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上) "부족한 점 많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 일념만은 확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上) "부족한 점 많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 일념만은 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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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1.29 13:39:40
  • 최종수정 2018.12.1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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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17일 심야, 신군부 세력에게 연행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필로 기록한 정치 이력이다. 두 차례의 진술서에는 김대중의 해방 후 활동 행적, 6·25 당시의 인민재판 목격담,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과정, 좌익사상 문제로 의심받게 된 계기, 미국과 일본에서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과 관련한 자기고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진술서를 통해 김대중 씨는 "해방 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과 다른 말과 중상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치욕과 분노의 심정을 금치 못했다"면서 이 기회를 이용해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또 망명생활 과정에서 결성한 미국과 일본의 한민통도 순수한 민주주의 회복 차원에서의 행보였으며, 해외교포 중 동기가 불순한 자들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수사과정에서 1980년 5월 20일, 5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작성된 김대중 진술서를 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고치고 읽기 좋게 긴 문장을 자르는 외에 원문 그대로를 상·하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한다.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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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진술서 제1회(1980년5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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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8․15 해방 이후 정치 사회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같은 해 11월경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약 2개월 동안 참가했다 자진 그만두었음.

3.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으나 건준 일을 주로 하고 청년동맹 일엔 간여하지 않았음.

4.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백남운)에 동조하여 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아 합법적 정치활동에 종사했음(약5~6개월간).

5. 해방 당시 일제하 철저한 황민화정책으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형편이었으므로, 오직 해방의 기쁨과 독립의 희열에 들떠 활동하다보니 좌익분자와도 같이 일하게 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6. 그러나 당시 본인의 장인인 차보륜 씨는 철저한 우익 지방유지로, 그는 당시 한국민주당 목포시 부위원장으로, 본인을 수차 호출해 공산주의의 반(反)민족성, 즉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일제하 그들의 반민족적 행적들을 말하면서 그들과 손을 끊도록 명령했음.

7. 이런 관계로 차츰 좌익분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소련을 조국이라 하는 자는 칼로 배를 갈라놓겠다"고 한 본인의 발언으로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투고 갈라서게 되었음. 그때가 1946년 7~8월경으로 기억됨.

8. 한편 본인은 1944년 6~7월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사무직원은 본인 혼자만 남게 되어 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음. 그러다 본인은 회사의 해운건으로 1946년 2월경 상경,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海司局)에 들렀더니 이미 서울거주 손일○ 씨(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간 후였음.

본인이 손 씨를 만났더니 자기가 현 종업원을 그대로 고용, 경영하겠다는 계획을 표명하며 협력을 당부하기에 당시 회사의 곤경을 타개하는 한 방법이라 믿고 목포로 내려와 종업원들에게 그런 경위를 설득, 손 씨와의 제휴를 권했음. 그러나 종업원들이 반대하며 자퇴를 주장하는데 당시 좌익 해원동맹 가입 선원들이 본인을 손 씨 계의 협력자로 몰아치므로 본인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1946년 말까지 이름만 둔 채 간여하지 않다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음.

9. 1946년 10월의 대구 좌익폭동사건이 발발한 당시 목포시에서 남교동 파출소 습격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목포에서 독립촉성회 청년대장으로 있던 홍익선 씨라는 분이 본인과 같은 연배로서 서로 라이벌 관계로 있던 중 본인이 이에 가담했다고 고발, 본인을 촉성회 창고로 납치해 마구 구타한 후 경찰에 넘겼음.

그러나 본인은 사건 당시 본인의 처가 출산 중인 처가에 있었기 때문에 산파, 기타 이웃 사람 등 많은 증인에 의해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을 뿐 아니라, 파출소를 습격했던 일당도 체포되어 본인이 전혀 관련되지 않았음이 판명되어 구속 10여일 만에 아무 혐의 없이 석방되었던 것임.

10. 본인은 장인의 권고에 의해, 그리고 좌익과의 완전 결별을 명백히 하는 방법으로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고 본격적으로 우익진영에 가담했는 바 이때가 1947년 중반기로 기억됨.

