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 발전이 인간 진보 이끈다는 사상, 원래는 좌파의 과학
인권이야말로 그 시대 도덕 아닌 생산력 수준에 달렸다고 봐야
애완동물, 심지어 가축의 권리마저 따지는 분위기 확산
좌파들이 도덕성 열심히 강조한 결과 아니다
발전의 모멘텀 계속 상실하고 있는 대한민국

2022년 8월 29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제공]
2022년 8월 29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제공]

인류의 인권 감수성은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었다. 1906년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아프리카 피그미족 청년 오타 벵가를 오랑우탄과 함께 ‘전시’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콩고 출신인 벵가는 미국에 붙잡혀와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전시실에 갇혔다가 이후 동물원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벵가는 우리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고, 흑인 목사들이 항의하면서 동물원에서 풀려나왔지만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고 10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863년 미국에서 흑인 노예가 해방된 지 거의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런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 등의 작가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뒤마(페르)가 아프리카 출신 흑인 소년을 구입해 자신의 반려 동물로 삼았고, 심지어 그 사실을 자신의 저서에 당당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불과 150여 년 전에 프랑스의 유명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인물이 거리낌 없이 저런 행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지금의 인권 감각과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이런 사례가 거론될 때마다 인권 감수성이 발달한 좌파들은 그 책임을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고귀한 존재인 인간을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 취급한다는 것에서 심각한 모욕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정말 인권 유린의 주역일까?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리버럴 성향의 지식인들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부조리를 설명할 때 일단 자본의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 타령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자본과 자본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얘기이다. 일단 자본주의를 트집 잡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관계나 논리적인 연관을 따져보지도 않고 일단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바로 그런 현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 자본주의는 사람을 동물원에 가둬 구경의 대상으로 삼는 비인간성의 주역이 아니라, 그 인간을 풀어주고 거기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윤리적 기준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시키는 힘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 좌파들에게 예민한 인권 감수성을 심어준 사회야말로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의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결정적인 계기 자체가 북부의 산업자본과 남부의 면화 농장주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북부의 산업자본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힘이라면 면화 농장은 노예 노동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산업자본은 노예가 필요하지 않다. 아니, 노예라는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장애물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자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이다.

노예에게 일절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노예 노동이 자본가들에게 더 유리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노예 노동은 노예들이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까지 책임져야 한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노동자의 인신의 자유, 계약의 자유, 선택의 자유야말로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유리하다.

그리고 노예들은 면화 농장 같은 단순노동 외에는 써먹기가 어렵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노동은 분화하고 정밀해진다. 노예 노동은 여기에 적응하기 어렵다. 또 하나, 산업자본은 거대한 시장을 계속 창출해야 한다. 하지만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들은 소비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결국 자본주의는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로 만들고, 나아가 그들이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한 제품을 소비해주어야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바로 이 시스템이 노예를 해방시킨 것이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본가의 탐욕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처럼 유교식 선비 문화의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탐욕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탐욕은 죄악의 뿌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탐욕을 공정한 경쟁으로 연결해 사회 전체의 합리성을 제고하는 시스템도 존재한다. 그 시스템이 바로 시장이다. 그리고 이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강화되고 확산되어 사회의 핵심 질서로 자리 잡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다.

노예제를 철폐하고 인권을 보편적인 윤리 기준으로 만든 힘은 싸구려 좌파들의 알량한 도덕성이 아니라 바로 이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과학이다. 인간의 양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동일한 형태, 동일한 분량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불과 몇백 년 전에는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그보다 더 오랜 과거에는 심지어 인간을 동물의 먹이로 던져주고 그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서 열광하며 응원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도 같은 동족을 노비로 부리고 사고팔며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신분이 세습되는 노비제가 불과 130여년 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 것이 자본주의 즉 시장의 힘이다. 자본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싸구려 좌파들은 이 거래와 거기에 동원되는 화폐를 증오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상품화하여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품화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가 늘어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가 확대된다는 의미이다.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고 어린 자녀를 유아원에 맡기는 것을 유치한 감성론자들은 ‘비인간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돌봄 서비스가 상품화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비극은 지금의 시장 경제보다 훨씬 비극적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가 ‘고려장’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은 지금도 유효하다. 과거와 지금의 차이라면 요양원이라는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뿐이다. 돈 없으면 그런 서비스도 무용지물이라고? 맞다. 하지만 적어도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안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 확대이다. 선택지의 확대는 어느 경우에도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그것이 자유의 확대이고 이것이 인권이며 진보의 핵심이다.

