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문혁춘추] 48회. “모택동의 친위쿠데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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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4.03 10:43:56
  • 최종수정 2020.04.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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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부장 요수석(饒漱石, 1903-1975, Rao Shushi)이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일대의 정쟁에 휩싸여 있었다. 주치의 이지수는 모주석이 기차를 타면 정치가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렇다 해도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과연 그는 왜 정치의 중심을 떠나 8개월 동안이나 남방에 체류해야만 했을까?

 

당시 북경의 정치판은 국가주석 유소기와 중공중앙위원회 총서기 등소평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경시장이었던 팽진 또한 북경 정치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들은 이미 모택동의 지시를 은근히 사보타지(sabotage)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적으로 1965년 11월 모택동은 평론가 요문원의 글을 중앙의 언론에 게재하라 지시했지만, 팽진은 게재를 불허하며 거의 한 달을 버텼다. 일개 시장이 그 정도였으니 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유소기와 등소평은 이미 모택동의 지시에 귀를 닫고 있었다고 할만도 하다.

 

모택동은 중앙정치이 난맥상을 보일 때면 기차를 타고 남방으로 떠나곤 했다. 그의 남방정치는 정국의 극적 전환를 도모하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었을 수 있다.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맥상을 보일 때면 기차를 타고 남방으로 떠나곤 했다. 그의 남방정치는 정국의 극적 전환를 도모하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었을 수 있다.

 

물론 당내에 모택동의 절대권위를 부정하고 노골적으로 저항할 인물은 없었다. 다만 아랫사람들이 겉으로 “예, 예!” 한다 해서 모택동의 절대권력이 그대로 유지될 리는 만무했다. 관료행정의 원리 상 정부의 각 지위에 배치되어 실무를 파악한 인물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한국의 행정부서를 봐도 장관은 얼굴마담이고, 차관은 꼭두각시고, 실권은 국장급이 장악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 하물며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대륙국가 중국임에랴.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어디서든 중공중앙의 중심인물들을 불러서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고, 지난 회 다뤘던 양상곤(楊尙昆, 1907-1998)의 전격적 해임에서 이미 보았듯 중앙정치의 주요인물에 대한 임면(任免)의 직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당 서열로 보나 카리스마로 보나 그는 틀림없이 중국의 최고영도자였다. 그렇다 해도 정적의 손에 장악된 북경을 그대로 버려둔 채 장시간 남방에 체류할 수 있는 그의 정치력과 간지(奸智)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속성 상, 보스가 현장을 비우면, 현장은 실무진의 해방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모택동은 북경을 벗어났다. 어쩌면 그는 도망치듯 떠났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카르텔에서 밀려난 모택동은 상해, 항주, 무한을 배경으로 권력의 기반을 재정비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북경을 고립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 최고영도자의 히스테리

 

모택동의 남방정치는 단순히 정치적 역학관계로만 설명될 순 없다. 최근에 와서 일부 학자들은 모택동이 북경에서 군사적으로 포위될 수 있음을 알고 남방으로 갔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모택동은 정변에 의해 자신이 실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택동은 틈만 나면 전통시대 중국 역대 조대의 흥망성쇠를 논하면서 신왕조의 창건 후 최초 50년 내에 정변이 일어난 사례를 즐겨 인용하곤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이후 불과 20년도 못된 상황이었다. 그로선 정변의 가능성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흐루쇼프가 불과 1964년 10월 13일 군부의 압박에 굴복해서 실각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 주은래는 중국의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10월 혁명 47주기 기념식에 참석했다. 11월 7일 저녁, 술이 오른 소련의 국방부장이 건들건들 다가와선 중국의 원수 하룡(賀龍)에게 “우리는 이미 흐루쇼프를 제거했으니 이제 너희가 모택동을 제거하라”는 말을 한다. 중국의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무례한 발언이었다. 하룡은 즉시 주은래에 그 사실을 보고한다. 주은래는 곧바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에게 “취중실언인가? 취중진담인가?”하고 따져 물었고, 이후 공식적으로 항의한다.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상세하게 이 사태를 보고했다.

