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종배 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 학생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자료를 통해 당시 시민군 지도부이 움직임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검찰에서 “계엄군과 계속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이 여론도 민주주의·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어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가 전복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경기 안양동안을‧5선)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신군부에 맞서 싸웠던 투쟁심과 5선 의원의 경륜(經綸)을 내세워 당 대표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심재철 의원은 2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펜앤컬처센터 2층 카페에서 가진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대표 겸 주필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한국당 대표는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며 자신이 적임자임을 강조했다.심 의원은 한국당이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이유를 '책임정치'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때 그때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변호인이 제출한 상고이유서, 그리고 김대중 피고의 자필로 작성한 상고이유(보충)서다. 김대중 피고는 자필 상고이유(보충)서에서 "본인은 전 정치생활을 통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나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면서 "재판부가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 공정한 판결을 내려 역사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심판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총선을 앞두고 남로당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무장폭동을 일으키면서 벌어진 제주 4.3 사태를 군경(軍警)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군법회의에 대해 법원이 소송절차 미비를 이유로 사실상 '불법 재판'이라는 판결을 내렸다.제주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는 17일 임창의씨(99·여) 등 제주 4·3사태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청구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생존 수형인
"우린 왕이 되기 위해 떠날 거요!"천하의 잡놈과 사기꾼이 왕이 되길 꿈꾸었다. 피치와 드라보트는 거사의 성공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과 술과 여자를 금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산 넘고 물 건너 사막 건너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목적했던 땅에 도착한다. 그곳은 왕도 대통령도 없는 원시 부족, 족장과 주민들은 드라보트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믿게 된다. 그들이 가지고 온 스무 정의 총과 주민들이 신이라 믿는 석상에 코를 비비며 "내가 신의 친구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기이한 우연까지 겹치자 사제들마저 드라보트를 신의 아
이 문건은 5월18일 오후 광주에 투입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지다. 안부웅 대대장은 광주에 투입된 이래 계속 시위대에 쫓겨다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포위돼 생사의 기로에 섰고, 시민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안부웅 대대장은 초기에는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에게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조준사격은 없었다”고 했다가 신문이 거듭되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 옥상 건물에 대원을 배치해 조준사격을 했다”,
베네수엘라, 초인플레이션 국가 명단에 들어가다경제학자 스티브 행케(Steve Hanke)는 세계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통화들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는 일을 수년 간 해오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통화인 볼리바르(Bolivar)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행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은 60,324퍼센트로서 볼리바르는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되었다.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베네수엘라 경제가 한창 좋을 때 볼리바르가 남미(Latin America)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 중 하나였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공 창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1차 피의자 신문조서다.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허화평, 그리고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로서 이들이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이며 그중에서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삼두마차의 리더였다는 것이다. 허화평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모든 정치적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실행된 것인 만큼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를 대표로 한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편집자 주] 북한 정치인 황장엽(黃長燁)은 1997년 1월 2일에 대한민국에 귀순했다. 북한을 유지하는 사상체계인 주체사상을 확립한 황 씨는 김일성의 사망(1994년 7월 8일) 후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주중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황 씨는 함께 귀순한 김덕홍(金德弘) 씨를 통해 망명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글로 정리해 한국인 이연길 씨에게 전달했다.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인 이연길 씨는 황 씨와 직·간접적으로 접촉을 유지하면서 황 씨의 귀순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황 씨가 귀순 직전(1997년 1월 2일)에 작성한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직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던 주영복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 내용이다. 신군부 집권의 협조자였던 주영복 씨는 1979년~1980년 당시 전두환 장군의 압력과 자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과 함께 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주영복 씨는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전두환 장군 측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으며, 이날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까지 전 장군이 요청하여 시행되었
[편집자 주] 이 문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됐던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검찰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권정달 씨는 1980년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 을 작성 집행하여 전두환 권력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 정부에서 수사가 진행되자 검찰 진술에서 “시국수습방안은 실질적인 집권 시나리오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신군부(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정달 씨의 진술 내용은 상하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와 5·18, 5공화국 창출의 한 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조서의 일부 내용이다. 12·12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도와 5공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당시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가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수사 과정에서 검찰 진술을 했는데, "민주주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상대적인 다수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광주시민의 명예회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부터 제5공화국이 탄생한 1980년 12월 31일까지의 주요 일지를 정리한 자료다. 박정희 시해사건과 유신체제의 붕괴, 이를 기회로 삼아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경쟁하기 시작한 3김 씨(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들의 선전선동으로 대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가 격화되었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와중에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국제물가가 폭등하면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혼란이 가열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
[편집자 주] 이 자료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수사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은 정치 보복”이라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합천에서 강제 연행돼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찰로부터 세 차례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된다. 이 신문에서 전 전 대통령은 “12·12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의심받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도 본인의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자회사인 'EBS미디어'의 정호영 대표이사가 최근 6.25 침략전쟁 가해자인 북한 3대세습 독재자이자, 국제사회에서 인권범죄자로 지목된 김정은을 "세계 최연소 국가원수(元首)"라고 적극 미화(美化)하는 '아동용 교구(敎具)'가 판매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9일 대표직을 사퇴했다.정호영 대표가 물러남에 따라 EBS미디어는 당분간 손홍선 전무가 대표 직무대행을 맡는다. 손 직무대행은 "회사의 임직원 모두가 최근 발생한 사안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17일 심야, 신군부 세력에게 연행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필로 기록한 정치 이력이다. 두 차례의 진술서에는 김대중의 해방 후 활동 행적, 6·25 당시의 인민재판 목격담,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과정, 좌익사상 문제로 의심받게 된 계기, 미국과 일본에서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과 관련한 자기고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진술서를 통해 김대중 씨는 "해방 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을 보급하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의미, 올바른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배움터인 이승만학당이 22일 대전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제2회 전국순회강연을 개최했다. 이날 강연은 '이승만의 자유와 평화'라는 주제로 열렸고 강연자로는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과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대표 겸 주필이 나섰다. 이날 현장에는 3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대전광역시의회가 지난 9월 3일 대전 서구에 위치한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