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8회. “인민민주독재의 비극”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8회. “인민민주독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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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8. 人民民主獨裁悲劇"

 

1. 문혁(文革) 기원

 

우리는 “문혁”을 탐구하기 위해 부득이 1940년대 국공내전까지 거슬러 올라야만 했나?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내전의 승리를 통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중국헌법에 따르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모택동 영도 아래 중국의 인민들이 장시간의 무장 투쟁을 통해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무너뜨린” 위대한 “신민주주의혁명”이다. 헌법 전문(前文, 서언) “중국의 인민이 국가의 독립, 민족해방 민주자유를 위해 간단없이 영웅적으로 분투하여”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인민해방군이 중국을 장악했기 때문에 “공산혁명”의 완성은 이제 지상명령(至上命令) 되었다. 1966 시작된 문화혁명도 실은 1949 건국 이념에 따른 공산주의 재건운동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수백만의 “적대세력”을 제거했으며, 반우파운동(反右派運動, 1957-59)으로 수십만 비판적 지식인들을 탄압했고, 바로 이어서 대약진운동(1958-1962)의 실패로 수천 만이 아사하는 대기근을 일으켰다. 그런 실정 후에도 모택동은 10년간의 문화혁명으로 중국 인민들을 혁명의 광기 속에 몰아넣었다. 절대군주로서 그의 권력은 국공내전의 승리에서 나왔다. 문혁을 탐구하기 위해선 모든 과정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모택동.
https://news.stanford.edu/2015/05/06/mao-walder-book-050615/

 

지금껏 살펴 바대로 공산당의 집권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인민해방군은 장춘에선 5개월간의 잔혹한 포위전으로 수십 인민을 학살했고, 수천만의 유민을 낳았으며, 중원지방에선 수백만 농민들을 징발해 전투에 투입했다. (공산당정부야 오늘날도 “혁명군중”의 자발적 참여라 선전하지만, 강제노역으로 봐야 한다. 부쳐 먹고 사는 수백만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목숨 걸고 잔혹한 전면전에 참여할 이유도,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국공내전의 감춰진 역사를 파헤칠수록 중국공산당 집권과정의 도덕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이제 1949 10 1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탐구해 보자. 참혹한 전쟁 끝에 수많은 희생을 딛고 건설된 새로운 나라는 과연 어떤 국가였을까? 문혁의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1950년대의 현실을 되돌아 봐야 한다. 

 

2. “민주집중제”와 “인민민주독재”

 

1949 4 20 인민해방군은 장강(長江) 건너 비옥한 동남부 지역으로 진격한다. 내전 막바지에서 중공의 승리가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다. 1949 6 15, 모택동은 북평(北平=북경)에서 공산당 지도 아래 신정치협상 주비위(籌備委) 결성한다. 주비위에는 중국공산당, 국민당혁명위원회, 민주동맹, 민주건국회, 무당파 민주인사, 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인민구국회, 중화전국학생연합회, 국내소수민족, 해외화교민주인사 등등 23 단체의 134 대표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을 그린다.

 

제1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 https://zh.wikipedia.org/wiki/

 

3개월 , 모택동은 1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 줄여서 인민정협 혹은 정협)”를 개최한다. 정협은 46 단체 662명의 대표가 참가해 새로 건립할 나라의 얼개를 짜는 절차이다. 회의를 통해 나라의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紅旗), 수도는 북평(北平=북경)으로 정해진다. 중국은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petty bourgeoisie) 민족자산계급(national bourgeoisie) 연대를 통해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五星紅旗)에서 큰 별은 공산당을, 나머지 작은 별 네 개는 바로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상징한다. 

