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복 장관 진술조서(上), "전두환 집권에 협조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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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15 09:08:09
  • 최종수정 2018.12.1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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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당시 군부 실권자였기 때문에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결재를 한다는 것은 곤란"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앞에서 경찰이 버스에 깔려 죽는 등 사태 악화돼 군 투입 불가피”
"혼란한 국내 상황, 수차례 간첩침투 기도 등 북한의 남침위협 징후 있었던 것은 사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직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던 주영복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 내용이다. 신군부 집권의 협조자였던 주영복 씨는 1979년~1980년 당시 전두환 장군의 압력과 자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과 함께 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주영복 씨는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전두환 장군 측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으며, 이날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까지 전 장군이 요청하여 시행되었음을 실토했다. 또 군 인사도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보안사가 좌우하는 등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고 했다. 주영복 씨의 검찰 진술은 격동기의 신군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해 나갔는지를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다. 관련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누어 소개한다.
1980년 5월 광주 현장을 방문한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왼쪽 세번째). 주영복 장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12.12 및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폭로하여 신군부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도록 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 현장을 방문한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왼쪽 세번째). 주영복 장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12.12 및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폭로하여 신군부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도록 했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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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복 진술조서 1995년 12월12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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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총장과의 관계

 

-피의자는 12․12 사건 당시 어떤 직책에 있었나요.
"1979년 4월18일 공군참모총장으로 예편해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국방부장관직에 있었나요.
"1979년 12월14일부터 1982년 5월21일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무슨 일을 했는가요.
"1983년 7월7일부터 1985년 2월18일까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진술인은 12․12 사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요.
"1979년 12월12일 14시경 병무청장으로 있던 방경원 예비역 소장을 만나 충무로에 있는 옷가게에 들러 골프복을 함께 사고, 집으로 가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시30분경 공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이지영 소장이 저의 집으로 전화를 해 '총장님, 한남동 지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위험하니 밖에 나가지 말고 주의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방경원의 집으로 전화해서 소식을 아느냐고 묻자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 가보자고 해 그와 함께 22시경 국방부에 도착해 정문 앞에서 노재현 장관 보좌관인 조 준장을 만나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장관을 만나 봐야겠다고 했더니, '장관님이 장관실에 있는데 지금은 안된다'고 해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보좌관이 빨리 나가라고 해서 23시30분경 방경원과 함께 나왔습니다.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 이태원동에 있는 여관에서 함께 자고, 다음날 05시경 집으로 갔습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10․26 사건과 관련되어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에 의해 연행, 조사받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1979년 12월13일 아침 집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진술인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전두환이 강제 연행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생각했는가요.
"어떻게 그렇게 막강한 사람을 연행, 조사할 수 있는지 너무나 놀랐습니다."
-12․12 사건 직후의 격변기에 진술인이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된 경위는 어떤가요.
"1979년 12월13일 10시경 청와대 비서관이 본인의 집으로 전화를 해 최규하 대통령이 뵙자는 말을 전해 와 급히 청와대로 갔더니 최 대통령께서 저에게 국방부장관을 맡아 주어야겠다고 말해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락했습니다."
-진술인은 당시 누구의 추천으로 국방부장관이 됐다고 생각하는가요.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엔 전두환에게 호감

 

