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3회 "대반란의 각본: 독초를 제거하라!"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大反亂의 脚本: 毒草를 除去하라!"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의 수령은 중국의 최고영도자 모택동이었다.

 

처음엔 장춘교가 요문원을 선택했고, 장춘교는 강청과 결탁되어 있었다. 요문원의 초고는 여러 차례에 걸쳐 꼼꼼히 수정됐다. 그렇게 완성된 원고는 최종적으로 모택동에 올라갔다. 모택동은 직접 수차례 원고를 퇴짜 놓으며 수정을 가했다. 대반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은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토막잠이라도 자기 위해선 날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수면제를 과다복용했다. 중국 정치의 심장 중남해(中南海)의 이너써클(inner circle)에는 싸늘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최고영도자 모택동이 대반란의 최초 일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모택동은 왜 하필 역사학자 오함을 타깃으로 선택했을까? 왜 하필 역사극 <<해서파관>>이 혁명의 불쏘시개로 선택됐을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우선 당시의 정치 공학을 살펴보면, 1962년 이후 모택동의 칼끝은 궁극적으로 유소기를 향하고 있었다. 1959년 4월 중순 모택동이 국가주석에서 물러나고 유소기가 국가주석이 되었다. 최고영도자로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주석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었다. 중국에는 단 한 명의 주석밖에 없었다. 중공중앙에서 유소기는 그저 유소기 동지로 불렸을 뿐이었다. 유소기가 국가주석직에 오르면서 중국에는 두 명의 주석이 군림하게 되었다. 국가주석의 영문번역은 "president"이다. 대외적으로 유소기가 "president"로 알려지게 된 셈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모택동의 자존심엔 큰 흠이 생긴 셈이다. 


국가운영의 실권은 국가주석 유소기가 장악하게 되었다. 유소기와 등소평이 과감하게 1950년대의 집산화 정책을 폐기하고 신경제정책을 도입하여 중국의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자 유소기는 점점 더 많은 중대사안을 모택동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모택동은 유소기의 신경제정책이 전형적인 소련식 수정주의의 모방이라 생각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의 질주를 막기 위해 중공 주석으로서 모택동은 혁명의 고삐를 한 시도 늦추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주석으로서 모택동은 이념투쟁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1962년 8월 중공 제8기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 때부터 새롭게 "계급투쟁"을 강조하며 문화혁명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당조직, 정부 및 하위 단위의 부패를 일소하는 이른바 사청(四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엔 부패 근절을 목표로 시작된 이 운동은 점차 사상, 정치, 조직, 경제 분야의 대규모 이념투쟁으로 확대됐다. 모택동은 중앙정부의 간부들을 대규모로 지방의 오지에 내려보내 사청운동을 직접 수행하게 했다. 이미 건국 초기 농촌 마을을 벌집처럼 쑤셔가며 지주와 빈농들에 대한 대숙청이 감행됐었다. 10년도 더 지나서 다시금 계급투쟁의 불씨를 살리려 했다. 지주와 부농이 없어진 상황에서 이제 지주와 부농의 자손들이 숙청 대상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모택동은 주치의를 비롯한 자신의 측근 인사들까지 모조리 지방에 내려보낼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사청운동은 흔히 문화혁명의 전조로 인식된다.

 

흑룡강성 아성(阿城)에서 진행된 이른바 "사회주의 교육 운동"(사청四清운동, 1963-1966) 중 비투(批鬪, 비판투쟁)에 시달리는 부농분자(富農分子)의 모습.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흔히 문화혁명의 전조로 인식된다.
흑룡강성 아성(阿城)에서 진행된 이른바 "사회주의 교육 운동"(사청四清운동, 1963-1966) 중 비투(批鬪, 비판투쟁)에 시달리는 부농분자(富農分子)의 모습. 

 

문화혁명의 불씨는 그러나 쉽게 큰 불로 일어나지 못했다. 모택동은 휘발성이 강한 혁명의 발화체를 찾아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유소기를 수정주의의 수괴로 몰아가는 정교한 이념의 올가미가 필요했다. 역사학자 오함은 북경시 부시장으로서 북경시장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과 결탁된 인물이었고, 팽진과 국가주석 유소기의 인연은 1936년 천진에서 두 사람이 함께 중공중앙북방국을 조직할 때로 소급된다. 

