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7회. “황제의 간지: 정치는 속임수다!”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47회. “皇帝의 奸智: 政治는 속임수다!”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한에 가면 동호 근처에 위치한 빌라에서 머물렀다.

 

동독에서 특별히 주문제작한 그의 전용열차는 냉·난방 시설은 물론 호화스러운 위락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비서진, 경호원, 요리사, 또 젊은 여성 수행원들이 따라다녔다. 모택동은 정해진 수면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필요에 따라 새벽 1시에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고, 아침 해가 뜬 후에야 잠을 자기도 했다. 그의 수행원들은 하루 스물 네 시간 긴장상태로 그의 시중을 들고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모택동은 10년의 문혁기간 중 2년 8개월 동안 남쪽의 지방도시를 다니면서 원격으로 중앙정치를 지배했다. 모택동이 움직일 땐 정치가 시작됐다. 흡사 후방의 벙커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세계대전 당시의 사령관처럼 그는 세심히 북경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관찰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실시간으로 북경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전화, 전보뿐만 아니라 항공편으로 배송되는 비밀문서를 통해서 모택동은 북경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원거리 정치게임을 벌여야만 했을까?

 

1960년대 기차를 타고 다니며 집무를 보는 모택동의 모습
1960년대 기차를 타고 다니며 집무를 보는 모택동의 모습

 

주치의 이지수의 증언에 따르면, 모택동은 60대 이후 발기부전의 고통을 호소하며 묘약을 구해 달라 호소했다. 발기부전의 진단을 받은 후 모택동은 껄껄껄 웃으며 “내가 내시가 됐군!”하면서 농담까지 했다고 한다. 발기부전은 그러나 그의 호색기질을 잠재우지 못했다. 호화열차 안에서도 모택동은 늘 젊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대부분 외모가 출중하거나 예술재능이 뛰어난 축이었다. 북경을 떠나 지방을 순방하면서도 그는 곳곳에 여인들을 숨겨놓고 밀회를 즐겼다. 모두가 사전조사를 통해서 투철한 당성을 검증받은 여성들이었다. 한때 모택동은 집안일을 봐주는 여성 수행원 한 명과 내밀한 관계였다. 이후 그 딸도 무한에서 모택동의 빌라에 드나들었다. 모택동의 외도를 감지한 강청은 질투에 사로잡혀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모택동은 다음 날 말없이 훌쩍 혼자 떠나버렸다. 버림받을까 현장법사를 뒤따라가며 손오공이 내뱉은 <<서유기>>의 대사를 쪽지에 써서 전달하며 강청은 모택동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의 "바람기"를 콘트롤 할 수 없었다. 

 

물론 주치의 이지수의 증언이 진실이라 단정할 수도 없고, 모택동의 사생활이 역사탐구의 핵심주제가 될 수도 없다. 다만 나폴레옹의 “작은 키” 증후군이나 히틀러의 무성애증처럼 권력자의 내면세계는 역사의 물길을 틀어버리는 돌발변수가 될 수 있다. 모택동의 여성편력도 그런 맥락에서 문혁의 실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한 개인에 절대적인 권력을 집중될 경우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위험이다. 토크빌의 통찰대로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기 때문이며, 역사의 경험이 증명하듯 권력자의 사욕은 모든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이다. 

 

1950년 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담뱃불을 붙이는 모택동
1950년 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모택동

 

 

2. “투 트랙” 전술

 

