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월 18일 – 빌헬름 1세의 즉위와 독일제국 선포

 독일은 세 차례에 걸친 제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황에 대한 충성심의 대가로 인정받은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이 통일한 제2제국, 히틀러의 제3제국이 그것이다. 황제는 있었으나 존재 자체가 모호했던 신성로마제국이나 히틀러의 광기가 이끌었던 제3제국에 비해 빌헬름 1세의 제2제국(이하 독일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보인다. 철혈정책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 정책으로 쌓은 실력에 의해 이룩된 제국이기 때문이다. 

 독일제국의 기반이 된 프로이센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빈 체제 이후였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중심이 된 빈 체제는 유럽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였다. 이때 독일은 프로이센을 포함한 서른다섯 개의 영방(領邦)과 네 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독일 연방으로 정리되었고, 프로이센은 작센 지방 5분의 2, 베스트팔렌 지방과 라인강 왼쪽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바야흐로 프로이센은 ‘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1861년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었다. 그가 재상으로 임명한 비스마르크는 “지금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과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언론을 통제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철혈 정책’을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스마르크는 외교도 다양하게 펼쳐나갔다. 장차 독일 연방을 통일할 때 생길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을 대비해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와 독일제국 선포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프-프전쟁) 중에 이뤄졌다. 프-프전쟁 이전부터 유럽 대륙 여기저기서는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우선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오스트리아를 정리하고 싶어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서로 싸우기를 바라고 있었다. 프랑스의 멕시코 원정 실패로 인한 국내 비판 여론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이런 속셈을 눈치챈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만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할 때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보상도 약속했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한편, 보험 삼아 오스트리아와도 비밀 조약을 맺었다.  

 1866년 6월 17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했다. 위기감이 팽배하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이 기어이 터진 것이다. 이 전쟁은 8월 23일, 오스트리아가 항복하면서 7주 만에 끝났다. 그런데 승리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차피 문서도 없이 말로만 막연하게 맺어진 약속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응징하기 위해 동맹을 모았지만 오히려 국제적인 고립 상태를 면치 못했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던 오랜 숙적 영국은 프로이센을 응원했다. 러시아도 크림전쟁 이후의 이해 관계 때문에 프랑스의 동맹 제의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적국 오스트리아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전쟁 복구와 자국 내에서 일어난 헝가리인들의 봉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로마 문제로 프랑스와 갈등 중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유럽 대륙에서 프로이센이 팽창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키도록 자극하고 도발을 일삼았다. 기어이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프로이센은 방어 전쟁임을 강조하며 프랑스의 도전에 응했다. 이 전쟁이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다. 

 프로이센은 오래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연방 국가들이 일제히 프로이센을 도와 프랑스군과 싸웠다. 결국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였다. 9월 19일에는 파리를 포위하고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 황제를 폐위시켰다. 1871년 1월 28일, 끝까지 저항하던 파리 시민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항복했고 프-프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해 5월 18일 프로이센은 프랑스 임시 정부와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고 배상금 50억 프랑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넘겨받기로 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황제 즉위식을 갖고 있는 빌헬름 1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모습이 부각된 것이 인상적이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황제 즉위식을 갖고 있는 빌헬름 1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모습이 부각된 것이 인상적이다.  

 

 파리가 함락되기 열흘 전인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황제 즉위식을 하고 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전쟁 중에 남의 나라 왕궁의 연회실에서 황제 즉위식과 제국 선포식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얄궂어 보인다. 안 그래도 프로이센의 배신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던 프랑스 사람들의 분노와 절망감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잘 알려진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은 이 시대의 알자스·로렌 지방을 시간적‧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사실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과 프랑스 국경 지대에 있는 비옥한 땅으로 전쟁의 결과에 따라 으레 이 나라로 저 나라로 소유권이 넘나들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빼앗긴 땅’이 된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 사람들의 절망감이 유난히 절실하게 표현된 듯하다. 베르사유궁전에서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도 전해진 까닭이었을까?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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