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7회. “土地改革殘酷史!”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공산당이 점령한 “신(新)해방지”에선 급속하게 공산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당시 중국 전역의 농촌에서 대략 10프로의 농민이 지주(地主) 혹은 부농(富農)이라 단정했다. 토지개혁은 바로 그 지주와 부농 소유의 토지를 압류해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에 재분배하는 과정이었다. 중국정부의 선전에 의하면, 토지개혁은 지주, 한간(漢奸, 친일매국노), 국민당부역자, 토호 등등 소수의 적인(敵人)을 제거하고 다수의 인민(人民)을 해방시킨 “위대한 혁명”이다. 그러나 과연 중공 지도하의 토지개혁이 그렇게 순조롭고 아름다운 과정이었을까?

 

공산당 간부가 농민들에게 "토지개혁안"을 설명하는 장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_man_reads_the_Land_Reform_Law_of_PRC.jpg

 

최신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토지개혁은 무려 3백만-5백만의 인명(대부분 중·소지주)을 앗아간 대규모 학살극을 수반했다. 그런 과정을 겪었음에도 대다수 농민의 실생활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됐을 뿐이었다. 재산을 모으면 곧 지주나 부농으로 몰렸기 때문에 농민들은 정성들여 농사를 지을 까닭이 없었다. 그 때문에 토지생산력은 전반적으로 오히려 저하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이웃으로 공생하던 촌민들은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전시(戰時) 총동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짚어가며 "토지개혁 대학살극"의 실상을 살펴 보자. 중국현대사에서 문화혁명의 광기는 이미 1940년대 토지개혁 때부터 시작됐으므로. 

 

 

1. 만주 벌판의 농민들

 

1948년 여름 장춘포위전이 전개될 당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만주지역 대부분은 공군에 장악되었다. 인민해방군은 마을을 접수하면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지주와 부농 소유의 토지를 압류해서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이었다. 인민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산당은 온 마을 사람들을 불어 모아 놓고 지주, 부농, 한간 등등 이른바 "인민의 적"에 대한 "공개재판"을 열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으레 봉건지주제의 철폐를 부르짖었지만, 농민들은 계급투쟁이나 토지분배 따위엔 큰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민들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합법정부라고 여기고 있었고, 전통의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앙당의 지시를 따라 공산간부들은 무리하게 토지개혁을 감행하였는데······.

 

지주와 부농을 추려 봐야 일반 농민과 담벼락을 맞댄 이웃사람들에 불과했다. 그들 소유의 토지 역시 일반 농민이 가진 땅의 두 배도 못되는 정도였다. 중국 및 구미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많은 지역엔 마르크스 이론에 부합하는 지주계급 자체가 부재(不在)했다. “해방”이전 중국 농촌에서 지주가 점유한 토지는 총토지 면적의 40프로에 불과했다. 그 토지의 25프로는 학교, 사묘(祠廟), 종족전(宗族田) 등등의 공전(公田)으로 개인소유지도 아니었다. 농촌의 빈농들도 2-3무(畝, 1무=667평방미터) 정도의 토지는 갖고 있었고, 토지가 전무한 농민은 기껏 1-2프로 정도였다. 그럭저럭 땅을 부쳐 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향촌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런 농촌 마을에서 “지주”를 찾아내 죄다 척결하려 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더군다나 중공지도부가 이미 인구의 10프로를 “인민의 적”이라 예단해 놓은 상황에서······.

 

지주 등 "인민의 적"에 대한 공개재판의 한 장면. http://www.alamy.com/stock-photo-chinese-farmer-kneeling-at-gunpoint-before-a-court-enforcing-communist-50020291.html

 

내몽고 적봉(赤峰)시에는 “하늘마을”(乾村)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부락이 있다. 이 하늘마을에는 산동(山東) 지방 이주민 42가구가 1300무(畝, 대략 87헥타르)의 토지를 일구며 살고 있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종결된 후, 만주 지역의 각 마을로 침투한 중공세력은 날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착취,” “계급투쟁” 등등 농민들에겐 생경한 혁명이론을 설파했다. “봉건지주제”의 피해자인 농민들을 일깨워 계급혁명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농민들은 지조(地租=지세地稅) 자체를 착취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토지개혁 자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늘마을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될 당시 제일 먼저 공산당에 가입했던 대옥당(戴玉堂)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에 지주와는 투쟁할 필요도 없었어. 보통 재산이 삼대(三代)를 못 가서 다시 가난해졌으니깐. 지주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알아? 8, 9할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번 재산이야. 우리 마을의 지주나 부농은 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야, 하루아침에 요행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고. 우리 대씨(戴氏)집안을 보면, 사(四)형제가 남의 땅 부치면서 뼈 빠지게 일을 했어. 그렇게 사 모은 땅 때문에 토지개혁 때는 지주나 부농으로 분류됐던 거지.”