 

1965년 말에서 1966년 초까지 3-4개월 시간 동안 모택동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듯하다. 만약 유소기와 등소평이 주도해서 자신을 몰아내는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면, 북경은 가장 위험한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중국의 자유언론인 양계승의 표현을 빌자면, 당시의 모택동은 “의신의귀(疑神疑鬼)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정신 상태로 내몰렸다. 이것도 귀신, 저것도 귀신이라 여기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자객이 아닐까 의심하는 히스테리 증세이다. 실제로 모택동은 군부의 장성들과 지방정부의 관원들에게 묻고 다녔다. “북경에서 정변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지?” 1966년 5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소화(蕭華, 1916-1985, Xiao Hua)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작년 상해 회의 후에 모주석께선 허세우 동지에게 물었습니다. 북경에서 정변이 발생하면 어째야 하겠소? 그리고 주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정주의는 문화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오. 당, 정, 군 모든 부문에서 나옵니다. 당과 군이 가장 위험하오.”

 

1966년 5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화혁명의 기본입장이 채택된다. 사흘 후, 정치국확대회의는 이른바 “5·16 통지”라는 중공중앙의 문건(중발 [66] 267호)을 현(縣)과 단(團)의 중국공산당 내부조직에까지 반포한다. “5·16 통지”는 1년 후 1967년 5월 16일 신문지상에 공개가 된다. 요컨대 소화의 이 증언은 이미 모택동이 북경의 권력을 제압한 이후에 나온 공식석상의 발언이다. 소화가 공공연히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권력이 모택동에 기울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어떻게 남방에서 북경의 권력 카르텔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1966년 북경의 거리 퍼레이드. 문혁 초기의 제2인자 임표가 모택동의 왼편에 있다.
1966년 북경의 거리 퍼레이드. 문혁 초기의 제2인자 임표가 모택동의 왼편에 있다.

 

 

3. “당이 군을 통솔한다!”

 

모택동은 문혁을 왜 일으켰는가? 최고영도자로서 절대 권력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당시 국가행정의 실권은 유소기와 등소평이 쥐고 있었다. 모택동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최고영도자의 명예를 누리고 있었지만, 뒷전에 밀려난 군주일 뿐이었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파벌 짓기? 언론플레이? 대중선동? 정적의 약점파기? 모든 전술이 다 필요할 테지만 백전노장의 모택동은 일의 머리와 꼬리를 알고 있었다. 현대국가의 핵심은 군사력에 있다. 특히나 머리 붙은 세쌍둥이처럼 당(黨), 군(軍), 정(政)이 일체가 되는 중공정부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습근평(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군사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직위를 겸하고 있다. 당권, 군권, 행정권을 모두 한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덧붙여 그는 등소평 개혁개방 이후 집단지도체제의 철칙으로 유지되던 5년 중임제를 제거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상으로 1950년대 모택동이 누렸던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 세 직책 외에도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창건 주체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서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중국공산당이 존속하는 한 그 누구도 모택동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모택동의 부정은 곧 중국공산당의 부정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59년 이래 유소기는 국가주석이었으며, 등소평은 중앙위원회 총서기였다. 두 사람은 행정의 실무를 장악하고 신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영도자는 바로 모택동이었다. 공식적으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오로지 모택동만이 평화 시에 병력을 이동시키는 군사작전의 명령권을 갖고 있었다.

 

1959년 모택동이 유소기에 국가주석의 직책을 던져주고 물러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군부만은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바로 그해 여름 모택동은 여산회의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국방부장관 팽덕회를 공개 파면했다. 팽덕회의 자리에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국공내전 만주전역의 전쟁영웅 임표를 앉혔다. 모택동의 의중을 잘 파악했던 임표는 1960년대 초반부터 “인민해방군”에서 본격적으로 인격숭배의 프로파간다를 시작했으며, 지난 회에서 다뤘던 문혁이 개시되기 직전 군부의 실력자 라서경(羅瑞卿)을 제거했다. 이 모든 과정이 군부를 장악해 권력을 탈환하려는 작전이었다. 이 당시 모택동과 임표는 손발을 착착 맞춰 핑퐁게임을 하는 듯하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직책은 절대로 내려놓지 않았다. 공산당 총서기는 곧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이 군을 통솔하며, 군은 당을 통솔할 수 없다”는 중국공산당의 철칙이었다.