 

1949 9 27, 정협은 “공동강령”을 채택하고, 중앙인민정부조직법을 반포한다. 조직법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와 “인민민주전정(專政=독재)”을 기본원칙으로 한다개혁개방이후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경제의 기본원리로 채택한 중국공산당은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민주집중제와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중국식 “신민주주의”란 바로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입각한 “인민민주독재”이다.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 제창한 민주적 의사결정과 중앙집권적 정책집행의 원리이다. 레닌은 공산당원 모두 일단 “자유롭게 토론하되”(토론의 자유) 일단 당론이 결정되면 모두 “일사분란하게 행동해야 한다”(행동의 통일성)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천명했다. 원칙은 이후 스탈린 치하에서 “공산당무오류론”이라는 전체주의의 독재의 논리로 전락하고 말았음에도 고스란히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의 모습. http://marxistworld.net/2014/01/book-review-lenin-by-lars-t-lih-reaktion-books-2011/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의 모습. http://marxistworld.net/2014/01/book-review-lenin-by-lars-t-lih-reaktion-books-2011/

 

중국헌법의 “인민민주독재”란 마르크스-레닌주의의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대동소이하다. 프롤레타리아가 인민으로 대체되고민주”란 수식어를 삽입했을 뿐이다. 중국의 헌법이론에 의하면, 인민민주주의독재는전국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인민에게는 민주를 실시하고, 극소수의 적대분자들에겐 전정(專政=독재) 실시하는“ 통치의 방법이다. 공산혁명에 반대하거나 저애(沮礙) 되는 소수의 사람들은인민”이 아니라인민의 적”이다. 논리에 따르면, 도처에 숨어 있는 인민의 적을 제거해야만 공산혁명을 이룰 수가 있다.

 

3. "인민의 적"을 색출하라! 

 

1950-1953 중국은 ()방위적인 정치 캠페인을 진행한다. 이미 살펴 바와 같이 국공내전 당시부터 공산당은 지주 부농을 겨냥한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1950 초엽부턴 국민당 잔당 소요세력을 척결하는 “진압반혁명(鎭壓反革命; 줄여서 진반鎭反)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다. 이어서 부패관료집단에 대한 삼반운동(三反運動) 자본가 사적 기업가에 대한 오반운동(五反運動), 교육·지식계를 겨냥해선 사상개조(思想改造) 운동이 전개된다. 모택동의 지도 아래 펼쳐진 1950년대 초반의 대숙청은 피해자 규모나 방법의 잔혹함에 있어 스탈린 대공황(The Great Terror, 1936-38) 방불케 한다.

 

1950년대 초 진반운동의 포스터. "우리는 반혁명 분자를 모두 색출해야 한다!"

 

