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4일 – 얄타회담 시작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회담이다. 세 나라의 정상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참석한 이 회담의 중점 의제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였다. 이 회담에서 세 연합국 지도자는 독일 분할 점령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 독일인들의 최저 생계를 위해 필수품을 공급해주고 독일의 모든 군수 산업을 폐쇄‧몰수한다고 선언하였다.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한다는 합의도 하였다. 이외에도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얄타회담은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 장차 한국의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중요한 회의 참석하기 위해 이승만은 충칭 임정과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 밖에서 ‘얄타 밀약’을 폭로하였다. 또 ‘태프트-카츠라 밀약’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밀약 체결을 예방하거나 이미 체결된 밀약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선 3월 8일 충칭 임정은 이승만을 샌프란시스코 연합국 회의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곧바로 한국대표단의 참가 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회원국의 합의에 따라 1945년 3월 1일까지 유엔에 가입한 국가들만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초청한다”라는 원칙을 내세워 거부했다. 이승만은 4월 20일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도 초청받았다고 지적하면서 옵서버 자격으로 참관하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히스는 5월 14일에야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코리아의 어떤 정부도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번 회의에 코리아가 참가할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듯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5월 8일 『시카고 트리뷴』 지에, 5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이그자미너』 지에 미국이 카이로선언의 정신을 위반하고 한국대표단의 대회 참가를 거부한 이유는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3개국 정상들이 한반도 문제를 놓고 ‘밀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가 폭로한 이른바 ‘얄타 밀약’의 내용은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까지 조선을 소련의 세력 범위 안에 둘 것을 소련과 동의했다. 더 나아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과 영국은 조선에 대해 어떠한 약조든 하지 않을 것에 의견이 일치되었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정보를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여 미국으로 귀화한 신뢰할 만하고, 평판이 높은 비밀 정탐원’ 에밀 고브로우로부터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5월 15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한국에 관한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에서의 비밀 협정이 최근에 밝혀짐으로써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줄 압니다. 저도 매우 놀랐습니다. 각하께서는 비밀 외교에 의해 한국이 희생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실 줄 압니다.

 1905년에 한국을 일본에 팔아버린 비밀 협정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다행히 이 얄타협정은 바로 이곳 국제연합회의 도중에 밝혀졌습니다. 저희는 각하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3,000만 명의 한국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국제연합의 회원자격심사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각하의 지시만이 저희가 회의에 참석할 길을 열어주고 회의에서 발언할 기회를 갖게 해 것입니다.… 

 트루먼에게 보낸 이 서한에 대해 미 국무부의 국무장관 대리 조세프 그루는 얄타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어긋나는 어떠한 비밀 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해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얄타 밀약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자 “3국 정상 사이에 많은 주제가 토론되었고 약간의 일반적인 이해가 성립되었지만 아무런 비밀 협약도 체결되지는 않았다”라고 해명하고 이 점에 관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 정부는 5월 24일자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얄타 밀약설을 반박하면서 이것은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의 무책임하고 황당한 주장’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18일에 밀약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3국 정상들이 한국에 관한 비밀 협정을 부인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하는 전보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얄타 회담의 주역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얄타 회담의 주역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얄타에서 맺어진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은 얄타협정이 맺어진 지 1년만인 1946년 2월 11일에 공개되었고, 얄타회담의 전모는 1955년에 공개되었다. 이렇게 공개된 자료들에 의하면,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1945년 2월 8일의 양자 회담에서 한국에 대해 미‧소‧중‧영 4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독립시켜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처칠이 전쟁 참가에 대한 대가로 한반도의 전부 혹은 일부를 소련군의 지배 아래 두겠다고 약속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해방 직후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루스벨트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북한 지역 점령을 허용한 결과라고 추단했다.  

 얼마 전 발굴된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얄타에서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전하는 과정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고, 조선에서 일본군을 축출한 후 소련, 미국, 중국이 조선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5년 2월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소련이 대일 전쟁을 개시한 직후 소련군이 한반도의 일부를 점령하는 데 대해 구두 합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여하튼 얄타 밀약설을 터뜨림으로써 이승만은 소련으로부터 극단적인 반소‧반공주의자로 낙인찍혔고, 미 국무부는 그를 기피 인물로 다시 확인하였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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