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4월 27일 개막된 런던올림픽은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고 이후 올림픽에 적용된 다양한 기준과 규정들이 만들어진 의미 있는 대회였다. 럭비, 레슬링, 사격, 수영, 양궁, 요트, 육상, 체조, 축구, 테니스, 펜싱, 피겨스케이팅 등 110개 종목이 펼쳐진 이 대회는 4회 대회였지만 1896년 아테네에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의 기틀을 탄탄히 한 대회가 되었다. 개막식 때 각국 대표가 국기를 들고 입장하고 선수들이 유니폼을 입기 시작한 것도, 참가 선수는 순수한 아마추어에 한한다는 규정이 마련된 것도 이 대회부터였다. 이 대회에
경회루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 있는 연회 장소이다. 원래 경회루 주변은 사방에 담이 쳐져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담을 허물어 지금은 경회루의 동쪽과 북쪽 담만 남아 있다. 정철이 쓴 에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경회루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은 정철이 부임지로 떠나기 전 경복궁 서문인 연추문(영추문)으로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는 기록이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은 모두 동쪽 담에 있다. 문 이름은 앞쪽부터 자시문,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생환 후 한 말이다. 유리 가가린은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상 교육 덕분에 간신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그는 1955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가가린은 키(157cm)가 작아 2인용 훈련기 착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퇴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대장이 가가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고 교관은 조종석에 쿠션을 깔아주었다. 그제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었다.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오늘날까지도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해 2월, 고종과 왕세자가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8월의 변고(을미사변)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서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다가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67년 이뤄진 ‘알래스카 매각’을 불법으로 규정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푸틴 대통령이 옛 러시아와 소련의 부동산을 찾아내고 관련 권리 등록과 법적 보호 조치를 취하라고 대통령실과 외교부에 지시하는 명령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되찾을 일은 없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이 보도는 한때 러시아가 지배했던 알래스카와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지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보수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알래스카’는 알래스카반도 등에서
조선은 청나라에 두 번이나 침략당한 후 1637년 끝내 항복했다. 조선 임금 인조는 죄수 옷을 입고 삼전도 나루터에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바쳐야 했다. 굴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방어를 위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 매년 예물을 청나라에 세폐로 보낼 것,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하여 우의를 다질 것 등을 강요당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효종이 즉위했는데 효종은 청나라 수도 선양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정교 일치 국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이며 실질적 통치자였다. 지금은 그 영토가 중국 땅이 되어버린 티베트는 당나라 때부터 ‘토번’이라는 이름의 통일 국가였다. 그런데 1950년 중공군이 티베트를 침략하였고 1965년에는 끝내 주권까지 빼앗았다. 중국으로 강제 편입되어 지금은 시창[西藏] 자치구에 속해 있다. 1959년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고 티베트 사람들은 아직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의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영혼이 환생한다고 믿는다
안창호 선생은 성실과 수양과 사랑으로 일관한 국민 교육자이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 정치가이다. 또한 그는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혀준 뛰어난 사상가이다. 안창호 선생은 ‘힘’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임을 절실히 느끼고 우리 민족이 그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계몽했다. 그가 말한 ‘힘’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도덕적인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며 단합하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안 받도록 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서당에서 공부했던 안창호는 17세 되던 해 언더우드가 세운
발해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분명히 살아 있는 고대 국가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것도 698년부터 926년까지 200년 넘게,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발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전에 통일신라 시대라 부르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고쳐 우리 역사에서 발해의 위상을 확실히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발해를 세운 사람은 옛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으로, 초기의 나라 이름은 ‘진국(振國,