유엔군은 1950 10 1 한반도에서 인민군을 38 이북으로 몰아낸다. 1950 10 18 북한 국경에 잠입한 20만의 중공군은 유엔군에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사이 1950 10 10 모택동은 “혁명의 도정에 저항하는 국민당 잔류세력, 비밀요원들, 비적(匪賊) 떼들, 반혁명세력들을 모두 탄압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한반도의 전쟁을 기회로 삼아 중국 내분의 위험세력을 전격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1951 5 7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 제1차 전국회의에서 “만약 항미원조의 징소리와 북소리가 없었다면, 토지개혁과 진반운동이 소음을 냈을 것이고, 천하엔 혼란이 일어나서 상황이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중공 정부가 한국전쟁을 기회 삼아 내부의 반대세력 계획적으로 숙청했다는 자백이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중국의 호북(湖北), 사천(四川), 귀주(貴州) 등지에서는 국민당 잔병세력의 무장반란과 일부 민중의 저항이 이어졌다. 특히 1950 여름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중국 최남단의 광서성에선 매복한 반군세력이 일어나 1,400명의 간부와 700 여명의 병력을 제거한다. 1949 해방 직후 공군은 바로 지역에서 수개월 17만의 반군세력을 도륙하지만, 광서성 울림(鬱林, 1956 이후 옥림[玉林]으로 개명)현에서만 200개의 마을이 반란에 가담해 게릴라전을 이어가고, 남서부 지역의 중국공산당 보고서에 따르면 사천 서부에선 6만에 달하는 반군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모택동은 광서 지역에 국공내전 시기 동북야전군 정치부에서 맹활약해 탱크란 별명을 얻었던 도주(陶鑄, 1908-1969) 파견한다. 도주는 1951 3월까지 15 명을 처형하고, 10 명을 투옥한다. 많은 사람은 옥중에서 아사하거나 병사한다. 1951 여름, 모택동에 발송한 전신에서 도주는 45만의 토비(土匪) 평정하고, 4 명을 처형했는데, 3분의 1 정도는 처형할 수도 있고 않을 수도 있다”고 보고한다. 이에 모택동은 “광서라면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회신한다. (이후 도주는 1966 문혁이 시작되면서 공산당 서열 4위까지 오르지만, 이듬해 숙청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광서에 이어 호북(湖北)에서도 1951년에만 ()인구의 1.75프로에 달하는 4 5 이상이 도륙된다. 1951 1월까지만 해도 호북에선 불과 220명의 반혁명분자만이 제거된 상황이었다. 저조한 성과에 실망한 모택동은 1930년대 연안시절부터 비밀정찰 업무를 담당했던 공안부(公安部) 부장 육서경(陸瑞卿, 1906-1978) 통해 호북성의 이선념(李先念, 1909-1992) 압박한다. 그해 2월엔 7 명이, 이른 봄엔 7 명의 반혁명세력이 처형당하더니, 머잖아 3 7 명이 공산당 간부들에 의해 무차별 총살당한다. (20 모택동의 총애를 받은 육서경은 그러나 문혁 초기 버림받아 권력에서 밀려나고 만다.)  

"반혁명세력을 진압하라!" (1951) http://news.ifeng.com/history/gaoqing/detail_2013_11/09/31104567_0.shtml#p=1
"반혁명세력을 진압하라!" (1951) http://news.ifeng.com/history/gaoqing/detail_2013_11/09/31104567_0.shtml#p=1

 

북경 자금성(紫禁城) 근처 본부에서 모택동이 직접 살상의 할당량(대략 1 1) 정하면, 육서경의 지휘 아래 관료집단은 지방의 학살 현황을 파악해서 상부에 보고한다. 1950 모택동은 “반혁명분자를 진압할 , 일관되고 정확하고 맹렬(잔인)해야”야 한다는 (), (), () 3 방침을 제정하는데, 번째 () 원칙이 가장 강조된다.

 

지방정부의 행동대원들은 보통 상부에서 떨어지는 할당량을 살짝 웃도는 숫자를 달성하려 했다. 예컨대 1951 5 광서(廣西) 경우, 1 1.63명꼴로 진반(鎭反) 처형을 이뤄지는데도 부족하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귀주(貴州)에선 1 명당 3명꼴로, 일부 지역에선 1 5명꼴로 학살되었다고 한다.1951 3 하남성에서 12 명의 반혁명세력이 처형한 모택동에 칭찬을 받은 하남성 간부들은 2 명을 추가로 학살해서 3 2 명을 달성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Campaign_to_Suppress_Counterrevolutionaries

 1950년대 초 반혁명분자를 처단하는 장면 (출처미상)

 

 

4. 희생자들의 울부짖음

 

1980-90년대 이후 중국에선 1950년대 진반운동(鎭反運動) 실상을 보여주는 공산당 내부자료가 많이 공개되었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진반운동 자체를 성공적인 공산혁명의 과정이라 평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정부 당안(榶案, 공문서)에는 반혁명분자 색출 작전에서 스러져간 희생자의 비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3 최신작 <<해방의 비극>>에서 홍콩대학의 디퀘터 (Frank Dikötter) 교수는 직접 지방정부의 당안을 파헤쳐 먼지 더미에 묻혀 있던 다음의 사실을 발굴한다.