11. 한편 본인은 1947년경부터 연안 운행의 화물선을 1척 구입, 해운사업을 시작했으며 사업관계상 당시 목포에 있는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 장교들과 접촉이 잦아 좌익계열로부터는 증오를 받게 되었음.

12. 1949년 어느 날, 친구(유재식)의 형인 유 모 씨가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을 진술, 본인은 좌익분자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음. 그러나 조사결과 단순히 친구 형에 대한 여비보조라는 것이 판명되고 또 해군 목포경비소 정보대장 오세동(군검찰 신문기록엔 오세돈으로 되어 있음 : 편집자 주) 중위(6·25 때 전사),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 등이 신원을 보증해 체포 수일 만에 석방되었음.

13. 1949년 무렵 당시 좌익 또는 그런 혐의를 받던 자 중 대한민국에 적극 충성하기로 태도를 명백히 한 자들을 중심으로 보도연맹이 결성된 사실이 있음. 그러나 본인은 여기 가입하거나 간부로 활동한 사실은 없고 다만 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 유지들이 갹출할 때 이를 제공했는데 아마 운영위원 같은 직책이 있어서 이에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됨.

14. 1950년 초 청년들의 대한청년단 가입이 반(半)의무적으로 되어, 당시 해상근무 선장들은 륙상지부에 가입하기가 직무성격상 곤란하므로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을 별도로 조직했는데, 같은 해운업자인 민병안 씨(6·25때 본인과 같이 체포되었다 공산군에 의해 학살됨)가 단장이 되고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6·25 때까지 이름.

15. 이미 진술한 대로 본인은 1946년 가을 경부터 좌익과는 일절 상종하지 않고 해운업에만 전념, 6·25 직전에는 배가 세 척으로 늘어났고 특히 당시 금융조합연합회(현재의 농협)가 정부 양곡 연안 수송을 일괄 담당하던 서울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역 수송을 하청 담당하게 되어 사업이 크게 번영했음. 해상수송의 성격상 해군 목포경비소와도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어 본인과 해군과의 친밀관계는 시민 공지의 사실이었음. 뿐만 아니라 본인은 사업상 필요에 의해 해군 경비대의 문관 신분증을 휴대하고 있었고, 본인의 친동생인 김대의는 해군 방첩대의 문관으로서 근무하는 실정이었음.

 

Ⅱ. 6·25 당시의 생활 상황

 

1. 본인은 6·25가 터지기 약 10여일 전 상경했는데 그것은 조선상선주식회사 목포지구 해운하청업자로서 수송이 끝난 운임을 수령하러 당시 이 회사 목포출장소장인 한도원 씨(일제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현재 백범선생 기념사업회 이사로 있음)와 같이 상경하게 되었음. 그런데 운임을 미처 받지 못한 채 6·25가 터지고 공산군이 침입, 점령하의 서울에 있게 되었음. 당시 본인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 중.

2. 솔직히 말해 본인은 6·25 당시까지 공산주의에 흥미나 관심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을 적극적인 반공투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으며, 그저 사업에나 열중하고 있었음. 그러나 일단 서울에 공산군이 침입하자 자기도 깨닫지 못하게 공산군이 싫어져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비로소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생생한 기억이 있음.

본인의 반공의식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하루는 여관을 나와 부근 성당 마당에 산책을 나갔더니 갑자기 북괴군 병사 3명이 한 청년을 끌고 오며 옆에 그들의 동료 좌익분자들 10명이 같이 몰려왔음. 그러더니 주위에 있는 약 20~30명에게 이 청년의 죄상을 설명하고 그 처벌을 묻자 공산분자들이 "총살이오!" 하고 외치니 인민군 병사는 "그럼 총살시키겠소" 하고 끌고 가는 광경을 보았음."

이미 인민재판 이야기도 많이 듣고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의 이름 아래 저지르는 잔학상도 들었지만 실제 눈으로 목격하니 그 충격은 컸으며, 이는 결코 우리와 상통할 수 없다는 것을 1천여 권의 반공서적을 읽은 것보다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음. 지금도 그 끌려가던 청년의 겁에 질리고 넋이 빠진 모습이 생생할 정도로 인상이 컸음.