지금까지의 사건을 되짚어 보면, 문화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모택동의 정치계략은 “투 트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지난 회에서 우리는 1965년 11월 모택동이 전격적으로 중공중앙의 판공청(辦公廳) 주임 양상곤(楊尙昆, 1907-1998)을 파면한 후,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그의 오른팔 임표를 통해 국방부 장관 라서경(羅瑞卿, 1906-1978)을 덫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렇듯 모택동은 권력의 재편을 위해 본격적인 권력의 게임에 돌입하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중공중앙을 장악한 “수정주의자”들로부터 권력을 되찾기 위한 모략을 짜면서, 다른 한 편으로 모택동은 요문원이란 무명의 젊은 비평가를 내세워 역사학자 오함을 물어뜯게 했다. 1965년 11월 요문원이 오함을 공격하자 인민일보를 비롯해 북경의 언론의 장악하고 있었던 북경시장 팽진은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등척(鄧拓)과 요말사(廖沫沙)를 저격수로 투입했다. 칼을 빼든 자객들처럼 두 사람은 오함을 엄호하며 한 달 넘게 화려한 논전을 벌였는데, 그때까지도 팽진을 비롯한 북경의 인텔리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팽진은 모택동의 어록을 꺼내들고는 “다양한 사상논쟁의 중요성”과 “학술논쟁의 독자성” 등 확보하는 방패막이로 삼았지만, 좌파노선의 비평가들은 공격의 수위를 갈수록 높여만 갔다. 이미 과격한 극좌노선으로 모택동의 총애를 받아 공산당 기관지 <<홍기(紅旗)>>의 편집을 맡고 있던 척본우(戚本禹, 1931-2016, Qi Benyu)와 관봉(關鋒, 1919-2005, Guan Feng)이 대표적이었다.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월까지 대약 두 달에 걸쳐 중국의 신문지상에선 다시금 이념논쟁과 사상투쟁이 전개됐다. “말의 전쟁”에선 무승부란 있을 수가 없다. 논전이 전개될수록 교조적 좌익세력의 언어는 과격해졌다. 당시 만 서른다섯 살의 척본우의 글을 읽어보면, 좌익소아병자의 과격함과 치기어림이 물씬 풍겨난다. 예컨대 1965년 12월 5일자 인민일보에 게재된 그의 칼럼 “혁명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다”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무산계급은 낡은 세계의 무덤을 파 뒤집고 신세계를 건설한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인류역사의 가장 무거운 책임이 놓여 있다. 무산계급이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선 반드시 역사발전의 법칙을 냉철하게 꿰뚫어봐야만 한다. 역사발전의 법칙을 모르면 공산당의 무산계급 혁명가가 될 수가 없다. 진실로 혁명가를 자임하려면, 무산계급은 역사를 중시하고, 역사연구를 중시해야만 한다.<중략>

계급을 초월하는 역사 연구는 없다. 지금껏 모든 통치계급은 자신들의 계급 이익에 따라서 역사를 해석해 왔다. 그들의 계급 이익은 인민군중의 이익과 부조화를 이루며, 사회발전의 요구와도 그렇게 불일치한다. 때문에 그들은 역사의 진상을 인식할 수 없으며, 역사의 진상을 왜곡한다. <중략>

보라! 공자 이래 대부분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정당하지 않다고 했다. 조반무리(造反無理)라고 했다. 모택동 동지께선 제창하셨다. ”중국의 봉건사회에서는 오로지 농민의 계급투쟁, 농민의 기의와 농민의 전쟁만이 역사발전의 진정한 동력이다!”

 

당시 중국의 독자들로선 너무나 많이 들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상투적인 혁명의 수사였을지도 모른다. 상투어(cliché)는 그러나 정치투쟁에선 놀라운 마력을 발휘한다. 인류학자들의 관찰대로 상투어는 문화적 상징이다. 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겹도록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것만 같은 바로 그 상투어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규범이자 절대가치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선 반당, 반사회주의, 주자파(走資派), 수정주의자 등등의 언어는 정적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고 두뇌활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독침과도 같았다. 상투어는 곧 정적의 심장을 찌르는 독침이며, 목을 조이는 올가미이다. 척본우는 당시 중국의 상투어를 통해서 오함의 목에 다시금 올가미를 씌웠다. 척본우가 쏟아내는 혁명의 상투어를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에서나 누구든 정치적 “상투어”의 독침을 맞으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3. 수령님의 미소: “2월 제강(提綱)”

 

그렇게 두 달 간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벌어진 후였다. 1966년 2월 3일 팽진은 돌연 “5인 소조”의 회의를 소집한다. 오함의 <<해서파관>>을 둘러싸고 진행된 언론지상의 논쟁을 정리하는 목적이었다. 다음 날 “중공중당에 제출하는 5인 소조 보고서의 제강(提綱)”이 작성된다. 이 문서는 당시 북경에 머물고 있던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세 명에게만 보고됐다.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이 바로 그 세 명이었다.

 

팽진이 주도해서 작성한 “2월 제강”을 이 세 명이 곧바로 승인했다는 점은 문화혁명의 발발에서 매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지수의 증언에 따르면, 주은래는 모택동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심복 같은 인물이었다. 주은래가 문혁 기간 내내 중국공산당 국무원의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그 진술의 신빙성을 높여 준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이라는 희대의 광란극을 통해서 제거하려 했던 표적은 바로 유소기와 등소평이었다. 두 사람은 2월 제강에 동의함으로써 팽진과 같은 배를 타고 문혁의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되었다.

 

팽진은 세 사람의 형식적인 수정안을 일부 반영해서 최종본을 완성한 후, 1966년 2월 7일 모택동에게 전보로 발송하고, 바로 그 다음 날(2월8일) 새벽 모택동을 만나기 위해 “5인 소조”의 세 명을 이끌고 무한으로 간다. 그 세 명 중에는 모택동의 심복인 강생도 끼어 있었다. 강생이 있는 한, 모택동은 이미 실시간으로 5인 소조 내부의 토의내용을 전해 듣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을 무한으로 불러 보고하게 한 조치도 모택동에겐 바둑판의 한 수였다.