-당시 최 대통령은 진술인에게 뭐라고 말하던가요.
"군의 단결과 위계질서 등을 강조하면서, 국방부장관을 정점으로 군이 일치단결해 발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진술인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기 이전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과 어떤 사이였나요.
"본인이 공군참모총장을 하고 있을 때 전 장군이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어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습니다. 1979년 3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공군참모총장실로 인사하러 왔을 때 비로소 첫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이 저에게 앞으로 군의 발전을 위해 군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해 제가 고맙다면서 '앞으로 조종사들을 보호해 줘야겠다'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이를 받아주어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노태우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진술인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후 전두환을 몇 차례나 만났는가요.
"1979년 12월20일경 전두환이 취임인사차 저를 방문했을 때 처음 보았으며, 그 후에는 총리공관에서 시국대책회의를 할 때마다 여러 차례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진술인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실로 직접 방문한 적은 없습니까.
"1980년 1월경 초도순시 차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 후에도 국무회의를 참석하러 가다가 시간이 남아 2~3차례 들른 적이 있습니다."
-진술인이 국방부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2․12 사건으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랬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확실한 경위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술인은 하나회에 대해 알고 있나요.
"7공화국(편집자 주:김영삼 정부를 지칭하는 듯함) 출범 이후 하나회 장교들을 정리한다고 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진술인은 국방부장관 취임 이후 12․12 사건의 주역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있었나요.
"저는 공군에서만 수십년 간 근무하다 전역해 국방부장관이 갑자기 됐기 때문에 12․12 사건 직후에는 그 점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합수부장인 전두환 등 12․12 사건 이후의 군부 실세들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아가 정권찬탈을 기도하기 위해, 육군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군부 내에 아무 입지가 없는 진술인을 형식적으로 국방부장관에 앉혀놓고, 자신들 의도대로 군부를 운용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요.
"사실 저는 오랜 공군 생활을 마감하고 집에서 쉬다가 1979년 12월13일 대통령이 오라고 해 국방부장관으로 봉직했습니다. 따라서 군부, 특히 육군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국방부장관 취임 당시에는 그 점에 대해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방부장관 취임 후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듣고서야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12․12 사건과 관련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 구속하면서, 국방부와 육본을 무력 점거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실세로 부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군부 내 실세로 부각한 그들이 군부 실정을 전혀 모르고 비교적 원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저를 국방부장관으로 천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1980년 1월부터 8월16일 최 대통령이 하야 할 때까지 중요한 정책 결정과정에서 주무장관인 제가 거의 매번 소외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저를 핫바지 장관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계엄사령관이 이희성과는 특별한 인간관계가 있었는가요.
"제가 공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그가 국방부 기획국장으로 있었던 연유로 알게 됐을 뿐 특별한 관계는 없었습니다."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업무보고를 받았는가요.
"취임했을 때 계엄업무에 관해 총괄적인 보고를 한 번 받았고, 그외 일일보고 등 정기적인 보고는 없었으며, 특별한 현안이 있을 때는 그때마다 대면, 또는 전화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광주사태 발생 당시에는 이틀에 한 번씩 저의 방에서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통령에게 직접보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으로부터는 어떤 식으로 업무보고를 받았나요.
"1979년 12월20일경 취임인사 차 왔을 때는 '12․12 사건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12․12 사건 이후 한미관계가 매우 불편해졌으니 장관님께서 신경을 쓰셔서 원만히 해결해 주십시오'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 후 전두환이 저에게 직접 보고하러 온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합수부 측에서 계엄사령관을 통해 국방부장관에게 결재를 올렸을 경우 진술인은 그 결재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나요.
"전두환은 당시 군부 실권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결재를 한다는 것은 곤란했습니다."
-직속상관인 진술인에게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한 번도 정식 결재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면, 중요사항에 대한 정책 결정은 어떤 절차로 이루어졌나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보안사령관은 매우 바빴기 때문에 저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 재가를 얻은 후 중요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보안사령관의 직속상관인 진술인으로서는 보안사령관에게 국방부장관을 경유한 정식 결재절차를 밟도록 지시했어야 하지 않나요.
"그와 같은 지시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10․26 이후 총리공관에서 시국대책회의가 수시로 열렸다는데 진술인도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후 그 모임에 참석했는가요.
"총리 공관에서 신현확 총리 주재로 통상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모임이 있었으며 본인도 참석했습니다. 다만 긴급사안이 있을 때는 수시로 시국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주로 어떤 논의가 있었나요.
"그때그때 사태에 대한 수습방안을 논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이 모임에 참석했나요.
"당시 주된 참석요원은 신현확 국무총리, 김종환 내무, 본인,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이었으며, 법무, 문교, 중앙정보부 차장, 보안사령관 전두환 등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참석했습니다."
-전두환 장군이 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12․12 사건 이후에는 합수부장으로서 김재규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 진행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두 번 정도 참석한 것으로 압니다."
-이 모임은 언제까지 지속됐는가요.
"신현확 총리 재직 시까지 계속됐고,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임명된 후에는 거의 그런 모임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0년 2월18일 육본에서 전군에 폭동진압훈련을 실시했는데 국방부에서 지시해 실시한 것인가요.
"육본에서 입안해 실시한 모양인데 계엄 하에서의 시위진압 훈련은 육본에서 통상업무 차원에서 실시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방부장관에 대한 보고사항이 아닙니다."
-폭동진압훈련을 실시한 것은 12․12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들이 정권 탈취과정에서의 국민저항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비상계엄 하에서 치안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군이 학생시위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19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됐지요.
"예."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이 전두환을 대통령에게 중정부장 서리로 추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당시 최 대통령이나 신 총리가 본인에게 중정부장 서리 후보를 추천하라고 한 적도 없고, 아무 실권도 없는 저에게 막강한 중정부장 서리 후보를 추천하라고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만약 전두환이 그처럼 말했다면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웃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추천으로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됐다고 생각하나요.
"당시 실세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신의 영향력으로 겸직하게 됐다고 짐작합니다."
-국내외 정보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요.
"정보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이 있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술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왜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려 했다고 생각하나요.
"정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막강한 중정부장 서리 자리를 자기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인사권을 비롯한 국정운영의 주도권이 신군부로 넘어가고 대통령이나 내각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됐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동감입니다. 사실 당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권자였으므로 신현확 총리나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전두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는 꼭두각시 입장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한미 연례안보회의 취소