 

농민들 사이의 계급투쟁이 조장되면서 결국 하늘마을의 42가호(家戶) 중에서 40프로를 넘는 18가호가 “투쟁호(鬪爭戶)”로 분류되었다. 투쟁호란 인민에 적대적인 가호를 의미하는데, 지주 4가호, 부농 6가호, 중농 및 빈농이 8가호였다. 하늘마을의 지주는 모두 타인을 고용하는 고공(雇工)의 방법으로 농지를 경영했다. 타인에게 직접 토지를 임대한 경우는 아예 없었다. 실제로 내몽고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광활한 대지에서 많은 농민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지주나 부농으로 분류되었다. 지주나 부농은 곧 청산(淸算)대상이 되었다. 불과 1-2무의 땅을 가진 사람도 지주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단 1무의 땅이라도 임대를 하면 곧 지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 대옥곤(戴玉坤)씨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에서 지주 색출은 실로 집요하고도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구원(舊怨)이 있으면 지주로 몰려 숙청되기도 했다. 군중집회에서 누군가 한 사람을 지주 혹은 한간(漢奸)이라 지목하기만 해도 처형되기 십상이었다. 다른 마을의 “적극분자”가 원정을 와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빈번했다. 투쟁집회에선 폭력이 난무했다. 매달거나 얼리거나 불로 지지거나 질질 바닥에 끌고 다니기도 했다. 집회에선 늘 그렇게 사람들을 잡아와선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고, 지주와 부농을 그 앞에 무릎 꿇려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하게 했다.

 

1940-50년대 중국의 "공개재판"의 장면 (http://www.alamy.com/stock-photo-chinese-farmer-kneeling-at-gunpoint-before-a-court-enforcing-communist-50020291.html)

 

대옥곤이 집회를 피해 도망을 간 후, 그의 부인은 짐승이 끄는 수레에 묶인 채 흙길에서 질질 끌려 다녀야 했다. 그 밖에도 여자들을 달군 쇠로 지지거나 속옷까지 다 벗기고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읍내 소학교의 교사들이 불려 와서 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고 떠받드는 인격자까지 지주로 몰려 숙청되기도 했다. 당시 촌민들 사이에선 “팔로군(八路軍=인민해방군)이 온 후엔 만주국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네!”란 얘기가 돌 정도였다. (이상 내용은 중국 인민대학 고왕릉[高王凌] 교수의 아래 논문 참조).

 

중국혁명기 농촌 사회의 변화를 세심하게 기록한 <<번신(翻身)>>의 저자 윌리엄 힌턴(William Hinton)은 “투쟁을 심화시키려면 타격의 범위를 넓혀야만 한다!”는 말을 적고 있다. 당시의 토지개혁은 국공내전과 맞물려 전개된 전시의 혁명이었다. 공군의 입장에선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대민동원력을 제고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토지를 받은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전(支前=전방부대 지원) 민공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토지배분의 수혜자에 요구되는 강제노역의 의무였다. 

 

지난 회에 살펴 본대로 1948년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65일간 회해전역에는 “543만 민공”이 동원됐다 한다. 그 민공은 대부분 중원지방 시골 마을에서 땅을 부쳐 먹고 살던 농민들이었다. 그 농민들이 대체 왜, 무엇을 바라고 전쟁에 나갔는가? 중공은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을까? 잠자는 인민의 계급의식을 고취해서? 총구를 들이대고 윽박질러서? 토지재분배의 반대급부로? 