 

문화혁명 당시 수정주의자로 몰려 비판투쟁 당하고 숙청된 주요 인물들을 추한 군중들에 비유한 작품. 이 작품 속에서 팽진은 "2월 제강"이라 적힌 구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오여란(翁如蘭) 작품. 1967년 작. 군추도(群醜圖) chinaposters.net
문화혁명 당시 수정주의자로 몰려 비투(비판투쟁)당하고 숙청되었던 주요 인물들을 추한 군중들에 비유한 작품. 이 작품 속 왼쪽을 보면 팽진이 들것에 앉은 채로 "2월 제강"이라 적힌 족자를 펼쳐 들고 있다. 오함은 징을 치는 사람 바로 뒤에서 "해서파관"이라 적힌 팻말을 들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행진"당하고 있다. [오여란(翁如蘭) 작품. 1967년 작. 군추도(群醜圖)] chinaposters.net

 

그날 팽진이 직접 손에 들고 간 “2월 제강”에는 모택동의 심기를 건드리는 직설적 표현도 꽤나 포함되어 있었다. 팽진은 우선 “실사구시”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후 실용주의 개혁개방의 기본원칙이 되는 “실사구시”는 원리원칙에만 얽매이는 교조주의를 공격하는 상투어였다. 팽진은 또 “진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구절도 의도적으로 삽입했다. 뿐만 아니라 적에게 이기기 위해선 정치적으로 무조건 억누르기 보단 학술논쟁을 통해서 정당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구절도 삽입했다.

 

일설에 의하면, 모택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팽진과 나머지 3명을 앞에 두고 “오함이 반당적이며, 반사회주의적이냐?”고 물었고, 오함과 팽덕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캐물었다. 이에 팽진은 오함과 팽덕회와는 아무런 조직적 연관이 없다고 반복했다. 이에 모택동은 말을 아끼고 노회한 정치가의 “포커 페이스(poker face)”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모택동은 무표정한 얼굴로 별 생각 없다는 듯 팽진이 내민 “2월 제강”의 문서를 비준했다. 전통시대 황제처럼 모택동은 주요한 문서에 직접 손으로 서명했다. 스스로 신나서 승인을 할 때면 날림체로 “당장 시행하라!” 등의 문구를 삽입하기도 했는데, 그날은 그저 문서에 인쇄된 자신의 이름자에 원을 그렸다고 알려진다. 마음속으로는 분기를 삭히고 있음이 분명하다.

 

모택동의 비준까지 받은 2월 제강은 중남해의 중국공산당에서 “중발(中發) 105의 형식으로 극비리에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반포되었다. 중국공산당에서 채택한 공식 입장이라는 의미였다. 팽진이 발의하고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의 승인을 받고, 최종적으로 모택동이 비준한 바로 그 문서가 어떻게, 왜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팽진으로선 오함 사건의 완전한 종결이라 생각할만도 했다. 

 

모택동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팽진은 이제 사태가 매듭지어졌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수행비서에게 “오함 사건은 이제 끝났다”고 말하면서 함께 고서점가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해에 들렀던 팽진은 모주석이 오함의 사건에 대해서 이미 정치적인 문제가 없다고 했다고 떠벌리고 있었다. 팽진은 그로써 두 달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난데없는 이념논쟁이 종식되었고, 이제 모든 일은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간 듯만 했다. 아마도 팽진은 그날 문서에 서명하던 모택동의 입가에 머물렀던 회심의 미소를 보지 못했던 듯하다. 

 

노회한 모택동은 능청스럽게도 내면의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팽진을 속였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정치는 언제나 정적을 속이는 마술이다. <계속>

 

"마르크스주의의 도리는 수천, 수만 가지로 나뉘어지지만, 결국은 단 한 마디로 귀결된다. "조반유리!" 반란은 정당하다!"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高皐, 嚴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 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8).

錢庠理, 《中華人民共和國史: 第五卷 歷史的變局──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1962-1965)》 (港中文大學當代中國文化研究中心, 2008).

楊繼繩, 《天地翻覆——中国文化大革命史》 (香港: 天地圖書, 2018).

Byung-Joon Ahn, "The Politics of Peking Opera, 1962-1965," Asian Survey, Vol. 12 No.12, (Dec. 1972), pp. 1066-1081.

Mary G. Mazur, Wu Han, Historian: Son of China's Times (Lanham, MD: Lexington Books,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徐志高 主编, 《文革史稿:文革史料彙編(1): 第一冊: 社會主義文化革命》 世界华语出版社,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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