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당시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 부위원장 체험기, “광주 시위 확대, 과도정부 전복될 것으로 믿어”
광주사태 당시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 부위원장 체험기, “광주 시위 확대, 과도정부 전복될 것으로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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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1.22 10:33:38
  • 최종수정 2019.01.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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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조치하고 호남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 예상자인 김대중 등 민주 인사를 전격 구속하는 등 과도정부의 비민주적,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심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도청 내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저의 정치적 소신인 민주회복과 과도정부를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위와 같이 폭동사태 기간 동안 폭도들을 지휘하여 계엄군과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종배 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 학생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자료를 통해 당시 시민군 지도부이 움직임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검찰에서 “계엄군과 계속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이 여론도 민주주의·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어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가 전복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1980년 5월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로 야기된 시위사태가 확산되어 광주 시가지가 시위대로 뒤덮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수습대책위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맞섰다. 사진은 금남로 일대로 몰려나온 광주시민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로 야기된 시위사태가 확산되어 광주 시가지가 시위대로 뒤덮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수습대책위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맞섰다. 사진은 금남로 일대로 몰려나온 광주시민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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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
피의자 신문조서(제1회 요지, 1980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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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연설

문) 5.18 광주사태에 관여하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1980년 5월 22일 오후에 있었던 전남도청 앞 시민궐기대회에 참석하여 5.18 광주사태의 진행 여부를 예의 주시하던 중 소위 시민 대표라는 사람들이 계엄당국에 갔다 온 결과에 대해서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그중 장휴동 씨의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서는 결국 폭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모든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시내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넘겨주자”라는 극히 미온적이고 광주 시민들을 우롱하는 듯한 발언에 흥분했습니다.
곧바로 장휴동 씨가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도청 앞 분수대 위로 뛰어올라가 장휴동 씨로부터 마이크를 빼앗은 다음 “장휴동 씨는 정치인으로서, 시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주 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사태 수습만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 수습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된다”라는 간단한 연설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금번 5.18 광주사태에 간여하게 된 것입니다.
문) 피의자가 도청에 들어가 소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시오.
답) 전시와 같은 연설을 한 후 도청 앞 남도회관 부근에서 모여 있던 대학생 200여 명과 함께 금번 사태에 따른 논의를 하고 있다가, 김창길이 “이번 사태는 대학생이 책임을 져야 될 성질이므로 우리들이 사태 수습을 하자”라고 제의하여 그 제의에 따라 사태를 수습할 대표로 종합대학교 학생 각각 5명, 전문대학교 학생 각 2명씩을 선출하기로 한 결과 전문 대학생은 그 자리에 없어 뽑지를 못하고 전남대  생 김창길, 정해민 등 5명, 조선대 학생 본인 및 양원식, 허규정 등 5명이 선정되어 전대학교 교수 명노근, 동(同) 송기숙과 함께 1980년 5월 22일 16시경 이미 폭도들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던 전남도청 1층 서무과에 들어가 소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문)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구성은 어떠했는가요.
답) 1)위원장 김창길 2)부위원장 김종배 3)총무 정해민 4)대변인 양원식 5)무기수거반 허규정 6)고문 명노근 송기숙으로 구성했습니다.
문) 위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조직 목적은 무엇이었는가요.
답) 당시 광주 시내에는 수천 정의 총기가 흩어져 있어 흥분한 데모대원들이 각처에서 탈취한 차량 등으로 시위를 하고 광주 외곽 경계에 임하여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는 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데모대의 질서를 잡아 명분 있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우리 대학생들이 나서서 위 조직을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문) 피의자가 동 조직의 부위원장으로서 행한 일을 진술하시오.
답) 본래 위 조직의 부위원장은 위원장의 공석 시에 위원장을 대리하고 보통 때에는 위원장을 보좌하여 조직 전체를 총괄하는 것이 그 업무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장례 담당’이라는 중요한 일을 맡아 주로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망 폭도의 시체를 도청 공터에 가져다 놓은 다음 가족들로부터 신원이 확인되면 도청 앞 상무관 건물에 운반하고 그 외 관, 광목 등 시체 처리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총기 자진반납하고 구속자 34명 데려와

