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1회. "문화대반란이 서막"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41回. "文化大反亂의 序幕"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내걸고 인민을 동원한다면 대중운동이 아니라 국가주도의 캠페인에 불과하다.

 

1970-80년대 모택동을 칭송하던 구미의 좌파들을 논박했던 벨기에 출신 학자 피에르 릭만스(Pierre Ryckmans, 1935-2014, 필명 Simon Leys)은 말한 바 있다. “문화혁명은 대중운동이라는 허구의 연막 속에서 치러진 권력투쟁에 불과했다.” 그 점에 대해선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공식입장도 크게 다르지도 않다. 가령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1기 6차 전회에서는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 역사 문제에 관한 결정문”을 채택하는데, 그 결정문 19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혁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당, 정부, 인민이 겪었던 가장 극심한 후퇴와 과도한 상실을 초래했다. 문화혁명은 모택동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모택동 동지의 주요 테제는 다음과 같았다. 부르주와지와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이 당과 정부와 군대와 문화계에 잠입해서 정부의 각조직과 각부서의 지도부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을 저버렸다. 당내의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고, 중앙위원회에서 부르주아 본부를 형성했다. 그 결과 중앙위는 정치와 조직에서 수정주의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고, 성, 시, 자치구 및 중앙부서에도 많은 수정주의 첩자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과거에 채택됐던 투쟁의 형식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자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되찾기 위해선 대규모의 문화혁명을 수행하는 길밖에 없었다. 아래로부터 광범위한 민중을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동원하여 그들의 사악한 현상을 들춰내는 방법이었다. 문화혁명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거대한 정치혁명이며,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일어나야 하는 혁명이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문화혁명은 모택동이 직접 조정해서 일으킨 “대중운동”이었다. 모택동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대중을 동원해서 “대반란”을 야기했다면, 사실상 대중운동이 아니라 관제데모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문화혁명은 대중운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문화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수억의 인민대중은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공산당 각 조직, 국가의 각 기관, 학교, 작업장, 군대 및 사회조직 각 부문에서 수정주의자를 척결하고 반혁명분자를 단죄하는 기이한 “혁명놀이”를 열광적으로 직접 나서서 벌였기 때문이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직접 일으킨 혁명이라면 대중운동이 맞다. 물론 그 대중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이미 15년에 걸쳐 밤낮없이 진행된 사상교육으로 세뇌되고 단련되고 “혁명적” 대중이었다. 그들은 모택동의 아해(兒孩)들이며, 모택동의 괴뢰(傀儡) 군단이었다. “설사 그러면 어떠하랴?” 직접민주주의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입만 열면 “국민의 뜻”을 들먹이는 정치가들이 말하듯,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 있으며 모든 권력은 인민에서 나온다." 그들이 믿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에 따르면, 인민의 의지가 모든 합법성의 원천이 된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의 길을 제시했고, 대중은 문화혁명을 원했다. 모택동과 인민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공산당 내부의 주자파(走資派) 집단을 암세포 도려내듯 도려내서 처단했다. 그 점에서 광장을 점령해 다수를 선점한 후 국민을 사칭하는 모든 정치세력은 "마오주의자"(Maoist)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1966-1976)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1966-1976)

 

2. 혁명의 레토릭: “조반유리(造反有理)”

 

어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수상쩍은 당 간부들, 교사들, 지식인들을 색출해서 인민재판을 벌이고 있을 때, 최고영도인 모택동은 외쳤다. 조반유리(造反有理)! 흔히 “반란은 정당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자구(字句)를 잘 뜯어보면 인민이 일으키는 반란의 활동이 섭리(攝理), 합리(合理), 조리(條里), 도리(道理)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 인민이 들고 일어날 만하니까 들고 일어났다는 얘기이다.

 

일례로 1966년 8월 26일 <<인민일보>>를 살펴보자. 전체 6면 중 앞의 3면을 모두 이른바 “조반정신”에 할애했다. 그날 1면을 보면, “홍위병의 혁명 조반정신이 전국 혁명 군중을 자극한다!”는 헤드라인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가 나기 일주일 전 신화사는 8월 20일부터 홍위병들이 거리로 몰려나가 전단지를 뿌리고 대자보를 붙이며 도심의 곳곳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었다. 그들은 도심을 몰려다니면서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의 색채를 풍기는 모든 간판을 떼어버리고, 혁명정신을 벼리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홍위병들은 북경 시내 구석구석을 돌면서 낡은 유물은 다 때려 부수고, 낡은 사고의 흔적은 다 지워버리고, 낡은 풍속과 습관은 다 가라치우는 “비상한 무산계급화,” “비상한 혁명화” 작업을 이어갔다. 