 

2. 중원(中原)의 계급투쟁

 

1947년 8월, 만주에서 국공의 각축전이 피 말리게 전개될 때, 유백승(劉伯承, 1892-1986)과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이 이끄는 중원야전군(中原野戰軍)은 회수(淮水) 남쪽 대별산(大別山) 지구로 진출했다. 이때부터 회해전역(淮海戰役)이 발발하는 1948년 11월까지 1년 3개월에 걸쳐 유백승과 등소평은 물산이 풍부한 그 지역에서 보급망을 구축하고 대민동원을 시작한다. 당시 중원야전사령부의 정치위원(政治委員)이었던 등소평은 “식량과 물자의 보급은 군중이 일어난 후에야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엄격한 감시 및 혹독한 징벌로 대규모의 농민들을 조직해 전장에 직접 투입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국공내전 당시 등소평의 모습 (http://www.chinadaily.com.cn/china/2014-08/21/content_18462132_7.htm)

 

유백승과 등소평은 대별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며 국민당과의 게릴라 전투를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중원야전군은 보급의 부족으로 큰 곤란에 직면하는데, “봉건지주의 지배를 받는 보통 농민들”은 공산당과 격리되어 있다. 등소평은 “군중을 발동시켜 토호세력을 타격하는” 이른바 “보급투쟁”을 이어간다. 쉽게 말해, 게릴라 전투로 점령지를 넓히고 지역 주민을 복속시켜 군수물자와 식량의 지속적 보급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야전군은 가는 곳마다 토호를 처단하고 철저한 재산의 몰수와 분배를 이어갔다. 

 

지금부터 당시 현장에서 대민동원의 총책을 맡았던 그의 증언에 직접 귀 기울여 보자. 등소평은 토호(土豪)세력을 물리치고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좌(左)의 오류”를 분석한다. “우리는 왜 오류를 범했는가? 객관적 상황을 무시한 채 주관적 희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반년 내에 중원의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년 안에 토지개혁을 완성하기 위해 총구로 중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군중의 의견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다음 세 가지의 사례를 들어서 계급투쟁의 극단적 양상을 지적한다.

 

1948년 토지개혁 선전 포스터
1948년 토지개혁 선전 포스터 (https://chineseposters.net/themes/land-reform.php)

 

좌의 오류 #1: 공군(共軍)은 한 지방에서 토비(土匪) 우두머리를 생포했다. 이에 중원야전군은 군중집회를 통한 공개재판을 계획했다. 계급투쟁을 통해 군중을 발동(發動)시키는 절차였다. 군중은 그러나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정부가 직접 판결을 내리고 총살할 것을 요구했다. 군은 그러나 군중의 의견을 무시하고 어렵사리 20명의 피해자를 모아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서 한 노인이 토비에게 “넌 내 소를 끌고 갔다”고 소리쳤고, 한 노파가 “넌 내 아들을 죽였어!”하고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나서지 않았기에 결국 공군(共軍)은 토비를 현장에서 즉결로 총살시켰다. 그런데 그날 밤 노파의 전 가족이 토비들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좌의 오류 #2: 한 마을에서 토지분배를 하는데, 한 부유한 중농(中農) 집안을 부농(富農)으로 분류했다. 이 집안의 착취정도는 매우 미약한 편이었고, 뜨내기 일꾼을 이따금 고용했을 뿐인데다 사람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았다. 원한을 품은 사람도 없는데다 모두가 그 집안을 좋게 보았다. 군중은 그 집안을 보호하려 했지만, 군인들은 강제로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에 반감만 갖게 되었다. 이 사례는 공군(共軍)이 중농(中農)의 이익을 침해해서 군중의 신망을 잃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좌의 오류 #3: 안휘(安徽)성 서부의 한 고장에서 군중이 수 명의 지주를 죽여 달라 요구했다. 공군(共軍)은 군중의 의견에 따라 그들을 죽였다. 그러자 군중은 보복이 두려워 또 하나의 명단을 내밀며 모두 죽여 달라 했다. 공군(共軍)은 그 또한 군중의 의견이라 여기고 모두 잡아서 죽여 버렸다. 명단 속의 인물들을 다 죽이고 나자 후환을 두려워 한 군중은 더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왔다. 공군(共軍)은 다시 군중의 의견을 따라 그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이다 보니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군중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모두 먼 곳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200여명의 사람들을 도륙한 꼴이 되었다. 등소평은 탄식했다. “열두 마을에서 우리가 쌓아올린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https://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struggle-session-in-a-village-a-landlord-is-publically-news-photo/183976861#china-early-1950s-struggle-session-in-a-village-a-landlord-is-by-picture-id183976861

 