문) 당시 계엄당국과의 협상 진행과정은 어떠했는가요.
답) 1980년 5월 23일 10시경 저희들이 회수해 놓은 카빈 소총 및 M1 소총 2000여 정 가운데 일부인 100정을 시민 대표 장휴동 등과 학생 대표 김창길이 계엄분소에 가지고 가서 반납한 후 5.18 사태로 구금되었던 사람 34명을 신병 인수해 왔는데 구체적으로 계엄당국과의 협상 내용에 관해서는 김창기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문) 계엄당국에 무기를 반납하지는 김창길의 주장에 대해서 피의자는 어떤 입장에 있었는가요.
답) 김창길이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하자는 주장을 한 데 대해, 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 반납을 하는 것으로 현재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고 가라앉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주는 정도의 정부 당국의 양보가 있어야만 되므로 이 정도의 요구사항은 관철해야 된다”는 결의를 계속 표명했습니다.
또한 1980년 5월 23일 14시경 전남도청 현관에서 당시 시민수습책위원이었던 전남대학교 교수 오병문에게 도청 내의 수습대책위원회 학생들의 동향을 설명해 주면서 “위원장인 김창길이 아무 대응책도 없이 무조건 무기 반납을 하자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해 가지고 는 도대체 사태 수습이 될 것 같지 않다. 광주 시민이 폭도가 아니라는 해명과 광주사태에 따른 피해보상, 사망자에 대한 시민장 준수, 광주사태 관련자 사후 처벌금지 등의 최소한의 요구사항 정도는 관철된 연후에 무기를 반납해야만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며 동 교수로부터 자문을 구했습니다. 동 교수는 “소신껏 하라”고 하며 저의 주장이 옳다고 하며 격려하여준 바 있습니다.
문) 제1차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결의한 계엄당국에 대한 요구사항은 어떠했는가요.
답) 1980년 5월 24일 13시경 도청 1층 서무과 사무실에서 위원장 김창길 사회로 수습대책위원들이 참석하여 계엄당국에 지시할 요구사항을 결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금번 광주사태에 대해 일부 불순분자들인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현 광주사태는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2)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3)5.18 사태로 구속된 학생을 전원 석방하라.
4)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납득이 가도록 하라는 4개항이었습니다.
문) 위 4개항의 결의사항은 그 후 어떻게 발표했는가요.
답) 동일(同日) 15시경 김창길과 본인 둘이서 도청 2층 부지사실에 들어가 장휴동, 장세균, 이종기, 최한영 등 20여 명의 시민 대표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위 4개항의 결의사항을 김창길이 취지 설명을 하고 제가 항목별로 발표를 했습니다.