 

-한미간에 매년마다 연례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왔지요.
"예. 해마다 양국 국방부장관이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 오가며 북한 동향, 무기지원 등 안보 현안문제를 협의해 왔습니다."
-그런데 1980년도에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가 열리지 못했지요.
"예."
-열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12․12 사건 당시 한미 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 하에 있는 9사단 29연대 병력을 사전 통보 없이 서울로 이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군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한미 연합사령관 위컴 장군이 1980년 4월경 본인을 찾아와 한국의 국내 사정 때문에 무기연기하겠다고 말해 그 해에 회의가 열리지 못했습니다."
-1980년 4월18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최 대통령을 방문, 그해 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 예정이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무기 연기를 통보했고, 그에 따라 위컴 한미 연합사령관도 진술인을 방문해 그런 통보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 서리 겸직으로 표면화된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미국의 불만 때문이기도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12․12 사건 직후 한미 연합사령부측에서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연기'를 주장했으나, 그 때 제가 열심히 노력해 정상적으로 협의회를 개최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4월18일에는 '연기'가 아니라 '취소'를 통보했습니다. 이유는 한국의 '국내문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미국 정부 압력의 일환으로 협의회 취소를 통보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김종환 내무장관이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경찰력만으로는 혼란수습이 불가능하다면서 군 투입을 요청한 사실이 있다는데 진술인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요.
"경찰만으로는 도저히 안되겠으니 군이 나와주어야겠다는 말을 김종환 내무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들은 일이 있습니다."
-내무장관의 군 투입 요청에 대해 진술인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가요.
"본인이 보기에도 시위 군중에 비해 경찰력이 턱없이 부족해 밀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더욱이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앞에서 경찰이 버스에 깔려 죽는 등 사태가 극도로 악화돼 군 투입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침정보 언론공개 않기로

 