 

당안 자료를 보면, 놀랍게도 아동학대의 사례가 흔히 발견된다. 1951 4 운남성 염흥현(鹽興縣)에선 익명의 음해에 의해 명이 넘는 중학생들이 지방의 당정부에 불려가 고문 받았다. 먹은 아이는 들보에 매달린 구타당하고, 여덟 먹은  아이는 무릎 꿇은 자세로 묶여서 다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리 틀리는 고문까지 당한다. 심지어는 여섯 아동이 간첩부대의 우두머리라는 모함까지 쓴다. 사천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반혁명분자 색출이 전개되어 명이 고문당해 죽고, 다섯 명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광동성 나정(羅定, 루어딩)현에선 학생의 도난 혐의 때문에 무려 13세에서 25 사이 340명의 10-20대가 체포되어 조사받는 일도 벌어진다.        

공산당 간부가 국민당 스파이를 색출하는 장면, "특무, 너 어디로 달아나니?" https://chineseposters.net/themes/counterrevolutionaries.php

 

무고한 양민학살의 사례도 빈발(頻發)했다. 굴뚝 연기 때문에 적을 은닉한다고 의심받은 강서(江西) 마을에선 마흔한 명이 무차별 난사로 학살당하는데, 거의 대부분 아녀자와 어린이들이다. 귀주(貴州)에선 명의 지주를 조져 마흔 여덟 명의 무고한 빈농을 반혁명세력으로 몰아간 , 여덟 명을 잡아서 고문한 결과 여섯 명이 자살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심지어는 1929 갓난아기로서 무려 여덟 명을 살해했다는 황당무계한 혐의를 쓰고 자살한 사람도 나온다.  

 

반혁명세력 숙청의 압박 속에서 음해, 모략, 중상이 끊이지 않았다. 운남의 감옥의 간수는 죄수의 표정만 보고 150명의 토비간첩을 적발하고, 사천의 현에선 지난 세월 국민당원과 얽혔다는 이유로 무려 4 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기도 한다. 이런 사건은 대개 상부의 눈치를 살피던 하급관리들이 행정상 성과를 내기 위해 저지르는 국가범죄인데, 개인적 원한에 얽힌 음흉한 범죄도 숱하게 일어난다. 사천에선 공식적으로 명만 처형했다고 보고해 놓고는 슬그머니 170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Campaign_to_Suppress_Counterrevolutionaries
"반혁명 진압하여 좋은 광경 보장하자!"(1951)
https://en.wikipedia.org/wiki/Campaign_to_Suppress_Counterrevolutionaries

 

1951 5 사천성 부릉(涪陵) 지역에선 상부의 마감기일을 맞추기 위해 2,676명의 혐의자들을 열흘에 걸쳐 즉결처형하고는 500명을 이틀에 걸쳐 추가로 처형하는 일도 발생한다. 지역에선 만에 모두 8 5 명이 학살된다. 127명의 죄수 중에서 무작위로 57명을 골라서 사흘 만에 처형하는 참극도 벌어진다. 사천성 서부에선 하루에 명씩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사례도 일어난다. 모두 상부에서 정한 반혁명분자 색출 처형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발악이다

 

1954 유소기(劉少奇, 1898-1969, 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보고서에 따르면, 1950 10월부터 1951 11월까지 71 정도가 처형되었다. 1956 모택동은 정부 고위급 비밀회의에서 당시의 대공황(大恐慌) 회상하며 대략 70 정도가 처형됐다고 말한다. 70만은 그러나 실제 희생자의 수에 훨씬 미치는 듯하다. 국가발전 개혁위원회 위원장 박일파(薄一波, 1908-2007) 주장에 따르면 1950년에서 1952 말까지 대략 200만의 반혁명분자들이 처형되었다.