총기 반납 문제로 강온파 갈등

문) 피의자는 김창길과 무기 반납 문제에 관해 언쟁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동년(同年) 5월 24일 21시경 도청 서무과에서 학생 수습대책위원회 회원이 모여 회의를 하던 중 김창길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면 광주시민 전체가 죽게 되니 빨리 무기 반납을 하자”라고 주장하므로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이므로 무기 반납은 불가능하다”라고 강력히 무기 반납을 반대한 바가 있습니다.
문)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1차 조직개편에 관하여 진술하시오.
답) 동년 5월 25일 01시경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조직을 개편했는데, 그 개편 내용을 보면 1)위원장 김창길 2)부위원장 총무 겸 대변인 황금선 3)부위원장 겸 대변인 및 장례 담당 김종배 4)상황실장 박남선 5)경비담당 김화성 6)기획실장 김종필 7)무기 담당 김경섭 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조직 개편을 한 이유는 정해민, 양원식 등 일부 학생들이 의견충돌로 조직에서 이탈하여 일할 사람이 부족하므로 이를 일반인도 포함하여 메워 넣기 위해서 단행한 것입니다.
문) 동월 25일 16시경 있었던 시민대표들의 회의 시 참석한 일이 있는지요.
답) 동월 25일 16시경 도청 내 부지사실에서 시민대표 등의 회의가 있으므로 학생 대표도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듣고 상 피의자 허규정과 함께 참석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동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누구이었는가요.
답) 동월 14시경부터 남동 성당에서 회합을 가진 후 도청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 외 별도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참석자는 홍남순, 이기홍, 이성학, 조아라, 이애신, 장두석, 조비오, 이종기, 김성용 등 약(원본불량으로 확인불가)여 명이었습니다.
문) 당시 시민대표 회합에서 시민대표들이 발언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요.
답) 위 시민대표 회합에서 홍남순은 “현 단계에서 총을 반납해서는 안 되며 계속 강경하게 투쟁하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왔다”라는 발언을 했고, 김성용 신부가 저에게 “학생들도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총기를 반납하지 말고 끝가지 투쟁하라”고 격려해 온 일이 있습니다.
문) 동일(同日) 윤개원을 만나 한 일을 진술하시오.
답) 동일 19시경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윤개원을 만나 정상용, 박효선, 김영철, 윤강옥, 이양현, 정해직 등 YWCA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 제가 “지금 도총 내에서는 위원장인 김창길이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자고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우리 함께 힘을 합쳐서 강경하게 대처해 나가자”라고 제의하여 동의를 받았으며, 이에 윤개원이 “앞으로는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적인 문제를 요구 사항에 포함시키도록 하자”는 제의를 하여 그와 같이 하기로 위 참석자 전원이 이후 위 정치적인 요구 사항도 포함시켜 관철 시까지 계속 강경하게 투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문) 제2차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조직개편에 관하여 그 경위를 설명하시오.
답) 동년 5월 25일 21시경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장성옥, 윤개원, 허윤정 및 본인 등 4명이 모여 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활동하기로 결의한 후 1)위원장 본인, 2)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 3)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 4)대변인 윤개원으로 하기로 정하고 그 외 세부조직은 윤개원과 정상용이 알아서 YWCA에서 들어온 사람들로서 채워 넣기로 정했습니다. 그 후 동원 26일 오전에 비로소 모든 조직이 완전 구성되었는데, 그 보증된 내용을 보면 1)홍보부장 박효선 2)기획실장 김영철 3)민원부장 정해직 4)기획위원 이양현 윤강옥 5)상황실장 박남선 6)보급부장 구성주 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계엄군 시내 못 들어올 것으로 믿어

문) 대학생 70~80여 명이 YWCA에서 도청 내로 들어오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동월 25일 21시경 도청 내에서 대학생 70~80여 명이 있는 자리에서 재야인사들인 김성용, 조비오, 이성학, 홍남순, 이종기, 이기홍 등이 동 대학생들에게 수고한다고 하며 격려해 주는 이야기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재야인사들이 구체적으로 한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답) 당시 김성용 신부가 “그 동안 우리 전라도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느냐, 모든 근원은 토지에서 나오는데 농촌을 얼마나 혹사했느냐, 전리도는 농토가 대부분인데 농업정책에 실패하여 고생이 많았다. 이번 광주사태는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광주 시민의 울분의 표현이다. 같이 노력하여 우리가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자”라고 말한 사실이 있으며 그 외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5월 25일 도청에 들어온 재야인사들은 도청 내에서 주로 무엇을 했는가요.
답) 도청 2층 부지사실에 모여 밤새도록 광주사태에 관하여 상호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5월 26일 새벽에 도청 내에 비상이 걸린 일이 있나요.
답) 5월 26일 07시경 광주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진입해 온다는 첩보가 들어와 도청 내에 비상을 걸어 경계를 강화하고 홍보부서에서 주도하여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한다고 하면서 가두방송을 하러 다녔습니다.
문) 시민궐기대회는 곧바로 개최되었는가요.
답) 동일 10시경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당시 계엄군은 진입해 들어왔는가요.
답) 그 후 사정을 알아보니 계엄군이 진입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서울과 목포 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뚫어 놓기 위해 약간 이동한 것이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어 계엄군은 절대 시내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기동타격대 편성하여 광주 지켜