 

"대반란"의 기획자 모택동의 입장에선 역사극 <<해서파관>>이야 말로 가장 손쉬운 먹잇감일 수 있었다. <<해서파관>>이 반혁명과 반당을 선동하는 음험한 역사극이라면, 역사학자 오함 뿐만 아니라 오함의 직접적 후원자인 북경시장 팽진까지도 이념적 파산을 면할 수 없었다. 팽진이 만약 반혁명분자라면, 팽진의 든든한 후원자 유소기 역시 반혁명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오함의 <<해서파관>>은 문혁의 횃불을 당기기 위해 활용된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만약 그렇다면 오함은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인텔리였고, 누명을 썼을 뿐이다.

 

2. "독초를 제거하라!"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에 대한 모택동의 공격이 단순히 정치공학적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오함에 대한 모택동의 증오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해서파관>>이 북경 경극단에 의해 상연된 후 큰 성공을 거두면서 모택동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해서파관>>은  1959년 여름 팽덕회를 파면한 모택동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했다.

 

모택동의 부인 강청은 <<해서파관>>의 상연 직후 이미 남편 모택동의 귀에 오함이 알량한 재주로 "주석님을 능멸하고 혁명을 배신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강청의 견해에 따르면, 오함은 해서를 영웅으로 만들어 팽덕회를 찬양하고, 가정황제의 어두움을 고발함으로써 모택동을 희롱했다. 모택동으로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셈이었다. 그런 모택동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예계의 비평가들은 앞 다퉈 오함의 <<해서파관>>을 칭송해대고 있었다. 비평가들이 오함을 칭송하고 대중이 <<해서파관>>을 찬양할수록 모택동의 증오심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문제는 모택동 자신이 대약진운동 당시 스스로 나서서 "명나라 충신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점이었다. 주치의 이지수(李志绥, 1919-1995)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이 1958년 12월 호남성 장사를 방문했을 때, 호남성 당위원회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 1912-1966)가 처음으로 호남성의 전통 악극 "생사패(生死牌)"를 그에게 선보였다. 충신 해서의 직언에 감동을 받은 모택동은 상부의 압력 때문에 거짓보고를 일삼았던 간부들을 질타하면서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강조했다. 이듬해 모택동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도 상해시장 가경시(柯慶施, 1902-1965)는 최고영도자 앞에서 영웅 해서를 칭송하는 악극을 상연했다. 모택동은 다시금 해서의 강직함을 격찬하며 "해서를 본받으라!" 훈시했다. 

 

호남성 제1서기 주소주는 여산회의에서 팽덕회와 함께 반당분자로 몰려 파면되고 노동개조형에 처해진다. 어쩌면 주소주는 모택동에게 대기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모택동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도로 "생사패"를 상연했을 수도 있다. 문화혁명 발생 직후, 주소주는 반년 이상 비판투쟁에 시달리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반면 가경시는 문혁직전 병사할 때까지 4인방 강청, 장춘교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서 모택동를 추종했던 인물이다. 대약진운동 당시 해서를 영웅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모택동에 대한 조롱이나 비판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모택동이 과연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 외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주치의 이지수의 해석에 따르면, 모택동이 순수하게 대기근의 진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비판적 지식인을 잡기 위한 계략이었을 수도 있다. 모택동은 늘 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자유로운 비판이 필수적이라며 지식인을 유혹한 후, 용감하게 직언하는 지식인을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해왔다. 모택동은 스스로의 말을 가볍게 번복해도 비판도, 견제도 받지 않는 전제군주였다.    