이상 세 가지는 공군 점령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다. “좌의 오류”에 관한 등소평의 자술(自述)이란 점에서 공군(共軍) 점령지의 대민조직 및 대민관리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史料)이다. 1927년 8월 7일 모택동은 당시 공산당의 온건노선을 우경(右傾)이라 비판하는 일군의 비판자들에게 말했다. “군사를 각별히 주의해라! 권력이 총구에서 나옴을 알아야 할 터!”(要非常注意军事,须知政权是由枪杆子中取得的)." 모택동의 명언을 뒤집어서 등소평은 말했다. “총이 권력을 갖다 준다는 생각만으로 우리는 중원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바로 거기서 인민을 죽음에 몰아넣는 “좌의 오류”가 발생했다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3. “인민”과 “인민의 적”

 

오늘날 중국의 고교과정 정치교과서에 따르면, 인간(人間)이 다 인민(人民)은 아니다. 인간은 인민과 적인(敵人)으로 구분된다. 인민이란 역사의 정도(正道)를 걷는 다수대중을 의미한다. 반면 적인이란 역사의 정도(正道)에서 이탈한 적대세력이다. 공산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절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적대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인간사회에 암세포처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적대세력”이 따로 있다는 발상이다. 모택동은 1925년 “중국의 사회 각 계급 분석”이란 시론에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적과 친구”를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운동의 성공을 위해선 진정한 적인(敵人)을 정조준해서 일침견혈(一針見血)의 공격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국공내전 당시 토지개혁 과정에서 3백만-5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지주, 한간, 토호, 부농 등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어 학살당했다.

 

https://uyghuramerican.org/sites/default/files/field/image/5b9ae5b9811286783c0060f9dbc856b6.jpg

 

지금껏 살펴 본 바대로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의 집권 과정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 나라다. 인민해방군은 장춘에선 5개월간의 잔혹한 포위전으로 수십 만 인민을 아사시켰고, 수천만의 유민을 낳았으며, 중원지방에선 수백만 농민들을 징발해 전투에 투입시켰다. 아울러 토지개혁의 명분 아래 3백만-5백만의 사람들이 항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인민재판을 통해 도륙되었다. 국공내전의 감춰진 역사를 파헤칠수록 중국공산당의 집권과정의 도덕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중국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소수의 반체제인사들은 억압당하고 있다.

 

모택동이 중국에서 피의 숙청을 수반한 잔인한 토지개혁을 진행시킬 때, 장개석은 대만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한국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개혁을 완성했다. 특히 대한민국 건국헌법 제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에 따라 1949년 6월 농지를 재분배하는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그 결과 농민은 경작지 소출량에서 연 30%씩 5년 동안만 지주에게 지불하면 그 토지의 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매해 생산량의 50%이상을 지주에 바치던 농부는 30%씩 5년 만 상납함으로써 지대(地代)에서 해방된 셈이다.

 

1950년 10월 16일자 타임지 표지 속의 이승만 대통령
1950년 10월 16일자 타임지 표지 속의 이승만 대통령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해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반면 중국의 공산혁명은 흠모하고 미화하기 일쑤다. 중공치하 토지개혁의 폭력과 광기를 직시한다면, 과연 그런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견지할 수 있을까? 이념의 미망(迷妄)은 역사적 무지에서 비롯된다. 중국 공산화의 생생한 역사가 일깨우는 진실이다.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劉統, <<中原解放戰爭紀實>> (人民出版社: 2003), pp. 304-324.

高王凌, 劉洋, “土改的極端化” <<21世紀雙月刊>>總第111期 (2009.2), pp.36-47. 

教育部普通高中思想政治课编著,普通高中课程标准试验教科书:政治生活2 (人民教育出版社, 2010) 

이영훈, <<대한민국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기파랑, 2013), pp. 175-178.

William Hinton, Fanshen: A Documentary of Revolution in a Chinese Village (Monthly Review Press, 1972).

John L. Buck, Land Utilization in China: A Study of 16,786 Farms in 168 Localities, and 38,256 Farm Families in Twenty-two Provinces in China, 1929-1933.

Steven I. Levine, Anvil of Victory: The Communist Revolution in Manchuria, 1945-1948 (Columbia University, 1987).

Gao Wangling and Liu Yang, “On a Slippery Roof: Chinese Farmers and the Complex Agenda of Land Reform,” Études rurales, No. 179 (Jan. - Jun., 2007), pp. 19-34.

Martin C. Yang, A Chinese Village: Taitou, Shandong Provinc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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