 

국가란 합법적으로 일정한 영토에서 무력(武力)을 독점하는 조직이다. 합법적 무력의 핵심은 바로 군경이다. 무력의 수준에서 경찰력은 군사력에 비할 바 못된다. 고로 국가권력의 핵심은 군사력에 있다. 누가 총을 쥐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1920-30년대 국민당과의 내전 과정에서 모택동은 공산당군을 이끄는 통수권자로 성장했다. 대장정(大長征)의 드라마를 통해 증명했듯 그는 늘 게릴라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입버릇처럼 중국공산당이 수정주의에 장악되면 산으로 들어가 소비에트를 재건하고 다시 게릴라 전쟁을 벌이겠노라 떠벌렸다. 당이 군을 통솔하기 위해선 우선 군을 장악해야만 한다. 이치상 군권을 장악하면 당권이 따라온다. 그 역은 성립될 수 없다.

 

"전사는 모택독 주석의 저서를 가장 즐겨 읽는다!" 1966년 10월.  《해방군보》. chineseposters.net
"전사는 모택독 주석의 저서를 가장 즐겨 읽는다!" 1966년 10월. 《해방군보》. chineseposters.net

 

4. 친위쿠데타

 

1966년 1월 모택동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일단 항주를 떠나 호북성 무한으로 향했다. 항주 서호의 국빈관과는 달리 무한 동호의 비밀빌라는 그에게 더욱 아늑하고도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군부를 향한 모택동의 원격조정이 시작되었다.

 

북경의 정치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선 우선 그들을 군사적으로 포위해야만 한다. 군대를 움직여서 북경의 외곽을 포위하면 그로써 실상 권력투쟁의 절반이상이 끝날 수 있다. 북경의 외곽을 포위하려면, 수도 방위를 맡고 있는 북경군구(軍區)의 무장을 해제해야만 한다. 북경군구는 중국 10대 군구 중의 하나였다. 천하의 모택동이라 할지라도 과연 어떤 명분으로 북경의 군구를 무장해제한단 말인가?

 

모택동은 야전생활로 단련된 게릴라투사였다. 전쟁광이자 투쟁중독의 지도자 모택동은 모처럼만에 군사지도를 다시 펼쳐들었다. 내전 시절 그의 무훈(武勳)을 상기한다면, 희열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쉬이 떠올릴 수 있다. 지략가 모택동은 꾀를 내기 시작한다. 바로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묘수였다. 당시 중국에 외부의 적이란 다름 아닌 소련이었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중소분쟁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모택동은 소련을 늘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이 레닌과 스탈린의 유지를 저버리고 수정주의의 유혹에 빠져 사회주의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이미 언급했듯 1964년 11월 술에 취한 소련의 장성이 중국의 원수에게 모택동을 제거하라는 말을 할 정도로 중소관계는 어그러져 있었다.

 

모택동은 바로 어그러진 중·소관계를 국내 정치의 떡밥으로 삼았다. 그는 소련의 침입에 대비하라며 군부의 장성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1964년 중국은 핵무기를 자체 개발해서 핵클럽에 가입한 다섯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소련이 중국과 전쟁하는 시나리오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 판타지 대신 모택동은 소련의 기습공격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한다. 전면전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북경을 장악하고 중공의 지도부를 겁박하는 전광적화의 기습공격은 가능할 수 있다. 몽고의 국경에서 북경까지 최단거리는 불과 600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소련이 대중국 군사작전을 펼친다면, 누가 봐도 중국과 몽고의 국경으로 병력을 밀파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소련이 위성국 몽고에 병력을 미리 주둔시켜 놓고 기회를 엿보다 중공정부의 허점을 노린다면, 중국의 수도는 너무나 허약하게 소련군에 포위될 수도 있다. 1120년대 여진족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와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할 때의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다. 수도를 점령당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순식간에 마비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소련 장갑차부대는 24시간 내에 중·몽의 국경을 통과해 북경까지 진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몽의 국경방위가 무너지는 순간, 북경은 소련군에 함락당하고 만다.