문) 피의자가 위원장이 된 이후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 1980년 5월 26일 12시경 정상용과 함께 도지사실로 전남도지사 장형태를 만나 매스컴에서 광수 시민들을 폭도라고 보도한 데 대하여 항의하던 중, 동인(同人)에게 “광주 시민이 폭도라는 누명만은 벗어야 되겠다”, “대통령 담화문 내용을 믿을 수 없다”, “대통령의 광주 사태 담화 발표 후 이어서 광주사태 일부 사실 TV 방영은 우리들을 더욱 흥분시켰다”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동일 14시경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광주시장인 구용상 및 도청 각 국장들에게 “1일 쌀 1가마니 반씩 제공해 달라”,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해 달라”, “시내버스를 제공해 달라”, “상가를 개점토록 해 달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대부분 승낙을 받고 유류 제공에 대해서는 보류된 바 있습니다.
문) 기동타격대는 언제 편성되었는가요.
답) 동월 26일 10시경부터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시에 의해서 윤석우와 이재호가 기동타격대를 편성했습니다.
문) 피의자가 기동타격대에 관여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동년 5월 26일 14시30분경 도청 2층 기획관리실에서 기동타격대 대원 약 30여 명이 집합되어 있는 가운데 “지금 우리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 시내가 너무 무질서하게 되면 도청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지가 나빠진다.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시내 치안질서 유지와 순찰의 임무를 부여하고 여러분들만이 총을 들고 시내 순찰을 하며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줄 테니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달라”는 내용의 격려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시민 대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동일 15시경 도청 내 부지시사실에서 김신근 목사 외 성명 불상자 3~4명으로부터 모금 목표 1000만원 중 수금했다는 금액 중 일부인 금 100만 원을 현금으로 받은 일이 있습니다.
문) 위 돈은 어디에 사용했는가요.
답) 폭도들의 장례에 필요한 관, 광목, 향 등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무기반납은 곧 죽음"이라며 무기 반납 반대

문) 전 위원이었던 김창길이 무기 반납을 제의한 일이 있었는가요.
답) 동일 18시경 도청 내 부지사실에서 시민대표 및 학생대표들인 이종기, 김재임, 장세균, 조비오, 조아라, 김화성, 정상용, 황금선, 구성주, 노수남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김창길이 “오늘 낮에 계엄 분소에 다녀왔는데 계엄당국에서 금일 24시가 무기 반납 시한이라고 하더라. 빨리 무기를 반납하자”라고 제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피이자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요.
답) 김창길이 위와 같이 무기 반납을 제의한 데 대하여 본인은 “지금 무기를 반납하면 전부 죽으란 말이냐. 나는 여태까지 시민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여 온 것이다”라고 무기 반납에 심한 반대의사 표시를 한 후 밖으로 나와 2층 복도에서 상황실장 박남선을 만나 동인에게 “지금 김창길이 우리들을 계엄군에게 넘기려고 한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위 회의에서 결론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답) 저는 그 회의 도중 기분이 나빠서 나와 버렸는데 박남선이 저의 말을 듣고 회의장에 들어가 무기 반납 제의를 묵살시켜 결국 위 회의가 무산되어 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그 후 피의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 동일 19시경 도청 2층 기자실에서 ‘보도’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30대 가량의 성명불상자로부터 “국내외의 여론이 광주사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5일만 더 버티면 문제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격려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문) YMCA에서 도청 내로 들어온 예비군은 어떠한 경위를 거친 것인가요.
답) 동년 5월 26일 23시경 YMCA에서 성명불상자로부터 “YMCA에 예비군 등이 대기 중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라는 쪽지를 전달받고, 저는 “지금 도청 내에는 수용능력이 부족하니 우선 YMCA에 대기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 후 5월 27일 03시경 도청 내에 비상이 걸렸을 당시 상황실장 박남선이 본인에게 “YMCA에 가서 예비군 49명을 인솔해 가지고 무장시켜 5개조로 편성한 후 도청 밖 외곽지에 배치했다”라는 보고를 들은 바 있습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체포돼

