주은래의 명령을 받자 홍위병은 오히려 군대에 팽덕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곧바로 화물트럭에 그를 태우고 북경으로 향해갔다. 팽덕회를 북경방위대에 인도하지 않기 위해 홍위병들은 그의 양손을 묶어서 짐승 부리듯 끌고 다녔다. 이듬해 (1967년) 1월부터 홍위병들은 팽덕회에 대한 본격적인 비투를 개시했다. 포승줄로 양손을 등뒤로 결박하고, 기다란 흰색 모자를 씌우고, 목에는 죄명이 열거된 널빤지를 걸었다. 수천 명의 홍위병들 팽덕회의 면상을 향해 증오와 모멸의 욕설을 쏟아부었다.

 

뚜렷한 증거도, 그럴싸한 근거도 없이 홍위병들은 팽덕회를 반혁명분자로 단정하고 인민재판을 이어갔다. 그가 공산당을 배신하고,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모택동사상을 폄훼했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팽덕회에게 스스로 공산당에 잠입한 대군벌이며, 야심을 품고 전복의 음모를 꾸몄음을 자백하라 윽박지르고 강요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가혹한 고문에 육신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 백년노장의 무골 팽덕회는 그러나 끝내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석 달 넘게 홍위병의 집단폭력에 시달린 팽덕회는 1967년 4월에야 군부대의 영창에 감금되었다. 그의 몸뚱아리는 골방에 짐짝처럼 패대기쳐졌다. 몸도 꼼짝달싹할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 갇힌 그에겐 한 모금 물도 주어지지 않았다. 화장실 이용도 허락되지 않았다. 팽덕회는 그러나 초인의 힘을 발휘해 거짓자백을 거부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얼마 후 모택동의 특명 아래 인민해방군 내에 특별수사대가 조직되었다. 특별수사대는 살인적인 고문과 심문(審問)을 이어간다. 심문의 과정에선 어김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에 이어 몽둥이찜질이 가해졌다. 팽덕회는 갈비뼈가 부러져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완강히 맞섰다. 팽덕회에 대한 심문은 보통 2시간씩 다섯 번이나 교대되며 10시간 동안 전개되었다. 1930년대 스탈린 대숙청 때 소련의 정치경찰이 개발한 고문방법이었다. 팽덕회는 모두 130회의 심문을 당한다. 이후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을 장악하기 위한 모택동의 전술이라지만, 팽덕회에 대한 모택동 개인의 원한이 아니고선 이해될 수 없는 폭행이었다.

 

비투당하는 팽덕회
홍위병들에 의해 모욕당하는 팽덕회

 

 

3.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그대

 

1967년 7월 20일, 호북성의 무한에서는 과격세력의 군부장악에 반대하는 50만의 백만웅사(百万雄師) 조직이 무장시위를 벌린다. 노동자 및 홍위병을 주로하는 과격세력은 공인총부(工人總部)를 결성해서 강렬하게 맞선다. 급기야 두 집단은 무장충돌을 일으키고, 곧바로 투입된 병력은 무차별 진압을 개시한다. 호북성 전체 18만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이른바 7.20(七.二零)사건이었다. 무한에서만 600명 이상이 학살되고 6만8천 명이 고문당하거나 불구가 되는 참극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호북군부의 사령관 진재도(陳再道, 1909-1993, Chen Zaidao)의 항명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택동은 군부장악의 필요성을 재차 절감한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1967년 7월 말 팽덕회에 대한 홍위병의 비투 집회가 승인됐다. 인민일보를 위시한 관영매체는 일제히 팽덕회를 군대에 똬리 튼 주자파의 우두머리로 지목했다. 비투를 당하고 초죽음에 내몰렸던 팽덕회는 한 달이 못돼 다시금 비투 집회에 소환되었다. 이번 집회는 인민해방군에서 주최했다. 1967년 8월 말, 팽덕회의 비투 집회에 동원된 4만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북경 스타디움을 꽉 메우고 있었다. 단상에 무릎 꿇린 팽덕회 앞에 임표(林彪, 1907-1971, Lin Biao)가 나타났다. 

 

문화혁명 당시 임표는 모택동 인격숭배운동을 직접 관장하던 중공정부 제2인자로 급부상했다. 1950년대 중국 군부 내부의 서열로 보면, 임표의 지위는 주덕(朱德, 1886-1976, Zhu De)과 팽덕회 다음이었다. 1959년 팽덕회가 해임된 후 임표는 그를 대신해 국방부 장관의 지위에 올랐다. 임표는 모택동이 인민해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키운 군부의 키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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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당시 임표는 모택동인격숭배를 주도했으나 1971년 소련으로 망명 중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모살의 배후가 모택동이라 보는 학자들이 다수다. 