 

중국내 재야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66년 2월, 춘절이 갓 지난 후, 모택동은 무창(武昌) 동호(東湖)의 호텔에 각 군구의 사령관과 정위(政委)를 불러 모아 연석회의를 주재했다. 모택동은 장성들을 향해 소련의 실제적 위협을 거듭 강조한 후, 수도방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그는 군사전략 상 효율적인 수도방위를 위해선 중·몽 국경의 방위가 필수적이라 주장한다.

 

“최고의 전략가” 모택동은 장성들을 앞에 두고 일장의 연설을 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국내외 수정주의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소련수정주의와의 대결은 필연적으로 피의 투쟁을 부른다. 중소분쟁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도 있다. 확전은 반드시 핵전쟁을 수반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두려워 말아야 한다. 소련의 인구는 중국의 4분의 1에 불과한데다 도시에 밀집돼 있다. 소련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중국보다 앞서 있지만, 부자는 전쟁을 꺼리지만 빈자는 싸움이 두렵지 않다. 소련이 침입해 오면 그 기회를 타서 블라디보스톡과 흑룡강 너머 3백 만 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실지도 회복할 수도 있다.

 

전시의 긴장을 잃고 관료적 타성에 젖은 장성들에겐 불타는 혁명의 사명감을 일깨웠다. 장성들로선 최고영도자로부터 피가 끓고 호흡이 가빠질 만한 전쟁의 시나리오를 받은 셈이었다. 그렇게 군부의 주요인물들에게 소련의 위협을 강조한 후, 모택동은 북경군구의 부대를 내몽고 지역으로 움직이는 전격적인 춘계 군사훈련의 계획을 세운다. 북경군구의 주요병력을 내몽고로 행군시키고 나면 북경은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 된다.

 

연석회의가 끝난 후 모택동은 북경군구의 상장(上將) 양용(楊勇)과 중장(中將) 요한생(廖漢生)을 남겨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운다. 그는 우선 중장 요한생으로 하여금 병력을 내몽고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춘계 대규모 훈련을 관장하라 명령한다. 요한생에게는 “천리야영”의 기치 아래 병력을 내몽고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중·몽 국경과 중·소 국경을 시찰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반면 상장 양용은 무한에 머물면서 모택동과 함께 군사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최고사령관과 직속부하를 분리시키는 군사관리의 오랜 노하우였다.

 

북경군구의 병력이 내몽고로 이동시킨 후, 모택동은 이제 북경의 외곽을 포위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모택동의 전술은 적으로 하여금 근거지를 떠나게 하는 이른바 “조호리산(調虎離山)”의 간계(奸計)였다. 호랑이가 떠난 산중은 텅텅 빈 성과 같다. 총 한 방 안 쏘고 적군으로 하여금 성을 텅텅 비우게 한 셈이었다. 지략의 공성계(空城計)가 아닐 수 없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과연 모택동은 어떤 병력을 움직여 북경을 포위할 것인가? <계속>

 

1950년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는 "인민해방군." 군사권력은 모택동 권력의 요체였다. 모택동은 군사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에 문화혁명을 일으켜 국가행정의 실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50년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는 "인민해방군." 군사권력은 모택동 권력의 요체였다. 모택동은 군사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에 문화혁명을 일으켜 국가행정의 실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高皐, 嚴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 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8).

錢庠理, 《中華人民共和國史: 第五卷 歷史的變局──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1962-1965)》 (港中文大學當代中國文化研究中心, 2008).

楊繼繩, 《天地翻覆——中国文化大革命史》 (香港: 天地圖書, 2018).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徐志高 主编, 《文革史稿:文革史料彙編(1): 第一冊: 社會主義文化革命》 世界华语出版社,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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