나의 판단으로는 많은 한국인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김일성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아무튼, 2차 대전 후 일단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 것은 우리나라뿐인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그나마의 행운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으로 언제나 생각하고 있음(이상의 6·25 관계는 본인이 일본에서 출판한 <독재와 나의 투쟁> 속에 나의 해방 후의 사상편력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음).

3. 괴뢰군이 서울에 침입한 후 본인은 당시 민주국민당의 열성당원이며 본인의 처남인 차원식의 장인 배인식 씨의 신문로 집으로 가서 이불을 쓰고 유엔군의 방송을 들으며, 또한 앞서 말한 조선상선 목포출장소장인 한도원 씨, 그리고 충남 장항서 해운업을 하는 조장원 씨 등과 만나 정보교환을 하곤 했음.

7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유엔방송에서 "대전 쪽의 금강 전투에서는 반드시 북괴군을 쳐부술 것이니 서울 시민은 기대하고 용기를 가져라"는 말을 들었음. 한편 당시는 식료품 사정이 어려워 돈 없는 본인들로서는 더 이상 서울서 버틸 수도 없었는데 본인 같은 청년은 언제 의용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형편에 있는지라 앞서 말한 한도원, 조장원 씨 부부, 처남 차원식 등과 협의해 걸어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금강 전투서 유엔군이 이길 테니 공산군이 목포까지는 도저히 내려가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충남 온양에서 서해안을 타고 내려가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음.

4. 7월 20일경 우리 일행 6~7명은 서울을 출발하여 앞서 말한 코스를 밟아 내려가다 충남 보령군의 조장원 씨 본가에서 2~3일 묵고 다시 걸어서 군산까지 이르렀더니 이미 공산군은 목포까지 침입한 것이 판명되었음. 본인은 그때 목포에서의 본인의 활동과 교제관계로 보아 목포로 가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으며, 그 점은 차원식 씨도 그의 우익 활동에 비추어 마찬가지였음. 그러나 이 와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고, 더욱이 내려가는 것은 소지한 주민증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올라가는 것은 그들이 발행한 여행증명 없이는 불가능함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증명된 이상 어쨌든 죽든 살든 목포에 가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다시 걸어 8월 10일경 목포에 도착했음.

5. 목포에 도착하여 본인의 회사 사무실 앞에 이르니 모친이 의자를 놓고 길거리에 앉아 있는데 흡사 미라같이 야위고 혈기 없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음. 본인을 보자 질겁을 하시면서 "빨리 숨어라"고 재촉하며, 목포에 괴뢰군이 들어오자 본인 집은 몰수되고 심지어 숟가락까지 가져갔으며 가족은 집으로부터 추방되어 아내는 일본군이 팠던 방공호 속에서 둘째아들 홍업이를 낳았다는 것이며, 본인의 친동생인 대의는 이미 공산군에 의해서 체포되고 본인이 왔는지 매일같이 공산군이 찾는다는 것이었음. 본인은 급히 모친과 같이 처가 숨어 있는 집을 찾아보고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 집에 숨었던 바 2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6. 정치보위부에서는 본인의 해군 문관 신분을 지적하면서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고 묻기에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몇 대 치면서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 못했다"고 하며 유치장에 처넣었음. 그 후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자가 와서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갔음.

7.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죄수번호 202호) 약 1개월간 극도의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는데 9월 28일 갑자기 문을 열면서 "모두 밖으로 나오라" 해서 감방 복도에 나갔더니 두 사람씩 한 수갑에 채웠는데 나와 같이 묶인 사람은 한일수 씨로서 지금도 목포에 거주하고 있음.

인민군 간수를 따라 형무소 입구 쪽에 있는 강당에 들어갔는데 본인 등은 강당 입구에서 먼 안쪽에 앉게 되었음. 조금 후에 시내의 내무서에 있는 죄인들도 데리고 와서 그들은 입구 쪽에 자리 잡게 되었음. 그 후 간수들은 입구 쪽, 즉 내무서에서 온 사람들을 몇 명씩 끌고 나갔는데 후일에 안 바로는 한 트럭씩 채워 싣고 나가 총살했던 것임.