 

1960년대 초반 북경경극단에 의해 경극으로 상연된 역사학자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의 한 장면.  4인방 중 한 명인 요문원은 이 역사극을 "독초"라 선언한다. 이로써 오함의 역사극은 문화혁명의 불쏘시개로 이용됐다.
1960년대 초반 북경경극단에 의해 경극으로 상연된 역사학자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의 한 장면. 4인방 중 한 명인 요문원은 이 역사극을 "독초"라 선언한다. 이로써 오함의 역사극은 문화혁명의 불쏘시개로 이용됐다.

 

1960년대 북경 경극단의 악극 <<해서파관>>은 대성공을 거두웠다. 역사학자 오함은 극작가로서 일약 문예계의 거물이 되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함에 대한 모택동의 증오심이 더욱 커졌을 수 있다. 역사학자 오함의 <<주원장전>>은 오늘날도 학계에서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오함은 1943년 초본의 제목을 "승발(僧鉢)에서 황권까지"라고 달았다. 승발이란 탁발승의 사발이란 의미로 불가에선 흔히 바리때라 불린다. 나중에 오함은 1940년대 부패한 국민당의 장개석을 비판하기 위해 그 책을 썼다고 저술의도를 밝혔는데, 모택동은 이후 직접 오함에게 "주원장전"으로 제목을 바꾸라 권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장개석은 결국 천하를 얻지 못한 채 대만으로 밀려났지만, 모택동은 주원장처럼 천하를 얻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절대권력의 유지를 위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군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흔히 주원장과 모택동 사이의 많은 유사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오함의 <<주원장전>>이 곧 모택동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한 셈이었다. 그 점 역시 오함에 대한 모택동의 증오를 부추겼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 듯, 북경시 부시장 오함은 북경시장 팽진을 통해 유소기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이었다. 바로 그러한 복합적 이유 때문에 모택동은 오함을 문혁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을 공격하는 요문원의 비평은 신경질에 가까운 날카로운 고함소리로 종결된다. 위에 언급했 듯 모택동은 요문원의 초고에 직접 수정을 가했다. 결국 오함을 향한 요문원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모택동의 증오심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해서파관>>이 향기로운 꽃이 아니라 하나의 독초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발표되고 연출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 작품을 칭송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쌓여간다. 유사한 작품들과 평론들도 널리 퍼지면서 큰 영향을 미치니 그 해독성이 심히 크다. 이 사태를 깨끗이 바로잡지 않으면, 인민의 공업(共業)에 매우 큰 해가 될 터이니 반드시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이 토론 중에 계급분석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사고해야만 현실적, 역사적 계급투쟁의 심각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요문원은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이 인민의 혁명투쟁에 직접적 유해(有害)가 되는 독초라 단정하고 있다. 오함은 바로 그 독초를 일궈서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을 방해하는 반혁명분자라는 발언과 다르지 않다. 머잖아 “독초”라는 단어는 오함의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려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오함에겐 이념적 사형선고가 아닐 수 없었다. 문혁기간 내내 "독초"는 부르주아, 자산계급, 반당, 반혁명, 반사회주의 일반을 이르는 가장 강력한 욕설이 된다. 

 

결국 오함은 3년 간 문혁의 폭풍에 휘말려 극한의 고통을 받다가 감옥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에 앞서 그의 부인은 노동개조형에 시달리다 과로에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딸은 거의 10년의 세월을 고통받다가 1976년 문혁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감옥에서 자살한다. 오함의 가족들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문혁 기간 내내 처절하게 짓밟혔다. 실로 9족을 멸하는 혹형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의 사학계를 대표하는 저명한 역사가를 그토록 처참하게 짓밟을 필요가 있었을까? 오함에 대한 모택동의 사적 증오심이 없었다면 설명될 수 없는 사태이다.   

 

문혁 당시 역사학자 오함을 공격하는 홍위병들의 이미지. 위의 포스터에서 홍위병의 창살이 뚫은 "삼가촌(三家村)"은 오함이 1960년대 초반 다른 두 명과 함께 연재했던 신문칼럼을 의미한다. 뒤에선 홍위병은 팔꿈치에 둘둘 말은 요문원의 비평문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을 끼고 있다.
문혁 당시 역사학자 오함을 공격하는 홍위병들의 이미지. 위의 포스터에서 홍위병의 창살이 뚫은 "삼가촌(三家村)"은 오함이 1960년대 초반 다른 두 명과 함께 연재했던 신문칼럼을 의미한다. 우측 상단을 보면, 한 홍위병의 손에 요문원의 비평문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이 들려 있다.

