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5회. "사상투쟁, 말의 전쟁"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45回. “思想鬪爭, 말의 戰爭”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요문원의 글을 인민일보에 게재하면서도 팽진은 해 볼 한 싸움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의 파워를 맹신하고 있었다. 팽진은 1951년 북경시장으로 선발된 후, 1955년 이래 중공 북경시위원회의 제1서기직에 올랐고, 1956년부터는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1964년 모택동이 조직한 “문화혁명 5인 소조(小組=그룹)”의 조장(租長)으로 발탁되었다. 

 

문화혁명 5인 소조는 본격적으로 문혁이 시작되기 전 문예계의 정풍(整風= 개혁)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상임 조직이었다. 1964년 7월 모택동은 문예개혁과 학술비판을 위해 문화선전 방면의 여러 과제를 처리하라 명령하면서 중앙정부의 다섯 명에 그 임무를 맡긴다. 본래 “5인 소조” 앞에 “문화혁명”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지 않았으나 1966년 5.16일 문화혁명이 개시될 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중공중앙의 통지문에는 "문화혁명 5인소조"라는 명칭이 등장해서 이후 계속 "문화혁명 5인 소조"라 불리웠다.  

 

"문혁 5인 소조"의 조장은 팽진이었다. 부조장은 작가출신으로 1965년 문화부 부장에 임명된 육정일(陸定一, 1906-1996, Lu Dingyi)이었다. 이 두 명 아래는 중앙서기처의 처장 강생(康生, 1898-1975, Kang Sheng), 문예비평가로서 문화부의 부(副)부장 주양(周揚, 1907-1989, Zhou Yang), 그리고 신화사(新華社)의 사장 오냉서(吳冷西, 1919-2002, Wu Lengxi)가 포함되었다. 문혁이 개시되기 2년 전 모택동은 왜 특별히 이 다섯 명을 콕 찍어서 5인 그룹을 조직했을까? 모택동이 이 5인을 신뢰했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5인 중 네 명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완벽하게 숙청하기 위한 계략일 뿐이었다.  

 

문혁 정부의 핵심인물들. 왼쪽부터 강생, 주은래, 모택동, 임표, 진박달(陳伯達 1904-1989), 강청
"모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 승리 만세!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승리 만세!"
문혁 정부의 핵심인물들을 그린 포스터. 왼쪽부터 강생, 주은래, 모택동, 임표, 진백달(陳伯達, 1904-1989, Chen Boda), 강청.
chineseposters.net 

 

오직 강생만이 나머지 네 명과는 달리 문혁 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강생은 모택동의 측근으로 중공 내부의 감찰 및 검열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1925-1979) 같은 인물이랄까. 1930년대 초반 강생은 모스크바에 가서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정보관리 및 감찰기술을 직접 보면서 학습했다. 모택동은 5인 소조에 강생을 투입해서 팽진을 포함한 나머지 네 명을 밀착감시하게 했다. 실제로 문혁이 개시되자 곧바로 "5인 소조" 중 팽진, 육정일, 주양, 오냉서는 곧바로 숙청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강생은 승승장구 문혁정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한다.

 

1965년 11월 말부터 1966년 2월 12일까지 팽진은 완강하게 맞서며 사상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거의 10년 전 모택동이 강조했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당부를 다시금 들고 나왔다. 사회주의 발전을 위해선 자유로운 사상논쟁 및 학술토론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팽진이 깃발 들고 나아가자 오함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판 치열한 사상투쟁이 일어났다. 

 

사상투쟁이란 본시 말을 폭탄으로 삼는 이념의 전쟁이다. 제 편을 규합해 상대편을 제거하는 잔혹한 투쟁이다. 죽고 죽이는 치열한 투쟁이지만, 그 투쟁에 투입된 투사들은 기껏 관객을 끌어 모으는 광대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최고영도자 모택동이 심판이었으므로 싸움의 승패는 이미 다 결정돼 있었다. 모택동은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상투쟁을 관망할 뿐이었다. 그는 실은 날마다 신문지상에서 벌어지는 날선 비평의 칼싸움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싸움을 지켜보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전국의 관객들, 바로 “위대한 중국인민”의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그가 기획한 드라마 속에선 격분한 관객들이 펜스를 넘고 뛰어들어가 경기장의 투사들을 잡아서 처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군중의 분노가 끓어올라 대반란의 비등점에 이르기까진 불과 채 반 년도 남지 않았다. 노회한 혁명의 마스터 모택동은 과연 그 사태를 미리 다 내다보고 있었나?   