이렇게 되자 강당 안은 울부짖는 자,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로 아비규환이 되었는데 간수들은 계속 총 개머리판으로 울고 외치는 사람들을 시끄럽다고 때리는 것이었음.

그렇게 해서 저녁 무렵이 되자 갑자기 괴뢰군이 서로 당황해서 부르면서 나가더니 행방을 감추게 되고 지방 출신의 간수들만 남게 되었음. 간수들은 미처 못 죽인 우익인사 약 80명(총 2백20명 가량 중)을 인도해서 다시 감방에 처넣었음. 그리고 그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괴뢰군 병사들이 지시한 대로 감방에 방화해서 죽이지 못하고 혹은 도망가고 혹은 망설이던 중 본인 등 몇 명이 주도가 되어 감방 문을 부수고 탈옥시켜 밖으로 빠져 나왔음.

8. 한편 본인의 목포 도착 전에 이미 체포된 본인의 친동생 대의는 같은 형무소 감방에 7명이 같이 있었는데, 먼저 불린 4명은 죽고 나머지 3명은 살아남는 데 끼어 살았음. 본인의 장인 차보륜 씨는 사형집행 현장까지 끌려가서 괴뢰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세워놓고 총을 쏘아 기절해서 넘어졌는데 총은 맞지 않았음. 그러자 검시하는 괴뢰군이 와서 "이 새끼가 아직도 안 죽었다"면서 또 2발을 쏘았으나 그것도 귓가를 스칠 뿐 맞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유일한 사형장에서의 생환자가 되었음.

또 본인의 막내동생 대현(해군 소령 제대)은 당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휴식 중 친구와 같이 언덕을 굴러떨어져서 탈출, 집에 돌아왔음. 이와 같이 집안의 3형제와 장인, 합계 4인이 모두 기적적인 생환을 했다 해서 6·25 이후 목포지방에서는 명 긴 집안이라 화제가 된 바 있음.

9. 9월 28일 생환 후 본인은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해운업에 종사했는데 6·25동란 중 한 척은 부두에서 폭격으로 유실되고, 한 척은 군경이 타고 나갔다 무사히 돌아왔으며 한 척은 목포 부두에 있어서 다시 수리해 사용하게 됨. 한편 당시 목포 근방은 군경의 진주가 더디고, 특히 도서와 해안지방에는 공비가 그대로 출몰하여 양민을 마구 학살하는 실정이었음. 해군 목포경비소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해상방위대 전남지역본부를 만들게 되고, 그 대장에는 부산에 피난 갔다 온 우익지도자 오재균 씨, 그리고 부대장에는 본인이 임명되어 본인 소유 기타 선박들을 취합하여 공비 토벌, 군경 수송, 수복도서의 경비, 정보수집 등 군의 보조 지원역할을 했음.

본인도 직접 승선하여 출동 수행했는데, 이 해상방위대는 육군 방위군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해상 방위군이 되었을 것이며 본인은 해군방위대장에 임명될 것으로 통고받은 바 있음. 그 당시 이러한 근무에 관계하던 해군 목포경비소 작전과장이 문○우(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 중위인데 지금은 해병준장으로 예편하여 서울 거주 중임.

10. 한편 본인은 1945년 10월경 목포에서 유일한 일간지인 목포일보를 당시의 계엄사령관인 해군 목포경비소 사령관의 승낙 아래 인수하여 시설을 보수하여 발간했는데 본인의 동사 사주 재직 기간은 약 1년간이었음.

11.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이 창립하여 목포상선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정부가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시켰음.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흥국해운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해남 출신 국회의원(2대) 윤영선 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였음.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농공은행 본점에서 1억 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당시 흥국해운의 군산출장소장인 ○성렬 씨(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본인은 해운업에서 손을 뗌.

 

Ⅲ. 기타 참고사항(1954~1967년)

 

1. 본인은 1954년의 3대 민의원 선거에 목포서 출마하여 낙선했음. 선거에는 이미 본인의 라이벌인 홍익선 씨를 포함해 6~7명이 출마했으나 단 한 번도 사상이나 정치편력 가지고 공격받은 바가 없음. 그것은 본인이 일찍이 좌익진영과 손을 끊은 사실과 6·25 전의 민족진영에서의 활동상, 특히 6·25 당시의 3형제와 장인의 기적적 생환사실을 주민들이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음.