독일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주의자들의 강령으로 집필한 은 1848년 2월 21일 처음으로 책으로 만들어졌다. 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의 행동 촉구이다. 자본주의는 그 모순 때문에 당연히 몰락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결국 ‘행동’이 필요한데 이 은 그 ‘행동’을 권장했고 실제 많은 사람이 이에 선동되었다. 이 독일어가 아닌 외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이다. 의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라 은 1904년 2월 17일,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일본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의 원작은 소설가 존 루서 롱이 1898년 발표한 단편소설 ‘나비부인’이었다. 이 소설은 또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가 1887년 발표한 ‘국화부인’에서 영향을 받았다. ‘국화부인’은 피에르 로티가 1885년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35세였던 프랑스 해군 장교는 나가사키에서 18세의 일본 여성과 일종의 계약 결혼을 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왕비가 바로 곁에서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궁궐 저 깊은 곳에서 그런 엄청난 변을 당했으니 고종은 궁궐 안 사람 중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까 두려워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라 다스리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조선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고종은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경복궁에 갇힌 신세가 된 고종은 궁궐 밖에 살던 엄 상궁을 불러들였다. 엄 상궁을 비롯한 몇몇 측근은 외국 공관이 밀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회담이다. 세 나라의 정상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참석한 이 회담의 중점 의제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였다. 이 회담에서 세 연합국 지도자는 독일 분할 점령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 독일인들의 최저 생계를 위해 필수품을 공급해주고 독일의 모든 군수 산업을 폐쇄‧몰수한다고 선언하였다.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한다는 합의도 하였다. 이외에도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김좌진.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일제에 저항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라는 점, ‘장군의 아들’ 영화로도 잘 알려진 김두한의 아버지이며 텔레비전 드라마와 예능에 출연한 그 후손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누군가 청산리대첩에 대해, 그의 업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 쉽게 흔들리고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좌진은 어떤 사람인가? 1889년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의
독일은 세 차례에 걸친 제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황에 대한 충성심의 대가로 인정받은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이 통일한 제2제국, 히틀러의 제3제국이 그것이다. 황제는 있었으나 존재 자체가 모호했던 신성로마제국이나 히틀러의 광기가 이끌었던 제3제국에 비해 빌헬름 1세의 제2제국(이하 독일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보인다. 철혈정책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 정책으로 쌓은 실력에 의해 이룩된 제국이기 때문이다. 독일제국의 기반이 된 프로이센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빈 체제 이후였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1883년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의 개화파 인물들은 속이 타기 시작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급속한 개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에 기댄 수구파가 권력을 잡았으니 기대처럼 빨리 개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였던 것이다. 1884년 개화파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에 있던 군사 중 1,500명을 베트남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때 일본은, 300만 엔을 빌려주고 150명의 군대를 보내줄 테니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제안을 개화파에게 했다. 1884
이조에서 “서원현(西原縣)의 고을 칭호를 강등시킨 지 올해로 10년 기한이 찼으니 청주목(淸州牧)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청주목으로 고을 칭호를 승격시킨 상황에서 공충도(公忠道)는 충청도(忠淸道)로 그 칭호를 전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이도 윤허하였다. 이 글은 1871년 1월 3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원래 조선 8도의 명칭은 해당 도(道) 안에서 으뜸가는 고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를테면 함경도는 함흥과 경성(鏡城),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강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날은 1991년 12월 31일이다. 1922년 12월 30일에 소련이 수립된 지 69년 만의 일이다. 처음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카프카지예 공화국 등이 가입하여 성립되었다. 이후 소련은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벨라루스, 몰도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15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연방 국가가 되었다. 원래 이들 공화국에는
청교도라 불리는 영국의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 후 수많은 난관을 겪어야 했다. 구교인 가톨릭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은 것은 물론 1533년 헨리 8세에 의해 만들어진 영국 국교 성공회에도 저항했기 때문이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자로 성장한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자 청교도들은 숨통이 트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영국 성공회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청교도들은 성공회와 많은 갈등을 겪으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청교도 중 일부는 종교 탄압을 피해 1609년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할 수
1948년 5월 10일은 우리 국민이 역사상 처음으로 참정권을 갖고 우리의 대표를 선출한 역사적인 날이다. 5‧10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국회를 열고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뽑았다. 헌법을 만들고 나라 세우는 것이 임무였던 제헌 국회에서 새 나라의 이름이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임시 정부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새로 뽑힌 국회의원들이 다수결로 정한 ‘새 이름’이다. 정부의 형태에 대해서도 열띤 논쟁이 오갔다. 국회의원을 많이 배출한 한민당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고집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