더 노골적인 얘기를 해보자. 우리가 진보라고 얘기하는 모든 현상은 생산력 발전의 결과이자, 다시 생산력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생산력 발전을 이끌어낸 힘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서 나왔다. 그래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야말로 진보의 핵심이며 그 반대를 주장하는 이론과 사상은 어떤 경우에도 진보에 역행하는 반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을 예로 들어보자. 여성들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고 생산 현장에서 위상이 높아진 것은 생산력의 발전 즉 도구의 발달로 노동에서 남성 근력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전반적으로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 것은 철저하게 여성 노동력이 창출해내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 남성의 그것에 비교될 만큼 확장됐기 때문이다. 진보는 이런 생산력 발달의 결과이자, 동시에 다시 생산력의 발전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진보의 결과 여성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되고, 다시 생산에 투입된 여성 노동력이 생산력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전반적인 진보의 사이클이다.

여성을 포함해 인권이 향상된 것은 다른 말로 바꾸자면 ‘사람의 값’이 올라갔다는 얘기이다. 사람의 값이 왜 오를까? 입만 열면 인권 따지고 ‘사람이 먼저’라며 인간의 가치에 대한 감수성 강조하는 좌파들의 노력 덕분일까? 인륜 도덕과 사람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인이나 도덕군자들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그 가치가 실현된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생산성 향상의 결과였다. 인간이 평균적으로 생산해내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격이라고 해도 좋다)가 올라갔기 때문에, 즉 사람의 값이 올라갔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좀 더 소중하게 다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권이며 진보이다.

인간이 생산해내는 가치와 무관하게 다른 인간을 잔인하게 대하는 인간들도 있다. 범죄 성향이 강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캐릭터의 문제이지 시대적 전형성을 나타내는 현상은 아니다. 즉, 인권이나 사람에 대한 대우의 문제는 인성이나 인륜 도덕이 아닌, 철저하게 그 시대와 공동체의 평균적인 생산력 수준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최근에는 애완동물이나 심지어 가축의 권리마저 따지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동물들이 생산력 향상의 주역도 아닌데 그들에 대한 대우가 향상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변화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산력 향상에 기인한 부차적인 현상이다. 인간의 값이 올라가자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이나 가축에게도 감정을 이입해 인간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좀더 좋은 환경에서 키운 가축의 육질이 식용에 더 바람직할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하고 있다. 이 모두가 인간의 값이 올라가고 인간에 대한 기대 수준이 폭발한 결과이다. 인간의 도덕성을 좌파들이 열심히 강조한 결과가 아니다.

20세기 말 세기말적 분위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헐리우드의 정신적 종말 현상인지는 몰라도 인류 문명이 완전히 몰락한 상황을 가정한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치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며 어떤 사회를 구성하게 될까? 그런 상황이 됐을 때 인류 문명이 강조해온 윤리와 도덕이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의 작동 원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인류 문명이 남긴 물질적 유산이나 인프라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인간들은 다시 원시 시대의 삶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배를 채울 식량을 뺏기 위해 이웃을 학살하고 심지어 그렇게 죽인 인간의 고기로 요리해 먹을 수도 있다. 성현이 남긴 도덕적 교훈은 설혹 그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해도 그들의 행동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다.

인류 문명은 긍정적 역할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결과도 많이 낳았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해낸 것은 결국 과학의 발전이었다.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다만, 인간이 문명을 유지하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진보는 필요하고 그 진보를 만들어가는 힘은 이성과 합리주의가 만들어내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생산력의 발전이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진보를 이끄는 힘이라는 사상은 원래 좌파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대부분의 좌파들은 과학 대신 도덕성과 윤리에서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찾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다. 그 대중적 인기와 별개로 이런 흐름은 인간의 진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좌파와 우파가 서로 생산력 발전을 놓고 이론과 실천 측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1987년 체제 이후 발전의 모멘텀을 계속 상실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것은 사활을 건 과제라고 본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전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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