 

 

5. “인민민주독재”의 어둠

 

모든 사건들은 “해방”과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씻을 없는 전체주의 국가범죄의 참상이다. 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인민의 적”에 가한 “인민독재”의 실상(實狀)이다. 과연 인민민주독재를 민주주의라 부를 있을까? 소수에 대한 다수의 독재란, 실은 다수지배(majoritarian rule) 뿐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辨明)”에서 항변하듯,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은 최악의 중우정치(衆愚政治, mob rule) 추락하고 말았다.

 

다수결원칙에 따라 국가의 기본정책을 정하려 하면, 최악의 민주주의를 피할 없다. 인민의 일부가 다수를 선점하면 곧바로 인민독재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다수가 진정 원한다면 소수를 잡아서 고문하고, 격리시키고, 도륙해도 실은 죄가 없다. 바로 소수는 인민의 자격을 상실한 “인민의 적”일 뿐이다. 적은 더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헌법 역시 바로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인민을 사람으로, 인민의 적을 “사람의 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하거나 김일성 주체사상을 부정하는 인간은 더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적”일 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의 1명제는 인간 일반에 대한 보편명제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의 적”이 송두리째 제외된 특정계급의 특칭일 뿐이다.

 

일부가 다수(多數) 선점하고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면, “사람중심”의 인민독재가 정당화된다. 김일성의 “사람중심” 철학이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세습독재 왕정이 되어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에선 김일성 유일사상에 반대하면 “사람의 적”으로 간주되어 학살되고 만다. “사람”의 어의(語義)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상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특정계급 혹은 특정세력을 칭하는 특수명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마이클 만 교수의 저서, <<민주주의의 어둠: 인종청소를 설명하다>>

 

20세기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처참한 폭력의 실상을 깊이 탐구한 마이클 (Michael Mann) 교수는 <<민주주의의 어둠(The Dark side of Democracy)>>이란 책을 통해서 중요한 테제를 정립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사회 구성원의 특정 계급(class) 내지는 종족(宗族) 인민(人民, people) 혹은 국민(國民, nation) 이름을 참칭할 발생하는 범죄이다. 다수가 인민이 되는 순간, 소수는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다.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한 “인간”은 너무나 쉽게 인종청소의 대상이 된다는 설명이다.

 

전체로서의 “인민”이 강조되는 사회에선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억압당한다. 다수주의의 무지몽매한 폭력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루가 자유주의 헌법의 기본권 조항이다. 신체의 자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등등, 연약한 개인은 바로 자유를 통해서만 집단의 광기와 폭력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있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전체주의 폭력으로 귀결되고 만다현대중국의 슬픈 역사가 일깨우는 준엄한 교훈이다.  

인민의 적을 색출하는 장면! "인민을 위해하는 자는 결코 법망을 피할 수 없다!"https://chineseposters.net/themes/counterrevolutionaries.php
인민의 적을 색출하는 장면! "인민을 위해하는 자는 결코 법망을 피할 수 없다!"https://chineseposters.net/themes/counterrevolutionaries.php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Frank Dikötter, The Tragedy of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Bloomsbury Press, 2013). 본문 중 3 "인민의 적을 색출하라"와 4. "희생자의 울부짖음"에 제시된 사건 중 다수는 바로 이 책 제5장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  

Yang Kuisong, "Reconsidering the Campaign to Suppress Counterrevolutionaries," The China Quarterly, No. 193 (Mar., 2008), pp. 102-121.

Julia C. Strauss, "Paternalist Terror: The Campaign to Suppress Counterrevolutionaries and Regime Consolidation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1950-1953,"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Vol. 44, No. 1 (Jan., 2002), pp. 80-105. 
 
Michael Mann, The Dark Side of Democracy: Explaining Ethnic Cleans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楊立 編著, <<帶刺的玫瑰古大存沉冤錄>> (中共廣東省委黨史硏究室, 1993).

杨奎松 , <<中华人民共和国建国史研究>>1,2 ( 江西人民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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