 

3. 편집자의 울분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바로 위에는 “편집자의 견해”가 실려 있었다. “편집자의 의견해”는 학술토론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강조한다. 사상과 문예 분야에선 얼마든지 서로 다른 견해가 충돌할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편집자는 해서와 <<해서파관>>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 상이한 관점, 다양한 해석과 접근방식이 상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해서파관>>에 관해 본격적인 토론을 제안하고, 넓은 독자층의 참여를 부탁하면서서 묘하게도 편집인은 최고영도자 모택동의 1957년 연설문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모택동 동지는 <<중국공산당 전국 선전공적 회의에서의 강화(1957.3.12.)>>라는 에서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들의 정권은 인민민주정권이다. 때문에 인민을 위해서 글을 쓰고 창작을 하기에 유리한 환경이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과학, 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보증이 된다. 만약 옳게 쓴 글이라면, 그 어떤 비평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변론을 통과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히면 된다. 만약에 그릇되게 글을 쓴다면, 비평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안 좋은 일은 없다. 우리의 사회에는 혁명적, 전투적, 비평과 반(反)비평이 모순을 드러내고 모순을 해결하고 과학, 예술을 발전시키고, 각 항에서 좋은 방법을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론을 통해서 비로소 여러 의견 사이의 상호쟁론과 상호비평을 더욱 더 발전시킬 수 있다.우리들의 방침은 다음과 같다. 비평의 자유를 허용한 이상 반비평의 자유도 허용한다. 잘못된 의견에 대해서 우리는 이치를 설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실사구시하고 이치로써 타인을 설득하며, 각종의 그릇된 사상을 극복한다.”

   모택동 동지는 또한 말씀하셨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착오를 줄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많은 사정에 대해 잘 모른다.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변론 중, 투쟁 중, 우리는 이러한 사정을 더욱 밝게 드러낼 수 있으며,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견해와 변론의 결과 진리를 발전시킬 수 있다. 독소를 가진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왜냐면 그러한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물의 투쟁을 통한 발전이며, 변증법적 발전이다.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 제 5면.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 위에 편집자의 견해가 실려 있다. 편집자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강조한 1957년 모택동의 연설문을 인용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하고 있다. 외압에 못 이겨 원치 않는 글을 게재한 편집인의 울분을 엿볼 수 있다. 

 

모택동은 1957년 3월 12일 이 문제의 연설을 통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백화제방의 정신으로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라고 격려했었다. 틀린 생각도 좋고, 어리석은 견해도 좋고, 심지어는 반마르크스적인 주장까지도 좋다며 모택동은 지식인을 유혹했다. 모택동의 유혹에 넘어간 순박하고도 올곧은 지식인들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모택동은 동굴 속의 뱀들이 기어나왔다며 “반우파 투쟁”(1957-1959)을 벌여 수십 만 지식인들을 숙청했다. 편집자는 그 연설이 양모(陽謨, 공공연한 음모)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편집자는 다시금 모택동의 양모를 인용해 “사상의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문원의 칼날이 오함을 겨누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모택동의 연설문을 방패로 활용해 오함을 엄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1940년대 연안시절의 정풍운동 때부터 모택동은 늘 그렇게 함정을 판 후 지식분자들을 꼬드겨 스스로 함정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요문원의 비평문을 보는 순간, <<인민일보>>의 편집자는 거대한 문혁의 태풍을 감지했던 듯하다. 태풍이 온다면 피할 길은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의 지식분자들에겐 모택동의 과거 발언만이 모택동이 일으킨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바람막이였다.  <계속>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高皐, 嚴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 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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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繼繩, 《天地翻覆——中国文化大革命史》 (香港: 天地圖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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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G. Mazur, Wu Han, Historian: Son of China's Times (Lanham, MD: Lexington Books,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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