 

윗 사진 속의 네 글자 "彭·陸·羅·楊"은 각각 팽진, 육정일, 라서경(羅瑞卿, 1906-1978), 양상군(楊尙昆, 1907-1998)의 성을 의미한다. 이 네 명에 공격의 포커스가 맞춰진다. 라서경과 양상군은 모택동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숙청한 군부의 거물들이다. 

 

 

2. 논전(論戰)의 확대

 

요문원의 글이 <<인민일보>>에 실리면서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본격적인 학술논쟁의 막이 올랐다. 북경의 평범한 시민들로선 그 논쟁의 의미를 알 길 없었다. 몇 년 전 크게 유행했던 경극 하나가 난데없이 전국을 뒤흔드는 논전의 표적으로 등장한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뭔가 심상찮은 정변의 전조임을 이미 간파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먼저 재빨리 눕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파람을 맞으며 우직하게 본심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신문지상의 학술논쟁은 곧 관공서, 학교, 광장에서 사상투쟁으로 번졌다.

 

요문원은 이미 오함의 <<해서파관>>을 “독초”라 선언한 후였다. 북경시장 팽진은 독초가 된 오함을 엄호했다. 팽진의 지휘 아래 북경시위원회 선전부의 기관지 <<문예전보(文藝戰報)>>는 요문원의 비판을 반박하는 특집호를 펴냈다. 팽진은 여전히 “진실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을 읊조렸고, 팽진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은 오함의 작품이 반혁명적 독초가 아니라 모택동의 주문에 따라 “해서의 정신을 기리는” 정당한 문예작품이라 주장했다.

 

놀랍게도 모택동의 추종자 상해의 장춘교 역시 요문원의 글이 발표됐던 바로 그 <<문회보>>에 요문원을 비판하는 글들을 게재하기도 했다. 장춘교는 얼마 후 4인방의 한 명으로 문혁의 광기에 기름을 쏟아 붓는 선동가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그런 장춘교가 오함을 옹호하는 글을 실을 수 있었음은 이미 강청을 통해 모택동의 승인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겉으론 백가쟁명을 지지하는 듯했지만, 실은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당기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트릭일 뿐이었다. 모택동인 1940년대 연안시절 정풍운동 때부터 늘 써왔던 양모(陽謨, 공공연한 음모)의 수법이었다.

 

불과 수년 전 이른바 반우파투쟁(1957-1959) 당시 맘껏 속마음을 표출한 대가로 자유를 잃고 감금당했던 지식인들은 정치적 위험을 잘 알면서도 오함을 옹호하며 사상의 다양성을 주장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반년 내에 홍위병의 집회에 불려나가 조롱당하고 모독당하고 두들겨 맞고 짓밟히고 만다. 공포와 모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식인들이 줄을 잇게 된다.

 

3. 가벼운 수필? 권력비판? 영도자 우롱?  

 

가장 용감하게, 아니 무모하게 오함의 변호에 앞장선 지식인은 중공 북경시위원회 서기 등척(鄧拓, 1911-1966, Deng Tuo)과 북경시위원회 통전부 부장 요말사(廖沫沙, 1907-1990, Liao Mosha)였다. 등척, 요말사, 오함 세 사람은 1961년 10월부터 1964년 7월에 걸쳐 중공 북경시위원회 기관지 <<전선(前線)>>지에 오남성(吳南星)이란 가명으로 67편의 칼럼을 연재한 바 있었다. 이들의 칼럼은 대부분 역사 사실을 들어서 현재를 논평하는 "설고논금"의 비평문이었다.