"모주석의 혁명노선을 따라 승리하고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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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신경쇄약과 탈수증에 시달리던 임표는 정치집회에서 군중의 함성을 들으면 순간적으로 마약에 취한 듯 생기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병사들에 붙잡혀 푹 고개를 숙인 팽덕회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초췌한 몰골로 형장에 무릎 꿀린 팽덕회를 향해 임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팽덕회는 스스로의 야심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붙어서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다. 이런 우익기회주의자는 철저히 정체를 까발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개혁을 이룰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이미 팽덕회의 문제점은 다 드러났었다. 그 당시 그 문제를 철저히 밝혀낸 것은 우리의 위대한 승리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 내부에 도사리던 큰 위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임표가 8년 전의 “여산회의”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중공지도부는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강서성의 명승지 여산에서 한 달에 걸친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8월 2일부터는 다시 16일에 걸쳐 제8회 중앙위 8차 전체회의를 이어갔다. 대약진운동이 개시되어 1년 넘게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여산회의의 첫째 의제는 대약진운동의 “경험을 총결산해서 오류를 교정한다”였다.

 

대규모집산화와 강제노동으로 당시의 중국의 인민은 극한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식량배급이 끊기면서 많은 지방에선 이미 수많은 아사자가 속출했건만, 관영언론은 날마다 장밋빛 가짜뉴스만 보도하고 있었다. 1958년 가을 팽덕회는 농촌의 참상을 직접 살피기 위해 지방 곳곳을 둘러본다. 1958년 10월, 감숙성의 곳곳을 둘러보면서 팽덕회는 농민들이 철강생산에 동원되어 논밭의 곡식을 손도 못보고 방치해뒀음을 알게 된다. 철강 생산의 원재료 확보를 위해 간부들은 농가의 밥그릇, 숟가락까지 각출했다. 오두막의 목재는 물론 과수원의 원목들까지 싹 쓸어갔다. “토법연강”(土法煉鋼, 민강제련법)의 용광로에 땔감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팽덕회는 고통 받는 농민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신문과 라디오의 선전과는 판이하게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고 있었다.

 

1958년 말 그는 한편의 시를 써서 당시의 상황을 고발한다.

 

곡식이 땅위에 흩어져있는데,

감자 이파리는 시들어가네.

청장년은 모두 쇠를 만들러 나가고

추수는 아이와 늙은 아낙들만이, 

이듬해 나날을 어찌 보낼까?

인민을 위해 이 몸이 애원하리라!

谷撒地,薯叶枯,青壮炼铁去,收禾童与姑,

来年的日子怎么过?我为人民鼓与呼!

 

모택동은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여산으로 향하면서도 그는 유토피아의 단꿈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대약진운동은 “위대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문제가 비록 적지 않지만, 앞길은 매우 밝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택동을 보면서 팽덕회는 더더욱 강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1959년 7월의 여산회의야 말로 바로 대약진의 광기를 막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모택동의 겸직공업비서 이예(李鋭, 1917- Li Rui)의 기록에 의하면, 1959년 7월 2일 개시된 여산회의는 신선놀음을 방불케 했다. “낮에는 회의를 하다 산을 즐기고 밤에는 산보를 하면서 댄스파티를 벌였다.” 모택동은 개회사에서 청중을 향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허심탄회하게 대약진운동의 오류와 모순점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고, 해결책을 논의하라 지시했다. 1940년대 연안에서 정풍운동을 시작할 때도 모택동은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하라 권했다. 1956년 백화제방운동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렇게 모택동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후, 진짜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벌했다. 동굴 속의 뱀을 끌어내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방법이었다. 그런 모택동의 행적을 잘 알기에 감히 아무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오로지 팽덕회만이 정면에서 모택동에 맞섰다.

  

팽덕회는 1950년대 중후반 들어서면서 모택동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1956년 중공지도부는 바로 그런 팽덕회의 제안에 따라 중국공산당 헌장 전문에서 “모택동사상”이란 단어의 삭제하기도 했다. 일화에 따르면, 팽덕회는 "모주석만세!"를 외치는 병사들에겐 사람이 고작 100년도 못사는데 어떻게 만년을 살란 말인가 말한 적도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끼며"라는 모택동이 직접 만든 대약진의 구호에 대해서도 그는 그런 섣부른 조급증이 재앙을 몰고온다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마지막 기회를 얻은 팽덕회는 여산회의 2일차부터 과감한 발언을 이어갔다.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모택동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열흘 넘게 격론을 이어가던 팽덕회는 1959년 7월 14일 마침내 모택동주석에게 진실을 알리는 충심의 만언서(萬言書)를 직접 써서 올리는데······. (계속)

 

 

1959년 여산회의. 이 대회에서 팽덕회는 대약진운동의 참상을 모택동에 직언한다.
1959년 7월 여산회의 장면. 이 대회에서 팽덕회는 대약진운동의 참상을 고발한다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대학 교수)

 

 

<참고문헌>

 

楊繼繩, 墓碑 : 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香港 : 天地圖書有限公司, 2008).

王焰主编,《彭德怀年谱》(北京: 人民出版社出版,1998)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ürgen Domes, Peng Te-huai: The Man and the Image (Stanford Uniersity Press, 1985).

Yang Jisheng, Tombstone: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3)

Frank Dikötter,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loomsbury, 2011)

黄春光, “黄永胜参加彭德怀批斗会感慨:太残酷了怎能这样,”

http://news.ifeng.com/history/zhongguoxiandaishi/detail_2013_09/26/29894863_0.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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