 

1966년 8월 26일 [인민일보] 제1면. 모택동이 탄자니아 우호대표단의 접견했다는 기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이 "조반유리"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1966년 8월 26일 [인민일보] 제1면. 모택동이 탄자니아 우호대표단의 접견했다는 기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이 "조반유리"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수도 홍위병 어린 장수들이 무산계급혁명 조반정신은 강렬하게 각지 홍위병과 광대한 혁명 군중을 고무했다. 그들은 자산계급, 봉건계급 및 반동부패세력과 일체의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다 쓸어 담은 요원(燎原)의 강렬한 불길을 당겼다.”

 

그들은 도심을 몰려다니면서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의 색채를 풍기는 모든 간판을 떼어버리고, 혁명정신을 벼리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홍위병들은 북경 시내 구석구석을 돌면서 낡은 유물은 다 때려 부수고, 낡은 사고의 흔적은 다 지워버리고, 낡은 풍속과 습관은 다 가라치우는 “비상한 무산계급화,” “비상한 혁명화” 작업을 이어갔다. 1면 헤드라인 기사에 의하면, 그렇게 시작된 북경 홍위병 어린 장군들의 ‘조반정신’은 북경을 넘어 항주(杭州), 광주(廣州), 무한(武漢), 장사(長沙), 제남(齊南), 남창(南昌), 정주(鄭州), 합비(合肥), 남경(南京), 복주(福州)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인민일보>> 2면에는 “홍위병의 무산계급혁명 조반정신은 매우 좋다”는 큰 헤드라인 아래 “낡은 세계를 향한 선전포고,” “홍위병의 혁명 조반정신 찬양,” “청화대학 교정에는 반드시 대란이 일어나야” 등등 조반정신을 고취하는 기사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 3면 기사들 역시 수도 홍위병들의 조반을 칭찬하는 기사들 일색이다. 인민일보는 특히 문화혁명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있음을 조명하는 편집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3면 하단에는 하얼빈 공업대학 홍위병의 대자보의 기사가 게재됐다.

 

모주석이 말씀하셨다. “조반유리”라고. 우리는 이에 따라 견결히 행동해야 한다. 모택동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 그것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것의 반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과 투쟁하고 그것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한 발로 짓밟아야 한다. 그러나 일군의 자산계급의 대리인들이 우리의 반란행위를 따르지 않고 각종의 낡은 세력, 낡은 질서를 이용해서 우리들을 압제하고, 제한하고, 음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안다. 혁명하는 것은 반동파에 반발하는 계급투쟁이다. 적인들은 필시 우리를 반대한다. 모주석이 말씀하셨다. 적인의 반발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 아니다. 적인들이 우리에 반대해서 투쟁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힘차게 반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반란을 일으키자’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노래를 부르고, 반란을 일으키는 연극을 연출한다.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의 반란을 일으키면서 혁명의 불길을 당긴다. 전 세계가 반란의 불길을 당겨서 낡은 세상은 철저히 무너뜨려 박살을 내야 한다. 하얼빈 공업대학 일하면서 공부하는 홍위병 일인(一人)

 

[인민일보] 1966년 8월 26일자 신문에 게재된 사진. 서북지역 영하(寧夏) 회조자치구의 수도 은천시의 광대한 회·한족 혁명군중이 모택동선집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인민일보에 따르면, “혁명군중은 모택동선집이 대량으로 출판된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모택동의 초상화와 모택동선집의 모형을 내건 서점 앞에서 환호했다"고 한다.
[인민일보] 1966년 8월 26일자 신문에 게재된 사진. 서북지역 영하(寧夏) 회조자치구의 수도 은천시의 광대한 회·한족 혁명군중이 모택동선집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인민일보에 따르면, “혁명군중은 모택동선집이 대량으로 출판된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모택동의 초상화와 모택동선집의 모형을 내건 서점 앞에서 환호했다"고 한다.

 

 

모택동이 말하는 조반정신이란,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파괴적 창조의 혁명정신을 이른다. 그렇게 혁명적 열정에 들뜬 어린 학생들에게 파괴의 특권과 임무를 부여한 모택동은 큰 숲을 불을 지른 화전민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강풍을 타고 솟구치는 화마(火魔)를 관망하고 있었다. “조반유리”라는 한마디는 공권력의 투입을 막는 절대군주의 초법적 명령이었다. 그 결과 1966년 8-9월 동안에만 북경시에서 무려 1만 8천 명이 혁명의 광기 속에서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문화혁명 10년 동안 최소 50만에서 최대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3. 모택동의 치밀한 계획

 

조반유리란 한 마디가 웅변하듯, 문화대혁명은 "문화대반란"이었다. 수정주의, 주자파,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낡은 문화, 낡은 사고,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치러진 광란의 대반란이었다. 대반란의 우두머리는 바로 모택동이었다. 오늘날 중공정부도 흔쾌히 인정하듯 문화혁명은 모택동이 창작한 마오주의 혁명이었다. 모택동은 혁명의 돌풍을 일으켜 대중을 열광시켰다.