 

전통의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비평문은 문혁 시기 "낡은 봉건사상"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당시의 사회문제과 부정부패를 풍자한 "건전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문제가 된 문제의 평론들을 직접 보면, 행간에 날카로운 권력비판이 숨어 있는 듯도 하다.  예컨대 등척이 직접 쓴 "건망증 전문치료"(1962년 작)라는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건망증을 보이는 사람은 "늘상 식언을 해서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그 사람이 일부러 미친 척하고 바보 시늉을 하지 않나 의심케 하니 절대로 신임할 수 없다! <중략> 

고대 중국의 의서에 따르면, 건망증의 원인은 분명히 두 종류가 있으며, 때문에 병증 역시도 두 개의 극단적 양상을 보인다. <<영추경(靈樞經)>>을 보면, 건망증의 원인은 기맥이 전도되어 정상상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지 건망증에 머물지 않고 결과적으로 희노의 감정이 정상을 벗어나게 된다. 말하기가 특히 힘겨워지고 쉽게 화를 내서 결국은 정신이상이 되고 만다. 또 하나의 병인으로는 뇌수손상으로 감각이 마비되고 심혈이 상충(上沖)하여 때로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만다. 만약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얼간이(傻子)가 되고 만다.  만약 이러한 양극단에 해당하는 그 어떤 증상이라도 드러나면 반드시 긴급하게 완전한 휴식을 취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선 아니된다. 억지로 말을 하고 일을 하면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 <원문은 굵은 글씨 아님>

 

글 자체는 그저 건망증에 관한 등척의 소견에  불과하다. 문제는 당시 중국인들이 건망증하면 쉽게 모택동을 연상한다는 사실이었다. 모택동은 반우파운동 때 "백화제방"의 약속을 저버리고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그 때문에 등척은 모택동이 금방 내뱉었던 인민과의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기했음은 바로 "중증 건망증"의 병증이라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건망증 환자는 말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야지, 말하고 일을 하고 시작하면 반드시 "대란"이 터진다는 대목에선 분명 모택동을 대놓고 조롱하는 느낌까지 있다. 아슬아슬 줄을 타고 가면서 창끝으로 모택동을 톡톡 찌르는 듯하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인데, 모택동으로선 딱히 문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모택동은 무서운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화혁명이 개시되는 1966년 5월 북경의 삼련(三聯)서점 출판사는 <<삼가촌찰기(三家村札記)>>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비평집을 묶어 출판하는데, 반당·반혁명분자의 멍에를 씌어 이들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 책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등척, 오함, 요말사 “삼가촌”의 반(反)당, 반(反)인민, 반(反)사회주의의 추악한 면모는 이미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공대한 노동자, 농민, 병사 군중과 혁명간부, 혁명지식분자는 삼가촌 반당집단에 대한 올곧고 엄격한 비판을 진행하였다. <<삼가촌찰기>>는 이 세 반당분자가 오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독초들이다.

 

이 서문만으로도 문혁을 앞두고 세 사람을 향한 사상투쟁과 마녀사냥이 개진됐음을 알 수 있다. 오함을 향했던 최초의 칼날은 그렇게 오함과 연결된 지식인의 네트워크를 난도질해대고 있었다. 논전은 커지고 있었다. 사상투쟁은 이제 “말의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계속>

 

1960년대 초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풍자성 수필집 《삼가촌찰기》의 세 저자. 이 세 사람은 모두 문혁 초기 반당분자로 몰려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등척은 문혁 초기 자살하고, 오함은 1969년 감옥에서 사망한다.
1960년대 초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풍자성 수필집 《삼가촌찰기》의 세 저자. 이 세 사람은 모두 문혁 초기 반당분자로 몰려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등척은 문혁 초기 자살한다. 오함은 1969년 감옥에서 사망한다.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吳南星, 《三家村札記》 (北京: 三聯書店出版, 1966.5).

高皐, 嚴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 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8).

錢庠理, 《中華人民共和國史: 第五卷 歷史的變局──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1962-1965)》 (港中文大學當代中國文化研究中心, 2008).

楊繼繩, 《天地翻覆——中国文化大革命史》 (香港: 天地圖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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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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