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코로나19 감염 상황이 심상치 않다. 현 추세대로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일 확진자 100만명, 하루 사망자는 5000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당국은 '악마'라는 과격한 단어로 지칭하며 근절의 대상으로 보던 코로나19를 '가벼운 감기(common cold)'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상 급격한 '위드코로나'로의 전환이란 평가다. 다른 국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중국의 급작스런 정책 전환은 사실 혹은 현상이 급변하는 중국 정치에 종속돼 버리는 경향을 여실히 보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북한의 관영 선전매체는 15일 ‘외세 의존’이라며 문재인 정권의 외교 행보를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실명 거론을 피하는 대신 ‘현 당국’ 또는 ‘현 당국자’와 같은 표현으로 순화했다.북한의 대외 선전용 라디오 방송인 ‘평양방송’은 이날 는 제목의 보도에서 “남조선의 현 당국은 당장 존망의 위기에라도 처할 것 같은 위구심(危懼心)에 사로잡혀 조선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구걸하는 멍텅구리 짓만 일삼고 있다”며 수위 높은 표현으로 문재인 정권을 비난했다.
1. 1960-70년대 한국언론의 문화혁명 관련기사지난 회에 언급한대로 김동춘은 1970년대에는 "중국 사람들도 밥 먹고 산다는 얘기"만 해도 죄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 하에선 중국에 관한 지극히 기초적인 사실을 말만 해도 처벌되었을까? 박정희 정권 당시 과연 대한민국의 일반국민은 중국에 관한 어떤 정보에 노출되어 있었을까?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는 1면에 “毛澤東死亡(모택동사망)”을 대서특필했다. 그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모택동 사망. 84세. 어제 새벽 1시- 18일에
며칠 전 (10월 18일) "대진연"이라는 "친북 대학생" 단체가 주한 미대사관저를 월담해 점령했다. 그들은 주한미대사 해리스를 떠나라 외치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절대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혈세강탈을 막고 재정주권을 지키려 한 의로운 행동"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했다는데······. 2019년 10월 세계 10대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이들은 1980년대 "반미자주" "미군철수" 외치던 주사파 운동권의 사고방식을 앵무새처럼 흉내내고 있다. 월담 과정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하는 등 최첨단 소통매체를 활용했지만, 이들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