2. 앞서 말한 홍 씨는 그때 서울로 가서 1958년경 당시 자유당 손도심 의원을 시켜 국회에서 발언케 하여 마치 본인이 민노청 중앙본부 간부였던 양 공격하게 했음. 그러나 6·25 전에는 지방에만 거주했던 본인이 서울에서 좌익 활동이란 넌센스의 발언으로 본인의 호된 면박을 받았는데, 당시의 신문에도 게재된 바 있음.

3. 홍 씨는 다시 1959년 본인이 강원도 인제에서의 보궐선거에 재도전하자 이번에는 국회의원인 이도선 씨를 내세워 본인이 해방 후 목포서 좌익활동하고 남로당하고 남교동 파출소 습격하고 했다는 등 온갖 중상을 했음. 가관인 것은 당시까지 본인과 일면식도 없는 이 씨가 본인과 같은 전라도 출신으로 죽마고우라고 떠든 사실이며, 또 홍 씨와 목포에서 1954년에 같이 출마했을 때는 한마디도 공격하지 못했는데 강원도 인제 땅같이 먼 고장에 와서는 떠들어댄 사실이 있음.

4. 본인은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에서의 보궐선거에 당선되었으나 5·16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했으며 민주당의 대변인이었던 관계로 치안국에 체포되어 약 2개월의 억류생활을 했음. 본인의 체포 이유는 당초에는 집권당 간부로서의 부정축재였으나 조사도중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본인의 해방 후 편력, 남교동 파출소 습격 사건 관련, 6·25 당시의 행적 등 터무니없는 문제가 제기되었음. 그래서 본인이 "이것은 홍익선 씨가 밀고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자 조사관이 "어찌 아느냐"고 하기에 "이것은 자유당 치하에서 수차에 걸쳐 공개 비공개로 쟁론되어 재탕 삼탕한 일이다"고 했으나, 조사관은 "아무튼 당신은 군검에 용공혐의로 송치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했음.

그래서 본인은 "그것은 내가 관여할 바 아니나 나의 신상문제가 이북이나 외국서의 이야기도 아니고 같은 남한 내 일이니 일단 현지조사를 해보면 알 것 아닌가"고 거듭 문의하자 결국 현지에 조사관을 파견키로 했음. 그 후 1개월쯤 지나자 앞의 조사관이 나를 불러 "당신에게 참 미안하게 되었다. 조사해보니 당신이 여기 진술한 그대로더라"고 하면서 제보자에 대해 심한 비난과 욕설을 한 사실이 있음.

그 후 본인은 당 회비 횡령혐의만으로 일반검찰에 송치되었으나 이 점도 수령자들이 완전 판명되어 무혐의 불기소로 석방되었음. 그러나 본인에 대한 홍 씨 등의 모략은 그대로 내무부 파일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은 바 있으며, 그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되어온 것임.

5.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앞의 홍 씨는 20년에 걸친 집요한 중상을 해왔으나 마침내 이를 반성 회개하여 1967년 목포에서의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는 본인의 편에 서서 지원하고 지지유세까지 하게 되었음. 지금은 서로 좋은 친구관계에서 상담하게 된 사실임.

6. 1967년 임자도 간첩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주범 정태묵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며,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좌익 활동을 중단하고 가업인 염전업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은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른 바 없었음.

이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시 정보부의 김형욱 부장의 보좌관들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코리아 호텔에서 김 부장을 만났음. 김 부장으로부터 "임자도 사건의 주범 정태묵을 조사 중 김 선생의 이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수사절차상 조사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고인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 만났으며 선거 후에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정태묵이 조사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거기간 중 김대중의 말을 들으니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이상의 진술은 본인의 전적인 동의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본인은 매우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의 일념만은 확고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10·26 사태 이후 본인을 둘러싸고 본인의 해방 이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과 다른 말과 중상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치욕과 분노의 심정을 금치 못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이용해 본인은 자기 기억에 있는 한 정확히 그간 문제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진술했습니다. 본인의 이 진술이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80년 5월 20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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