문) 피의자는 정부 종합청사 상황실에 계엄군의 진입 여부 확인 전화를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동원 26일 23시30분경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들어온다는 첩보를 받고 정부 종합청사 상황실로 전화를 해서 계엄군의 진입 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 성명불상자로부터 “계엄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라는 말을 듣고 제가 “계엄군이 선제공격해 오면 우리도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계엄군의 진입 당시 피의자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는가요.
답) 동월 27일 03시경 도청 내에 비상이 걸리면서 총소리가 나서 계엄군이 진입해 들어오고 있음을 확인하고 도청 정문 숙직실(무기고)로 가서 사람들이 무기를 지급받고 있는 사실을 보고 나서 2층 기자실로 올라와 있다가 동일 04시경 진입해 들어온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와 같이 도청 내에서 활동할 당시 광주 일원의 상황은 어떠했는가요.
답) 데모 군중들이 경찰서 등 각종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카빈, M1소총 등으로 무장한 채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과 경찰이 철수함으로써 광주 시내의 전남도청 및 법윈 기타 관공서가 기능 마비되었고 극도의 치안 부재 상태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상황이었습니다.
문) 위와 같은 상태가 야기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계속되는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된 금년 5월 18일 이후에도 전개되어 이를 진압하려는 계엄군과 데모대 간의 유혈충돌이 기폭제 역할을 하여 급기야 광주 일원의 폭동사태로 발전된 것입니다.
문) 기폭제의 역할을 한 대학생들의 데모 당시 구호는 무엇이었는가요.
답)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과도정부 퇴진하라”는 등이었습니다.
문) 위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고 데모를 하던 행위의 연속으로 확대된 폭동사태에 피의자가 가담한 후 폭도를 지휘하여 계엄군과 대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저는 금번 5.18 광주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사태의 추이를 예의관망하고 있었던 바, 계엄군이 광주에 내려와서 가혹한 살상행위로서 데모대를 진압했고, 시민들은 이에 격분하여 무기고를 탈취, 무장한 채 광주 일원을 장악했으며, 정부 당국에서는 계속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규정짓고 이를 물리적으로 진압하려고 하고 있어 정부의 처사에 대해서 크게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갑자기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조치하고 호남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 예상자인 김대중 등 민주 인사를 전격 구속하는 등 과도정부의 비민주적,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심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도청 내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저의 정치적 소신인 민주회복과 과도정부를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위와 같이 폭동사태 기간 동안 폭도들을 지휘하여 계엄군과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홍남순, 김성용 등 강경 재야인사들이 우리의 대정부 투쟁을 고무 격려했고 정상용, 윤개원 등 YWCA 계 청년 대표들이 도청에 들어와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하여 힘을 솟게 하여 더욱 강력히 투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위 계속하면 과도정부 전복될 것으로 믿어

문) 당시 피의자가 생각했던 유구 사항 및 투쟁 방향은 어떠했는가요.
답)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광주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4가지 요구사항은 처음부터 제가 내세운 요구사항이었고, 그 후 재야인사들과 YWCA계 사람들과 연결됨으로써 동인들이 표면에 내세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의 정치적인 구호까지 포함시켜 이를 관철시킬 것을 도청 내 조직의 기본 방침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문) 위와 같은 투쟁 목표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는가요.
답) 물론 저희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로서 계엄당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당시 데모군중이 무장한 채 광주 일원을 점거하고 있었으며, 시내 고층건물에 기관총(LMG)이 설치되어 있었고, 도청 지하실에는 많은 양의 폭약이 있어 시가전을 우려한 계엄군이 쉽게 시내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상황판단했습니다.
또한 신문기자들과 시민들로부터 국내외 여론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간다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의 투쟁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문) 피의자가 무장 폭도들을 계속 지휘하여 광주 일원을 장악하고 있으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되리라고 생각했는가요.
답) 저희들이 총을 들고 무장한 채 광수시내 일원을 점거 장악하고 정부에서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과도정부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사항을 계속 관철시키기 위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 국민의 동정을 받아, 또는 전국에 있는 반체제 재야인사, 대학생 및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의 론도 민주주의, 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됨으로써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는 전복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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