 

대반란의 광기, 폭력, 영향을 반추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택동은 과연 어떻게 1966년 현재 7억 3천 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대반란의 광풍 속에 몰아넣을 수 있었는가? 대중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조정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누구든 모택동의 방법으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면, 세계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국가 위에 법이 있고, 법 위에 인민이 있고, 인민 위에 최고영도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모택동이야 말로 20세기 최고의 혁명기술자이자 선동전문가였다. 7억 3천 만 명의 인민대중을 모택동처럼 마음대로 격동시키고, 조정하고, 지배할 수 지도자는 인류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장악한 이념의 힘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념이란 곧 상징조직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은 언어에서 나온다. 언어는 실상을 단순하게 왜곡하고 명료하게 개념화한다. 개념은 족쇄가 되어 영혼을 구속하고, 빗장이 되어 마음을 지배한다. 잘 만들어진 한 마디 정치구호가 1개 군단의 화력을 능가하는 무기다. 예컨대 혁명이란 두 글자는 1950-60년대 중국의 현실에선 감히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었다. 이에 덧붙여 모택동은 “조반정신”이라는 핵무기에 비견되는 언어를 만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살았던 개개인에게 모택동이 부르짖는 “조반정신”은 의식주 못잖게 생존의 필수품이 되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자는 곧 반동파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과연 모택동은 어떤 구체적 방법을 동원해서, 어떤 전술을 구사해서 미증유 문화혁명의 뇌관을 터뜨렸을까? 대중을 마음에 혁명의 주술을 걸여 원하는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되찾았을 수 있었을까?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에 걸쳐 전국의 관료집단이 대거 모인 이른바 "7천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화를 통해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국가주석 유소기는 대기근의 "7할은 천재이며 오직 3할만 인재"라는 라는 유명한 말로 모택동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서 조심스럽게 권력을 이양받았다. 유소기와 등소평에 국가행정의 실무를 맡기고 경제회복의 책임을 지운 뒤 모택동은 국가권력의 제2선으로 물러났다. 모택동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국가주석 유소기와 중공중앙 총서기 등소평은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의 실용주의 경제개혁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민생이 뚜렷이 개선되어 가자 모택동은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스탈린 사후 후르쇼프는 탈스탈린 운동을 주도하며 수정주의  노선을 걸었다. 모택동으로서 유소기와 등소평이 후르쇼프의 개혁을 답습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모택동은 불현듯 1961년 북경 경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경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의 정치적 함의를 깨닫고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명(明, 1368-1644)나라  해서는 가정(嘉靖, 재위 1521-1567)황제에게 관료부패와 정부의 실정을 고발한 후 그 직언 때문에 관직에서 파면당한비운의 지방관이었다. 대약진운동 결과 기근이 발생하자 모택동은 관료들이 상부의 억압 때문에 직언을 못한 이유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명나라 충신 해서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역사학자들을 시켜서 해서의 정신을 기리는 예술작품을 만들라 촉구했다.

 

그 결과 경극무대에 올려진 "해서파관"의 플롯을 보면, 놀랍게도 모택동만 얼간이가 되고 만다. 누가 봐도 해서는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의 실상을 고발하며 직언했던 국방장관 팽덕회이었으며, 가정황제는 모택동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극중에서 해서는 가정황제가 서거한 후에야 복직된다. 1961년 "해서파관"을 직접 감상했던 모택동은 큰 박수를 치며 "해서의 정신"을 기렸는데, 결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셈이었다.

 

행정의 실권을 잃은 모택동이 신경제정책으로 경제성장의 실제적 성과를 내는 유소기와 등소평를 보면서 느꼈을 불안감과 열등감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신경제정책은 1950년대 모택동이 추진했던 집산화 정책에 전면으로 위배되는 이단의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격분케 한 직접원인은 바로 자신을 가정황제에 비유함으로써 팽덕회를 현대의 해서로 만들어버린 경극 "해서파관"이었다.  

 

"해서파관" 원대본의 저자는 청화(淸華)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북경시 부시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던 저명한 역사학자 오함(吳晗, 1909-1969)이었다. 1965년 11월 신문지상을 통해서 시작된 오함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문화대반란의 서막을 알리는 제1의 신호탄이었다. 전국을 뒤흔드는 혁명의 쓰나미를 기획하기 위해 모택동은 최소한 반년 전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해 정교한 반란의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계속>  

 

"모택동어록"을 손에 들고 광장에 모인 홍위병
"모택동어록"을 손에 들고 광장에 모인 홍위병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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