-1980년 5월12일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에서 진술인과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가 북괴의 남침위협을 보고한 사실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북한의 남침위협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어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 보고는 첩보 입수기관인 중정의 담당국장이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떤 첩보가 입수됐나요.
"1980년 5월10일경 중정이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했는데, 그 내용은 5월15일부터 5월20일 사이에 북한 특수부대 요원이 우리나라 후방지역으로 침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첩보가 국방장관과 신 총리에게 보고되고, 신 총리가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해 중정 담당국장이 첩보내용을 보고해 대책을 수립한 것입니다."
-어떻게 대책을 수립했나요.
"북한이 특수 게릴라전을 전개할 경우 현재의 국내 상황으로 보아 엄청난 문제가 야기될 것이므로 전군에 비상경계 태세를 강화하도록 조치하고, 일반 공무원에 대해서도 근무 강화를 지시했습니다. 당시의 심각한 경제문제나 민심 등을 고려해 언론보도는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실제로 남침위협이 있었나요.
"당시의 혼란한 국내 상황, 수차례에 걸친 간첩침투 기도 등 북한의 남침위협 징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 국무성은 1980년 5월13일 성명을 통해 '미국 측 정보로는 북한 내에 별다른 부대이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 대해 어떤 종류의 공격이 절박해 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5월19일 미 국무성의 호딩 카터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우리는 이 순간에 북한군의 어떤 비정상적인 이동조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즉각적인 남침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5월22일 호딩 카터 대변인은 '미국은 한국의 불안정한 정정을 이용하려는 북한측의 어떤 기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하면서 '1주일 전 한국에서 반정부 데모가 발생한 이래 북한군이 어떤 비정상적인 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다시 부인했습니다. 왜 미국의 정보분석과 한국의 정보분석이 판이한가요.
"미국에서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남침위협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10일 최 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나섰다가 5월16일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지요.
"예."

 

조문환 차관이 전군 지휘관회의 건의

 

-당시 최 대통령의 중동 순방과 관련해 신군부 세력들이 집권을 위한 일을 꾸미기 위해 국가원수를 해외에 내보낸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다른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 대통령이 귀국한 뒤 대통령 부재 중에 일어난 시국전반에 대해 보고했나요.
"다른 부처에서도 보고했고, 저는 23시경부터 자정 무렵까지 보고했는데, 최 대통령에게 '내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외국에서 신문을 보내 국내 상황이 수시로 나오는데 몹시 창피스러웠다'고 했으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보고 드렸더니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최 대통령이 귀국하던 날 18시경부터 그 다음날 19시경까지 56개대 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 당분간 시위를 자제하기로 하는 결의문을 작성하려는 순간 경찰 기동대가 회의장을 덮쳐 대부분의 학생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알고 있나요.
"1980년 5월17일 밤 국무회의장에 들어가면서 김옥길 문교부장관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습니다."
-데모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는데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데모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5월22일 총궐기대회를 하겠다고 해 정부에서 강경하게 나간 것 같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주재한 사실이 있지요.
"예."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인가요.
"국방부차관 조문환과 상의해 결정했습니다."
-그 회의를 개최한 경위는 어떤가요.
"1980년 5월14일 14시경 정확한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데 서울 시내에서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한다고 해 계엄사령관 이희성, 내무부장관 김종환 등과 같이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무부장관이 계엄사령관에게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진압이 어려우니 군 병력의 지원이 있어야 하겠다'고 해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어 5월16일 13시경부터 13시10분경 사이 국방부 합참정보국장(제2국장)인 최성택 소장이 국방부장관실로 직접 찾아와 북한의 남침위협이 있다는 첩보 보고를 하면서 5월13일~15일 사이 서울에서 약 5만~7만명 정도의 대규모 시위대가 '계엄 해제, 정부의 헌법심의위 폐지, 양심수 석방,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5월19일까지 정부에서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5월22일 전국에 걸쳐 대규모 시위를 할 것이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저는 같은 날 14시경 조문환 차관을 불러 이 내용을 알려주면서 그에 대한 대응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같은 날 14시50분경 조차관이 '관련국장들과 상의해 보니, 이대로는 정국수습이 곤란하므로 아무래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의견을 수렴해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구두보고를 했습니다. 저는 즉석에서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개최를 지시했습니다."

 

권정달이 시국수습방안 결의 요구

 

-피의자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리는 시간에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최 대통령의 찾아가, 김대중 등 소요 배후 조종 혐의자,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들에 대한 연행 조사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답니다. 이처럼 중요사항을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에게 사전에 보고했나요.
"사실 이와 같은 중요사항은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에게 사전 보고해야 하는데, 당시 전두환은 군부 실권자이자 중정부장 서리로서 실권이 전혀 없는 저에게 그런 보고를 했겠습니까. 다만 1980년 5월17일 09시30분경 권정달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시국수습방안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를 보고하러 갔다'면서 이 방안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의제로 상정해 의결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초에는 1980년 5월20일로 계엄확대를 예정하고 있었으나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신군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군에 남아 있는 륙사 8기 동기생들에게 연락해 대응조치를 취하려 한다는 정보를 이학봉 대령이 입수해 전두환에게 계엄 조기 확대와 김종필 등의 체포를 건의해, 5월17일로 회의가 앞당겨지고 곧바로 김종필 등을 연행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개최 무렵에 그런 소리가 군부 일각으로부터 들렸던 것은 사실이나, 근거 있는 소리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소집은 어떤 방법으로 했는가요.
"국방부차관 조문환에게 지시해 소집하도록 했는데 공문으로 했는지 전화상으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제는 무엇이라고 통보했나요.
"'북한동향과 치안상황에 대한 군의 대처방안'이라고 통보했습니다."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할 의제는 언제, 어떻게 결정을 했나요.
"의회 개최 전날까지만 해도 구체적인 의제를 상정함이 없이 '북한동향 및 치안상황에 대한 군의 대처방안'이라는 포괄적 의제 하에 군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의 당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진술인에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의제를 통보했다는데 사실인가요.
"1980년 5월17일 09시30분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본인을 찾아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가 최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기구 설치, 국회해산' 등 세 가지 문제를 건의하러 갔는데, 보고를 하러 가면서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위 세 가지 안건을 알려주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이 친필로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것인가요.
"아닙니다. 권정달 정보처장이 구두로 전해 주었습니다."

 

세 가지 요구 중 하나만 결의

 

-위 세 가지 문제를 회의에서 다루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권정달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세 가지 안건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 당시 권정달 정보처장은 '국회 해산'에 관해서는 진술인에게 말한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국회 해산'도 안건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술인은 전회 검찰 진술에서 권정달이 세 가지 수습방안을 참고적으로 알려주었을 뿐이라고 진술했는데요.
"전회 진술 때는 만약 제가 전두환의 부탁을 받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이 안건을 처리해 주었다면 전두환과 제가 공범으로 몰리는 등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회의 개최일인 1980년 5월17일 09시30분경 갑자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저를 찾아와 '보안사령관의 지시'라면서 '오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위와 같은 세 가지 안건을 상정하여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총의를 집약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저는 심적으로 상당히 부담을 느꼈으며, 그래서 권정달이 돌아간 10시경 유병현 합참의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곤 해군총장, 윤자중 공군총장이 장관실로 들어왔기에 그들에게 이 문제를 상의한 바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상의했나요.
"세 가지 안건을 전두환의 부탁대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할 것인지 여부를 협의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늘 회의에 앞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상의해 보자'고 한 다음, 먼저 '국회 해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병현 합참의장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회 해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것은 나도 내용을 잘 모르는 것인데,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기구 설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유병현 합참의장이 자기도 비상기구의 성격을 잘 모르겠다고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전국비상계엄 확대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유병현 합참의장이 '지금도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으니까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진술인은 위와 같은 세 가지 안건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해 처리하려고 했나요.
"예, 당시 군부의 최고 실세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런 메시지를 보내 저는 은근히 겁을 먹고 이를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유병현 합참의장이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 설치 문제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하는 것이 부적합하다 해서, 저도 동감했기 때문에 두 가지는 제외한 채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만을 상정 처리한 것입니다."
-진술인은 전두환의 메시지를 받고 왜 심적 부담을 느꼈나요.
"생각하지도 않았던 정치적 안건들을 의결해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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